인격완성

에세이
단행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27 01:01
조회
4301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인격완성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 인격완성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77 - 86 ( pages)
주제어 스카이다이빙 인간개조 현대인의 사랑 어버이 인격완성 행복
첨부파일: ? 인격완성.pdf

인 격 완 성

0〕스 카 이 다이빙을 하는 인격 완성
한국이 낳은〈스카이 다이버〉김광모(金光模) 대위가 자신의 완 성을 위해서 한국을 등지며 고국에 보내온 편지에는 우리가 거,듭 되새겨 볼만한 귀절이 몇군데 있다. "한국에 있어서 근본적인 속박 은 다만 경제적, 정치적,사회적,고통에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소위 속박이라고 부르는 한국적인 사고의 경향인 것입 니다……” 우선 우리는 이 글을 읽을 때 김대위가 말하는 한국적 인 사고의 경향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하게 생각된 다. 어려서부터 유교나 불교적인 전통 아래에서 자라난 우리들에게 는 일찍부터 〈인격 완성〉이라는도덕 관념, 수신제가식의 도의주 의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 왔었다. 그리하여 삶의 궁극적인 목적 은 성인이나 군자처럼 원만한 인격자가 되고 넓은 학식과 고결한 인품,그리고 자비로운 심정을 가지는 데 있다고 하여 왔다. 그러 나 이러한 도덕적인 이미지는 급격하게 변천하는 현실 사회에 부합 되지 않는요소를가지고있었다. 말하자면 인간심리의 복잡성, 그리고 공동 생활(가정 생활이든 사회 생활이든지를 막론하고)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갈둥, 비극적인 압력에는 너무나 무력한 윤리 개 념이었다는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김대위가무형의 속박에서 자유를 찾아 외치는 그의 주장을 한차례 이해할 수도 있다. 근세의 서구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사상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인 영역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 사상가를 든다면, 진화론을 처음으로 주장한 차알스 ‘ 다아원이나 프리드리히 ' 니이체, 그리고 카알 ‘ 마 르크스라고할수있디-. 이 사상가들이 장구한세월에 걸쳐 전세계 에 널리 알려진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고 본다면 세 사람이 다 같이 저들의〈인간〉즉〈인간학〉울 가지고 그 명성을 차지한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에밀 브루너라는 신학자가 그의 저서 (;^!! ;11 요하방〉에서 적절하게 지적하였다. 근세의 사상이나 인간 학, 그리고 윤리학의 궁극적인 문제는 항상〈인간〉이라는이 한 가 지를 중심 문제로 다루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 중심의 철학 은 다 만 인간자체에 대한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무질서의 분석으로 보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밀?하자면 인간의 파탄, 인격성의 파멸은 다만 세계 질서의 혼란에서 유래되는 것이 며 이러한 무질서가 존재하능 동안 우리의 인격적인 완성을 유지하 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매일 신문에 보도되는 우리 생활 주변 의 가지가지의 사회적 참극이나 쓰라린 현실을 보고 이러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직접 흑은 간접으로 현실의 부조리 에 참여하고 있으며 또 책임을 느낀다면 소위 우리가 전통적으로 말을 하여 온 인격 완성이라는 개념이 홀어지고 만다. 김대위는 마 침내 이러한 삶의 질곡 속에서 우선 자신을 해방시켜 보려고 의식 적으로 시도하였고 또한 감정적으로나마 성공한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근래에 이르러서 우리는 인간성의 개선을 위해서 술한 구호와 새 술어를 지어낸 것을 본다. 인간 개조라든지, 체질 개선이라든 지, 또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나라 만듈기,사람 만들기 둥 재치 있는 운동을 전개시키고 있다. 한 나라의 정사를 맡은 사람이나, 수만의 군대를 호령하는 사령관이나, 많은 직공을 거느리고 있는 대 기업가들이 언제나 당면하는 문제는 사람을어떻게다스리느냐? 하는 한 가지 문제에 귀착하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인간 개조와 같은 듣기도 거북한 말까지 튀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을 개 조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 어떠한 정황에 있던 사람을 어떻게 고치자는 말인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정신적으로 고쳐 보겠다고 자신있게 나설.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더 근본적으로 따져 묻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여 사람을 개조할 수 있다고 하 는가고 묻고 싶다. 이것은 어처구니 없는 낙관주의자의 말이다. 인 간의 죄성이 어떻다는 것을 아는 크리스천에게는 이러한 허황한 인 간관에 뿌리를 박은 생각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사람의 죄의 심 각성율 채 깨닫지 못하는 초보적인 죄를 우리는 범하고 있는 것이 다. 인간성에 대해서 좀 더 리일리스틱한 관찰을 하여야 한다. 몇 해 전 에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 바이스 와 신학자 폴 틸릭이 인간은 과연 변할 수가 있는가하 는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였다. 전자는 미국의 심리 요법계의 권위자이며,.털릭은 이 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신학자이다. 먼저 바이스씨는 현대인은 이미 자연을 극복하고 이를 개조하여서 인간 사회의 복지에 이용하고 있 는 것과 마찬가자로,우리는 인간성의 건설적인 능력을 신뢰하고 개발하면 인간성도 좋게 변화할 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프로이드 는 인간의 운명을 반복 충동으로 해석하였다. 남에게 속아 보거나 또 속을 줄 알면서도, 이전에 하던 일을 되풀 이 하지 않을 수 없는 마력적인 힘에 몰려 사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 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이스는 이러한 프로이드의 결정론적인 진단 에 대해서 인간을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주 장한다. 그 길이란 감정적인 쇼크 치료를 통해서 인간이 인간의 본 성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 요법자로서 생각할 수 있 는 말일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신학자 틸릭은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으 로 완전하게 새롭게 변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 고 그는 변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즉 인간이 변했 다고 하는 것은 그 인간에게 있는〈변치 않는 무엇〉이 있어서 비로 소 변하는 것을 측정할 수도 있으며,또한 변한다는 일 자체의 의 의가 있지 않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변치 않는것,아니 변하게 할 수가 없는 것은 그 인간의〈자유〉이다. 인간은 이 변할 수 없는 자유를 가지고 자기가 처해 있는 정황 안에서 물음에 대한 대답을 요구할 수가 있다. 또한 인간은 자아를 통해서 외계에서부터 받은 자극에 반응을 표시하는 자유, 심지어는 인간이 자신의 본성011 모 순된 행동까지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인간을 개조한다 거나 변하게 한다는 것은 이러한 변할 수 없는 인간의 자유를 변질 시키는 것을 의미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여) 현대인은 사랑할 수가 있는가 ?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런 말을 하였다. "현대는 마치 깨어진 시계 와도 같다, 태엽이 끓어진 시계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다. 겉으로 보면 이 시계는 아직 멀찡하다. 인간의 세계에서는 이 왕에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들렸지만 지금은 그 심장이 움직이지 않 고 있다.” 아마도 마르셀이 말하는 세계란 침체와 실의의 유럽을 두고 하는 말일론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 문명이 자꾸만 발달하고 인간의 능력이 무제한으로 위로 향하여 치솟아 올라가고 있는 현대 에도 불안,깨어진 세계,고독, 운명 같은 말로 현대인의 생각을 표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깨어진 세계 질서에서 규정지어진〈인간의 조건〉 의 파탄에서 오는 말일 것이다. 말하자면 안간의 생활에 있어서 가 장 근본적인 삶의 양상이라고 할 공동체의 생활이 산산이 흩어지고 우리가 발을 붙여야 할〈자리〉를 잃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 ? 터전을 상실하였가 때문에 생겨지는 방향 감각 의 마비가 우리의 정위치를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 자기의 정해진 자리를 모르기 때문에 현대인은 사랑을 할 수 없게 된다. 탕자는 자기의〈자리〉를 박차버린 존재이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에 항거 하고 나왔기 때문에,그에게는 방향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랑의 사실성을 깨닫지 못하였다. 라인홀드'니버는 인간의 죄악의 사실 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인 인간이 마치 사랑을 할 수 있는 척하는 허위 (?대比애!애)라고 하였으며, 인간은 이 허위로 자신을 기만하는 동시에 하나님 마저도 속여 보려고. 한 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리얼리즘이 종 래 우리의 윤리관이나 전통적인 사상에는 결여되어 있었다. 인간성 에 속속들이 뿌리를 박고 있는 죄성과 그리고 끊임없는 오만과 또 합 인간에 대한 낙관주의, 이 모든 것'1? 대한 소박한 이해가 오늘 우리들의 혼란울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지 않는가? 이런 점에서 본 다면 종래 우리가 생각하며 말하던〈인격 완성〉이란.개념와 본질적 인 뜻부터 재검토하지 않을 수가'없다. 현실에 대하여 초연한 태도 를 견지하는 동양적인 인격 관념으로서는 도저히 급격하게 변천하 는 현실 사회에 어떤 윤리적인 강박((노지。!!)을 주지 못하게 될'것 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적인 윤리관을 한국이라는 지역 안 에서 재해석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생각한다. 즉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무엇〉이냐 하는 개념적인 규정 보다도 그리스도교의 사랑 을〈어떻게〉실천할 것이냐 하는 물음,아니 더 나아가서는 과연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느냐 하는 궁극적인 문제 해명에 서부터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이해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현대인 은 과연 사랑을 할 수가 있는가? 이 말은 즉 현대인은 자기 본연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가 ? 또는 잃어버린 땅을 다시 찾을 수가 있느냐 하는 대답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할 것이다.

(쇼) 어버이와 인격 완성
사람이 삶의 근원적인 사실인 사랑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자 리〉는 바로 가정이다. 탕자는 아버지를 저버리기 이전에 벌써 이 가정이라는 자리를 포기하고 말았다. 현대에 있어서 가족 중심주의 적인 전통을 이어 받아온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를 단순한 봉건 사 회의 유물이라고 저버려서는 아니 된다. 선진 국가에 있어서는 모 든 사회악과 혼란의 시초는 건전한 가정 생활의 파탄에서부터 시작 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족 중심 제도를 없애려 하지 말고 새로운 차원에 승화시키는 길만이 선진 민주국가가빠지 는 과오롤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라고 하겠다. 그런 뜻에서 우 리는 건전한 가정을 가지는 일을 자랑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인 격을도야하는데 있어서 가정 교육, 학교교육’ 그리고 ? 사회 교육 이 필요하지만,그중에 제일 근본적인 것은역시 가정 교육일 것이 다. 나머지 학교, 사회 교육은 이 가정 교육을 보충하여 주는데 불 과하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인격적인 삶을 형성하는데는 가정 생활 이 중심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은 너무나도 등한히 생각하고 있다. 가정 교육에 있어서도 특히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는 정신적인 영향이 쎄일 크다. 이러한 점에서 볼때 우리는 진정한 여성 교육론,또는 가정 주부 의 신학 같은 문제를 새로 제기하며 진지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생 각한다.

인간의 상황에 대한 여성의 견해라는 글 가운데서 이러한여 성을 위한 신학의 문제성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그녀는 여성의 특징을 남성에 비교하면서 남성 은 거만, 권력에의 의지 같은 죄를 범하기는 쉽지만, 여성은 사고의 분열 또는 분산,어떤 수준을 희생시키면서까지도 너그러워지려고 하는 충동,개인적인 비밀의 한계를 분별 못한다는 점, 그리고 이 성에 대한 불신, 숙덕공론을 위한 사교성 등과 같은 죄를 범하기 쉽다고 지적하였다. 한 마디로 말하면 여성은.구상 또는 조직적인 촛점을 잃기 쉬우며 따라서 자기의 부정 또는 미개발의 자아 포로 가 되기 쉽다는 말이다. 물론 이렇게 열거한 사실들이 여성의 성품 전체를 나파내는 것은 아니고 그 일면에 불과하다. 여성이 오히려 자기의 여성됨을 확신하며, 기쁨과 행복감으로 여성적인 성품올도 야하려고 할 때, 그것이 남편에 대한 청량제 같은 힘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생활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정은 우리 의 장래에 커다란 암운을 던져 주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식당,다 방에 밀어닥치는 여성들, 계니,동창희니 또는사친희니 하며 몰려 다 니는 여성들을 볼 때 과연 그러한가정에서 자라나는 감수성이 예민 한자녀들은 어떻게 될까? 이러한 여성들도한결같이 집안살림을 돕는다거나 자녀 교육때문이라는 좋은구실을 가지고 있을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구실을 가지고 몰려 다니는 동안에 자신도 모르는사 이에 가정을 중심으로하는 귀중한 정서 교육, 예의 범절 같은 아름 다운 전통을 하나씩 잃어버리게 된단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생 존 경쟁에 뒤떨어지지 않으려는 한국적인 현실인지 모른다. 그러나 각박한 현실일수록 소중한 자녀들의 정신, 품격의 교육 지도를 위 해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다소의 물질적인 손해를 각오하여야 하 지 않을까? 한국의 경제적인 결핍보다도더 무서운 파탄이 이미 우리주변에서발생하고있다는 점을우리는 .깊히반성하여야할 것이다.

어) 인격과 푸른 하늘 저 쪽의 행복
현대인의 정신적인 정황은소의니,불안이니, 필연과 자유의 상극 이니 하는 말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최근에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 어서도 교만, 권력에의 의지,인격의 객체화 같은 것을 인간의 근 본 죄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죄가 두드러지게 노정 되는 자리는 직장이나 사교적인 장소 보다는 가정이라는 것을 잊어 서는 안된다. 인간에(즉 구체적인 남편, 아내 또는 자식으로서의 존재) 갈등이나 딜레머의 바탕은 우선 가정 생활 안에서'먼저 찾아보게 된 다. 그러므로 인격 완성의 수도장은 가정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다시 한번 스카이 다이버 김대위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원칙대로 순수하게 산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 각자로 하 여금 그의 능력에 따라 되고 싶은대로 되게 하라” 이 말은 인용구' 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자신이 오래 생각한 문 제를 간추려서 질문 형식으로 제기한것 같다. 이 문제 제기를 받은 1 우리로서는 여기에 응당해 답을 시도하여야 만 할 것이다. 그대로 묵살한다 는 것은 김 대위의 호소를 너무나 소홀히 하는 태도이다. 먼저 이 질문에는 두 가지 모순이 있다. "원칙대로 사는 사람이 과 연 얼마나 되는가” 하는 물음은 흔히 이상주의에 불타는 청소년들이 현실의 추악상에 실망할 때에 으레 하는 말이다. 그러나〈얼마나 되 는가?〉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실문이 라는 점은 설문자 자신이 잘 알 것이다. 그것은〈원칙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대전 체를 이미 김 대위는 무 언중에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얼 마나 되는가?〉라는 물음은 결코 실존적인 물음은 되지 못한다. 〈원칙대로 살 수 없다〉는 그의 전제가 사실이라면〈왜 원칙대로 살 수 없는가?〉하고 설문을 하는 것이 차라리 정당하다 고할 것이다. 한 마디로 해서 자기라는 주체를 완전히 현실의 테두리 밖에 세워 놓고〈울타리 속에 있는 닭 중에 몇 마리나 정말 좋은 알을 낳을 수 가 있느냐.?〉고 묻는 태도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는 "그의 능력에 따라 되고 싶은 대로 되게 하라’’ 는 제안은 전자의 질문과 는 정반대되는 말이다. 능력 대로 되고 싶은 대로 되 게 하는 일이 반드시 원칙대로 사는 일을 보증하여 주지 않기 때문 이다/ 우리돌 중에 누군들 자기 능력대로 살기를 싫어할 사람이 있 을까? 그러나능력대로살되,원칙에 어긋나지 않게 산다는 일을 어느사회에서 찾아 볼 수 있을까? 이것은 불가능한 유토피아를 꿈 꾸는 일이 '아닐까 ? 우리는 김대위의 애달픈 호소에 감명을 느끼면 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무엇인지 석연치 않은 것을 느낀다. 이역 의 땅에서 정말 자기 인격의 충실을 이루기를 바라지만 인격 완성 의〈자리〉는 저 푸른 하늘 위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데서가 아니라 배신,냉흑, 불신,기근이 가득 차 있는 현실의 질곡 속에서 끈기 있게 살아가면서도 자기의 자리를 똑똑히 지켜 나가는데서 이루어 질 수가 있다. 이제 우리의 머리 속에서 고전적인 인격 완성론은 없이 하여야 한다. 현실에 참패당하면서도 삶의 돌파구를 찾는 정열을 잃지 않 으며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엄숙한 태도가 우리에게 요구 된다. 구질구질한 환경 속에서 지지리도 못난 백성 가운데 태어났으면 서도 이 땅이 내가 설자리라고의치며 그곳에서 참 인격 완성의 길 을 탐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