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경향신문) 정태인 소장, <기사연 리포트> 배포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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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연
작성일
2018-07-20 11:33
조회
3888
[원희복의 인물탐구]정태인 “민중이 원하면 무조건 쓰고 말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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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소장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주간경향>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흔히 ‘J노믹스’라는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 기반은 소득주도 성장이다. 문 대통령은 6월 19일 <경향신문>이 주최한 ‘2018 경향포럼’ 축하 메시지에서 “경제 불평등 없이 국민이 함께 잘사는 것이 성숙한 민주주의”라며 “이것이 정부가 국민께 약속 드린 ‘포용적 성장’과 ‘소득주도 성장’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소득주도 성장은 노동자 소득이 늘어야 소비가 늘면서 경제가 성장한다는 논리다. 과거 경제정책은 기업의 수익을 올려 낙수효과를 기대했지만 기업은 사내보유금만 쌓을 뿐 안정적 고용을 늘리거나 임금을 올리지 않았다.

소득주도 성장 이론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사람이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정태인 소장(59)이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경제 가정교사’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뜻을 펴기도 전 청와대를 나왔다. 그러나 지금 문재인 정부는 이를 현실에 적용하는 ‘대범한’ 실험을 하고 있다. 물론 10년 전처럼 재계와 정치권의 견제와 반대, 저항이 극렬하다. 일단 6·13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이 압승해 소득주도 성장이 탄력을 받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야당보다 민주당 내부가 개혁적이냐가 문제다. 의원들은 자신의 재선에 불리해 세금을 올리는 것에 반대한다. 종합부동산세에 특히 그렇다. 민주당 의원들은 노무현 정부가 정권을 잃은 것은 종부세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민주당에서 종부세 인상은 금기어처럼 돼 있다.”

소득주도 성장 이론 국내에 처음 소개
그는 관료의 저항은 정치인에 비해 ‘약과’라고 본다. 그는 “관료도 신자유주의에 완전히 물든 사람이지만 대통령 의지가 확실하면 따라간다”면서 “참여정부 부동산정책이 흔들렸을 때가 노무현 대통령이 흔들렸을 때”라고 말했다. 최근 경제정책을 놓고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장하성 정책실장의 힘 겨루기 논란이 심하다. 지난 5월 소득 하위 20% 1분위 계층의 소득 악화 통계를 놓고 벌인 ‘최저임금 인상 때문’이냐, ‘노령인구 유입 때문’이냐 논란은 바로 문 대통령의 ‘J노믹스’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청와대 홍장표 경제수석도 자타가 공인하는 소득주도 성장론자다. 이로 인해 지난 5월 29일 긴급 경제점검회의까지 했다. 일단 문 대통령은 청와대 편을 들었지만 느닷없이 장하성 실장 사퇴설이 나오기도 했다. 경제정책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막후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저소득자 20%, 5분위 중 1분위 소득이 준 것은 최저임금 인상보다 일단 노령화라는 쪽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그렇다. 통계에 명백히 나온다. 하위 20% 노령층은 사실상 직업이 없어 소득주도 성장과 관계없는 계층이다.”

-그렇다면 베이비붐 세대가 계속 은퇴해 소득이 줄텐데 이 5분위 양극화 통계는 계속 악화되지 않겠나.

“이 계층의 소득상태는 더욱 나빠져 노인 빈곤율 세계 1위도 더욱 악화될 것이다. 나는 노인복지는 보편적 복지보다 선택적 복지를 해야 한다고 본다. 현재 노령수당은 그냥 놔두더라도 새로운 복지시책을 도입하면 선별적으로 주는 것이 좋다.”

-지난 6월 5일 통계청의 ‘5월 고용동향’을 보면 청년 4명 중 1명이 직장이 없다. 이것이 최저임금 인상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소득주도 성장은 시행한 지 석 달밖에 안됐다. 소비는 3.4% 늘어 좋은데 이것이 임금인상 때문인지 인과관계를 따져봐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워낙 빚이 많아 임금이 올라도 곧장 소비가 늘진 않는다. 소득이 늘어 소비가 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특히 홍장표 경제수석은 중소기업 네트워크로 성장동력을 찾겠다는데, 이 효과가 나려면 최소 10년 걸린다.”

김 부총리는 긴급 경제점검회의에서 “5월 고용동향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라며 “그동안 일자리 창출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크게 나아지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임금인상이 고용동향에 나쁜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뉘앙스다. 경제부총리가 충격을 받았다면 실제 당하는 국민들은 얼마나 황망하겠나. 참 어이없는 경제부총리의 태도였다.

노무현 정부 한·미 FTA 반대 선봉
정부는 지난 5월 28일 최저임금에 상여금과 교통·숙식비 등 복리후생비를 포함시키는 내용으로 최저임금법을 개정했다. 소득주도 성장정책에 거꾸로 간 것이다. 정 소장은 “최저임금 1만원에 기업이 위험해진다는 주장에 겁이 나면 천천히 올리면 되지, 올려놓고 다시 깎는 꼼수를 부리면 되겠나”라면서 “단순화해야 할 임금체계를 오히려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이런 단편들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이 얼마나 힘든 길인가를 방증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어려움에도 소득주도 성장을 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피케티 베타지수(순자산총액/국민소득)는 지난해 말 기준 8.28로 세계에서 가장 높고, 이는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높다. 선진국은 4~5, 불평등이 심각한 미국도 6 정도이다. 레미제라블 배경 시절(프랑스혁명 직전)에도 7.5 정도였다. 우리는 90년대 초까지 경제적으로 매우 평등한 나라였는데 20년 만에 가장 불평등한 나라로 전락했다. 그래서 흙수저·금수저라는 말이 나오는 세습자본주의 시대로 떨어졌다. 이는 자본소득 대비 노동소득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소득주도 성장은 이 격차를 줄여 불평등을 해소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룬다는 발상이다.”

-양극화 심화가 고령화 때문으로 이는 복지 차원으로 풀어야 한다면 결국 재원의 문제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 지식인 소득이 상위 10%에 들어가 버렸다. 자본소득 빼고 연봉 5000만~6000만원이면 소득 상위 10%에 든다. 우리 중위 소득은 보통 1600만~1700만원이다. 진보적 지식인조차 증세를 싫어한다. 지식인들은 중위계층보다 조금 못살아야 한다. 실제 1950~60년대까지 우리 사회가 그랬다.”

-문제의 중소기업 임금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노조를 만드는 것 아닌가.

“소득주도 성장정책의 핵심이 임금인상과 노조 강화다. 단체협약 적용률을 확대해야 한다.”

-그런데 전교조 법외노조 문제를 방치하는 것을 보면 문재인 정부는 노조 활성화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문재인 정부는 아직 뚜렷한 노조 활성화 정책을 내놓지 않았다. 청와대 노동비서관은 굉장히 뛰어난 사람인데, 일자리위원회에 있다. (하~하~) 서유럽은 노조 조직률이 60%로 막강했지만 우리는 지금 10%밖에 안된다. 중소기업은 하청단가의 문제가 중요하다. 이는 공정거래위원회 업무다. 중소기업 하청단가 공동교섭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의 김상조 위원장이 이것만 해도 큰일을 하는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 이론의 소개자답게 그는 막힘이 없었다. 최저임금 인상, 증세 특히 종부세를 통해 마련된 재원으로 복지 확대, 중소기업 하청단가 문제 등 복합적인 문제까지 해박하다. 기자가 “이렇게 밖으로 돌지 말고 직접 (청와대에) 들어가서 뜻을 펼치지, 왜 문 대통령이 안 불러주나”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그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요? 나는 정의당 당원을 했고 386들과 사이도 나쁘다…”고 얼버무렸다. 그는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에 있으면서 386 후배와 사이가 안 좋았다. 결정적 요인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라고 알려졌지만, 그는 “종부세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말했다.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숭문고를 거쳐 1978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유시민·심상정과 78학번 동기다. 그는 동기 중 제일 먼저 연행돼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공무원인 부친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다행히’ 조직에 속하지 않은 그는 25일 구류만 살고 나왔다.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 당시 진보적 사회과학 무크지 <녹두서평>에 ‘민정우’라는 가명으로 편집자를 했다. 그때 실었던 글 ‘식민지 사회 성격규명을 위한 시론’은 그의 석사논문이다.

그는 진보적 경제·노동 이론가로 ‘암약’하며 2년간 경찰의 추적을 피했다. 그때 그가 숨어 있던 곳이 서강대 교수 손학규 소장(현 바른미래당 선대위원장)의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다. 그는 여기서 한국 상황을 분석·전망하는 ‘기사연 리포트’를 해외에 보내는 일을 했다. 이때 ‘운명적’으로 만난 사람이 바로 박현채 선생(전 조선대 교수)과 김병태 전 건국대 교수 등 농업경제학자들이다. 그는 농촌 연구를 통해 알게 된 박현채 선생을 정신적 은사로 꼽는다. 수배와 징계가 풀린 1991년 서울대 경제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갔지만 지도교수가 안병직 교수였다. 안 교수는 박근혜 정권에서 뉴라이트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지도교수도 내가 맘에 안 들었고, 나도 논문 쓸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1994년 미국 실리콘밸리 버클리대에서 6개월, 영국에서도 공부했다. 그는 “케임브리지대에 적만 두고 아이 밥만 해주다가 외환위기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후 학술진흥재단에 있으면서 CBS 등에서 방송을 하다 2002년 노무현 후보를 만났다. 그는 “지지율 2%대에 불과한 그의 주변에 아무런 경제전문가가 없었다”고 말했다.

북한 경제 관련 박사 논문 준비 중
2003년 노무현 정부의 경제 설계자로 청와대에 들어간 그는 2005년 신자유주의에 ‘물든’ 정치권 386의 견제로 청와대에서 나왔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 체결에 들어가자 과감하게 반대편에 섰다. 그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노 대통령의 한·미 FTA 반대투쟁 선봉에 섰다. 그는 당시 ‘한·미 FTA는 재벌·관료·보수언론의 삼각동맹’ ‘민중시대를 가로막는 퇴물’ 등의 표현을 써가며 반대했다.

그의 이런 ‘분명한 소신’은 박현채 선생과 일면 비슷하다. 박 선생은 10대에 지리산에서 빨치산 소년돌격대를 하다 체포되고, 뒤늦게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간 ‘천재형’ 인물이다. 박정희 시절 재벌이 아닌 중소기업과 농업을 통한 자립경제를 강조하는 <민족경제론>을 주창하다 탄압을 받았다. 그의 <민족경제론>은 김대중 대통령의 <대중경제론>의 사실상 전부였다. 그러나 박 선생은 90년대 들어 DJ가 ‘뉴DJ플랜’이라며 신자유주의적으로 변하자 깨끗이 결별했다. 정치적 타협보다 학자적 소신, 민중에 대한 애정을 더 중요시했던 것이다.

한·미 FTA 저지에 실패한 그는 2015년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를 만들었다. 그는 “칼 폴라니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버리면 시장이 찢어지고, 파시즘이 대두되고 전쟁까지 난다고 경고한다”고 말했다. 그는 칼 폴라니 모델은 한 번도 성공 여부가 입증된 적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1960~70년대 영국 노동당, 사회민주당 정책이 소득주도 정책”이라며 “스웨덴은 대기업 노조가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중소기업 임금을 대폭 인상해 성공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3년 전 북한에 ‘꽂혀’ 뒤늦게 북한대학원에서 공부했다. 5학기를 모두 마친 그는 북한 경제를 동·서독과 러시아, 중국·베트남 사례와 비교하는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이다. 박사학위 없는 경제전문가의 ‘한’ 아닌 ‘한’을 근 30년 만에 풀 수 있을지 기대된다.

그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연하고, 방송도 한다. 그는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박현채 선생에게 받은 영향”이라며 “박현채 선생은 ‘민중이 원하는 것은 무조건 써야 한다. 모르면 공부해서라도 써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제야 인간 정태인에 대한 그림이 대충 그려지는 느낌이다. 그는 민중이 원하면 무엇이든지 (해야) 하는, 정치적 타협보다 소신을 중요시하는, 막힌 조직에 속하지 않은 자유로운 빨치산이었다.

글 원희복 선임기자 wonhb@kyunghyang.com·사진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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