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사
- 1961년 5.16 군사 정변 구테타
1961년 5.16 군사 정변 구테타가 발생한다
-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1973년 5월 20일)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1973년 5월 20일)은 1973년 동경에서 지명관, 오재식, 김용복 3인이 주축이 되어 작성된 문서이며 한국어·일본어·영어 3개국어로 동시에 작성된다. 오재식 선생이 전체를 주도하고 책임과 후원을 담당했으며, 한국어와 일본어본을 지명관 교수, 영어본을 김용복 교수가 작성한다. 제1차로 국내 동지들에게 이 선언서를 보내어 함께 선언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으나 당시 국내 사정상 불가능함을 통보받는다. 그러나 2차로 권유하여 국내 동지들도 동 선언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국내 사정이 어려워 미화 1,000불을 마련하여 함께 보내어 이 돈으로 동 선언서의 인쇄, 배포 비용 등에 쓰도록 한다. 이 선언서는 국내뿐 아니라 CCA, WCC 등의 국제 기독교 기구와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 교회, 기관, 미국 유니온 신학교 등 대학에도 발송된다. 특히 라인홀드 니버가 편집장으로 있었던 미국의 “기독교와 위기”(Christianity and Crisis)라는 잡지에 선언문 본문이 실리기도 한다. 운산은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의 국내 책임자로서 다양한 과제를 담당한다.
-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 (1974)
1973년 작성된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 “문서의 익명성을 벗어나 좀더 당당한 자세로 입장을 천명”하기 위하여 운산 김관석 목사를 포함한 한국의 신학자, 성직자 66명이 모여 서명한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성명”이 1974년 11월 18일 발표된다. 이 성명문에서는 교회의 사회 참여는 결코 교회의 본질을 벗어난 정치 참여가 아니라 교회의 근본적인 신앙과 신학에 근거한 행위와 참여임을 선명하게 천명한다. 특히 이 선언문에는 국가와 종교의 관계, 인권, 교회의 선교, 한국교회의 시국선언들에 대한 신학적 고백과 증언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선언은 1930년대 나치정권에 결부된 교회내적 도전에 저항하여 개혁교, 루터교, 연합교가 공동으로 대항하고 작성한 선언문인 바르멘 선언(1934년 5월 29-31일, 열린 고백교회 총회)과 같은 무게를 지닌 선언문으로 평가된다.
- 수도권빈민선교사건 (1975)
1973년의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선언과 1974년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학성명 이후로 1975년 수도권빈민선교사건이 터진다. 이 사건은 1974년부터 진행된 독일의 “세계를 위한 빵[세계급식선교회]”(BFW: Brot fuer die Welt)의 수도권빈민선교사업 지원을 계기로 벌어진 사건이다.
- 3.1 민주구국선언 사건 (1976)
1976년 3월 1일 저녁 서울 명동성당에 신도 700여명이 모여 3.1운동 57주년 기념 미사를 올렸으며 여기에서 “민주구국선언서”가 발표된다. 이 선언서의 최종 서명자는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김대중, 김관석, 은명기, 윤반웅, 안병무, 이문영, 서남동, 문동환, 이우정 등 12명이다. 이로 인하여 김대중, 문익환, 서남동, 이문영, 안병무, 윤반웅, 신현봉, 문정현, 문동환, 함세웅, 이해동 등 11명은 구속 기소되었으며 77년 3월 22일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는다. 또한 수도권위원회의 위원과 실무자 전원은 반공법으로 연행된다.
- CBS 정상화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1986.5)
기독교방송의 기능정상화운동은 1984년 3월 12일 기독교방송 정기이사회에서 기능정상화를 당국에 건의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짐으로 촉발된다. 그리고 1985년 2월의 제34차 총회에서 기독교방송의 기능회복을 위한 건의문이 채택된다. 그리고 1986년 5월에는 “기독교방송 정상화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