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논문

하느님의 역사경륜 (문동환 목사님의 강연 원고)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9-09-29 23:41
조회
3963
이 논문은 2009년 9월 7일 (월요일) 오후 2시에 개최된 본원 <창립 30주년기념식>에서 행한 한신대학교 명예교수인 문동환 박사의 특별 강연 원고입니다-운영자

하느님의 역사경륜


시작하는 말



한국에서 떠난지 여러 해가 되는 제가 “한국교회에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말한다는 것은 주제넘는 일입니다. 제가 그 동안 교회가 해야 할 사명에 대하여 생각했던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결국 한국교회에 말하는 것으로 끝나리라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을 우리는 역사의 주이시라고 고백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면 날로 더 하느님의 뜻에 역행을 하고 있다. 세상 방방곡곡에 빈부격차는 날로 심화되고 자기 땅에서 밀려난 사람이 UN의 발표에 의하면 2008년에만 헤도 국내 떠돌이 까지 합하여 8 천만이나 된다고 한다. 그 중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겪는 고초란 이루 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극을 초래하는 주범은 화려한 산업 문화를 구가하는 신자본주의다.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한 것인가. 우리 한국에서 창출이 된 민중 신학자들은 하느님은 민중들을 통해서 새 내일을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요즈음 민중이라는 말 보다 떠돌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했다. 성서를 읽어보면 역사 재창출을 위하여 하느님이 선택한 무리들이란 출애굽기를 보나 갈릴래아 공동체를 보나 앞날이 꽉 막힌 떠돌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가 온 인류적인 과제가 되었기에 민중이라는 말 보다 떠돌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육을 전공한 나로서는 그 동안 한 가지 질문을 덙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견 보기에 존명에 허덕이는 떠돌이들이 어떻게 역사의 주체가 되는가 고 말이다. 교육을 전공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그 과정들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 간곳마아 떠돌이들이 양산되고 있는데 왜 민중신학을 하던 자들이 실의에 빠져 있는가? 나는 과거 약 30 년간 성서를 읽으면서 이 물음을 되풀이 했다.

이런 물음에 대하여 성서는 한 새로운 면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그것은 “고난”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다. 히브리인들이 고난을 겪는 과정에 의식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를 한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곤 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창세기 2 장에 있는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하는 설화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창세기 2 장에 있는 창조 서화에 보면 야훼 하느님은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만드시고 거기에 그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산 사람이 되게 하셨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육체다. 흙으로 된 육체는 존명을 위하여 자기중심적이 된다. 각자위심(各自爲心)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아담과 해와는 하느님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더 지혜 있게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는 우를 범했다. 이렇게 各自爲心이 앞서면 경쟁이 일어난다. 그래서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다. 그리고 인간 사회는 혼란에 빠져서 노아 홍수의 비극을 초래한다. 그 후 오만 불손해진 인간은 바벨탑을 쌓고 하느님에게 항거한다. 결국 힘의 각축전이 발생하여 인류는 갈가리 찢어져서 참극을 빚어낸다. 이런 힘의 각축전에서 희생을 당하는 자들이란 밑바닥 약자들이다. 그들은 살던 땅에서 밀려나 떠돌이가 된다.

그리자 하느님은 이 떠돌이들을 그의 동역자로 부르신다. 아브라함 이 그 상징적인 대표자이다.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쫓겨난 외로운 떠돌이였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에게 나타나시어 세 가지 약속을 하신다.



1) 너에게 비옥한 땅을 주마. 2) 창성하는 후손을 주마. 3) 네 후손을 통해서 민족이 서로 축복을 하면서 살게 하마.



사람은 땅이 있어야 살 수 있다. 동시에 서로 위하고 아끼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민족들이 서루 축복을 하게 되어야 땅도 공동체도 유지될 수 있다. 이 세 가지야 말로 떠돌이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역사 안에 이룩하시려는 경륜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떠돌이 아브라함과 계약관계를 맺는다. 물론 아브라함이란 떠돌이의 상징적인 대표에 불과하다. 모든 떠돌이들이 이것을 원한다. 그 떠돌이들을 하느님은 부르시는 것이다. 하느님과 떠돌이들이 어떻게 역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것을 우리는 출애굽 설화에서 발견한다. 그 설화를 자세히 보자.



1. 출애굽 공동체의 진리


‘하비루’라고 불리는 수많은 떠돌이들이 존명을 위하여 애급 나일 강변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스스로 현현한 신이라고 하는 바로 왕의 노예가 된다. 그들의 삶이란 비참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인간성이란 완전히 짓밟힌다. 일 거수 일 투족이 다 바로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기에 그들의 주체성이란 완전이 말살이 된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의 열매는 다 수탈이 된다. 그들의 앞날은 꽉 막혀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들은 행여나 하는 심정으로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모세라는 선각자가 태어난다. J 기자는 그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기럭하다. 모세는 떠돌이의 후예로 나일 강에 버려졌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의 궁중에서 여유 있게 사는 특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어머니의 젖을 빨면서 떠돌이의 얼을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모세는 그런 전통을 이어 받았음에 틀림없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추리이다.

그가 나이 들면서 고생하는 떠돌이들을 생각하면서 아파하기 시작한다.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나는 가고 묻는다. 이 악의 뿌리는 무엇인지, 이 떠돌이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을 것인 가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다가 그는 마침내 깨달았다. 탐욕과 권세욕에 사로잡힌 바로 밑에서는 아무런 소망도 없다고. 바로의 권세와 영광이 다 이 노예들의 피땀에서 오는 것이기에 그들을 놓아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은(覺)그는 마침내 행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애급 병정을 쳐 죽인다. 그리고 그의 동족들을 깨우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크게 실망을 한다. 그의 동족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존명을 위하여 허덕이는 그들은 오히려 그를 위험시 한다. 그 무리들은 아직 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피신을 한다. 혼자의 각과 단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디안 광야에 나간 모세는 장인의 양을 치면서 40 년이란 기나 긴 세월을 쓰라린 심정으로 지낸다. 애급에서 고생을 하는 하비루들을 생각하는 그의 심정이란 찢어지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면서 애급에서 자행이 되는 악의 본질을 생각해 본다. 동시에 그들의 살 길이 무엇일 지를 묻는다. 이렇게 아픈 심정으로 새 내일을 갈구하는 모세의 영이 아파하시는 야훼 하느님의 영을 만난다. 그것이 바로 시내 산 떨기나무 불꽃에서 야훼 하느님을 해후하는 사건이다.

그 불꽃에서 야훼 하느님은 애급에서 아우성을 치는 떠돌이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로 이끄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모세를 애급으로 파견한다. 모세는 주저한다. 애급의 떠돌이들이 그를 배척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는 야훼의 약속을 믿고 애급에 가서 떠돌이들을 만났더니 놀랍게도 그들은 모세의 전하는 말을 전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이 아닌가. 40 년이라는 오랜 동안 고생을 하면서 그들도 각을 한 것이다. 바로의 악을 몸으로 절실히 경험을 하고 그들의 앞날에는 아무런 소망도 없다는 것을 명확히 본 것이다. 그래서 아우성을 친 것이다. 야훼가 모세를 불러서 애급으로 보낸 것은 애급의 떠돌이들이 집단적인 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요한 진리를 보여준다. 하느님도 고생하는 떠돌이들을 구출하고 싶으셨으나 그들이 집단적인 각을 하기 까지는 어떻게 하실 수가 없으신 것이다. 야훼 하느님은 그들에게 부어 넣으신 영이 마침내 집단적으로 각을 할 것을 아시고 그 때를 기다리신 것이다. 이렇게 각을 한 그들에게 야훼 하느님이 그들을 구출하시겠다는 복된 소식이 전해지자 떠돌이들은 환성을 올리면서 이에 응한 것이다. 집단적인 단을 한 것이다. 이렇게 고난을 통하여 하느님이 넣어 주신 영들이 집단적인 각과 집단적인 단을 함으로 출애굽의 기적이 일어났다.

이렇게 출애굽을 한 떠돌이들은 시내산 앞에서 야훼와 계약관계를 맞는다. 애급에서 뼈저리게 겪은 악들이란 그들의 공동체에서 결단코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십계명 내용이다. 이 정리된 십계명이란 후대에 와서 정리되었으나 그 핵은 이미 확립이 되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앞으로 그들을 건져내신 야훼 밖에 다른 신을 절대로 섬기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동시에 수호신을 가지고 횡포를 부리는 왕들도 가지지 않기로 서약을 했다. 애급에 그렇게도 많았던 우상들도 지키지 않을 것, 살인, 간음, 도적질 등을 하지 않을 것 등등을 서약했다. 그리고 과부, 고아, 떠돌이들이 안심하고 사는 정의와 평화의 공동체를 이룩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탈출 공동체다, 변해질 수 없는 악의 공동체에서 탈출을 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정의와 평화가 강처럼 흐르는 탈출 공동체를 이룩한 것이다.

이 탈출 공동체는 출애굽을 한 떠돌이들이란 여러 종족들의 혼합체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하면서 그곳에 있는 여러 떠돌이 종족들과 더불어 평화로운 공동체를 이룩했다. 이렇게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세 가지가 일단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역동적인 사건이 서서의 심층심리학자 칼 융이 말한 민족적인 아키타입(archetype)이 되어 하비루들의 심층심리에 전해져 내려갔다. 여기에서 이 이야기에서 존명에 허덕이던 떠돌이들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본다.

물론 이 모세의 이야기는 그대로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나 모세를 중심으로 한 놀라운 사건들을 J 기자가 신학적으로 풀이한 신앙고백이다.




2. 오도된 다윗 전통



이 탈출 공동체가 정착한 곳은 아무도 없는 허허 벌판이 아니었다. 그 곳은 탐욕과 힘의 철학에 사로잡희 왕들이 서로 싸우고 투쟁을 하는 피비린내 나는 고장이었다. 그리고 그 곳을 지배하는 문화란 비를 오게 한다는 바알 신을 섬기는 문화였다. 이 종족들은 모세가 이룩한 탈출 공동체를 그대로 둘 까닭이 없다. 그들은 무력을 동원하여 이 탈출 공동체를 침범해 왔다. 이렇게 되자 저들은 농민군을 형성하여 이에 항거를 했으나 왕 밑에서 훈련을 받은 불레셋의 정비군이 철기를 가지고 침략을 해 오자 동기만을 가진 농민군이 이것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사무엘 사사에게 왕을 달라고 호소를 했다. 사무엘은 이것은 계약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거부하려고 했으나 궁지에 빠진 무리들의 호소를 막을 수가 없어서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삼게 된다. 그러나 사울은 방어를 위한 전투사령관일 뿐 백성들의 삶을 지도하는 것은 사사인 사무엘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사울 왕은 그의 소관 사항을 벗어나는 행위를 했다고 해서 하느님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 ! 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은 전사를 한다. 그리고 농경문화에 진입한 무리들은 날로 더 바알 문화에 흡수되게 되었다.

그리자 나타난 것은 다윗이다. 다윗은 6 백 명의 유능하고도 충성스런 부하를 거느린 농민혁명군의 부대장으로 예루살렘을 공략하고 왕위에 오른다. 그는 전투에 능할 뿐만 아니라 특출한 지도력을 가져서 사울의 지도하에 있던 출애굽 전통을 가진 북방의 열 지파도 그를 왕으로 모시도록 유도하여 그는 문자 그대로 통일 왕국을 이룩했다. 이렇게 왕국을 이룬 그는 무력을 동원하여 주변 종족들을 정복을 하여 국위를 드높히였다. 그리고 북쪽 출애굽 공동체가 모셨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여 그의 수호신을 만든다. 이렇게 되자 그를 섬기는 나단이라고 하는 예언자가 그를 높이 칭송을 하면서 그의 아들이 대대로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따르는 왕들이 하느님이 법도를 어기더라고 그 때문에 왕위에서 추방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야훼의 이름을 빌려서 선언을 했다. 이렇게 다윗 왕의 후손이 대대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출애굽 공동체가 시내 산에서 맺은 계약과는 완전히 위배된다. 시내 산 계약에 의하면 출애굽 공동체는 왕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사울의 경우는 왕이라고는 했어도 실제로는 방위군의 총사령관일 뿐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모든 권한을 한 손이 잡은 왕이다. .그리고 야훼를 다윗 왕조의 수호신으로 만들었다. 주변의 왕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정의의 하느님은 힘을 오용하는 왕들을 심판하시는 분이다. 그를 성전에 가두어 놓고 그에게 제사를 드림으로 저들을 보호하다는 수호신이 되게 한다는 것이야 말로 그의 이름에 욕을 돌리는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주변의 왕들처럼 그의 권력을 오용하여 그의 충성스런 부하의 아내 벳세바를 가로채고 그 부하를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했다. “간음, 살인, 도적질 까지를 서슴치 않고 감행을 한 것이다. 벳세바에게서 난 아기가 죽음으로 벌을 받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권세욕에 사로잡혀서 서로를 살해했다. 벳세바에게서 난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형제들을 다 살해한다. 그리고 솔로몬 왕의 행태는 다윗 왕에게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하느님의 분노를 사는 것들이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화려한 궁궐을 새울 분만 아니라 곳곳에 도시들을 세움으로 수많은 노예들과 북쪽의 열 지파들까지 혹사한다. 주변의 공주 700 명과 그밖에 미인들 300 명을 후궁으로 삼아 향락을 일삼는다. 뿐만 아니라 공주들이 가지고 온 다른 신상들을 세우고 이를 섬기기도 한다. 애급의 바로 왕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마치 바벨탑을 세웠던 무리들처럼 오만 불손하게 되어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그의 대관식에 북방의 열 지파 대표들이 와서 진정서를 냈다. 그의 아버지 솔로몬이 그들을 혹사했는데 새로 등극하는 왕은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해달라고 말이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이란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줬다면 나는 그보다 더 무거운 집을 지울 것이다. 내 아버지가 너희들을 가죽 채찍으로 다스렸다면 나는 너희들을 쇠 채찍으로 다스릴 것이다.” 라는 것이었다. 결국 북쪽 열 지파는 다윗 왕국에서 탈출을 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그 뒤를 따르는 다윗 왕조의 후예들은 계속 권력을 남용하여 그들의 탐욕을 채워 백성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리고 백성들도 잘 살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비를 오게 한다는 농경신인 바알을 섬겨서 하느님의 분노를 샀다.

그리자 이사야나 미가 같은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준엄한 야훼 하느님의 심판을 선고한다. 성전 문설주가 흔들리는 장엄한 성전에서 하느님은 이사야를 부르셨다. “누구를 보낼까?” 하는 분노한 하느님의 물음에 이사야는 “나를 보내 주십시오!” 하고 응답을 한다. 그에게 야훼 하느님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준엄한 하느님의 삼판을 선언한다. “언제까지이니까?” 하는 질문에 하느님은 도시는 다 망하고 백성들은 다 쫓겨 날텐데 ”주민의 십분의 일이 남아 있다 하더라고 그들마저 상수리나무, 참 나무가 찍히듯이 쓰러지리라“ 라고 하신다. 철저히 망할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농촌에서 예언을 한 미가의 목소리는 더욱 준엄하다. 미가서 1장 1-2 절의 말은 한국교회에 잘 알려져 있다.



“망할 것들! 자리에 들면 못된 일만 꾸몄다가

아침 밝기가 무섭게 해 치우고만은 악당들아.

탐나는 밭이 있으면 빼앗고, 탐나는 집이 있으면 제 것으로 만들어

그 집과 더불어 임자도 종으로 삼고, 밭과 함께 밭주인도 부려먹는구나.“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하는 일에 대하여는 좀 더 적나라하게 꾸중을 한다.


이스라엘 가문의 지도자들아 들어라.

무엇이 바른 일인 지 알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선을 미워하고 악을 따르는 구나!

내 겨레의 가죽을 벗기고 뼈에서 살을 발라내며 내 겨레의 살을 뜯는구나

가죽을 벗기고 뼈를 부수며 고기를 끌이어 냄비에 끓이고

살점은 가마 속에 삶아서 먹는구나. (미가 3:1-3)



이스라엘의 사제와 예언자들을 행해서도 꼭 같이 그들의 죄악상을 폭로한다. 그리면서 야훼의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는 무리들을 향하여 이사야는 서슬이 퍼런 하느님의 분노를 터뜨린다. 수양의 번제물에는 물렸다고, 살진 짐승의 기름에는 지쳤다고. . . 이젠 내 성전 들을 짓밟지 말라고. 아무리 빌고 빌어도 듣지 아니 할 것이라고 선언을 하신다는 것이다. 야훼가 그렇게 분노하시는 까닭이란 그들의 가치관이 완전히 뒤바뀌어 도저히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아 너희는 비참하게 되리라.

나뿐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뿌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아

. 너희는 비참하게 되리라.“

지혜 있다고 자처하는 자들아.

유식한 자로 자처하는 자들아.

너희는 비참하게 되리라.“ (사 5:20-21)



이렇게 가치가 완전히 전도된 자들이란 사물을 바르게 판단할 수 없어서 곁길로 나가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지혜 있다고 자처 하는 자, 유식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은 더욱 그렇다. 예언자들은 이런 뒤 밖인 가치관을 가진 저들의 패망을 명확히 본 것이다.

그리 지혜 있다는 자들, 유식하다는 자들은 각 가지 꾸민 말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그러기에 그들은 비참하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악행을 하면서도 저들은 다윗의 후예에서 정의로운 통치자가 나와서 다시 다윗 왕 시대와 같은 평화의 동산을 만들 것이라고 주장을 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를 뒤따르는 예언자들은 이새의 뿌리에서 새 싹이 나고 그에게 제혜와 슬기를 주는 영이 내려서 늑대와 새끼 염소가 어울리고 . .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겁 없이 손을 넣을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을 한다. (사 11:1-9) 그리고 야웨의 전이 있는 산이 모든 묏 뿌리 위에 우뚝 서고 만민이 그 밑에 모여들어 야웨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을 했다.(사 2:1-4) 이스라엘을 절정으로 온 만민이 그 밑에 모일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수호신인 야훼가 이스라엘을 높이 들어 만방을 다스리는 나라가 되게 할 것이라는 다윗 왕조의 그릇된 신앙의 의 표현이다. 이것이 어처구니없는 신앙이라는 것을 우리는 시편 2 편에 있는 이스라엘 왕의 대관식에 부른 축시에서 명확히 본다.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다.

나에게 청하여라. 만방을 너에게 유산을 주리라.

땅 끝에서 땅 끝까지 너의 것이 되리라.

, , , ,

저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부수어라.

철퇴로 짓부수어라.“ (시 2:1-12 요약)


이런 어처구니없는 신앙을 가진 왕들은 가지각색의 악행을 자행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이방 나라들과 각축전을 버렸다. 그럴 때 마다 저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제물을 바치면서 야훼가 그들을 살려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이스라엘 왕 중에도 야훼의뜻을 따르려는 히스기아와 요시아와 같은 올바른 왕들이 있었다고 성서는 증언을 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잡신들과 그들이 세운 신전 등을 일소하고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제도를 재건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미 망한 북방국의 주민들 까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도록 하여 다윗이 이룩했던 통일 왕국을 재건하려고 했다. 그러나 힘의 철학에 사로잡흰 다윗 전통을 정당화 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 결국 유대왕국은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패망을 하여 처참한 부로 생활을 하게 된다.



바벨론에서 20 년간 쓰라린 부로 생활을 하던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인권을

존중하는 구레스 왕이 나타나 주변 왕들을 제압하고 제국을 형성하면서 그의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피정복자들의 신을 섬기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제 2 이사야라고 불리는 시인은 구레스를 야훼의 기름을 받은 메시아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는 야훼가 그들을 위하여 행동을 개시하신다는 경려의 시를 써서 유포시켰다.



“위로하여라. 내 백성을 위로하여라.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 . 복역의 기간이 끝났다고 일러라.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일러라.

. . .

. . . .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

주 야훼께서 능력을 떨치시면서 오신다.



이 소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가 바벨론을 정복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게하고 야훼 하느님을 섬길 수가 있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모름지기 뜻있는 젊은이들은 비밀리에 그를 찾아가 그에게 협력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이 구레스 왕이 바벨론을 점령하자 예수아와 다윗의 후손 즈룹바벨을 시켜서 예루살렘 수축을 하게 했다. 그들은 5 만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동하고 유대 땅으로 돌아와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게 했다. 그리고 학개와 스가랴를 는 야훼의 말이라고 하면서 즈룹바벨이야 말로 다윗 왕국을 재건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다.(학 2:21-23, 스 6:9-14) 그러나 그들의 꿈은 무산도고 말았다. 즈룹바벨이 자취를 감추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곳으로 이주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지방의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고 살아 백성의 지도자 에즈라와 느혜미아는 크게 분노하여 이방 여인들과 그들에게서 난 자녀들을 다 추방하게 하는 비극을 창출했다. 이렇게 율법을 정리하여 율법주의적인 유대교를 조성함으로 다시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대망하려한 것이다.

그러나 그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 마카비 형제가 창출한 하스몬 왕가는 다윗의 영토를 재건함으로 메시아 왕국을 이룩하려고 했으나 그들도 힘의 철학과 헬라 문화에 사로 잡혀서 겯 길로 나가더니 형제들 사이에 힘의 분쟁이 일어나 참극을 버렸고, 결국 로마의 세력을 유도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 제국의 굴레를 뒤집어쓰게 됐다.


3. 출애굽 전통을 되살린 북 방 국 이스라엘



그러나 출애굽의 전통(아키타입)은 북방국 이스라엘에서 다시 살아났다. 솔로몬의 학정을 보면서 북방의 열 지파는 이를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르호보암 즉위식에 그들의 진정서가 거부되자 그들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왕 제도란 본래부터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거기에 다윗 전통과 같은 강력한 기초를 가지지 않은 북왕국은 더욱 그랬다. 따라서 계속되는 반란과 혁명으로 왕실은 빈약하기 그지없었고 또 북방의 아시리아 제국의 침략으로 나라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이끈 것은 출애굽의 전통(아키타입)을 되살린 예언자들이었다. 이 운동의 선구자는 엘리아다. 엘리아는 당시 가나안 땅을 뒤덮은 바알신과 대결을 했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바알 문화를 이스라엘 나라에 확산을 시키면서 야훼 하느님 예언자들을 학살했었다. 이렇게 되면서 엘리야는 바알 문화와 대결을 한 것이다. 이 대결은 마침내 갈멜 산상에서 이룩되었다. 비를 오게 하는 것이 바알이냐 야훼냐 하는 대결이다. 이 대결에서 엘리아가 대승을 하여 민중들은 바알의 사제 450 명을 처형했다. 말하자면 엘리아의 대승이었다. 그러나 엘리아는 그를 죽이려는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 산으로 도피했다. 대결에 승리를 했으나 그 일대를 지배하는 바알 문화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엘리아가 호렙 산에 와서 야훼의 바위 앞에 서자 큰 바람이 불어 바위를 산산 조각이 나게 했다. 그러나 야훼는 거기에 계시지 않았다. 그리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야훼는 거기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훨훨 타 올랐다. 그러나 거기에도 야훼는 계시지 않았다. 그 뒤 적막이 온 산을 뒤덮고 그 속에서 야훼의 음성이 들렸다. 이제부터 야훼 하느님은 바람이 불고 지진이 나고 불이 훨훨 타 오르는 것과 같은 놀라운 사건에서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조용한 침묵 속에 나타나실 것이라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나타나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를 중시하고 그 속에서 일하시는 야훼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이다

그린 뒤 야훼 하느님은 엘리아에게 다마스커스에 가서 하자엘에게 기름을 부어 시리아의 왕으로 세우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후계자로 새우라고 명하신다. 야훼 하느님은 온 인류의 하느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인류의 역사 심층에서 일하시는 야훼의 음성을 들으라는 것이다. 예언자들이 임무는 그 야훼의 음성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모스



아모스는 남쪽 드고아에서 양을 치고 무화과를 기르는 농부다. 그가 북방국 벧엘에 와서 야훼의 말씀을 전했다. 그는 주변에 있는 여러 나라들의 악한 행위들을 예거하면서 하느님의 심판을 선언 했다. 그의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국한 되지 않았다. 이것은 하느님은 온 인류의 삶에 관심을 가졌다는 엘리아의 생각과 일치한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인 행위보다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진다. 이 역시 출애굽 전통과 일치한다. 그리면서 그는 삶이 동반하지 않는 종교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격분을 전한다. 동시에 그가 전하는 야훼의 심판이란 결정적인 것으로 새로운 날에 대하여는 무언이었다. 이와 같은 강력한 아모스의 예언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여러 학자들은 말한다.

아모스는 동시에 하느님이 출애굽 당시 어떻게 히브리인들을 소중히 여기셨느냐를 강조하여 이스라엘을 향한 하느님의 간절한 애정을 표시한다. 그리고 그가 비록 남쪽에 살면서 예루살렘에 가서 예언을 하지 않고 북쪽 이스라엘에 와서 예언을 했다는 것을 보아 그가 비록 남쪽에 사나 출애굽 전통을 이어 받은 자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호세아



호세아는 이스라엘 왕국이 망하게 되는 혼란시기에 애탄 야훼의 말씀을 외친 예언자다. 그는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그와 그를 배신하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이해하였다. 그는 야훼의 명에 따라 부정한 고멜과 결혼을 한다. 고멜은 아이 셋을 낳고 그를 배신하여 창녀가 된다. 이것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와도 같다. 하느님의 그렇게 아끼고 돌보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을 섬기고 그의 뜻을 버성겨서 악행을 밥 먹듯이 했기 때문이다. 배신한 아내를 향한 그의 심정과 야훼 하느님의 심정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리면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윤리적인 악행과 종교적인 배신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선고한다. 그리고 그들의 가증한 종교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분노를 선포한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이와 같은 심판의 말로 끝나지 않는다. 이스라엘을 향한 아훼의 간절한 사랑을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들이 고난을 통하여 깨끗해지면 그는 다시 그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사랑의 관계로 이룩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면서 야훼 하느님은 호세아더러 고멜을 다시 구출하여 더불어 살라고 명하신다. 그래서 호세아는 은 열 다섯 세겔과 보리 한 호멜 반을 가지고 가서 고멜을 구출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 아내니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지 말고 들어 앉아 있으시오. 그렇게 오래 지난 뒤 당신과 한 자리에 들리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고난을 겪어서 깨끗해 진 뒤 야훼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출애굽의 아키타입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애급의 떠돌이들이 오랜 고난을 통하여 그들이 의존하려고 했던 애급의 악을 깨닫고 야훼 하느님에게로 돌아온 것과 같은 과정을 의미 한다.



예레미아.



예레미아는 남방국에서 예언을 했으나 북쪽 벤야민 지파 출신으로 솔로몬이 추방을 한 대사제 힐키야의 후손이다. 그는 남방에 살면서 요시아 왕이 종교개혁을 하는 것을 주시하다가 그것이 무의미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본격적으로 예언을 하게 된다. 많은 구약학자들은 예레미아와 호세아는 서로 기가 통한다고 말한다. 그는 호세아처럼 배신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애타는 심정으로 예언을 했다. 그는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 있은 끊을 수 없는 애정관계를 이런 말로 시작한다.



씨 뿌리지 못하는 사막에서 나를 따르던 시절,

젊은 날의 네 순정, 약혼시절의 네 사랑을 잊을 수가 없구나.

이스라엘은 깨끗이 나에게 몸 바쳤었지.

소출 가운데서도 맛 물이었지. (2:1-3)



그랬는데 그들은 굴레 벗은 말처럼 야훼를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면서 발광을 했다는 것이다. 새 잡는 그물을 쳐놓고 남을 속여서 약탈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과부, 고아, 떠돌이들의 인권을 짓밟고 빈민들의 송사를 공정하게 판결을 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5:26-8) 사제들, 예언자들, 나라의 지도자들이 꼭 같이 횡포만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특히 그를 분노케 한 것은 이렇게 불의만을 자행하면서 야훼의 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는 이제 하느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전 문을 가로 막고 회쳤다.


“이것이 야훼의 전이다. 야훼의 전이다. 야훼의 전이다 한다마는 그런 말은 믿지 말고 너희들의 생활 태도를 고쳐라. 너희들 가운데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여라. 과부, 고아, 떠돌이들을 억누르지 말라. 너희는 훔치고, 죽이고 간음을 하면서 나의 이름으로 불리 는 집에 와서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고는 다시 각 가지 역겨운 일들을 하니 나의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도적의 소굴로 보이느냐!” 하고 질책을 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에 역행만 하는 저들의 앞날에 아무 소망이 없는 것을 보는 예레미아는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그들이 다시 떠돌이의 삶을 살게 될 것을 예언을 한다. 그래서 그는 오지그릇을 깨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의 길을 갈 것을 예언하기도 하고(19장 요약) 멍에를 만들에 목에 걸고 앞으로 바벨론에 잡혀가서 무거운 멍에를 멜 것을 선포하기도 했다. 그리고 바벨론의 느부가네살 왕이 침공해 오자 항거하지 말고 바벨론에 잡혀가라고, 그것이 야훼의 뜻이라고 외쳤다. (27장 요약) 그리고 고국에 돌아올 것을 바라는 먼저 바벨론에 잡혀간 자들을 향해서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고 그곳에 오래 있을 생각을 하라고 편지를 쓴다.(29:1-15) 예루살렘을 향한 그의 부 분노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다윗 왕조의 망할 것을 역설하는 그는 백성들의 미움을 받아 죽음의 고비를 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이와 같은 선포로 끝나지 않는다. 선하신 하느님은 그들 앞에 새 내일을 전개시키실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러나 그 예언은 다윗 전통을 이어 받은 예언자들처럼 다윗의 후예가 이룩할 메시아 왕국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이 떠돌이로 오래 고생을 한 뒤 야훼 하느님은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아 그들의 마음에 야훼 하느님의 새로운 계약을 사겨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고난을 통해서 마음으로 야훼의 뜻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그리면 누가 그들에게 야훼의 뜻을 깨우쳐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경험으로 하느님의 뜻을 환해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면 그들은 야훼의 백성이 되고 야훼는 그들의 하느님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난을 통한 마음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애급의 하비루들이 고난을 통하여 마음의 변화가 오고 야훼의 듯을 깨닫게 된 과정과 일치한다. (렘 31:31-34)



에스겔 (597-470)



에스겔은 주전 597년 이스라엘의 지도급 인물들이 바렐론으로 잡혀갈 때 같이 잡혀간 사제의 한 사람이다. 그는 본래 출애굽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예레미아의 영향을 받은 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의 뜯을 버성겨서 악의 길로 치닫는 것을 몹시 아파했다. 따라서 바벨론에 잡혀 간 뒤 그들의 그릇된 삶을 추궁하면서 하느님의 심판을 성실하게 받으라고 예언을 했다. 그는 특히 성전을 욕되게 한 것을 감슴 아파하다가 하로는 비몽사몽간에 예루살렘 성전으로 옮겨 가 성전 안에서 자행되는 각 가지 추태를 보면서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야훼의 영이 선전에서 떠나시는 것을 목도했다. 그 후 그는 예루살렘 성전까지 무너질 것을 예언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릴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이렇게 되자 그를 향한 백성들의 불만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자 그를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세가 달라지고 그의 메시지도 소망의 메시지로 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세계 망방에 흩어져서 고생을 할 텐데 때가 이르면 야훼 하느님은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아 그들에게 성령의 단비를 내리시고 그들 마음에서 자기만 생각하는 돌 같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하느님의 뜻을 환히 알고 그 뜻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면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이 된 다는 것이다. 그 말의 핵 역시 예레미아의 경우와 같이 출애굽 전통과 일치한다. 고난을 통하여 마음의 변화가 오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야훼의 종의 노래들. 사 42:1-9; 49:1-6; 50:4-9; 52:13-53:12



이 네 노래는 제 2 이사야의 글과 같이 편집이 되었으나 이와는 다른 전통이 부합된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 내용 역시 제 2 이사의 주제와는 다르다. 이 노래들은 다윗전통이 빚어 만든 선민사상을 깨뜨리고 야훼 하느님의 통치가 땅 끝까지 확산이 될 것을 노래한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 노래를 지은 시인은 구레스 왕과 연락을 하다가 감옥사리를 한 자로 쓰라린 감옥생활을 하면서 그의 생각이 좁디좁은 선민사상을 깨뜨리고 날개를 펴 땅 끝까지 훨훨 날았다고 본다.





첫째 노래 (42:1-9)

이 노래는 야훼가 믿어주는 종이 어떤 인물인지를 소개부터 한다. 그는 야훼의 영을 받아 뭇 민족에게 바른 삶의 길을 펴 줄 자라는 것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고함을 지르지 않는다.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아니하고 깜박이는 등불도 꺼버리지 않는 인정 어린 분이다. 만방을 무력으로 통치할 다윗과 그의 후예와는 완전히 다르다. 야훼는 그를 통해서 만방과 계약을 맺을 텐데 그는 정의를 이룩하여 소경이 보고 옥에 갇힌 자들을 풀어줄 것이라고 한다.



둘째 노래 (49:1-6)

이 노래는 바닷가에 사는 뭇 민족에게 살길을 전할 종이 어떻게 선택이 되고 훈련이 되었는 지를 설명한다. 야훼는 그를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부터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예레미아의 경우와 같다. 이것은 틀림없이 떠돌이들이 애급에서 고생할 때부터 선택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고생한 떠돌이들만이 야훼의뜻을 알아서 살 길을 만방에 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는 오랜 동안 불평만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고난을 통해서 자기를 훈련을 시켜 야훼의 길을 만방에 전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격해 한다.



셋째 노래 (50:4-9)

이 노래는 야훼가 아침 마다 그에게 올바른 말솜씨를 깨우쳐 주시어 고달픈 자들을 격려하게 하시기에 감격해 하는 노래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틀림없이 감옥에서 이 노래를 지었으리라. 감옥에서 한 많은 다른 죄수들의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잠자리에 든 뒤 새벽이 오면서 그 죄수들에게 용기를 줄 야훼의 뜻이 가슴에 떠오른다. 바벨론 감옥에는 틀림없이 다른 약소민족들의 양심수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침 해가 돋자 그들에게 약자들을 돌보시는 야훼의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그들에게 말 할 수 없는 소망을 준다. 이것을 경험하는 야훼의 종은 고생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따라서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내대며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턱을 내민다는 것이다. 야훼기 그와 같이 계시기에 재판받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넷째 노래 (52:13-53:12)

이 노래는 무한한 천대로 고난을 겪은 고난의 종이 그를 조롱하던 많은 무리들을 그의 편으로 인도했다고 하는 것을 그린 노래로서 원시교회는 이 시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메마른 땅에서 가가스로 돋아나는 햇순처럼 아무 보잘 것 없는 자, 갖가지 박해로 인간의 모습조차 볼 수 없는 비참한 그를 지나가던 무리들이 둘러서서 조롱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득 그들은 깨닫는다. 그가 천대받고 고생을 하는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들이 회개하고 고난의 종의 뒤를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성서에는 이밖에도 선민사상을 배격하고 야훼를 온 인류의 구주로 삼는 다는 두 편의 이야기가 있다. 에즈라와 느헤미아가 이방연인과 결혼한 자들에게 그들의 이방인 아내와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을 다 추방하는 비극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야훼의 뜻일 수가 없는 그릇된 처사라고 지적하기 위하여 쓴 이야기들이다. 그 첫째는 요나서요 그 둘째는 룻기다.



요나는 이방 도성 니느웨에 가서 야훼의 말을 전하라는 것에 반발을 하여 다시스로 가다가 큰 고기 배 속에서 회개를 하고 니느웨에 가서 야훼의 말씀을 전했다. 그리자 니느웨 사람들은 높은 사람에서 낮은 사람까지 모두 재를 쓰고 회개를 한다. 따라서 하느님은 그들에게 내리려든 재앙을 내리지 않는다. 그리자 요나는 화를 낸다. 야훼 하느님은 용서하시기를 좋아하시어 그들이 회개하면 용서하실 것을 알아서 다시스로 도망을 하려고 했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함으로 하느님이 벌을 내리시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나는 하느님에게 불평을 한다. 이렇게 될 바에는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는 것이다. 선민사상을 신봉하는 자들이 얼마나 비인간적이냐 하는 것을 명확히 그린 것이다.



룻기는 그 반대다. 유대인들이 개라고 하는 이방 여인이 얼마나 더 아름다운 인간이냐 하는 것을 그렸다. 이야기는 나오미라고 하는 여인에게서 시작한다. 그녀는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서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이방 땅 모압으로 가 거기에서 두 아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된다. 그리자 베들레헴에 다시 풍년이 들어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렇게 되자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그들의 고향에 가서 다시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라고 한다. 그러나 두 며느리는 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에 가겠다고 한다. 그러나 나오미는 다시 설득을 하여 맛며느리는 고향에 돌아간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를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느님이 내 하느님이 된 다고 하면서 어머니가 묻히는데 자기도 묻히겠다고 한다. 절대로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을 데리고 고향에 간다. 그 후 룻은 나오미의 친척과 결혼하고 다윗의 할머니가 되었다고 이! 야기를 맺는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느님이 내 하느님이 되면 되지 않습니까!” 라는 이 말은 당시 쫓겨나는 여인들이 남편을 향해서 한 말들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요 어머니의 하느님이 내 하느님이라고 하는 여인들이 그들을 쫓아낸 이스라엘 백성 보다 더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자들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고난과 천대를 받는 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더 안다는 것이 여기에서도 밝혀진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출애굽 전통에서 태어났다.





4. 떠돌이 예수와 탈출 공동체



갈릴래아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는 쓰라린 떠돌이 전통에 젖줄을 대고 자랐다. 수많은 갈릴래아의 농민들은 농토에서 밀려난 떠돌이가 되어 두루 방황을 했고 현재 소작농 혹은 날품팔이로 목숨을 이어가는 농민들도 언제 떠돌이가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동시에 그들을 수탈하는 악한 제도에 대한 그들의 원한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이런 한 맺힌 무리들과 더불어 사는 예수님은 나날이 떠돌이들을 양산하는 악한 제도를 주시하면서 앞으로 떠돌이들이 살 길이란 어떤 것일 가를 추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소 삶의 여유가 있은 그는 오랜 동안 떠돌이들이 고생하면서 살아온 역사를 되씹으면서 어떻게 하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새 내일을 이룩할 것인 지를 추구했다.

그리다가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 가에서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웠다!”라고 외치자 수많은 무리들이 이에 호응을 하는 것을 보고 모두가 악을 악으로 깨닫고 새 내일을 갈망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고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 그리자 하늘에서 하님의 응성이 들렸다는 것이다. 새 내일을 간절히 구하는 그의 영과 하느님의 영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자 그는 하느님의 영에 이끌려 광야에 간다. 그의 생각을 정리하려는 것이다. 그리자 마귀가 와서 그를 시험했다는 것이다. 이 시험의 내용을 Q 자료는 세 가지로 정리한다.

그 첫째는 ‘물질이 많아야 문제가 해결이 된다’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은 물질이 많음으로 문제가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문제의 해결이다 라고 응답을 한다. 아무리 물질이 많아도 강자들이 그것을 독점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그 물질을 사랑으로 서로 나누어야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물질에 대한 탐욕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사탄은 예수를 높은 산 위에 이끌고 올라가서 천하의 모든 영광을 보이면서 그에게 절을 하라고 한다. 그리면 그 영광을 다 준다는 것이다. 다윗처럼 그리고 모든 왕들처럼 힘의 철학을 신봉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주 야훼 하느님 외에 아무도 섬겨서는 아니된다 라고 이를 물리친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첫째가 되는 계명이다. 힘의 철학이 만악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다윗 왕조와 로마 제국이 그것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셋째로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리라라고 권한다. 하느님이 천사를 보내어 그의 발이 돌에 부듯치 지 않게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타락한 유대 종교를 이용하라는 것이다. 성전을 소중히 여겨 제사를 드리고 율법을 지키고 선민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하느님이 그를 도와 메시아로 삼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만든 종교로 하느님을 강요하려는 것이야 말로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컳으는 것이라고 이를 거절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 세 가지 시험이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음의 길로 오도한 악의 뿌리다. 모세는 악의 뿌리를 열 가지로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악의 정체를 명확히 보고 이를 거부했다. 이렇게 악을 명확히 보고 이를 거부하는 覺과 斷이란 새 내일 건설에 블가결한 요소다.

이렇게 악을 명확히 보고 거부한 예수는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화개하고 목전에 도달한 하느님 나라를 맞으라.”라고 선포한다. 그리고 그의 일생 동안 무리들에게 이 악을 명확히 보도록 깨우치고 이에 대치되는 생명을 살리는 길을 밝히시고 사셨다.

민중신학자들은 예수님을 민중이라고 밝혔다. 그는 민중과 하나가 된 삶을 사신 것에는 틀림이 없다. 아니 그는 떠돌이의 삶을 사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이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 8:20)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회개하라.하느님 나라가 가까웠다!”라고 외치면서 무리들을 깨우치시고 섬기신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다. 그는 모세처럼 어려서부터 악을 직시하면서 그 본질을 추궁하고 이에 대치되는 하느님 나라를 추구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의 동생 아고보도원시 교회의 수장의 하나로서 율법을 중시했다.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깨끗한 수공업을 하여 삶의 여유를 가졌었다. 마울을 봐도 천막을 만드는 수공업을 하지 않았는가. 목수의 가정에 태어난 예수님도 떠돌이들의 한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시면서 아파하는 마음으로 삶의 문제를 깊이 추구하신 것으로 봐야 한다.

이 회개하라는 도전에 기득권자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 부칠 곳이 없는 떠돌이들은 그 주변에 운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주변에 모여들었다고 해서 다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악을 명확히 보고 이에 단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단을 하기 위해서는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에 점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떠돌이가 되시어 그들과 같이 사시면서 악을 명확히 깨우치시고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셨다.

먼저 그가 가르치신 것을 보자.

첫째로 탐욕에 대한 가르침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마 19:24). ‘곡간을 크게 짓고 만족해하는 부자야 말로 미련한 자이다’. (눅 12:15-21)‘거룩한 척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은 사실 탐욕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이다’.(마 23:27-39) ‘대 사제들의 무리들이란 강도들의 무리들이다.’(막 11:12-25) 이것이 다 탐욕의 죄악상을 깨우치는 가르침이다.

둘째로 힘의 철학을 깨우치는 가르침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온다는 것은 거짓말이다.’(막 12:35-37)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지 말고 내려가서 형제의 발을 씻는 종이 되어라.’(눅 22:24-27) 제자들이 누라 하느님 나라에서 제일 큰가의 질문에 예수님은 어린이와 같아야 한다 라고 깨우치셨다.(마 18:1-5)

셋째로 유대종교의 그릇됨을 밝히는 가르침이다: (안식일 법) 그릇된 율법: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막: 12:1-8,9-14) ) 사람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 15:1-11) 선민사상에 대하여 백부장이 아브라함의 식탁에 앉으리라.(눅7:1-7) 땅 끝 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마 28:16-20)

그의 삶을 보자 .

(나눔) ‘그는 나누는 식탁을 소중히 여겼다.’(막 2:12-17, 눅 19:1-10) ‘나누고 용서하는 자리를 하느님 나라라고 했다.’(눅 17:20-25) 천명에게 5 병 2 어를 나누어 줌으로 나누는 한님 나라의 산 비유를 보이셨다.’(ar6:44-52)

(율법) ‘안식일 법과 성결 법을 무시했다.’ ‘죄인이라고 배척을 받는 자들, 그리고 이방인들과 가까이 사귀었다. 선교 초부터 이방인들이 그를 따랐다. (막3:7-12)’ (성전) 성전을 숙청하고 강도의 굴혈이라고 언명했다.‘

(힘의 철학)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부정했다.’ “자신이 다윗 전통의 메시아라는 것을 부인했다.‘ ’높은 자리를 추구하는 제자들에게 낮은 자리로 내려가라고 깨우치셨다.‘ ”그 자신이 떠돌이가 되어 낮은 자리로 내려가셨다.

그래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보시면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악의 세력에 도전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다. 서구 교회는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고 하나 이것은 유대교 제사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일 뿐 예수님의 희생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하느님이 그의 아들을 죽게 하시고 그의 피 공로로 우리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하느님은 회개하고 돌아서면 받아주신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탕자의 비유를 보라.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는 그대로 받아주셨다. 예수님도 회개만 하면 하느님 나라를 선물로 받는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은 성전에서 채찍을 드심으로 대사들로 하여금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함으로 그들의 극악함을 온 천하에 들어내게 하여 모든 사람으로 악을 악으로 명확히 보게 하려는 깨우침의 과정이었다. 따라서 그가 부활하신 뒤 하루에 3 천 명 씩 새 생명공동체의 식구가 된 것이다.

그리면서 그는 마음의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냐 하는 것을 강조했다. 아무리 율법을 강조해도 마음의 변화가 없이는 악을 각할 수도 없고 새 내이을 위하여 단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여인을 보고 음심을 품어도 간음 한 것이나 다름이 없고 형제를 미워해도 살인 한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마 5장 21절 이하) 마태복음서 5 장에 있는 마음이 가난한자, 애통하는 자, 의 사모하는 자, 온유한 자, 정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자비로운 자, 마음이 깨끗한 자,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셨다.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면서 원수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5:41-48) 성 어거스틴이 사랑하라. 그러면 무엇을 해도 좋다고 말한 것은 마음의 변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변화는 고난을 통해서이다. 고난을 통해 악의 정체를 알게 되고 내일을 갈구함으로 하느님의 영을 만나게 될 때에 가능하다.

이렇게 하여 이룩된 공동체란 탈출 공동체다. 다윗의 전통을 이어받은 타락한 유대교에서 탈출하고 힘의 철학의 화신인 로마 제국에서도 탈출을 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는 새로운 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떠돌이들 사이에서 이룩되어 지중해 연변에 있는 떠돌이들 사이에 확산이 되어 로마 제국에 도전을 했다.

이 탈출 공동체의 핵은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명확히 요약이 되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초월자이신 하느님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와도 같다는 것이다. 그는 나의 아버지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의 아버지도 아니다. 온 인류의 아버지다. 이것은 야훼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던 유대인들의 하느님이 아니다.

“이름에 영광이 돌아가게 하옵소서”

이때까지 하느님의 이름에 영광이 돌아가지 못했다. 우리들의 탐욕, 권력욕,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이름에 영광이 돌아가게 하려면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어야 한다. 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 위에서도 이룩되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이 보장되어야 한다.” 몸을 가진 우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 육신을 위한 물질이 보자 되어야 한다. 그런데 강자들의 탐욕으로 말미암아 수 없이 많은 자들이 떠돌이가 되어서 굶주린다. 모두 사랑의 심정으로 물질을 서로 나누어 아무도 일용할 양식 때문에 걱정하는 자가 없어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용서해야 한다.” 배부르게 먹는 것으로만 삶의 기쁨이 차 넘치는 것이 아니다. 서로 사랑하여 용서하는 공동체가 이룩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가 우리 사이에 이룩된다. 그것이야 말로 탐욕과 권세욕에 사로잡혀서 비참하게 된 죽음의 세계에서 탈출하는 것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우리 탈출 공동체는 탐욕과 권력욕으로 아수라장이 된 죽음의 문화 한 복판에 태어났다. 그 죽음의 문화는 그릇된 가치와 오도된 복음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다윗 왕이 그 유혹에 넘어갔고 세상의 모든 왕들도 그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유대교도 마찬가지다.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이 악한 문화에서 탈출을 하여 새로운 삶을 살 때 이 사탄의 세력은 우리를 향해서 공격해 오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악에서 건져달라고 기원을 해야 한다.



베드로의 대망하는 교회



이렇게 삶과 가르침으로 깨우쳐 주셨는데도 베드로를 위시한 여러 제자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다윗의 후예에서 오실 메시아로 생각을 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그들 사이에 나타나시지 않자 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재림하셔서 다윗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베드로를 위시하는 예루살렘의 신도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그의 재림을 기다리는 대망 공동체를 형성했다. 다윗 왕조의 문화에서 탈출을 하지못한 것이다. 그리다가 주후 70 년에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자 로마에 피신한 저들은 발울의 영향하에 다시 오실 메시아는 온 인류의 구주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것이 오늘날 까지 제도 교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이렇게 대망을 하는 공동체는 이 세상에 대하여는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 예수님의 재림과 더불어 망하게 될 장망성(長亡城 )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저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고 그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그가 오실 때 천년왕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었다. 다윗 왕조의 메시아 사상에서 탈출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 후 서구의 조직교회란 거이 다 예수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다윗 전통에서 탈춣을 하지 못한 대망하는 교회가 되었다. 하느님이 역사 안에서 하시려는 일을 무시하는 교회가 되었다.

2 차 대전이 끝난 뒤 서구의 식민지 국가들에서 해방을 받은 제 3 세계에서 이 오도된 신학에서 탈출하기 시작했다. 남미의 해방신학에서 북미의 흑인 신학, 여성 해방신학등. 그리고 한국에서는 민중신학이 태어났다.

그러나 이 신학들이 신학자들 사이에서 오갔으나 대부분의 교회를 탈출 공동체로 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가 만들어낸 대망공동체의 체질을 개선하지 못했다. 모이는 자들 거이 다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서 구원을 받는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망 공동체에서 탈출을 하여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서 서로 나누고 용서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에 발 벗고 나설 수가 없었다.

이런 대망 공동체는 오늘의 바알 종교와도 같은 산업문화 속에 휩싸여서 다시 곁길로 치닫고 있다. 산업문화란 많이 소유하면 행복해 진다는 그릇된 복음을 전한다. 이 문화는 탐욕을 조장할 수 밖에 없다. 이 탐욕은 경쟁을 조장하고 경쟁은 약육강식의 참극을 초래한다. 탐욕과 힘의 철학이 난무하면서 사회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런 혼탁한 물결이 교회에도 밀려들어와 기독교도 바알문화에 휩싸인 유대교처럼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와 같이 된 대망하는 교회에서 탈출을 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조직 교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대망 공동체에서 탈출을 해야 한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 지는 생명공동체 운동으로 나서야 한다.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운동으로 말이다.




5. 오늘의 교회에 고함



이 탈출 공동체는 언제나 악이 지배하는 문화속에 태어난다. 우리가 사는 산업문화 역시 오늘의 교회가 도전을 해야 할 그릇된 문화다. 오늘의 신자유주의가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산업문화란 많이 소유함으로 행복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모두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발광을 한다. 이것이 치열한 경재을 초래하고 약육강식이라는 만행을 행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공동체는 날로 파괴된다. 그뿐이 아니다. 이 신 자유주의는 환경을 파괴하고 인간 사회도 파국으로 몰고 간다.

그 신 자유주의 자체가 파국으로 치 닫는다. 오늘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신자유주의는 세계의 기둥 위에 조성이 되었다. 첫째로 대량 생산이다. 둘째는 저인금 노동이다. 셋째로는 왕성한 구매력이다. 그런데 저인금 노동으로 빈부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다. 따라서 다대수의 시민들의 구매력이 날로 감소된다. 구매력이 간소해 지면 기업이 파산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일자리는 날로 줄어들어 기업들의 도산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정부가 재정을 풀어서 기업의 도산을 막으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이다. 그리고 그 혜택은 가진자들에게 가고 국민들은 여전히 빈곤에서 허덕인다. 국민들의 구매력이 없기에 결국은 다 몰락을 하게 된다. 문제는 많이 소유해아 한다는 그릇된 복음이다. 이것이 많이 생산을 하는 다국적 기업을 만들어 생태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류 사회도 파산 상태로 몰고간다. 이런 그릇된 문화에서 탈출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산업문화의 악을 명확히 보고 몸서리를 쳐야 한다. 그리고 새 생명 문활를 갈구해야! 한다.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모두가 이런 각과 단을 하게 되면 역사는한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할 것이다. 특히 온 세계에 있는 떠돌이들이 각을 할 때 새 내일이 통튼다. 그리고 역사는 날로 그리로 향해 줄달음을 치고 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어떤가?. 이런 죽음의 문화의 악을 제대로 깨닫는가? 그리고 이에 대치되는 생명문화를 추구하고 있는가? 불행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문화에 침투해 있은 것처럼 우리 교회도 이 산업문화에 심취해 있다. 교회는 多多益善의 그릇된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 모두 숫자 놀음에 제정신을 못 쓴다. 생명이 문제가 아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생각지 않는다. 모두 탐욕에 사로잡혀서 추태를 부리고 힘의 철학에 도취해 있다. 그래서 사회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우리리 교회도 탈출을 해야 한다. 교회라고 하는 사람이 만든 제도에서 탈출해야 한다. 왜 수 천 년 전 서구에서 만든 제도에 그대로 매어 있는가? 예수님이 제도 종교애서 탈출을 하여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한것처럼 우리도 제도 교회에서 탈출을 해야 한다.

우리들 사이에도 새 내일을 향해서 혼신의 노력을 하는 운동들이 적지 않게 있다. 실로 반가운 일이다. 나는 그런 공동체들이 연합하여 서로 꿈과 힘을 나누면서 하느님의 선교에 전력을 다하는 탈출 공동체를 이룩했으면 한다고 본다. 필요에 따라서 옛 공동체와 연계를 유지하야 한다면 해도 좋다. 그러나 탈출공동체를 지향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본다. 더불어 손을 잡고 이 산업문화와 이 산업문화 물든 오늘의 바알 종교의 비를 명확히 보면서 새로운 탈출하는 공동체를 이룩해야 한다고 본다. 이 공동체 역시 어떤 제도를 가져야 할이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제도는 제도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 하느님나라 운동을 위한 제도가 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새 내일을 향한 공동체는 다 탈출 공동체였다. 루터, 칼빈, 외슬레 등등이 이룩한 공동체도 다 탈출 공동체였다. 그러나 이 공동체들이 당시 만들었던 제도에 매여 있는 것이 문제다. 박정히와 대결을 했을 때 신교, 구교, 불교까지 하나가 되어서 투쟁을 했다. 일종의 탈출 공동체였다. 이제 우리는 신자유주의라고 표방을 산업문화에 도전을 해야 한다. 이것이 21 세기의 과제다. 그리고 내가 믿기에는 우리들 사이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ㅇ릐 영은 이것을 이룩하시고야 말 거이다. 우리 다 같이 하느님의 영과 같이 아파하면서 새 탈출공동체를 창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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