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료

어깨동무 (김기석 목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6-18 21:46
조회
1928
2007년 6월 17일

어깨동무
(마11:16-19)

김기석 목사(본원 기획위원)


? 존재를 건 질문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있는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는 전 세계의 무슬림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모스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슬람 세계의 영웅인 살라딘(Saladin, 1137-1193)의 묘가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모스크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의미있는 곳입니다. 모스크의 한 가운데에는 헤롯에 의해 참수당한 세례자 요한의 머리 무덤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케루스 요새에 갇혀 있던 세례자 요한은 헤롯의 명령에 의해 참수되어 그곳에 보내졌던 것입니다. 어둠침침한 초록빛 조명 아래 누워있는 세례자 요한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울컥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스스로를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규정하면서, 세상의 어떤 권세 앞에서도 거칠 것 없는 음성으로 자기 시대의 불의를 폭로하고, 사람들이 쓰고 있는 위선의 가면을 사정없이 벗겨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힘 있는 이들에게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오랫동안 식민지 수탈에 시달려왔던 민중들은 그가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한 음성으로 자기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칭찬으로 사람을 시험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는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에 따라 앙앙불락하는 소인배가 아니었습니다. 민중들의 이목이 예수에게 집중되고 있다는 제자들의 보고를 받았을 때에도 그는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케루스 요새에 갇혀서 죽음을 예감하고 있을 때 그는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서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마11:4-5). 여기에 언급된 이들은 그 사회에서 철저히 주변화된 사람들, 즉 不可觸賤民들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들의 살 권리를 되찾아주고 계십니다. 당신이 오실 그분이냐는 질문에 주님은 당신을 통해 구현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가리켜 보이고 있습니다. 선문답과도 같은 이런 대화를 통해 세례자 요한은 새벽이 밝아오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례자 요한이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그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큰 정신은 큰 정신을 알아보게 마련입니다.

? 피리를 불어도, 애곡을 하여도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외로웠지만 예수님도 외로웠습니다. 곁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을 바로 이해하는 이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라 하는 이들에게 사회의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이 두 사람은 불편한 존재들입니다. 억압당하고 무시당하는 것을 운명처럼 여기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운명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것보다 더 큰 혁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소위 백성의 지도자라는 이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네거티브 공세’를 시작합니다. 그들은 통상적인 사회적 관계를 거부하며 금욕적으로 살아가는 세례자 요한을 두고 ‘귀신이 들렸다’고 조롱합니다. 또 사람들 속에 들어가 그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어주는 예수님을 두고는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며 비난합니다. 이것은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여론 조작(public opinion manipulation)이고, 인격 말살(character assassination)입니다. 완악한 세대입니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나’만 있을 뿐 고통당하는 타자에 대한 존중이나 배려는 없습니다. 진리는 관심 밖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태를 보면서 기가 막힌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장터에 앉아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일단의 아이들이 작심한 듯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우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게임의 룰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룰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릴 적에 우리는 친구들을 향해 오른쪽 엄지 손가락을 세워보이며 ‘술래잡기 할 사람 여기 붙어라’ 하며 친구들을 초대했습니다. 반응이 없으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피리를 불고, 곡을 한다는 것은 ‘너와 함께 하고 싶다’는 일종의 발신음입니다. 그러나 그 발신음이 다른 이의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지 못할 때 우리 가슴에는 멍이 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 속에 화육해 들어가 그들의 삶을 축제로 바꾸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님이 첫 번째로 간 곳은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였다고 소개합니다. 이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삶 속에 신명을 불어넣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일주일이나 계속됩니다. 사람들은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포도주를 마시고, 음식을 즐기고, 노래하고 춤추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유쾌하게 웃습니다.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조용히 앉아서 그런 야단법석을 멸시어린 시선으로 지켜보셨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들과 함께 똑같이 그 축제를 즐기셨을 겁니다. 그렇기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아셨을 때,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하셨던 것이겠지요.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예수님의 행태를 보고 스스로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렸을 겁니다. 그들은 가르고 판단하고 정죄하기에 익숙할 뿐, 남을 인정하고, 일상의 삶을 긍정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 우리 시대의 노래
이런 사정은 우리 시대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고 하면서 새 것을 마시려 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은 자기 삶의 습성을 바꾸는 불편을 감수하기 보다는 타성의 힘에 굴복해버리고 맙니다. 세상을 새롭게 하자는 주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늘 있게 마련이고,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면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현실을 긍정해버리고 맙니다. 윤인중 목사가 계양산에 골프장이 들어서는 것을 막으려고 155일 동안을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아도, 그의 눌함(訥喊)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미군이 반환한 미군기지의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도, 오염된 땅속 4m에서 뽑아 올린 기름에 불을 붙여보여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표정들입니다. 기후변화가 심각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하면서도, 스스로 편리한 삶을 거부하면서 불편을 감수하려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6일 전쟁으로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40년을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데도, 그들의 고통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음성은 다른 이들의 귓전에도 이르지 못하고 소멸될 때가 많습니다. 검문소 앞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하루 종일 차례를 기다리고, 이스라엘 병사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해야 하는 그들의 굴욕감을 우리는 모른 체 하고 있습니다. 내 책상 앞에는 깨진 달걀 앞에 쭈그리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는 아프가니스탄 소년의 사진이 있습니다. 그 소년은 넘어지는 바람에 달걀이 모두 깨졌다며 어머니가 자기를 죽일 거라며 울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린 소년 소녀들을 생존의 전쟁터에 내모는 세상은 대체 어떤 세상입니까? 땔감과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하루 종일 광야를 걷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누런 진흙물을 생명수인양 마시는 그들을 보면서 저는 그야말로 물을 물 쓰듯 하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기 몸에 쇠사슬을 묶은 채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는 노점상들의 외침은 무시되기 일쑤이고,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며 도로 한복판에 서있는 이들도 교통의 흐름을 방해한다 하여 싸늘한 눈길을 받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눌 때 세상은 조금은 살 만한 곳으로 변할 겁니다. 특별히 우리는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지랖 넓게 세상의 모든 아픔에 반응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레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강도 만난 이웃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의 이웃이 되어주기 위해 마음을 쓰고, 몸을 움직일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입니다. 공동의 아픔, 공동의 분노가 만나는 자리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만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 옳음은 그 한 일로서 밝혀진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새로운 세상을 열려는 철든 신앙인은 많지 않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병든 사람을 병원에 데려가는 일은 자선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대목은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지혜로운 인격인 예수님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제 아무리 완고하게 굴어도 그리스도께서 옳다는 것은 그분이 하신 일이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생명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병든 사람은 온전해졌고, 낙심했던 이들은 숙명론의 너울을 벗고 일어섰고, 자기 속에 갇혀 살던 사람들은 이웃들의 짐을 함께 지기 위해 밖으로 나왔습니다.

며칠 전에 읽은 인도 선교사 스탠리 존스의 자서전 <<순례의 노래>>에서 저는 정말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구절과 만났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한 대목이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 곁에 서있는 어린양이야말로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 죄값을 지불하는 사랑, 희생적인 사랑이 우주 안에 있는 힘의 중심이라고 말한다.”(278쪽) 우리는 지금 무엇을 우리 생의 중심으로 삼고 살고 있습니까? 돈이나 힘입니까?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면 우주의 중심에 있는 어린양 예수의 마음을 우리 마음으로 삼아야 합니다. 스탠리 존스는 1919년에 간디와 만난 자리에서 간디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기독교를 인도에서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하려면 어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네 가지를 제안하고자 합니다. 첫째, 당신네 선교사들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도록 하십시오. 둘째, 당신네 종교의 가르침을 실천하십시오. 그 가르침의 품위를 떨어뜨리거나 저하시키지 마십시오. 셋째, 사랑을 강조하고, 그것을 추진력으로 삼으십시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타종교들을 보다 호의적으로 공부하고, 그 종교들 속에 있는 선한 것을 찾아내고, 사람들에게 보다 호의적으로 다가가십시오.”(스탠리 존스, <<순례자의 노래>>, 김순현 옮김, 복있는사람, 2007, 262-3쪽)

간디의 말은 오늘의 우리도 명심해야 할 말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세상의 추문거리로 전락한 것은 우리가 예수처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삶의 원리로 확고히 붙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섬김을 중심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배타성 때문입니다. 이런 태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입니다. 이걸 깨닫는 순간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나는 잔치 자리에서 사람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껄껄 웃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힘들고 지친 이들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하는 주님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병든 이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그들을 고쳐주려는 주님의 인자하신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의 어깨에 손을 얹어주셔서 우리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누군가의 어깨동무가 될 차례입니다. 주님의 피리 소리에 따라 춤을 추고, 주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곳에 우리도 머물러야 합니다. 이 길을 통해 우리는 천국 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그 길 위에 선 자의 행복을 날마다 체험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