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미국의 중동정책 비판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10-03 22:51
조회
3087
다음 글은 <평화 만들기> 249호에서 퍼왔습니다.-운영자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미국의 중동정책 비판
유달승


1. 서론

또 다시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다. 지난 7월 12일부터 이스라엘은 ‘정의의 처벌’ 작전명으로 레바논에 대한 무차별적인 공습을 단행했다. 이번 침공으로 레바논 희생자가 1천4백여 명 정도에 이르렀고 레바논 인구 1/4 이상이 난민이 되었으며 사회기반 시설이 초토화되었다. 유엔안보리는 8월 11일 1만5천명의 평화유지군을 레바논 남부 분쟁지대에 파견하는 휴전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14일 이스라엘 침공 34일 만에 이스라엘과 레바논은 휴전에 합의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78년에는 리타니 작전, 1982년 갈릴리의 평화작전, 1993년 책임 작전, 1996년 분노의 포도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기존의 레바논 침공과 이번과의 차이점은 작전명이 다를 뿐 침공의 명분은 테러조직의 제거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번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이제까지 나타난 중동전쟁과 마찬가지로 2개의 전쟁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전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침공전쟁을 보도하는 미디어 전쟁이다. 많은 언론들이 이번 사태를 이스라엘과 헤즈볼라 간의 무력충돌로 묘사했지만 사실상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전쟁이다. 이 과정에서 새삼 언론보도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언론의 보도는 한 사건을 평가하고 분석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하지만, 국제분쟁의 경우 전적으로 서구 언론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을 정확히 보도하고 그에 따른 진실을 규명하는 작업에는 많은 한계점과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중동 분쟁의 보도에서 이러한 측면이 더욱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전쟁의 목적과 의미를 분석하고 이 과정에서 나타난 이번 전쟁의 진실을 파악하고자 한다. 또한 이번 전쟁을 둘러싼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를 하고자 한다.

2.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의 목적과 의미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보도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문제점은 자의적인 용어 사용과 이중 잣대이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납치’, ‘테러단체’ ‘보복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서구 언론의 이중 잣대를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쓰고 있다.

첫 번째는 ‘납치’ 논쟁이다. 이것은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발단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 언론들은 7월 12일 헤즈볼라 무장요원들이 레바논 남부 이스라엘 접경지대에서 이스라엘 병사 2명을 납치했다고 보도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병사가 이스라엘 영토에서 납치되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최초의 보도는 이러한 내용과 다르다. 독일 통신사(DPA), 에이피(AP), 프랑스 통신사(AFP), 유피아이 아라비아(UPI Arabia)와 아랍 언론들은 이스라엘 병사 32명이 레바논 영토 아이타 알 차압(Ayta al-Chaab)을 급습했고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 병사 2명이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 이곳은 이스라엘 국경선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레바논 마을이다. 이러한 보도가 사실이라면 국제법과 제네바협정에 따라 그들은 전쟁포로이다. 이스라엘의 공식 발표 이후 일부 언론은 보도내용을 수정했지만 일부는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 언론들은 이러한 보도 내용을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납치’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만약 납치된 것이 아니라면 이스라엘의 보복전이라는 용어도 잘못 사용된 것이다.

두 번째는 자위권 논쟁이다. 이스라엘은 이번 레바논 침공을 자위권 행사라고 강변하고 있고 대부분 언론들은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자위권은 유엔헌장 51조에 언급되어 있지만 유엔헌장 2조에 제시된 원칙에 따라 규정받을 수 있다.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자위권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무력공격을 받았고 자위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번 사태의 발발은 영토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을 위협하여 이스라엘의 주권을 수호하는 정당한 전쟁으로 규정할 수 없다. 법적으로 자위권을 주장하려면 이스라엘 영토에 대한 광범위한 무력공격이 존재해야 한다. 만약 모든 폭력사태를 전쟁 행위로 간주한다면 세계는 커다란 재앙에 빠지게 된다.

세 번째는 이번 전쟁의 성격에 관한 보도이다. 일부에서는 이번 전쟁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간의 전쟁 또는 이슬람극단주의, 특히 시아파 극단주의에 대한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이번 전쟁은 이러한 전쟁이 결코 아니다. 사망자 숫자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언론사마다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아랍미디어와치(Arab Media Watch)의 자료는 매우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8월 9일까지 28일 동안의 전쟁에서 1,161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의 정교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레바논 전체 사망자 1,064명 중 헤즈볼라 무장대원은 약 5%(54)가 사망했고 대다수는 무고한 민간인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인들은 101명이 죽었는데, 이중 64%(65)가 군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공격은 단순히 헤즈볼라 무장대원만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체 레바논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번 전쟁을 서구문명에 대한 이슬람극단주의와의 전쟁이라고 묘사한 것도 잘못된 것이다. 7월 26일 베이루트 조사정보센터(Beirut Center for Research and Information)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번 전쟁에서 레바논인 86.9%가 헤즈볼라를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또한 레바논의 기독교계 에밀 라후드 대통령도 이스라엘의 행위를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이중 잣대에 대한 일방적인 보도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7월 21일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레바논 사태와 관련하여 유엔결의안 1559호의 이행을 언급한 내용이다. 유엔결의안 1559호는 2004년 9월에 채택된 내용으로 미국이 현 시점에서 이 결의안을 강조한 이유는 헤즈볼라의 무장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점령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촉구한 유엔결의안 242호(제3차 중동전쟁 이후 채택)와 유엔결의안 338호(제4차 중동전쟁 이후 채택)를 이행하지 않고 있다. 유엔결의안 1559호의 이행을 언급하기에 앞서 이 지역에서 채택된 유엔결의안 이행여부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지적할 필요가 있다.

또한 미국은 헤즈볼라를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있지만 헤즈볼라는 엄연한 제도권 정당이다. 헤즈볼라는 2005년 총선에서 총 128석 중 23석을 획득했고 2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유럽연합과 유엔은 헤즈볼라를 테러단체라고 규정하지 않고 있다. 2002년 미의회조사국 보고서와 2005년 국제테러리즘에 관한 국무성 보고서에는 헤즈볼라가 1994년 이후 테러행위를 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헤즈볼라를 테러단체로 규정하는 것은 이번 레바논 침공에 대한 미국의 정치적인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7월 29일 베이루트 조사정보센터(Beirut Center for Research and Information)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이 이번 전쟁에서 공정한 중재자 역할을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89.5%가 No라고 답변했다. (7.8% Yes) 지난 1월 31일 레바논에서 미국의 역할을 지지하는 견해는 38.2%였다. 이것은 이번 전쟁을 통해서 나타난 레바논의 반미정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목적은 레바논의 정권교체와 친이스라엘 정부의 수립에 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은 다양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번 침공은 석유송유관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현재 제2의 중동이라고 불리는 카스피해 석유 개발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카스피해에서 지중해로 연결되는 BTC(바쿠~트빌리시~세이한) 송유관 공사가 지난 5월 개통되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 해역의 카스피해에서 생산되는 석유를 그루지야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항구인 세이한까지 나른다는 것이다. BTC 라인을 보면 BP(34%)와 셰브론이 인수한 유노칼(10.3%), 스테이트 오일(8.6%), 엑손 모빌(8%) 등이 많은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BTC 송유관은 기존 러시아 송유관에 의존하거나 유조선을 이용해 터키 보스포러스 해협의 병목구간을 통과해서 지중해로 나가던 비효율적인 운송방식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제르바이잔의 유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현재 약 20%를 그곳에서 수입하고 있다. 더 나아가 터키와 이스라엘은 6월 BTC 송유관을 확장시켜 시리아와 레바논 영토를 경유하는 송유관 건설(세이한에서 이스라엘 항구 아슈켈론 ashkelon)을 합의했다. 이스라엘이 레바논 침공에서 시리아와 이란을 겨냥하여 지역전으로 확대시키려는 의도는 이 사업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카스피해 유전에 관심을 갖는 이스라엘의 목적은 자신의 에너지 소비를 충당할 필요성 뿐만 아니라 홍해 에일라트(Eilat) 항구를 통해 아시아 시장에 재수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터키의 세이한과 지중해의 아쉬켈론 항구는 단지 400 Km 정도 떨어져 있고 아쉬켈론 항구와 홍해 에일라트 항구는 이미 송유관이 존재하고 있다. 홍해 에일타트 항구에서는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게 효율적인 수송이 가능하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중국의 진출을 차단시킬 뿐만 아니라 이란을 고립시키는 다양한 목적을 함축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최근 중동에서 일어나는 이슬람운동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현재 중동에서는 이슬람운동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되고 하마스, 헤즈볼라, 무슬림형제단의 제도권화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작년 이집트 총선에서 무슬림형제단은 돌풍을 일으켜 새로운 대안세력으로 등장했다. 작년 2월 14일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 피습 사망 사건 이후 레바논 정국은 정치공백 상태에 빠졌고 헤즈볼라는 총선에서 대약진해 레바논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지난 1월 팔레스타인 총선에서도 하마스는 다수의석을 차지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이에 따라 이슬람운동의 영향력은 점차 확산되고 있고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러한 흐름을 저지하려고 있다.

3. 미국의 중동정책 비판

최근 조지 W 부시 미대통령은 “이슬람급진파를 파시스트와 나치, 공산주의자의 계승자”라고 말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이슬람파시즘과의 전쟁’으로 미화시켰다.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미국이 9-11 테러 이전보다 더욱 안전해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지난 30일 미 퀴니피액 대학의 여론조사에서 테러리스트들이 향후 수개월 이내에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질문에 62%가 "YES"라고 답변했고 현재 세계는 테러 공포 속에 빠져 있다. 5년간 ‘테러와의 전쟁’으로 발생한 희생자는 6만 2천명에 달하고 난민은 4백 5십만 명이나 생겼다. 9-11 테러 이후 ‘테러와의 전쟁’은 또 다른 9-11 비극을 탄생시켰다. 이것은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오히려 ‘테러리스트를 양산시키는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다.

냉전 시기 미국의 중동정책은 세 가지 전략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안정적인 석유자원의 확보, 대소련 방어망 구축, 이스라엘의 안보. 이러한 미국의 주요 전략은 탈냉전 시대에서는 지속되고 있다. 소련이 더 이상 미국의 이해관계에 장애요인으로 등장하지 않자 미국은 중동지역의 새로운 위협요인으로 ‘이슬람으로부터의 위기’를 제기하게 되었다.

1) 미국의 이중 잣대(Double Standard) 정책

중동에서 미국의 이중 잣대 정책은 일방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과 이후 정착촌 확대정책에 대해서 미국은 침묵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대해서 미국은 이중 잣대를 내세우며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공습으로 발생한 레바논의 희생을 외면했다.

미국의 이중 잣대 정책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략적 관계에서 기인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략적 관계는 냉전, 중동에서 반서구 민족주의 운동의 출현 및 미국 선거구에서 유대인의 영향력 확대로 점차 발전했다.

벤 구리온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는 이스라엘의 미래가 강력한 서구와의 유대관계에 의하여 유지된다고 주장하였다. 이 시기 이집트, 시리아 및 이라크에서는 민족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레바논, 요르단 및 이란에서는 반서구운동이 발생하였다. 바그다드 조약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던 미국의 정책은 실패했고 소련이 이스라엘 주변의 아랍 국가들과의 동맹관계를 확립하는데 성공했다. 중동의 격렬한 반서구운동은 이슬람 세계, 특히 아랍국가에 널리 퍼져있던 이스라엘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감과 부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서구의 간섭, 중동에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최후의 보루로 간주되었다. 그 결과 미국은 중동에서 자국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략적 관계를 정립하는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중동 전역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면서 석유 국유화 운동이 등장해 미국의 석유회사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당시 베트남전쟁에서 미군이 소비하는 연료의 60%가 중동산 석유였다. 이스라엘은 6일 만에 이집트 군대와 시리아 군대를 초토화시켰고 팔레스타인의 최후의 보루인 가자지구, 서안지구 및 동예루살렘을 점령했다. 베트남전쟁에서 고전하던 미국에게는 이스라엘을 통해 중동에서 자국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의존도는 매우 높아졌고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가 수립되었다. 물론 이에 대한 아랍인들의 분노도 점차 확산되었다.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시위가 곳곳에서 발생했고 사우디아라비아, 베이루트, 암만 및 다마스커스에 있는 미대사관이 습격당했다. 하지만 미국의 친이스라엘 정책은 보다 더 확대되었다. 1954년 미국에 있는 유대인 단체 지도자들이 창설한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AIPAC)는 친이스라엘 로비단체로 이번 전쟁을 통해 그 영향력과 힘이 배가되었다. 이 단체는 워싱턴에서 가장 강력한 대외 로비단체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단체는 우익성향의 기독교 원리주의 단체가 결합하면서 점차 목적과 성격이 변화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광범위한 공식적 지지는 그대로였다.

또한 제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은 상당량의 소련제 무기를 미국에게 제공하여 그 전략적 동
맹국으로서의 잠재력을 입증했다. 1969-70년 사이에 전개된 소모전 동안 소련제 대포, 대전차, 대공포 및 미사일 등도 역시 미국 정보부에 제공되었다. 이스라엘의 잠재력은 1970년 시리아가 요르단 북부를 침략한 이후 더욱 강화되었다. 닉슨 대통령과 키신저 안보담당보좌관의 호소에 따라 이스라엘 군대는 비상태세에 들어가 요르단 국경으로 진격하였고 그 결과 시리아가 철수했다.

최초의 공식적인 전략협정은 1979년 해럴드 브라운 미 국방장관과 에제르 와이즈만 이스라엘 국방장관 사이에 체결된 방위협정에 대한 미-이스라엘 합의각서였다. 이 각서로 인하여 양국사이에 합동연구 및 개발이 가능해졌다. 카터 행정부는 이스라엘을 미국 기술 이전에 적임인 비 NATO 국가로 지명했다.

좀 더 공식적인 협정은 레이건 시대에 이루어졌다. 1980년 레이건 행정부는 중동에서 이스라엘이 맡은 견제 역할과 중동 군사 균등화에서 무장병력의 가치를 강조했다. 연차총회에서 레이건은 이스라엘을 “주요 전략 자원일 뿐 아니라 미국의 중요한 동맹국”이라고 선포했다. 알렉산더 헤이그 국무장관은 중동에서 반공산주의 국가 동맹에 근거한 “전략적 협력”을 통해 지역안보를 위한 새로운 계획을 수립했다. 1981년 미국과 이스라엘은 전략적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에 조인하였고 그 주요 내용은 “그 지역에 대한 소련으로부터의 모든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협력할 것과 “전 지역에 대한 이러한 위협을 저지함으로써 국가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협상 및 협력”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노동당은 이 양해각서가 이스라엘의 자체 방어력을 초과하는 의무사항이고 아랍국가들의 공격시 미국의 지원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하였다.

1983년 미국과 이스라엘 간에 전략적 협력을 위한 개정된 양해각서가 체결되었다. 양국의 고위급 국방관료들 사이에 공동정치군사위원회(JPMG)이 창설되어 합동 군사계획과 훈련이 용이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에 미군이 사용할 무기와 군수품이 배치되었다. 1987년 미 의회는 이스라엘을 “주요 비 NATO 동맹국”으로 지명했다. 이에 따라 상호안보지원계획위원회(JSAPG)와 공동경제개발위원회(JEDG)가 발족되어 더욱 긴밀한 상호협조가 이루어졌다.

미-이스라엘간의 전략적 협정은 미국의 중동지역 아랍 우방들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1989년까지 거의 공표되지 않았다. 그러나 1989년 9월 중동분쟁의 억제 효과를 높이기 위해 협정이 공표되었다. 당시 라빈 국방장관은 미국과 약 27회 합동군사훈련이 행해지고 있었다고 발표했다.

2) 미국의 이중 봉쇄(Dual Containment) 정책

미국의 중동정책의 주요 목표는 이스라엘의 안보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에너지 공급을 보장하는 걸프지역의 안보는 매우 중요하다. 걸프만에서 미국의 전략적 중요성은 1970년대 석유전쟁에 의해 강조되었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심화되자 걸프지역 보수왕정국가들과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다. 1988년 이란이 아랍 항구를 향하고 있던 배를 위협했을 때 미국은 불안해하는 보험회사들에게 수로를 통한 수송은 안전하다고 납득시키기 위해 쿠웨이트 배에 “미국 국기 등기”를 해 주었던 사실은 유명하다. 1991년 이라크에 대해 미국이 주도한 공격은 걸프만 군주들을 보호하는 것이 점령보다는 미국의 이해관계를 추진할 수 있기 때문에 사담 후세인 체제의 전복을 중단했다.

걸프지역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수출은 미국의 NATO 동맹국들의 경제뿐 아니라 그 밖의 서유럽경제발전의 주요 에너지원이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는 미국 경제에도 매우 중요하다. 최근까지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석유수입량 중 제2위였는데, 이제는 미국에서 수입하는 석유 중 약 50%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매장량을 보유한 사우디아라비아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세계석유무역을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유대관계는 상호필요에 의한 것이었다. 1991년 걸프전쟁 이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는 그 지역에서 이라크에 대한 억제책이었다. 1990년대 초 이라크는 쿠웨이트뿐 아니라 다른 걸프지역 국가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이란과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이중 봉쇄정책이었다. 미국은 걸프지역에서 자국의 이해관계를 증진시키고 보호하기 위한 어느 한 국가를 선택했다. 미국은 우선 이란을 선택했다. 1973년 중동전쟁에서 아랍산유국들이 서방국가들에게 석유 판매를 제한하는 자원의 무기화정책을 추진하자 미국의 중동정책은 크게 변화되었다. 미국은1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통해 중동을 지배해 왔지만 1973년 이후 이란을 강력한 우방국으로 규정하고 다양한 지원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부터 미국은 이란을 ‘중동의 헌병’이라고 불렀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후 이란에서는 친미정부가 붕괴되고 반미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시기부터 미국의 중동정책은 변화되었고 지금까지도 이란정부에 대한 이중 봉쇄정책이 지속되고 있다.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은 이란의 이슬람혁명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이라크를 지원했다.

미국의 이중 봉쇄정책은 이라크나 이란에게 의존하지 않고 미국과 그 우방들에게 유리하게 걸프지역에서 세력균형을 달성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걸프전쟁 이전 이라크는 걸프지역에서 이란을 견제하는 주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자 미국은 이 침공을 비난하고자 하는 안전보장이사회의 모든 조치에 반대하고 나선다. 미국은 재빨리 이라크를 테러 지원국 명단에서 지우고 미군의 무기가 이라크로 송달되는 것을 승인한다. 하지만 이란-이라크 전쟁 이후에는 지역강대국으로 등장한 이라크를 통제하기 위해 미국은 걸프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패배 이후 사담 후세인은 더 이상 걸프지역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는데 적절한 파트너로 간주되지 않았다.

미국의 이중 봉쇄정책은 걸프협력위원회(Gulf Cooperation Council: GCC)에 대한 지원과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카타르 및 바레인에 미군의 배치 이외에도 이란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경제적 조치도 포함되었다.

4. 결론

2003년 이라크 침공 이후 미국은 중동 민주화 정책을 주장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11월 6일 민주주의기부재단(NED)의 외교정책 연설에서 ‘중동의 민주화는 수십 년 동안 미국 외교정책의 중점 사항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고 11일 워싱턴 헤리티지재단 연서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민주화 성공은 자유의 역사의 거대한 초석이 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전 세계를 돌아온 민주혁명이 결국 중동에서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폴 월포위츠(Paul Wolfowitz) 미국방부차관은 이라크의 성공적인 정치변화가 “시리아와 이란에서 시작하여 아랍세계로 거대한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내용에 따르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중동의 민주화를 위한 조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첫 번째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선언했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탈레반의 반격이 거세지고 있고 아프간 서남부 지역을 다시 장악했다. 두 번째 테러와의 전쟁이었던 이라크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아므르 무사 아랍연맹 사무총장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지옥의 문을 여는 것”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고 이 예언은 현실로 나타났다. 오늘날 이라크의 모습은 혼란과 무질서로 점철된 지옥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이번 레바논 사태를 ‘새로운 중동을 위한 기회’라고 주장하면서 중동사태는 고통스럽고 비극적이지만 중동의 보다 큰 변화를 위한 기회의 순간이라고 말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레바논의 비극을 ‘새로운 중동의 탄생을 위한 불가피한 산고’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새로운 중동’ 구상은 이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을 거부하는 모든 형태의 저항운동을 제거하고 이스라엘의 안보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미국은 외교와 중재를 거부하고 일방적인 이스라엘의 군사행동을 지지하고 있다. 또 다른 새로운 중동 구상은 이 지역에서 친미국가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다. 7월 26일 레바논 해법을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로마회담에 사우디 아라비아, 이집트 및 요르단이 참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미국의 새로운 중동 구상은 실현되기 어렵다. 첫째, 헤즈볼라는 단순한 군사조직이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 뿌리 깊은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고 레바논의 정치, 경제 및 사회와 연계된 주류 운동이다. 또한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헤즈볼라는 투쟁을 통해 점령지로부터 이스라엘의 철수를 이끌어낸 유일한 아랍정당이다.

둘째,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인해 레바논 사회는 철저히 파괴되었고 반이스라엘 정서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제는 어떠한 레바논 정치조직도 헤즈볼라를 공개적으로 비난할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헤즈볼라의 입지는 보다 더 강화되었다. 특히, 레바논 남부에 대한 이스라엘의 표적 공습으로 시아파 공동체의 연대가 확고해 지고 있고 이는 헤즈볼라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로 나타나고 있다.

이번 레바논 사태에서 이스라엘은 전투에서는 이길 수 있지만 전쟁에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를 비롯한 친미국가에서 확산되는 반미, 반이스라엘 시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헤즈볼라를 반대했던 중동의 친미국가들은 아랍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봉착해 심각한 정권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또한 헤즈볼라의 지도자 나스랄라는 아랍세계의 영웅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제 헤즈볼라는 더 이상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아니라 이슬람세계 저항운동의 구심으로 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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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 교수이다.
* 위 글은 2006년 9월 29일 희망포럼 세미나실에서 [경계를 넘어,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가 주최한 {김진균 기념사업회 2006년 학술토론회: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과 미국의 새로운 중동정책}의 발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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