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의 자아

에세이
단행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27 00:56
조회
3816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크리스천의 자아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 크리스천의 자아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67 - 76 ( pages)
주제어 승리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 자아 의식 성령 부조리
첨부파일: 크리스천의자아.pdf

크리스천의 자아
로마서 8장은 크리스천의 생활의 모티브를 가장 간명하고 또 조 리있게 쓴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을 그의 목적으로 하시는가 ? 그 리스도의 삶과 죽음,그리고 성령의 전능,죄의 심각한행패들이 8 장의 골자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 8장을 세 부분으로 나눠 현대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자아 발견을 주제로 하 여 강해를 시도코자 한다. 그래서 첫째는 영의 생활을 중심으로 법 률에의 승리를 생활 모티브로 하는 자아 발견여 나?끄), 둘째는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소망의 생활을 모티브로 하는 자아 발견, 그 리고 끝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역사, 또는 자기 구원과 사회 의 갈림길에 선 그리스도인의 고민을 다루려고 한다.

⑴ 승리자로서의 자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로마서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으며 13:21~26?,이 부분은 8 : 25절을 설명하는것 으로 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 받는 일이 없고”,"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죽 음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다”는 것이다. 여기의 법 ⑷!!!에은 계 명이라기 보다는 어떠한 형태 (맨如쇠 또는 원리 (?소닌머리를 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얼이 바로 이 영의 원리라는 것이다. 이 생명의 영이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답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교회답게 하는 것이다. 곧 이러한 영이 우리를 율법 의 영에서 해방시켜 준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영적인 존재 또는 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할 때,어떤 종교적인 경건이나 도덕적인 결 백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영 안에 있는 이의 생 활은 승리자의 생활이라고 잘라 말하고 있다. 이 승리의 생활은 이 세상 어떠한 법에도 굴종하지 않는 자유의 생활인 것이다. 이 세상 아무 것도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생활을 침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승리의 생활이 결코 신비주의적인 신앙 체험에서 가지는 심리적 인 나르시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승리의 생활에도 늘 영을 좇으려는생각과 육신을 쫓으려는생각들이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승리의 생활을 절대로 주관적인 심리적 자기 도취로 혼돈해 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결국 살아 움직이는 삶의 과정에서 빚어지 는 영과 육신의 싸움을 가리는 자기 기만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승리자의 생활이라고 해서 무율법주의를 따르 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율법의 요구를 완성시키려는 생활 이다. 그런고로 승리자의 생활은 결코신비주의적인주관적 자기 확 신이 아니며, 또.그렇다고율법이 없다고 하는무율법주의도 아니 라는것을 알아야 할것이다. 이러한생각들은 다만 영과 육신의 부딪침을 인간 자신의 수준에서 해결하려고 하는 때에 생겨지 는 것이다. 영과 육신의 부딪침은 어떤 이원론으로서만 해소되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바울은 여기서 강조하고 있다. 다만 "하나님의 영 (요절)”에서부터 우리는 한 인간의 자아의 통합如沈라1야)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사실적이며 창조적인 면들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 영은 절대로 심리적인 자기 환상 이나 일시적인 자기 도취를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리-, 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책임적인 결단을 내리는데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 는 의 (화^이/따)를 행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바울은 승리자로서의 크리스천 생활의 성격을 설명하였 다. 크리스천은 결코 율법이나 이 세상의 권세가들에게 패배 당하는 생활을 할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을 이긴 승리의 생활 속에서 크리 스천은 참된 창조적인 생활을 할 수 있고 참된 인격의 통합을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⑵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
승리자의 생활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약속을 받은 생활이 다. 그러나 이러한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생활에는 한 가지 조건이 따른다. 그것은 육신에 빚진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빚이란 부채를 말하는 것이다. 육신에 대한 부채는 결국 자기 소외 의 생활이다. 영과 육신과의 관계는 분리나 단절이라기보다 창조 적인 긴장 관계라 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창조적인긴장관계가꺼 꾸로 되면 육신아 주가 되고 영은 이에 대한 종의 위치에 서게 된 다. 그러므로 실지의 인간생활에 있어서 이렇게 꺼꾸로 된 영과 육 신의 생활이 곧 죽음에 이르는 생활, 죽음의 생활 자체를1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생활이 바로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죽음의 본능(如3出 !!볘!했)인 것이다. 이 죽음의 본능을 향해서 줄달음치는 삶이 바로 육신을 쫓는 생활인 것이다. 이 육신을 좇늘 생활은 인 간이 자신의 신분(닛리빈야) 혹은 통합된 자아(;“比한있대 8낸)를 가지 지 못하고 부단히 인격 분열증에 걸려서 자신과 이 세상을 파멸에 이 끌어 가게 한다. 이러한 생활을 부정하고 통합된 인격성 가운데서 육신을 잘 돌보는 대신, 영적인 것에다가 우위를 둔 생활이 곧 하 나님의 아들로 약속 받은 생 활이 라는 것이 다. 이 러 한 생 활에서는 옛날에 무서워 하던 종의 생활로 다시 돌아 갈 수가 없다. 육신만 을 쫓는 생활은 결코 자유스러운 생활이 아니라 소외된 생활이다. 그러므로 영으로 이런 소외를 극복한 이는 다시 옛 종(무서워하는) 의 영을 받지 아니한다. 이러한 승리자의 자아 또는 신분을 입증해 주는것은이 세상의 아무것도 아닌, 다만 성령만이(내절) 친히 하여 주실 분이란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거듭 승리자의 자아 의식을 이 땅 위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됨을 성령이 입중함 으로서만 타당성을 가진다고 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자아 의식, 또는 자신의 신분 문제 가 책임적인 크리스천의 근거라는 점을 알아야 할 것이다. 책임적 (여8!)에3^6)이라는 말은 상대에 대해서 반응을표시한다는뜻이다. 이러한 반응 표시는결국 자아가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하 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남을 향해 응답하거 나 반응을 표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자아의식의 발견은 곧 책임적인 행동을 하게 하는 처음 출발점이 된다. 그러면 내가나 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가 자아 발견의 내용이 될 것이다. 내가 나의 자아를 어떤 민족적,문화적,그리고생리적인 테두리 안 에서 파악하고 거기에다가 자아를 동화시키는 경우에 우리는 자아 상실 또는 매몰된 자아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자아상실이 나 매몰된 자"아 때문에 현대인은 진정한 인격적인 반응을 표시하지 못하고, 다만 반동만을 계속하며 무엇이 책임인지를 알지 못한다.

해방된 그리고 승리자인 크리스천온 먼저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 계에서 자아를 설정하고 파악하기 때문에 언제나 우주적인 자아 의 식과 반응 그리고 책임 의식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윤리적인 자 리에서 본다면,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지 켜야 할 법칙인가를 묻기에 앞서 어떻게 반응을 표시할 것이며 또 무엇이 책임적인가 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과거의 크리스천 생활의 원리에서는 신앙적인 복종이 가장 본질적인 윤리 문제였지만 현대에는 무엇이 옳은 반응이며 무엇이 책임이냐 하는 것이 근본 문제로 되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옛 종의 영에 다시 굴복하면 우리는 참으로 창조 적인 승리의 생활에서의 책임을 경험할 수 없다. 우리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무엇이 율법인가고 물으면 그것이 유대교적인 율법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실존과 의식을 구속하고 있는 유교적인 것,불교적 인 것 또는 선교적인 것들이라고 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 미암아 구속되고 승리의 생활을 하기 이전에는 이러한 죽음의 영에 얽매여서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시 이러한 옛 율법과 죄 에 굴복하지 않게끔 되었다. 바울은 여기서 다시 승리자,해방된 이 도 앞으로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말 하는 고난이 밖으로부터 받는 고난인지,또는 내면적인 고난을 말 하는 것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생활을 결코 무 율법주의나 안이한자기 충족의 생활로 받아들일 수는없다는 것으 로 해석된다. 주와 함께 받을 영광을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도 받 아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의 질서가 새로운 생명의 진통을 겪는 것 과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들 역시 탄식을 하면서 양자됨을 기다린 다. 현재와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소망을 가지려면 거기에 따든 무 슨 확고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들의 운명을 직시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처음 열매를 받았기 때문이다. 소망이 소망됨은 그것이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하겠지만, 또한 그 것이 실현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고도 하겠다. 우리가 우리의 손 으로 잡아 쥘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소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령의 처음 열매가 우리 마음 속에서 힘차게 역사한다고해도우 리의 약점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오히려 이 열매 때문에 우리 자신의 약점을 더 날카롭게 인식하게 된다. 우리는 양자가 될 어 음 은 받았지만 아직 완전한 양자는 아니다. 우리의 소망 가운데서 양 자됨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 나가는 동안 우리의 한계를 알지 않으 면 아니 된다. 우리의 한계 상황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실은〈"모 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것을우리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미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이들에 게는 자신들의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 생겨지는 일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어 나가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 곧 바울이 말하는 성화와의인의 실상이다.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부르신사람들을또한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 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읍니다(멘-애).”그리스도교에서 말 하는 예정론은 객관적인 의미에서 이해하기에 앞서,신자의 주관적 인 신앙 고백으로서 해석해야 함 것이다. 미리 택하심을 받았다는 신앙의 주체 의식은모든 신자가 자기의 구원의 사실을 생각할 때에 느끼는 신비스러움에 대한 고백일 것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나와 같은 죄인을 죄와 두려움의 법에서 해방시켜 승리의 생활로 이끌어 주셨는가? 이것이 선택의 신비에 대한고백일 것이다. 이 확신과 의인 때문에 신자는 장차 을 영광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영광에의 소망과 확신 때문에 신자의 승리의 노래가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읍니까?” 성령의 처음 열매로써 우리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알지만,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현실 속에서 벌써 그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환난과 고난이 있지만 그것들의 위력은 사라지고 만다. 선과 악이 뒤섞여져서 잘 분별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러나 하나 님의 힘이 선을 강화하여서 그 구극적인 승리를 가져 오게 되는 것 을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아 발견은 고난을 통해서 더욱 확실해진다. 현재 받고 있는 고난을.내가 어떻게 해석하고 견디어 나가는가 하는 물 음에 대해서 대답하는 입장에 따라 자기가 자아를 그렇게 규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 한국 민족이 받은 과거의 고난을 한낱 우연한 역사의 장난으로만 생각하는가? 어떤 운명적인 것으 로 생각하는가? 이러한 물음의 긍정직인 대답 속에서 저절로 자신 을 운명론자로 규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받 는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 들이는가 하- 는 것이 자아 발견의 길인 것이다. 이와 같은 환난을 통해서 해석 하며 자아의 응답틀 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 님의 사랑과의 떨어질 수 없는 유대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가 이떠한 형식의 정치, 문화, 사회적인 전통으로도 이 와 같은 우주적인 응답을 할 수가 없다. 우주적인 웅담 속에서, 자 아를 찾는일에서, 모든 인내와 승리의 생활을 찾아야만 한다. 이러 한 응답을 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굶주 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 조금도 두렵지가 않다. 우주적인 웅담을 은사로 받은 신자에게는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어떤 피조 물이라도 두렵지가 않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적인 낙관주의는 이러 한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서술한 승리자,정복 자의 생활은 결코 시나 문학적인 사상에서 불러대는노래가아니다. 그의 피와 땀으로 엮어진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은 고백 문서이다. 그러기에 논리직으로나 문장에서의 무리가 있지만 그것이 한 움직 이며 살아 나가는 개인의 신앙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에 한충 더 힘 있는 것이다.

⑶ 부조리의 자아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신앙 체험을 통해서 승리자이며 정 복자인 그리스도안와 자아를 발견하는 과정을 설명했다. 8장의 마 지막 부분은 승리자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의 실존 적인'관계가 끊어질 수 없다는 점을 바울은 있는 힘을 다하여 강조 한 감격적인 부분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에서 끊어질 수 없는 수직적인 문제인 것이다. 초월자이신 하나님과의 사랑을이 땅 위의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온 9장 서두에서 아주 극적인 전환을 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극적 인 전환이 어떤 사변적이거나 변중법적인 비약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살을 에는 듯한 고통과 걱정을 거쳐서 겪어야 할 전환인 것이다. 이 전환이 또 눈가림이나 조작을 위한 것이 아 니라고 한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이러한 점에서 이해할수있다. 그가 마음에 큰 슬품이 있고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는 말이 조금도 거짓이 없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바울은왜 이러한 슬품과 고통을느꼈을까? 그것이 육체적인 의미에서 받는 고통이라기보다 마음에 받는 고통 이라는것은틀림이 없다. 그 까닭은 그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그와 더불어 증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눈에 보이지 않고 성령이 증거해 주는〈슬품과 고통〉을 바울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 “나 의 동족인 형제들을 위하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1 오히려 나는 한이 없겠읍니다.”라고 바울은 담대하게 말하고 있다. 여기에 바울의 슬품과 고통의 원인이 있다., 8장끝에 서는 그가 말하기를, 이 세상 어떠한 피조물이라도(동족인 형제까 지도)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이가 없 다고 해 놓고서,다음 순간엔 형제나 골육의 친척을 위해서는 그리 스도에게서 단절되어 저주를 받아도 한이 없겠다고 한다. 바로 이 러한 그의 신앙의 역설 속에 슬품과 고통의 원인이 있었다. 또 이러 한역설이 그로 하여금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을 말한다는 다짐 을 새삼스레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실존적인 신앙과 역 사적이며 사회적인 신앙(동족인 형제들)과의 교차를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설이 사실은 신앙의 현실적 모습인 것이다. 이 역설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어느 한 쪽으로 도피하는 길 밖에 없다. 곧 실 존적인 면(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만 강조하고 사회성을 무시하거 나 사회성만 강조하고 실존적인 면을 소홀히 하면 그의 신앙생활은 안이한 타성으로 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하가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 자가가 있다면 이러한 슬품과 고통을 내면적으로 감당하는 일이다. 그것은 결코 무책임한 도피구나 변명이 아니라 신앙의 역설을 그대 로 받아서 감당하는 것이 참된 크리스천의' 자아인 것이다. 그러기 에 한 그리스도인의 자아 의식에는 이러한 역설이 그 근본이 되어 있다. 이 역설을 아는 사람만이 인간의 부조리의 깊이를알게 된다. 부조리의 자아는 신앙의 본질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다. 책임적인 크리스천은 자신의 자아발견에서 비롯된 반응에서 책임 적인 결단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자아 발견의 근본 문제를 우리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 8장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