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거의 대상의 내면화 작업

에세이
자필수고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16-08-30 21:59
조회
6151
저자 김관석
자료유형 논문
제목 항거의 대상의 내면화 작업
간행물명 횃불이 꺼질 무렵 - 항거의 대상의 내면화 작업
발행처 유림사
발행일 1974-11-30
간행물유형 단행본
범주(형식) 에세이
페이지 179 - 185 ( pages)
주제어 언론 한국 유교 권위주의 유럽 자유주의 일본 제국주의 기독교 언론
첨부파일:? 항거의대상의내면화작업.pdf

항거의 대상의 내면화 작업

언론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한 사회의 발전을 표현하는 것이다. 언론은 결코 진공 상태에서 생겨지지 않는다. 역사적인 상황 속에 서 이루어지는 정의, 평화, 평등이 정치적,경제적 갈등에서 그 실 현이 저해될 때 여기에 대한 반발, 비판, 경하하는데서 피로소 언 론이라는 것이 형성된다. 그러기 때문에 한 나라의 언론은 그 나 라의 역사적 발전,또는 사회 발전의 구조를 떠나서 생각할수가 없 다. 서구의 언론은 서구 특유의 사회 발전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 문에 그것은 서구 사회 발전의 자기 표현이 된다. 우리 나라의 언론도 이와 마찬가지로〈언론〉이라는 것이 형성되 기까지의 역사의식 및 이 의식의 표현인한국의 사회 구조를생각 지 않을 수 없다.

월버 슈람의〈매스콤의 책임〉이라는 저서에는 위에서 말한 서구 의 사회 발전과 매스 콤 발전을 대단히 홍미있게 다루고 있다. 그 가 제시한 바에 의하면 서구의 언론이 형성되어 발전되어져 가는데 먼저 권위주의에서 시작하여 자유 방임주의 시대를 거쳐 현재에는 사회 책임주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역사적 발전 을 상세하게 사상사 및 사회 발전사의 입장에서 검토하고, 이러한 발전이 직선적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언론 속에서 도 여전히 권위주의나 자유 방임주의적인 요소가 남아 있다는 몇가 지 예를 들고 있다. 전체주의 특히 공산 국가의 언론은 여전히 권 위予의적있 ?제를 벗어나지 묵 하V발 1 ^ 비?살국가압에V 아직 도 무책임한 자유 방임주의적^ 언론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오늘의 서구의 언론은 과거의 권위주의나 자유주의를 지 양고, 사회 공동체 안에서의 유대를 견고케 하는 데 언론이 사회적 인 책임을 지녀야 한다는 사회 책임주의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 현저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과연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근본적인 윤리적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슈람은 이러한 윤리 문제를 결코어떤 원칙적인 입장에서 연역하려 하지 않고 수많은 사례를 인용해 가면서 구체적 인 사건 중심으로 귀납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아시아, 특히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발전사 에서 이러한 과정을 비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유럽의 경우에는 중 세기의 권위주의가 계몽 시대, 특히 종교 개혁을 계기로 하여 무너 지기 ?작했고, 그 뒤를 이서서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르는 인 간 중심의 계몽주의 또는 휴머니즘을 꽃피게 한 자유주의의 역사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권위주의로부터 자유 방임주의를 거쳐 발 ‘ 전한 유럽의 사회는 일차 대전을 계기로 하여 새로운 역사적인 전 환점에 직면하게 되고 마르키시즘과 프로이드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자유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여기서 인간, 역사 및 공동체에 대함 새로운 반성과 아울러 사회 공동체에 대한 공동 책 임이 개인의 자유에 못지 않게 중요4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 서 비로소 사회 책임론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유럽의 역사적 발전에 비교해 보면 우리 나라는 유교적인 권위주의라는 가치 체계로써 모든 사회 구조나 개인 생활이 규제를 받아 왔다, 이러한 권위주의는 이조 말에 와서 붕괴되기 시작했지 만 일본의 제국주의로 말미암아 자유라는 것이 짓밟혀 버리고. 새 로운 권위의 왕좌가 우리를 규제하고 말았던 것이다. 1945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사회는 여러 가지 형태의 권위주의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왔었다. 여기서 우리는 권위주의가 좋은 것이냐 나쁜 것 이냐 하는 것을 따지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유럽의 경우에는 권위 주의가 자유주의에게 굴복하고, 그 자유주의가 또 다시 사회 책임 주의로 말미암아 지양 당하는 역사적인 과정을 밟았음에 비추어 본 다면 우리는권위주의가 어떤 외부적인,정치적인침략으로 부장당 했을 뿐, 유럽에서 볼 수 있는 약 400년간의 자유주의의 시대를 겪 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 적 할 따름이 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권위주의가 이 나라에서 물러난 후 정 말 유럽 에서 볼 수 있었던 자유주의를 우리가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가? 역사의 시련은 우리에게 이러한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권위주의에서 사회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현대의 역사적 인 발전에 뛰어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긴 역사를 통해서 겪어보지 못한 우리에게 과연 사회적 책임이 무 엇인가를 그 본래적인 차원에서 파악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우리가 말하는 민주 사회는 한 마디로 해서 책임 사회를 말하는 것 이다. 그러나 책임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무엇을 맡겨주면 그것을 완수할 띠1,우리는 책임 완수 했다고 한 다. 그러나 본래적인 책임 개념은 결코 어떤 일을 완수한다는 소극 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책임 개념은 역시 권위주의적인 전통에 젖은 사고 방식에서. 나오는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본래적인 책임 개념은 그보다도 근본적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 본래 책임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자아 인식, 즉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 인식을 출발점으로 한다. 이 자아 인식은 결코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웃과의 대화를 통 해서 그에게 반응을 표시하고 또 그의 반응에 대해서 나의 반응을 표시하는 부단한 반응 교환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타인의 언어와 행동 속에 비추어진 자신을 보고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여기에도 여러 가지 복잡하고도 미묘한 인간 상호 관계 문제가 따르지만,결국 사람은 이러한 반응 또는 응답을 할 수 있 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할 때 책임 (!싼卵!^!)^!끼의 근본적인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현대의 사회 책임론의 바탕에는 인간의 자아 의식, 또는 본래적인 자아 인식이라는 기본적 문제가 깔려있 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 문제는 권위주의 가치 체제 속에서는 성 숙해질 수가 없다. 거기에서는 명령과 의무 수행이라는 것밖에 있 을 수 없다. 인간의 순수한 자아 인식은 자유라는 차원에서 찾아보 게 되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언론이라는 것은 그 사회의 발전을 나타 내는 표현인 것이다. 책임 사회 형성에 앞서 책임이라는 것의 본래 적인 의의를 역사적으로 겪어보지 못한 데 우리의 사회 문제 또는 그 표현으로서의 언론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의 언론 역사는 주로 활자 문화의 미디어인 신문을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한국의 신문은 국가의 독립,자유 민주주의를 쟁취 하는 것으로 선구자 구실을 해 왔었다. 그러나 신문을 통한 언론만 으로는 이것을 성취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사들도 있었 다’ 서재필 박사는 "자유주의,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고취하는 일이 신문만으로는 성취하기 몬란할 듯하여 여러 가지로생각하다가 무슨 정치적 당파를 하나 조직하여 여러 사람의 힘으로 그 사상을 널리 전파시켜야 되겠다고 독립협회란 것을 창설하였다.’,(서재필 자 서전)고 서술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 독립 운동에 몸바친 지사들 의거의 비슷한 생각이었다고 본다. 행동을 위주로 하는 독립 운동 가들은 어느덧 신문의 언론이 지닌 한계성을 직감적으로 인식한 것 같았다. 활자를 통한 언론 활동으로써는 장구한 시간을 거쳐 민중 을 계몽하고 자아 의식을 터득할 수는 있을지언정, 목전의 정치적 인 압박을 부쉬버리는 데는 무력하다고 보았던 모양이다. 여기에 우리는 한국의 언론의 역사에서 하나의 큰 문제성을 찾게 된다.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민족 운동의 정신적인 기반을 터득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나약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 에, 정신적인 심화 작업보다도 구체적인 행동으로 지향했던 것이 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는 언론 자체의 정신적인 나약성 같이 보이 지만 사실 그것은 한국의 정신적 전통 자체가 지니고 있었던 나약 성이었다. 즉 우리는 권위주의를 붕괴시키고 자유 민주주의의 정신 적 기반올 구축하지 못하는 한계성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유 광열 박사의〈기자 반세기〉를 보면 이 나라의 언론인들의 지 사적인 성격, 그리고 붓대를 통한 독립 운동의 정열을 실감할 수가 있다. 서 재필 박사를 비롯하여 장지연, 유근, 양기택, 박은식, 정 운복, 이 상협 그리고 우리의 언론계의 대 선배요 민족 독립사 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최 남선 선생의 생애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낀 항거의 불꽃을 뚜렷이 볼 수 있다. 한국 언론사의 반세기는 이치범 항거 일색이었다, 그들이 남겨 놓은 언론의 역사는 우리 나 라 언론의 전통을 이루었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투사적인 정신 사를 형성하였다. 일본이 한국에서 물러나간 후로부터 우리의 항거 대상은 사라졌다. 우리가 희구하던 자유 민주주의의 실현은 또 새 로운 역사적인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남북의 분단과.정치적인 독재, 혁명의 연속 속에서 우리에겐 자유와 평둥을 가로막는 새로 운 저해 요소가 나타났다. 북괴의 공산 정권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위협과 아울러 우리 자체 내에 있는 정신적인 빈온 때문에 언론은 새로운 항거를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북괴의 공산 정권에 대한 항거에는 민족 전체의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나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비민주적인 요소는 극복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항거의 대상을 내면화 하는데 오늘도 언론의 역사적인 새 과제를 모색해야 만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언론에만 기대한다는 것은 근시안적 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 과제는 우리에게 민주주의 특하 자유에 대 한 신학적인 고찰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진정 한 자유가 무엇이냐? 이러한 자유에 대한 자아 및 역사적 의식이 정립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참으로 책임 사회 개념을 형성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자유의 사상을 내면적으로 심화하고 성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하나의 공차사로 끝나고 만 것 이다. 진정한 책임 사회를 민주주의의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의 자 유를 침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고, 이에 대한 힝?거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책임 사회에의 첫걸음이 된다는 뜻이다. 앞서 슈람의 도식에서 우리는 유럽의 사회 발전사에 비추어진 언론 의 사상적인 과정을 말했다. 우리는 현재 유럽이 겪은 400년 간의 자유주의 시대를 겪지 못한채 책임 사회를 형성해야 할 단계에 처 하여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논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무거운 과 제이기도하다. 그러나 유럽의 역사가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이나 본보기가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언론의 창조적인 국면을 찾아낼 수 가있을 것이다. 이것은 유럽의 자유 시대가 가져온모든인간 소외 문제를 미리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현대 유럽의 문명 속 에서 심각하게 다루어진 인간 소외는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생각하 게 될 우리에게는 큰 경종이 되며, 인간 소외 극복을 우리의 전통 적인 가치 의식을 재창조하는 데서 성취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문 제이다. 이것은 물론 너무나 낙관적인 생각인지 모르나 어쨌든 인 간 사회의 건전한 발전과 인간 구원의 신학적인 과제로 삼아야만 할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이 과제를 의면하는 어떠한 언론이 나 신학도 비생산적인 것이라고 단정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한국의 기독교의 책임을 따질 수 밖에 없다. 세속 과 경건의 엄격한 구별로 말미암아 일반 언론과 교회 언론의 분리 가 가져다 주는 분열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소외 극복, 구원의 성취를 한국의 선교 전체의 과제라고 생각한다면, 자유와 책임에 대한 성찰이 교계 언론인들이 치투어야 할 정신적인 과제이다. 과 연 한국 교회가 이러한 문제를 놓고 어느만큼 신학적으로나 사회적 으로 진지하게 다루었는지 의문이다. 이 문제늘 다만 일반 언론계 에다 맡겨야 한다는 안이한 생각이 지배적이 아닐까? 앞으로 기독교적인 언론인의 훈련과 인재 양성에 있어서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면,우리의 교계 언론은 메마르고 비생산적인 언론이 되고 말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