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과 지성인

에세이
단행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27 00:31
조회
3456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지성과 지성인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 지성과 지성인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57 - 66 ( pages)
주제어 지성인 사회학적 의미 근대화 합리주의 개인주의 기독교적 지성
첨부파일: 지성과지성인.pdf

지성과 지성인

(!) 지성인의 사회학적 의미
혼히 지성 혹은 지성인에 대해서 ‘말하게 되는 경우 한 사회 공동 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지식인의 역할이라는 점 보다도 기 성적인 성격이라는,추상적인 지식을 가지거나 이행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논의하는 일을 자주 보게 된다. 지성 혹은 지성인이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의 의미를 규정하지 않고서는 이 문제를 끝까지 끈기 있게 추구해 나갈 수는 없다. 대학 교수, 언론인,또는 개인 적으로 일반 여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틀어서 지성 인의 범주 속에 넣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지성적〉이 란 말은 하나의 사회적인 역할에 관련된 말이지, 결코 한전체 인 격을 나타내는 말은 아나다. 우리가 지성인이라고 하면 대개 교사 나대학 교수들을 포함하는 사회 지식 계충을 총체적으로 일컫는데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모든 교수가 다 지 성인이라고 단정을 내려서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 활동의 성질 여하에 따라 저들이 지성인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 다. 이를테면 교과서 내용을 해석 (뇨몌!)예3산에)이나 적용을 하지 않고서 그저 전달((:이!!!!써流他)만 하는 교사를 지성인이라고 할' 수 는 없다. 라디오 아나운서가 남이 준비한 원고를 그대로 읽어서 방 송하는 일이 지성적인 활동이 될 수 없다면,해석과 적용을 가르치 지 못하는 교사의 활동도 지성적인 역할이라고는 할 수 없責 것이 다. 그는 다만 한 사회 안에 있는 전달의 메카니즘 속의 톱니바퀴 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의미에서 우리는두가지 지성인의 타입을 들 수 있다. 즉 어떤 관료적인 기구(공적인 것이든,사적인 것이든)에 서 자문이 나 기 술적 인 기 능을 담당한 지 성 인,다음에 는 그러 한 관료 적인 기구에 예속되지 않은 지성인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관료적 인 지성인의 고객은일반대중이다. 국가나 사회 변천이 심하고 전쟁 과 같은 위기가 닥쳐올 때에는 이러한 비예속적인 지성인들도 잠정적 으로 관료적인 기구에 들어가서 중간적인성격을 띠우는수도있다. 이러한 두 가지 타입의 지성인들온 그 성격상 서로 분리되어 있 으면서도〈문제의 규정〉에 있어서는 서로 일치되는 수가 있다. 미 국의 경우에는 인종 차별 문제,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서도 국가 사 회적인〈문제의 규정〉에 있어서, 이 두 가지 타입의 지성인들은 같 은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 규정을 받 아 들 이거나 배격하는 데는 양자가 서로 다른 가치 판단에 의하여 태도 를 결정하게 된다. 즉 관료적인 지성인은 정책 수립가가 미리 제정 된 장책 (?바如6!^ 뼈라)의 테두리 안에서 그 문제 해결의 방안을 찾는데, 비예속적인 지성인들은 이러한 정책에 구애 받지 않고 문 제 규정에 따라서 해결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 자체의 선택과 규정에는 가치 함축(乂닌!?-1I0I)11^3^10미이 따르며, 또 그 선택 은 그 사회 구조 안에서 차지하는 지성인의 위치로 말미암아 고정 되어진다. 아물든 비예속적인 지성인과 관료적인 지성인은 한 사 회 안에서 서로 다른 직능을 가지고 있다. 비예속적인 지성인은 등 에와 같은 역할을 하며, 대중 전달이 발달함에 따라 사회 정책에 끼치는 영향이 날로 더 강력하여지고 있다. 현재 한국의 지식 계층을 〈기능적 지식 분자와 정치적 지식 분자〉로 나누고 있지만(황성횡 교수의 '한국근대화와 지식인의 역할’) 이것도 ^611011 교수의 분류에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비예속적인 지성인과 관료적 지성인의 관계는 문제 규정이나 선택에 있어서 공통한 가치 개념을 바탕으로 일치되는 경우도 있으나, 항상 양자간에는 사회 구조 안에서 저들이 차지하는 위치 때문에 서로 긴장 관계를 조성하며,또 이러한 긴장 이 사회 발전의 다이나믹한 요소를 이루게 된다. 그런고로 현명한; 정치가라면,이 긴장을 없애기 위해 한 쪽을 말살하지 말고 오히려 그 긴장 관계를 조정 (피삐?이&는)하여야 할 것이다.

여) 근대화와 지식인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지식인 혹은 지성인은 사회의 근대화에 있어서 정신적인 긴장 관계를 다이나믹하게 조성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하겠으나 그것이 서구의 경우와 같이 산업 혁명 같은 경제 의 변혁이나 정치 및 철학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우리 사 회에 있어서는 다른 양상을 멸 수 밖에 없다. 일본의 관료 기구와 제도를 그대로 물려 받았고(그 근원을 따지면 프로이센 형의 年巧 序列 的인 상하 질서를 골자로 한 것이다. ; 또 이에 따른 권위주의적인 사 고 방식에서 탈피 못하면서 미국적인 직무 계층적인 근대화를 구현 하려는데 우리 나라의 근대화의 근본 문제가 있다. 지식인을 키워 내는 교육 기관에는 아직도 교육자나 피교육자가 이러한 권위주의적 사고를(스승과 제자의 관계, 학교 규율,제복, 상급생과 하급생과의 관계 둥) 문제 삼율 수 없는 전제로서 정해 놓고 미래의 지식인이 될 이 나라의 학생을 교육시키고 있으며,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근대화문제는 비합리적인(권위주의) 것에서부터 벗어나 합리주의적인 교육을 함으로써만 밝은 전망을 내다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정치, 경제 질서의 근대화보다 합리주의적인 사유가 근 원적인 과제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고로 한국의 근대화는외국의 기술문명의 습득에서 이루어진다기 보다 한국의 교육 제도의 비합리적인 것을 제거하는 데 근본적인 해결을 찾아야 할 것이다.현재 한국의 학생들의 행동을 단순히〈욕구불만〉 으로 처리해 버리는 일은 대단히 피상적이고 위험한 일이며, 한국 의교육제도의근본적인모순과 또여기서교육을받는학생들이 느끼는 딜례머에서 근본적인 문제의 발달을 찾아야 할 것이다. 프 로이센적인권위주의 교육제도에서 교육을받으면서, 한편으로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경험주의적인 합리적 사상에 눈을 뜨게 된 학생 들이 자기 분열을 극복 못하는 데 대한 불안과 초조감을 이해하여 야할것이다. 사회나경제질서의 혼란과 핍박이 심하여 교문을 나 산 학생들이 사회의 지식 분자라는 계층을 형성하여 나가면서 현실 과와 타협을 강요당하지만, 그 마음 속 깊이 뿌리 박고 와는 이러 한 갈등을 극복 못하는데 현대 한국의 엘리뜨의 항거 정신의 성격 을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현대의 한국 지성인들은〈양심직으로 능률성을 철회〉한다는 소극적인 항거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정책 수립자의 눈에는〈옹졸한 지성인〉으로 보이게 될 수도 있올 것이다. 그러나최근에우리를고무시키는현상은 지식인들의〈문 제의 선택과 규정〉에 전에 없는 진지성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가리우지 않고 가차없는 자기 비판을 하는 지 성인이야 말로 총, 칼을 함부로 휘두르는 무인보다 더 용감하다고 할 것이다. 만일 지식인들이 이러한〈문제의 선택과 규정〉.을 하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옹졸하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사실 과거 지식인들의 특징을 든다면 우리 나라가 오랫동안 외세 압박에 눌려 왔었기 때문에 그 자신의 신분다如없1다) 을찾으려고하 는데만 집착해 왔고, 지성의 비속화에 항거하는데 그 온갖 힘을 기 울여 왔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한 지'성적인 집착 때문에 가끔 한국의 지성은(예를 들면 한국 문학 작품 중에서) 피상적인 문학 적 쇼비니즘적인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차 대전을 전후로'한 실존주의 사상도 우리 나라에서는 몇몇 교 수들과 문학가들의 붓을 통해 심심풀이 정도의 입씨름 거리로 소개 되었을 따름이다. 이를테면 홍역을 가법게 치루어 나간 것이나 다 름 없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다만 상식적인 문제 선택과 규정을 평면적으로 치 투어 나가려는 지성인들의 안이한 아카데미즘에다가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에토스의 신학적인 요소를 좀더 종교적인 차원에서 탐구하는 계기를 찾지 않는데서 그 근본적 인 원인을 엿볼 수가 있을 것이다.

(幻 합리주의와 개인주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합리주의 사고가 맡은 역할을 강조하였지 만 그것이 결코 서구적인 이성 지상주의를 찬양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은 아니다. 합리적인 개인주의가 오히려 개인의 존엄성이나 문명 사회를 좀먹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은 서구 근대 사상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상식처럼 되어 온 것이다. 근대의 서구 사상에 있어서 특히 !차 대전 이후로부터 급템포로 일어난 비합리적있 철 학이나 문학 사상율 이러한 고전적 합리주의, 개인주의 사상울 부 정하는 사조로 간주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비합리주의적인 사 상이나 실존주의 사상을 주창할 수도 없고,다만〈합리성〉이란 개 념을 서구적인 협의의 정의를 내릴 것인가 하는데 우리외 관심의 촛점이 있다.〈인간이 협의의 합리적인 존재인가〉라는 문제를 학문 적으로 따지는 일 자체가 하나의 합리적인 질문이기도 한 것이다. 즉 이성으로써 온갖 삶의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고 전적 합리적인 인생관의 타당성을 따지는 일까지도 합리적인 설문 에 속한다는 것이다. 사실 앞으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문제는 서 구적인사회 합리주의를 지양하고, 이처럼 합리주의의 한계를 제 정하는 고차적인 합리주의를 모색하는데 있다. 여기서 근대화의 과 정에서 지성인이 맡아야 할〈근본적 문제의 선택과 규정〉의 성격을 찾아야 할 것이다.

(소) 기독교적 지성의 과제
합리주의와 기독교와는 서로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기독 교신앙의 역사에서 신앙의 합리성과 신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자주 신학 논쟁의 주제로 되어 왔었다. 그러나 고전적인 서구 합리주의가 역사 과정 자체로 말미암아 지양되어져 가고 있는 사실 과 함께 사회 과학 분야에서도 합리주의가 빚어낸 개인주의를 극복 하고 사회의 유기적인 발전의 터전을 이루는 가치 의의를 추구하 는 경향을 우리는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더우기 이러한 학문적인 방법론 가운데서도 새31^예8!^ 와 같은 문화 철학가, ?했이!, 85165’ 그리 고 묘0재113 8(^15;하 와 같은 조직. 사회 학자들융 사 회 생활의 가치를 종교로써만 이해될 수 있다는 입장율 고수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자유는 필연성을 초월하지만,그것을 없이할 수는 없다고 한다. 초월이란 결코 제거나 말소를 의미하지 않기 때 문인 것이다. 자연의 인과율은 인간이 예기치 않는 시간과 장소에 서 새로운 차원에서 활동한다, 자유나 창조는 결코〈필연성을 그대 로 받아 들인다〉는 것울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와 같은 창조를 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이에 변이를 가져오게 하며 이러한 변이 과정에서 새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따름이다. 이렇게 말하는 현대 사회 과학이나 문화 철학의 결론은 그리스도교의 신학 적인 해석을 대변하여 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이와 같이 고전적 합리주의 지양이 현대의 사상이나 사회 과학에 있어서 중심 과제로 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그리스도교 신학이 (엄밀 히 말해서 그리스도교 윤리학) 차지하는 위치와의의를 자각하여야할 것이다. 19세기의 역사주의를 거쳐온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윤리학 은 신화(!피산뇨!배)의 의의를 재발견하고,현대 사회 심리학이나 민 속학 분야에서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되어 있는 신화해석에 새로 운 빛을 던져 줄 수 있다. 한 민족 사회 안에서 보게 되는 온갖 상 징 및 상징 숭배의 현상학적인 의미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오늘날 크리스천 지식인들에게 맡겨진 과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학문적 인 방법론을 무시하고 직관적인 유추로써 민족 신화의 근원을 창세 기에서 찾거나 또 이로써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우월성을 입중하려 고 하는 시도에는 또 하나의 신학적인 쇼비니즘에 빠질 위험율 내 포하고 있다. ( : & 는 현대의 그리스도교적인 지성과 과제를 논하는 글 중 에서 현재까지 우리는 역사를 이해하는데 역사적인 비판 연구의 결 과보다 오히려 하나의 철학적인 입장에서 하였으며, 이것이 자연 주의적인 크리스천지성인들이 범한 큰 잘못이었다고한다. 그는 계속하여서, 크리스천 엘리뜨들이 주장하는 자유주의를 비판하면 서 철학의 오용(?애86 ?배애叩切)을 들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 은성서와 역사적 신앙에만 위배될 뿐만 아니라, 이성 자체에도 어긋난 사상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현대의 그리스도교적인지성 은 1879년에 레오 8세가 ?6161111 ?31113회장을 돌린 이후에 중세 연구 특히 토미스틱 철학의 재연구에서 시작된 영속적인 철학(?1?11- 0801.1113 ?대패!3)을 하나의 특징으로 삼고 있다. 중세기에 있어서는 희랍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틀의 사상 계열을 따른 어거스틴과 아퀴 너스가 그리스도교적 지성의 중추를 이루었었다. 이 어거스틴의 사 상과 아퀴너스의 사상의 차이를 말할 수도 있으나, 사실은 양자의 4상은'굉장한 규모로 한 점을 향해 집중하고 있다. 중세기에는 아 퀴너스의사상도 그다지 충분히 일반지성인들에게 이해되어지지 않았으나, 근대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그의 사상이 널리 연구되어지 기 시작하였다. 033361167는 주장하기를 중세기를 휩쓴 것은 어거 스틴의 사상이었다고 한다. 종교 개혁자들도 어거스틴의 사상의 영 향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플라톤주 I 의자인 어 거 스틴과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 아리스토틀주의자인 아퀴 너 스를 대 치 시 키 고, 여 기 서 ?11110301)11151 1)616111115 를 찾는다는 것 이 최근 보수적인 지성인들의 움직임이라고 하겠다. 이 사상은 결 코 현대 사상에의 반동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오히려 근대 사상이 거쳐온 특히 데카르트 이후의 인식론과 근대 합리주의를 근본으로 부터 재검토하여 대중 사고를 대표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 프로테스탄트에서는 현대의 역사학이나 고고학위 연구에서 얻어진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시간과 공간의 과학적인 개념을 새 롭게 해석하며,인간?실존을 상징적으로예속 설화, 문학 둥) 이해 하는 데 근대의 실존주의 문학과 철학자들의 작품을 인증하고 있다. 더 우기 시카고 대학의 211(1(16 교수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와 ?1X617156 연구와 동양 철학, 특히 인도 철학의 교리에서,〈대립의 통일〉⑴" 01에1如11113 0卯0반이:III미사상을 찾아내어 (일본의 西出 幾太郞의 〈절대 모순의 자기 통일〉을 연상케 한다)성속?3야에-마0!3애)의 장벽을 무너뜨 리자는 꾸준한 움직임이 있다. 이 새로운 크리스천 지성의 동향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니이체,사르트르, 까뮤, 카프카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그 중에는 무 신론자라는 낙인을 찍힌 사람도 있다)들어 그 작품에 등장하는 반그리 스도교적인 인물의 독백이나 대화에 대해서 종래대로의 틀에 박힌 해석을 내리지 않고 동양적인 성속융합이라는 새로운 각도에서 해 석을 하고 있다. 위811311 3^0131”지에는 (새표도 3!버!낸 미국 로체스터 신학교의 조직 신학 교수 월리암 해밀턴이 〈신의 죽음의 신학 (了뇨 06.11. 01 (^!丁!!60108비〉이라는 제목으로,최근 구미에서 굉장히 문제가되어 있는 로빈손 감독의〈신에게 솔직히〉,에모리 신학의 "!!피!^5 八11- 1沈1:의〈?!代태 01닌6 &I?1 丁1比 013160110 하 7116 &!?에〉,그리 고 ?3111 乂30 811떼의〈丁!16 크沈이야 1、1!6 (노행진〉을 들 어 문제로 삼고 있다. 八11126!:는 니이체처럽 현재 우리에게는 역사적으 로 신이 죽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는 성스러운 것을 회복하려면 속된 것에 대한 부정율 하지 말고 철저한 긍정을 하여야 한다고 주 장한다. 신학자들이 하여야 할일은〈하나님의 흠석 때문에 생겨진 암혹에 깊이 잠겨져 있는 이 세계 안에서 종교적인 의미를 벗겨 보 인다는 역설적인 사업〉이라고 하였다. 키엘케골과니이체, 그리고 현대의 실존주의 철학에다 동양 철학의 〈무〉사상을 가지고 신약 성서의 종말의 사실을 시적인 언어로 분석한 八1112하은 분명히 그리 스도교적인 지성 탐구의 방향을 보여 주고 있다. 영속적인 철학이나 또는 신의 죽음을 말하는 신학이나 꼭 같이 종 교적인 차원에서 문제의 선택과 규정을 대담하게 하는 것으로 우리 의 관심을 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