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한-일 생명평화역사 기행을 다녀와서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9-05 00:23
조회
1662
시마바라_기독교농민운동_순교지

원폭투하중심지_기념공원_수반

한일 생명,평화,역사 기행을 되새김질 하며...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영혼을 덮으소서”
기행 일주일의 감동이 다시금 밀려드는 것 같다.

♬“내-가 태어난 때부터 사랑하는 조국은 둘-이었네. 슬-픈 역사가 이 땅을 갈라도 마음은 서로 찾았네 불렀네. 볼-을 비빌까 껴안으을 까- 처음 보아도 낯익은 얼굴아 가슴에 맺힌 이 아픔 다 녹이자 함께 부르자- 하함께 부르자. 이- 기쁨을 누구에게 들릴까 이- 노래를 이 춤을 희망을 내일-의 우리-들에게”
일을 하는 도중에도 흥얼흥얼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에 고배 민족학교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똘말똘망한 얼굴을 그려본다.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전광석처럼 지나가버린 일주일이었다. 멍한 느낌을 기행 하루하루를 기록해가며 정리해 보려한다. 워낙 많은 내용을 담은 기행이었기에 두고두고 되새김질을 해야 제대로 소화될 것 같다!


첫째날 : 한-일 역사의 희생양들을 애도하며...

<하카다항> 부산에서 배로 3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 한문이 섞인 일본 간판만 아니면 우리나라의 한 지역으로 여겨질 만큼 친숙하다. 우리를 기다리던 리무진과 선한얼굴의 고쿠라교회 주문홍 목사님의 안내로 기행출발- 기행에 대한 가벼운 설레임은 이내 분노, 억울함, 부끄러움 등의 묘한 감정으로 뒤섞여버렸다.
<영생원> 공동묘지에 도착했다. 일제시대 탄광촌에 강제 징용돼 노예처럼 혹사당하다 돌아가신 분들의 떠도는 유골을 모셔다 놓은 곳-영생원.(고쿠라 교회의 최창화 목사님의 주창으로 이곳에 영생원을 짓고,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유골을 모셔다가 안치하였다.) 조국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고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멀리 동해가 보이는 언덕위에 자리를 잡았다. 네모반듯한 영생원 내부 한 면(동해가 보이는 쪽)에 유골단지가 쭉 놓여있는데 이름을 몰라 불명, 무명, 00호란 글이 고인의 이름대신 적혀있다.
“- 숱을 팔 때는 배고파 죽겠는데 그 말만하면 몽둥이를 맞았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싶소 (중략) 십오세 소년은 몸이 아파서 하루 놀라다가 뚜드려 맞았네. 몽두리 맞고서 굴안에 끌려와서 천장이 떨어져서 이세상 이별했네(중략) 감독놈은 몽두리를 들고서 죽은 사람 옆에 두고 숱담아 내라했네-”- 아직도 이분들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가 그들의 소식조차 모르고 그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지. 고인들의 영혼만이라도 자유로이 가족에게 갈 수 있기를 소망하며..

<오다야마묘지> 1945년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기쁨에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강제노역 속에서 살아온 그들에게는 변변한 여비조차 없었다고 한다. 오직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염원만을 가지고 나선 귀국길에서(한 많은 현해탄에서) 조난을 당해 돌아가신 유체들이 묻힌 곳이다. 일본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이 마구 끓어오를 때, 우리를 위해 오다야마묘지에 묻힌 영혼들의 소리를 듣게 해주신 분이 바로 일본인 목사 요시야코 가와모토 목사님이다.
전후 36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버려진 체로 잊혀져가던 묘지를 가다듬고 추도비를 세웠으며, 1990년부터는 매년 9월에 시민운동 주체로 이곳에서 추도회가 열리고 있단다. “위령자들이여, 침묵하지 말고 그때의 상황을 만천하에 알려달라”며 <조선인 조난자 위령비> 앞에서 영령들의 소리를 듣고 전하는 가와모토 목사님을 통해 선한 일본인의 양심도 보았다.
순간 우리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과 인권유린, 이국민에 대한 멸시 등의 작태를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폐쇄적인 민족주의도 벗어던져야 할 껍데기다.
40도를 육박하는 땡볕 속에서 햇빛가리개도 없이 등허리가 흠씬 젖도록 까딱없이 서서 위령자들에 대해 증언하던 가와모토 목사님, 주문홍 목사님 감사합니다!

<고쿠라교회> 일본이 짓밟고 조국도 외면한 재일동포들의 인권회복과 보다나은 삶을 위해 애쓰는 고쿠라교회에서 저녁을 먹으며 작은 교류회를 갖았다. 서로 소개하고 우리가 열심히 준비했던 노래도 부르고, 서로 마음을 겨우 열었을 때 시간에 쫓기여 아쉬운 이별을 해야 했다.
새롭게 교회당을 신축 중이던데 무사히 주님 성전이 완공되기를 기도 드리며...


둘째날 :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공생공빈

<쓰고 버리는 시대를 생각하는 모임>의 스치다 다카시 교수님을 교토 캠퍼스프라자에서 만났다. 72세의 은발, 마른 체형이시지만 건강해 보이시고, 小食을 하시고 직접 생산에 참여하시며 유기농 건강식을 하셔서일까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신다. 강연을 들었다. ‘모든 가치를 돈에 두어 유한한 자원을 필요이상으로 만들고 써대는 이 사회는 반드시 붕괴 될 것이다. 유한한 자원은 고갈되고 환경과 생명까지도 망가뜨리기 때문에 대안으로써 모든 생명체가 공생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공생공존). 필요한 것은 함께 살기위해 만들고, 나누자는 것이고, 그것을 지켜지기 위해서는 모두가 풍요한 삶이 아닌 모두가 가난해지는 것이다(공생공빈). 모든 생명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에 공생공존의 일환으로 유기농업=생명농법을 실행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하는 농업(소비자는 구매자일 뿐이고 생산자는 생산만 할 뿐인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고 소비자와 생산자가 함께 생산하고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을 지향하는 안전농산공급센타를 실천하고 있다.’ 물질의 풍요 속에 썩어가는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공생공존의 원칙이 정말 필요하다고 본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만들고 나누는 생명농법에 대해 많은 관심이 간다.
안전농산공급센타에서 마련한 유기농 농산물로 맛난 점심을 먹었다. 그 귀한 음식이 남겨진 몇몇의 도시락이 쪼매 거슬린다. 우리가 다듬어야 할 나쁜 습관이 너무 많다.

<귀무덤 :임진왜란 당시 전적으로 바쳐진 우리 조상님들의 귀와 코가 묻힌 곳> 먼저 보인 것은 크고 웅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사다. 마주보고 조금 가면 귀무덤이 있는데, 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적을 으스대기 위한 희생양으로 귀무덤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아 욱!하는 불덩이가 치밀어온다. 우리의 불행한 역사 앞에서 평화의 기도를 한다. 뒤틀린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동지사대학>에서 윤동주님과의 짧은 만남을 하고, 사진에 시인의 조국애와 번민을 담아 우토로로 향했다. 시간을 핑계로 윤동주 평전을 읽고 오지 못한 것이 몹시 걸린다.

<우토로> 버스에서 내리자 처음 보인 것은 말끔한 집들과 군사기지다. 어라!?...
그 사이로 조금 들어가니 심한 시궁창 냄새가 나며 붉은 글씨로 “우토로에 영원히 살리라. 일본정부는 식민지의 책임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 우토로를 지키자!”등의 구호가 적힌 판들이 보이고 허름허름한 집이 보인다. <에루화>라는 간판이 붙은 한겨레방(마을회관이자 우토로 어르신들의 쉼터)에 들어섰다. ‘
그곳에서 우토로 주민들의 역사와 20여년을 싸워온 ‘우토로 지키기 이야기’를 들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억울하게 고향땅에서 쫓기듯 이곳에 들어와 군비행장을 짓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람쥐 체바퀴 돌듯 중노동에 시달려온 어르신들. 낮은 양철지붕으로 지은 열 평 미만의 막사 한 칸에서 5-6명의 식구들이 살았단다. 식수도 공동우물 하나를 겨우 파서 함께 먹었는데, 물이 식수로 적합하지 못했지만 그들에게는 그것만이 전부였단다. 생계를 잇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임금이기에 (그마나도 관리자들은 해방이 되자 밀린 임금을 주지 않고 도망쳐 버렸단다.) 중노동을 하다보니 아침에 입고 나간 옷이 저녁에는 어깨 부분에 구멍이 생기고, 그 구멍 난 자리에는 시컴한 멍이 훈장으로 남는단다. 새로 옷을 살 돈이 없어 어깨부분에 천을 덧대고 아침이면 다시 일터로, 밤이면 헐어버린 덧천을 뜯어내고 다시 작은 천을 덧댄다.
광복이 되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제가 버리고 간 그 자리에 터전을 닦고, 조국에 대한 짝사랑으로 귀화라는 달콤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모든 멸시 천대를 받아가며 자력으로 만든 그 작은 터전을 이제 와서 내 놓으란다. 내가 이렇게 억울하고 막막한데.. 감상에 젖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는데 주책없이 눈물이 흐른다. “일본은 식민지 침탈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구하라! 강제노역으로 멸시와 박해로 앗아간 우토로 주민들의 삶을 돌려놔라! 한국정부는 우토로주민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인 해결에 나서라!” 속으로 외쳐본다.
1시간의 짧은 시간이 금새 지나고 마을 주민 어르신들을 뵙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며 우토로를 떠났다. 9월말로 연장된 우토로 토지매매 문제가 잘 해결되기를 바라며, 1달 남은 기간에 우리의 힘도 미력하나마 더해보자! 이날 즉석에서 모인 헌금이 54,000엔이었다.
기행참가자 여러분 너무 감사합니다!

<고베청년학생센타> 야스타 교수의 특강을 들었다 유기농업에 대한 내용이었다. “식량부족으로 인한 종속의 길을 피하기 위해서는 식량자급률을 올리고, 고령화 사회속에서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 생명농법을 해야 한다. 미국과 호주에서 주로 수입하는(거의 수입밀이란다) 밀로 만든 빵을 먹지 말고 밥을 먹자.” 내일 아침도 빵인데..(우리것은 예장생협에서 만든 유기농 빵이야..?!)
고배청년학생센타 히다상과 야스다교수님, 생협회원 모리자키상 함께 저녁을 먹으며 교류회를 갖았다. 우리말을 너무 유창하게 하시는 히다상, 홀로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불러주신 모리자키상, 함께 어울려 장기자랑도 하고 구성진 노래가락에 하나가 된다. 지구촌 세상이랬지, 서로 다른 얼굴과 말, 풍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진실한 마음은 통하는 것이다!


세쨋날: 하나로 되자! 누리지 못하는 자가 사랑하는 것을, 누리는 자는 홀대한다.

<고배 조선초중급학교> 일본 기행에서 꼭 가고 싶었던 곳, 호기심과 기대로 설렌다. 우리의 초등학교와 다를 게 없는 교실들이 나온다. 그런데 교실 앞 게시판, 교실과 교실 사이, 복도 등에 적힌 글들이 나를 사로 잡는다. ‘지키자, 이어가자, 민족의 넋-우리말’ ‘우리말 100%’ ‘민족의 우리말 사랑하자’ 이 학교에 재적생은 220여명이고, 한국국적의 아이들이 많으며 일본국적과 중국국적 아이들도 몇 명 있다고 한다. 한국국적의 아이들이 많은데도 민족학교에 대한 우리나라의 지원과 배려가 없는 현실이 놀랍다.
재일교포 3세대에 해당되는 어린아이들이 일본사회에서 우리말과 역사를 익혀나가기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고배조선초등급학교가 1945년 10월 27일에 건교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의 갖은 협박과 차별(민족학교 학생들에 대한 일본정부의 지원은 고사하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받고 있단다), 1995년 고배 대지진으로 인한 학교 파괴 등의 많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우리의 말과 역사를 배우고 지키겠다고 꾸꿋히 학교를 지키는 교사들과 학부모님, 아이들이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방학 중임에도 직장을 나가시는 부모님들 때문에 학교에 나와 있는 초등학교 어린이들과 유치원 아이들, 무용연습을 나온 중급학교 아이들, 운동연습을 하던 운동부 학생들이 우리 기행 참가자 50여명과 함께 모였다. 괜히 또 가슴이 방망이질 하며, 눈물이 맺힌다. 우리가 먼저 ♪‘--하나로 되자, 하-나로 되자 이-꿈을 누구에게 전할까--’ ‘--평화, 평화로다--’ 노래를 불려주었다. 유치원 초급아이들이 답가로 ‘김치’노래를 불러주었다. 낭낭한 목소리로 곱게 불러주는 그 아이들이 얼마나 이쁘던지...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을 보자니 괜시리 또 눈물이 주르르.. 챙피함에 고개를 돌리는데 통역으로 함께 가신 이지영 전도사님도 눈가가 젖어들고 있었다.
모두 손에 손을 잡고 한마음이 되어 강강술레를 하고, 아리랑을 함께 불렸다. 우리의 조국도 이렇게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다! ♬‘통일이 어서 오라, 통일을 이루자’ 조국을 사랑하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참 많다.
요즘 ‘우리학교’라는 민족학교 아이들의 생활을 담은 다큐멘타리 영화가 소개되면서 민족학교에 대한 인식도 많이 전파되고 도움의 손길도 늘어가고 있단다. 그 하나로 민족학교에 동화책 보내주기 운동이 있다. 기행 후기활동의 하나로 동화책 보내주기 사업에 함께 동참함은 어떨까?

<고배생협>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 님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고배 생협을 만드신 분이시고, 빈민들의 나은 삶을 위해 한평생을 바치신 분이란다. 1909년 빈민운동을 서두로 노동운동, 노동조합운동, 농민운동, 협동조합, 교육사업, 1923년 동경 대지진 구호활동 등등 일본에서 그 분을 빼놓고는 제반 운동의 역사를 논하지 못 할 정도로 많은 분야에서 열정적으로 일하신 분이란다. 인도에 간디가 있다면 일본에는 이 가가와도요히코목사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이제야 처음 그분의 이름을 접했을까? 너무나 큰 분인 것은 분명하다.

<오사카성> 도톤보리에서의 자유시간 4시간. 몇몇의 사람들과 오사카성을 다녀왔다. 오사카성도 그렇고 일본의 성들에서 보여주는 해자(성 주변을 둘러싸고 만든 큰 강)와 높은 성벽에서 느껴지는 것-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도 많고 지켜야 할 것도 많았나 보다. 끝없는 다툼과 칼을 믿는 무사의 나라이다 보니 상대를 두려워하고 스스로 드러남을 꺼려하고, 다툼이 있을 때 그 싹을 잘라버리는 근성을 오사카성에서 읽어본다.

오사카에서 나가사키로의 이동은 큰 배로 한다. 저녁8시에 배를 타면 아침 8시에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배의 추억이 있어서 이번 기행이 더욱 낭만적이다. 바다의 짠내음을 달콤한 맛으로 느끼며 갓판에 주저앉아 주변 야경과 밤하늘의 별을 보며 추억의 한 토막을 쓴다. 정신없이 달려온 기행 일정에서 못 다한 친교와 생각나누기를 하다 보니 밤이 깊어간다.


네쨋날: 반전반핵 - 평화를 꿈꾸다.

<원폭자료관, 원폭투하중심지> 이 지구상의 전쟁과 관련된 모든 무기는 없어져야 한다! 이는 절대적인 진리다! 1614년 일본, 그리스도교인은 죽여도 좋다는 법령이 제정되고 대대적인 박해와 순교, 시마바라 반도에서 37,000여명의 농민(기독교인)들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일본의 기독교는 사라진 줄 알았다. 200년 후, 나가사키와 소또매 은거지 등에서 자생적인 신앙을 지켜온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음이 들어난다. 우라까미 지역에도 기독교인이 있음이 들어나자 3,000여명의 교인들은 추방을 당한다. 추방령이 풀리자 다시 돌아와 우라까미 성당을 세우고 신앙의 꽃을 피워 보려는 순간 1945년 8월 9일 그 속에 원폭이 떨어졌다. 오! 주여, 어찌 이리도 가혹 한가요.

<원폭피해자 추모 기념관> 원폭으로 돌아가신 7만 여명의 사망자 넋을 위로하는 넓은 수반이 있다. 수반의 물은 원폭이 터지고 화염으로 인해 그들이 가장 갈구한 것이 물이었다는 것에서 물을 채워 드려 갈증을 달래드리고자 했고, 밤이면 7만 여개의 불이 켜지는 데 그것은 당시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이란다. 원폭이 터지면 반경 1.5km 까지는 그 피해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단다. 원폭이 터지자 그 화염으로 모든 것이 타들어가고 녹아버렸다. 세찬 바람에 의해 그 피해가 더욱 확산되고, 용케 목숨을 건졌다 하더라도 원폭 휴유증(백혈병 등)으로 죽어가게 된다.
평화를 갈구 하는 많은 이들의 발길과 손길을 그곳에서 볼 수 있었다.
‘반전반핵, 평화를 이루자!’ 다같이 반전반핵가(♪민족의 생존이 핵폭풍 전야에 섰다. 이 땅의 양심들아 어깨걸고 나가자!)을 부르며 이 세상이 전쟁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평화의 세상이 되는 그날까지 함께 노력하자는 다짐을 나누어야 했는데, 뭔가 우리의 의지를 담은 표현물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26인 순교기념공원>에서 26인의 십자가 처형 동상을 본다. 12세의 어린아이도 있다.
지금 겨우 40도의 더위도 힘겨운 데, 어찌 저 고난을 이겨냈을까? 우리에게도 각자의 십자가가 준비 되어 있을 텐데.. 기꺼이 지고 갈 믿음이 내겐 있을까?

<소또매 은거지> 기독교 박해를 피해 숨어 지내던 곳, 일몰이 아름답다는 곳. 바닷가, 가파른 절벽 위 둔덕에 위치한 소또매의 절경은 우리나라 외도에서 바라본 해금강을 연상케 한다. 지금 우리가 아름다움을 취해 있는 이 곳이 소또매 은거자들에게는 고립과 단절의 처절한 외로움의 감옥이었을 수도 있으며, 불안한 그들만의 평화를 꿈꾸는 해방구였을 수도...

<나가사키 카톨릭 회관> ‘일본 기독교 전래및 순교사’에 대한 특강을 들은 후 성찬식을 하며 순교와 평화의 두 단어를 새겨본다. 아쉬움의 한마디. 막연히 순교한 그리스도인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일본에서 박해를 받았던 이유, 선교에 대한 비난의 이유를 되새겨봐야 할 것 같다. 종교이기주의와 문화적 이기주의에 편승한 선교는 참된 선교가 아니라고 본다. 예수의 삶을 나의 삶으로 고백할 때 낮은 자들과 더블어 사는 모습을 통해 녹아지듯 전해지는 그리스도 신앙의 전파가 진정한 선교라고 조심스레 적어본다. 하나 더 선교는 나의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필요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다섯째날: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주께서 우리를 평화의 도구를 쓰시기 위해 이번 기행에 인도하심을 내가 고백하고 평화의 일꾼으로 살기를 다짐하는 경건회를 시작으로 하루가 열렸다.

<운젠순교지> 계란 썩는 냄새가 나는 유황온천, 희뿌연 연기사이로 유황물이 흐른다. 피부병과 몸에 좋다는 온천물에서 족욕도 하고, 유황 온천물로 삶은 계란도 사서 까 먹었다. 계란을 삶을 정도도의 뜨거운 물로 기독교인들의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을 하였단다. ‘..국자에 구멍을 뚫어 유황물을 순교자들의 머리 위로 서서히 떨어뜨려 뜨거움을 지속시키는 고문..’-침묵의 한부분이 생각난다. 그곳에도 십자가가 외로이 서 있다. 부할절에 우리가 계란을 먹고 예수님의 부할을 몸에 체험하듯 우리는 그 순교자들의 부할을 꿈꿔본다.

<시마바라 크리스챤 농민의 난(그리스도교 박해와 무거운 조세의 이중삼중 고를 벗어버리기 위한 난)> -우리나라의 동학혁명이 떠오른다. 시마바라반도 하라성에 갖힌 농민들 중 1명만 남기고 다 죽임을 당했단다. 그 한사람을 살려둔 것은 난의 처절함을 증언하게 하여 차후로 그런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는 경고의 일환이었단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 죽였단다. 그런데 그들이 크리스챤이였단다. 시마바라 반도는 사람들, 여행자들의 발길이 많지 않은 곳이란다. 누가 알아줄까. 37,000명의 크리스챤 농민들이 외롭게(의롭게) 죽어간 그곳을 .. 예수님도 그곳에 함께 계셔서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것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생명,평화,역사 기행에 함께 하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기행을 통해 역사 왜곡의 현장, 아직도 질곡의 역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동포 형제자매들, 생명과 평화가 짓밟힌 잔혹한 현장들을 보았습니다.
기행 속에 던져주신 주님의 소명대로 역사를 바로잡고, 모든 생명이 존중되고 평화롭게 공존되는 세상을 만드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도록 주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흩어지고 갈라진 내 형제 자매가 하나로 되어 통일춤을 덩실덩실 추는 그날까지,
가진 자 눌린 자 없이 함께 나누고, 먹고 사는 참 살맛나는 그날까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위협당하지 않고 하하 웃는 그날까지,
당신의 정의와 평화, 창조질서 보존의 소명을 다하도록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