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일본과 재일 한국ㆍ조선인 ――― 화해와 공생은 가능한가-1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8-11-03 23:35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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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과 재일 한국ㆍ조선인 ――― 화해와 공생은 가능한가

사토 노부유키 (재일 한국인 문제연구소)


머리말

1980년 9월 10일, 재일 1세 한종석씨가 동경도 신쥬쿠구 구청에, 동년 11월 13일에는 최창화목사(재일대한기독교회)가 기타큐슈시 오구라 기타구 구청에 「외국인 등록법」(외등법)상의 지문날인을 거부하였다. 스스로의 양심에 입각한 이 불복종 투쟁은 재일 한국ㆍ조선인을 비롯한 재일 외국인의 새로운 인권획득투쟁으로 확산되어, 1985년에는 지문날인을 거부ㆍ보류하는 재일 외국인이 일만 명을 넘어섰다. 이 지문거부운동은 지문제도를 비롯한 외국인등록증(외등증)의 상시휴대ㆍ정기적인 교환ㆍ형사처벌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외등법을 근본적으로 재검토, 나아가 외국인 정책의 변경을 추구하는 문제로 전개되었다.
1980년대 최초의 지문거부로부터 19년이 지난 1999년 8월, 「지문제도 전폐」를 포함한 외등법「개정안」이 국회에서 성립되어 2000년 4월부터 실시되었다. 1980년에 시작되었던 지문거부ㆍ외등법개정운동이 이와 같이 장기간에 걸쳐 커다란 파장을 가지고 전개되어 온 것은 재일 한국ㆍ조선인의 운동사에 있어서도 일본사회에 있어서도 특필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외국인 지문제도」의 전폐로부터 7년이 지난 2007년 11월 20일부터 일본의 모든 국제공항ㆍ해항에서 일본에 입국하는 외국인의 생체정보(지문과 얼굴 사진)를 등록시키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즉, <테러리스트의 입국방지>라는 명목으로 <외국인 지문제도>가 부활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외등법의 도입ㆍ실시과정, 1980년대부터 90년대에 걸친 지문거부ㆍ외등법 개정운동을 개관하여 이 운동이 일본사회에 무엇을 제기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한다. 그리고 21세기인 현재, 자본의 글로벌화에 의해 일본에서도 「다국적ㆍ다민족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재일 한국ㆍ조선인의 존재와 그 경험의 의의를 「운동 현장」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제 1 장 「재일을 살다」투쟁 ――― 1980년대 지문거부운동

1. 전후 민주주의 하에서의 「외국인 관리」제도

(1) 외국인등록령
1947년 5월 2일, 즉 「전후 일본」의 신헌법이 시행되기 전 날, 천황 히로히토(쇼와 천황)의 최후의 「칙령」으로 외국인 등록령이 공포, 즉일 시행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전후 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일본에 거주(재일)하는 구 식민지 출신자(재일 조선인, 대만인)를 배제하고 관리하는 대상으로서 법제도를 구축하여 가는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시사하는 것이다.
이 외국인 등록령은 현재의 「출입국 관리 및 난민 인정법」(입관법)과 「외등법」의 양면성을 지니며, 등록제도에 대해서는, 1) 외국인은 30일 이내에 거주하는 시ㆍ정ㆍ촌에 등록한다, 2) 시ㆍ정ㆍ촌은 「외국인 등록부」(현재의 외국인등록 원표)에 등록하여 「등록증명서」를 교부한다, 3) 외국인은 등록증을 상시 휴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이상을 위반하였을 경우는 형벌(6개월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 등)을 과한다, 5) 금고 이상에 처해진 자에게는 강제퇴거를 명할 수 있다 ――― 등으로 되어있다. 게다가 제 11조에는 <대만인과 조선인은, 이 칙령의 적용에 관해서는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라고 정해져있다.

이 외국인 등록령의 전체를 살펴보면, 실로 기묘한 법령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외국인은 당분간 본국에 들어갈 수 없다」로 되어있다(제3조). 그러면 이 법령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이미 재류하고 있는 외국인」이 된다. 하지만 연합국 관계자는 이 법령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고(제2조), 전전부터 계속 거주하고 있는 재일조선인ㆍ대만인은 일본정부의 견해에 의하면 강화조약까지는 「일본국적을 가진다」고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제11조에서「간주 규정」을 만들어 재일조선인ㆍ대만인에게도 적용하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일본인이었던 대만인ㆍ조선인의 관리는 일시적인 완전 방임상태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식량배급, 기타 점령행정상에도 많은 불편이 있었기에……외국인등록령이 제정 실시되게 되었다」(『외인등록』1957년 5월호)
이 법무 관료도 표현하고 있듯이 외국인 등록령은 외국인의 출입국관리에 관한 「일반법」의 형식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조선인ㆍ대만인에 대한 「단속법」으로 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었다.
외국인 등록령에는 시행일로부터 30일 이내에 등록신청을 하도록 정하고 있지만, 동년(1947년)5월 5일, 정부는 등록마감을 7월말로 하였다. 그러나 「재일 조선인연맹」(조련)과 「재일본 조선거류민단」(민단) 등의 강경한 반대운동에 의해 순조롭게 이행되지 못하여, 7월 말 단계에는 신청률이 불과 10%에 지나지 않았다. 기일연장을 반복하여 결국 10월 말이 되어서야 등록이 완료되었다. 등록자 총수는 63만 9368명으로, 그 중 조선인은 52만 9907명으로 되어있다.
이 시기는 전후의 혼란기로, 사진기재의 극단적인 부족으로 얼굴 사진이 없는 임시 등록증을 인정하기도 하고, 사진을 바꾸어 부치는 것도 인정되었다. 원래 등록해야 할 이름과 출생지, 본적지 등은 본인의 신고에 의한 것이므로 그러한 것을 증명해야 하는 재일조선인ㆍ대만인 등의 공부를 일본정부ㆍ시ㆍ정ㆍ촌이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일본어의 읽고 쓰기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시ㆍ정ㆍ촌에 따라서는 「조련」지부, 「민단」지부별로 일괄 신청도 인정되었다. 이것은 정부가 용인하고 있었던 일이다.
「조선인 단체에서 여러 가지 요구를 해오리라고 생각되지만, 등록의 진실여부만 확인되면 그 외의 점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상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등, 편의를 배려하여 등록이 원만하게 실시되도록 할 것」(1947년 6월 21일, 내무성 조사국장으로부터 지사 앞 통달).
즉, 정부로서는 「등록이 원만하게 실시되게 하기」위해서는 「이중등록」이나 「허ㆍ무인등록」등이 발생하는 것을 각오하고 형식적인 등록완료를 서둘렀던 것이다.
정부는 1949년 12월 3일, 외국인등록령을 개정하였다. 즉, 등록증의 유효 기간제(3년간)와 전국 일련번호제를 도입, 벌칙 강화 등으로, 익년(1950년)1월 16일부터 31일까지, 기간 내에 제1차 일제갱신이 행하여졌다. 재일한국ㆍ조선인은 「조련」의 강제해산(1949년 9월 8일)직후로 조직적인 저항은 할 수 없었지만, 갱신 신청의 거부는 개별적으로 이어져, 정부는 등록 마감을 3월 20일까지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등록 미신청 또는 등록 방해용의로 검거된 자는 3월 20일 현재 5000명에 달했다.
또한 그 때까지 재일 한국ㆍ조선인의 등록증의 국적란은 모두 「조선」으로 기재되어 있었지만, 제1차 갱신 때부터 자진신고에 의해 「한국」혹은 「대한민국」의 기재도 인정되게 되었다(1950년 2월 23일, 각의 결정). 그것은 1948년 8월 대한민국의 수립을 받아들여 일본정부가 스스로의 외교 전략으로 행하였다기보다는 갱신등록을 촉진하는 것에 중점을 둔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2) 외국인등록법
1952년 4월 28일,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발효일로 일본정부는, 국적법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장의 통달로, 재일 한국ㆍ조선인, 대만인에게 국적선택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은 채, 일률적으로 「외국인」으로 하였다. 그 이후 재일 한국ㆍ조선인, 대만인에 대한 민족차별은 「국적에 의한 구별」로 합법화되어 기본적인 권리조차 박탈당했다.
그리고 전년(1951년)10월 4일부터 시행된 「출입국 관리령」(입관령)을 재일 한국ㆍ조선인, 대만인에게 적용함과 동시에, 외국인 등록령을 폐지하고 「외국인 등록법」(외등법)을 시행하였다. 거기에는 14세 이상의 외국인에게는 지문원지, 등록원표, 등록증에 지문날인이 의무화되었다.
이 등록법에 의한 일제갱신이 동년 9월 29일부터 10월 28일까지 실시하기로 되었지만, 재일 한국ㆍ조선인의 반대 의사가 뿌리 깊어, 10월 28일의 등록갱신 마감 시점에도 미등록 재일 한국ㆍ조선인이 3만 9598명에 이르고, 검거자 또한 555명에 달하였다.
또한 지문제도에 대해서는 외등법의 부칙에 1년 이내에 정령으로 정하여 실시하게 되어있지만, 연기되어 3년 후인 1955년 3월 5일, 정부는 「외국인등록 지문에 관한 정령」을 공포하고, 동년 4월 27일부터 실시하였다.
외등법, 특히 지문제도에 대한 재일 한국ㆍ조선인의 반대 의사는 조직적인 거부운동이 아닌 개인의 거부행동으로 표출되었다. 우리들이 지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2건의 형사재판과 지문 불 날인으로 검찰청에 송치된 수로, 1955년 27명, 56년 195명, 57년 254명 …… 등이다. 이러한 투쟁은 일본사회에 주목되는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계속되어 갔다.

(3) 외국인 관리 시스템
외국인등록령에서 외등법으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법 개정 과정은 외국인등록사무의 합리화라는 이유에서 부분적인 「개정」이 이루어지는 한편, 세부적인 의무규정을 추가해 나아가는 「개악」이 거듭되었다.
게다가 외등법을 치안입법으로 기능시키기 위하여 상세한 의무규정을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위반에 대한 형사처벌을 두어, 경찰 권력이 자의적인 판단으로 자유롭게 조사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어떠한 작은 과실에 의한 위반이라도 입건하여 형사처벌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외등법은 제1조에 그 법의 목적에 대해 「외국인의 공정한 관리에 도움이 된다」고 하고 있지만, 일본의 「관리」라는 말의 법령상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공권력이 사람의 생활관계에 개입하여 그 의사에 관계없이, 또는 그 의사를 배제하여 외부적으로 이것을 규율하는 조치를 의미한다 ……. 『통제』보다도 더욱 강경한 규율을 행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하야시 슈조<林修三>ㆍ 다카츠지 마사미 편저 『법령용어사전』).
일본에는 이러한 의미를 지닌 「관리」라는 말을 법 목적으로 사용하는 법률은 집행관법, 주민기본대장법, 경찰법 등 12법이 있다. 이 중에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관리」는 외등법과 입관법 뿐으로, 그 외는 「민사집행수속을 구성하는 물건의 관리」이며, 「주민에 관한 기록의 적정한 관리」등으로 되어있다. 즉, 외국인만이 「공권력에 의해 생활의 간섭을 받으며」「외부적으로 규제를 받는다」는 것이 법률로 인정되어있는 것이다.
한편 일본국민의 등록은 주민기본대장법에 의해 정해져있다. 일본국민이나 외국인이나 거주하는 시ㆍ정ㆍ촌에서 동일하게 「주민등록」을 한다. 그러나 외등법과 주민기본대장법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외등법은 외국인에 대하여, 1) 얼굴 사진 외에 근무처 등 수많은 등록사항이 있다는 점, 2) 등록증의 상시휴대와 정기적인 갱신등록을 의무화하고 있는 점, 3) 이러한 의무규정을 「1년 이하의 징역 혹은 금고, 또는 20만엔 이하의 벌금」등의 형사처벌로 강제화하고 있다(이들 3항목은 일본국민에게는 요구되지 않는다).
1954년부터 1980년까지 「갱신 불신청」(그 대부분이 의도적인 갱신거부가 아니라 과실에 의한 신청지연)으로 자치단체에 고발되어 검찰당국에 송치된 재일한국ㆍ조선인은 연평균 5127명이나 되며, 경관의 가두심문에서 「등록증 불휴대」로 송치된 재일한국ㆍ조선인의 수도 연평균 3242명에 달한다. 검찰당국의 처분 내역을 살펴보면, 1980년에 외등법위반으로 기소된 재일한국 ㆍ 조선인은 3985명으로 기소율이 68.2%인 반면, 미국인의 기소율은 13.2%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외등법은 재일외국인, 특히 재일한국ㆍ조선인의 일상생활을 샅샅이 감시하여 위협하는 장치로 강화되어갔다. 그리고 1965년 한일법적지위협정이 체결되고, 1979년에 국제인권규약에 가입하였어도 이러한 외등법에 의한 억압적인 제도는 무엇 하나 정정되는 일은 없었다.


2. 지문거부운동의 전개

(1) 제1기 : 1980년 9월~1984년 8월
1980년 9월, 한종석씨가 동경에서 지문날인을 거부하였고, 기타큐슈시, 교토시, 가와사키시, 코베시로 재일외국인의 지문날인 거부는 확산되어갔다.
이 투쟁은 「단 한 사람의 반란」으로 일컬어지듯이, 재일한국ㆍ조선인에게 있어서는 지금까지 남북분단의 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지배되어왔던 민족 조직(한국민단ㆍ조선총련)의 틀을 넘어서 개인의 주체적인 결단에 의한 자립된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1970년, 히타치제작소의 취직차별에 대한 박종석씨의 재판투쟁을 효시로 재일한국ㆍ조선인 2세들의 투쟁, 즉, 「재일」로서의 민족차별철폐 투쟁의 새로운 전개로 지금까지의 「정치운동」과는 다른 모양의 확산을 야기하였다.
또한 최선혜씨가 1981년 1월에 기타큐슈시에서 지문날인을 거부하였고, 신인하씨가 1982년 8월에 요코하마에서 거부하는 등, 14세와 16세 (1982년 개정부터 지문날인ㆍ등록증 상시휴대 의무 연령이 14세에서 16세로 상향 조정되었다)의 재일 3세들이 최초의 갱신등록의 지문체취를 거부한 일은, 일본인에게도, 또한 재일사회에도 「문제」의 소재를 점검하는데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1955년의 지문제도가 실시되고 연중행사처럼 날인을 거부하는 재일한국ㆍ조선인은 산발적으로 이어져 왔지만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대중적 거부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법부성은 1982년 10월, 지문거부자의 재입국 신청을 불허함으로 운동의 확산을 봉쇄하려 하였다 (재입국 허가를 받지 않고 일본을 출국하였을 경우, 그 때까지 인정되었던 재류자격은, 설령 영주자격이 있었다고 하여도, 그 출국시점에서 박탈당한다. 더욱이 입관법상 재입국 허가의 인정ㆍ불인정은 법무장관의 자유재량으로 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문거부는 계속되어 「지문 거부자 지원」「지문 거부자를 고발하지 않는」운동으로 자치단체 노동자의 움직임이 시작됨과 함께 지방의회 (도ㆍ도ㆍ부ㆍ현의회와 시ㆍ정ㆍ촌의회)에서 외등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결의가 잇달아 상정되었다. 또한 각지에서 지문거부자를 「지탱하는 모임」가 구성되어 재판투쟁을 떠맡았다.
이러한 일은 외국인등록령의 도입(1947년)부터 지문제도가 강제실시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 많은 일본인들이 그것을 무시ㆍ무관심으로 용인하는 가운데, 재일한국ㆍ조선인이 고립무원인 채로 반대투쟁, 거부행위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과, 커다란 차이점이었다.
그리고 1983년 11월에는 각지의 지문거부자(당시 31명)과 변호단, 연구자를 중심으로 「지문거부소송 전국 연락회」가 결성되었다. 당시 6건의 형사재판(지문거부 소송)과 2건의 행정소송(지문거부자의 재입국권 소송)의 법정싸움이 있었지만, 거기에서는 지문제도 그 자체가 헌법위반이며 국제인권의 자유권 규약에 위반한다는 것으로 논쟁하였다. 즉, 이들 재판투쟁은 「형사피고인」인 지문거부자가 「원고」가 되어 나라의 정책을 추궁한다는 유니크한 재판투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재판투쟁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그 때까지 법부 관료와 경찰 관료들만이 숙지하고 있던 지문제도를 비롯한 외국인등록제도의 도입과정과 현재의 운용실태를 백일하에 폭로하였다는 것. 예를들면, 등록시 자치단체의 창구에서는 「지 문」이 동일인성의 확인수단으로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과, 이미 1970년 이후 법무성에서는 「지문원지」의 환치분류 등의 작업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 즉 지문제도는 동일인성의 확인이라는 「본래의 목적과 기능」이 이미 포기되어있다는 것 등. 그리고 자치단체에 보관되어있는 등록원표(외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갱신등록 때마다의 지문과 얼굴 사진, 등록사항이 등재되어있는 원표)를 경찰이 자유롭게 열람ㆍ복사하고 있었던 일 등이 밝혀진 일.
2) 국제인권규약의 비준과, 난민조약의 비준(1982년) 과도 연계하여, 그 때까지 자명한 일로 되어 온 「일본국민」대 「외국인」이라는 절대적 이분론을 상대화하여, 일본사회에 「정주 외국인」이라는 개념을 정착시켜, 「내적인 국제화」의 과제로 제기한 일.
3) 지문거부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증언을 통하여, 특히 「재일」의 역사성과 생활, 그 안에서의 느낀 것을 재판소에 제시한 일.
즉 재판투쟁은 법정에서 뿐만 아니라 매스컴 등을 통하여 널리 이러한 일들을 「일본사회의 과제」로 발신하였던 것이다.

(2) 제2기 : 1984년 9월 ~ 1988년 5월
법무성에 의한 재입국 불허가 처분과 경찰에 의한 집요한 소환과 취조ㆍ체포에 의해 1983년 말에는 지문거부자수는 일단 줄어들었지만, 1985년의 등록증의 대량 갱신을 앞두고, 민족조직에서는 한국민단이 외등법 개정을 요구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하였고(1983년 ~12월), 한국청년회에 의한 투쟁위원회가 조직되었다(1984년 10월). 또한 지문거부 예정자협의(1984년 9월 발족),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지문거부실행위원회(1984년 11월 발족)등의 「거부예고」운동이 새로이 시작되었다.
민족조직과는 별도로 재일 2세 청년을 중심으로 결성된 지문거부 예정자 회의는, 그 「거부예고선언」에서 재일한국ㆍ조선인이 품고 있는 「공통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우리들은 조국의 분단을 생각하며, 이 땅 일본에서 하루하루의 소중한 생활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재일동포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태어나서 성장한 2세ㆍ3세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은 취직 등의 차별 뿐 만 아니라 외국인 등록제도에 의한 위압에 위협당하고 있습니다. 항상 등록증명서를 휴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 압박감은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등록을 갱신할 때마다 지문 날인이 강요되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들에 대한 일본사회의 차별ㆍ억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내년은 외국인등록을 대량 갱신해야 하는 해입니다. 37만 명 이상의 재일외국인이 또다시 지문날인을 강요당하게 됩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은 이 30년래의 『유물』을 깨끗하게 청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굴욕』보다도 『민족적ㆍ인간적인 긍지』를 존중해야 하겠기에 이번의 등록갱신시에는 지문날인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는 중대한 결의를 이에 표명합니다」
그리고 동경에서는 각 구ㆍ각 시별로 지문거부자ㆍ거부예정자를 둘러싼 시민운동단체가 결성되었다. 1980년대 전반 각지에서 「지문거부자를 지탱하는 모임」가 설립되었고, 1984년 이후에는 「지문거부자와 함께 투쟁하는 모임」로 각지에 시민단체가 설립되었다. 즉, 「외국인」에게 지문날인을 강요하는 외등법을 무관심하에 유지시켜온 것은 「일본국민」이다, 라는 「당사자」의식에 기초하여 지문거부운동에 참가하는 일본인이 늘어 갔다.
1985년 이러한 각지의 시민단체는 홋카이도에서 큐슈까지 약 150에 달하였다. 거기에는 지문거부자 한 사람과 일본인 두 사람 이라는 작은 모임으로 부터 지역 노동조합과 시의회의원까지를 망라한 큰 모임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이 「시민운동」단체의 대부분은 기독교 교회를 중심으로 자발적이며 적극적으로 만들어져 갔다.
1984년 12월 말 현재, 지문거부자는 82명이었다. 1985년 2월 23일, 카나가와현 가와사키시의 시장은 「인권 존중의 관점에서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있는 재일 한국인을 시에서는 고발하지 않는다」고 표명하였고 이 「불 고발 선언」은 전국의 자치단체로 확산되었다.
이에 대하여 경찰청은 자치단체의 고발 없이 지문거부자의 체포를 감행하여, 5월 4일에 가와사키시의 재일 2세인 이상호씨, 6월 13일에는 다카츠키시의 이경재씨, 오오사카시의 양용자씨 등을 체포하였다.
그 와중에 오오사카부 경찰본부의 외사과장은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일본에 거주하고 싶으면 법률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법률이 싫다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면 된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과 동일하게 자라난 사람은 일본에 귀화하면 된다」고 폭언을 토했다(5월 10일).
또한 법무성도 5월 14일 지문거부의 억지와 자치단체의 단속을 꾀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등록사무요령을 대폭 변경하는 통달을 내었다. 이 통달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1) 날인시 종래의 검은 잉크 대신 무색의 액체를 사용하며, 또한 회전지문에서 평면지문으로 한다.
2) 지문거부자에 대해서는 「지문 불 날인 의향 표명자」로서 설득기간을 설정한다. 그래도 지문 찍 기를 거부할 경우에는 「지문 불 날인」이라고 붉은 색으로 기입한 등록증을 교부한다.
3) 그 시점에서 거부자를 즉시 고발한다.
이 통달이 얼마나 외국인 주민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인가는 그 누구의 눈에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많은 자치단체들에게도 쉽게 이해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경찰에 의한 강권발동, 법무성의 강경책이 오히려 불에 기름을 들어붓는 격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그 후의 지문거부자의 수가 잘 표현해주고 있다.
거부운동의 고양되는 중, 1985년 7월부터 11월에 걸친 등록증의 대량갱신에 재일한국ㆍ조선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문을 찍던지 그렇지 아니하던지, 어떤 각오를 가지고 등록증의 갱신에 임하였다. 일상의 일과 육아에 쫓겨 「운동」에는 전혀 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지문날인을 보류 또는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재일한국ㆍ조선인의 지문거부운동에 재일대만인ㆍ중국인과 미국, 캐나다, 프랑스, 스페인 등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이 참가해 간 것은, 지문거부운동의 존재를 세계에 발신하는 일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즉, 이 재일한국ㆍ조선인의 이의신청 주장이, 일본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외국인의 「공통의 주장」으로 발신되었던 것이다.
또한 법무성 통달의 실시를 둘러싸고 연일 전국의 각 지방단체 창구에 요청행동과 작열한 교섭이 이뤄지고 있었던 것은, 이 운동의 새로운 비약을 초래하였다. 즉, 지금까지 지역에 생활하는 외국인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던 자치단체에 대하여 「주민으로서의 외국인」의 존재를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와사키 주재의 한국ㆍ조선인은 전전부터 대단히 고생을 하며 가와사키시민으로 일 해왔다. 가와사키에서 태어나 성장한 2세ㆍ3세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시민이 범죄자와 동일한 방법으로 지문을 찍고, 시 직원도 그것에 입회하고 있다. 시민의 인권과 직원의 심경을 생각할 때, 법을 지키는 입장과의 사이에서 고민하였다. 날인제도는 인도상의 문제이므로 서둘러 개선해야 한다」
이 가와사키시 시장의 발언(1985년 3월 7일, 시의회 답변)은 재일한국ㆍ조선인의 호소를 수용하려고 하는 자치단체의 자세를 표현하고 있다. 물론 전국의 모든 자치단체가 이러한 자세를 취한 것은 아니다. 법무성 통달을 둘러싼 의논은 동경도의 마치다시와 같이 통달의 반려를 표명하는 자치단체가 있는 한편, 부분실시를 택하는 곳 등, 극심한 혼란이 일었다.
1985년 10월 11일, 한국민단은 「이미 전국에서 지문거부ㆍ보류자가 1만 3000명을 넘어, 제도개정을 요구하는 의사표시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지문보류운동의 종결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재일한국ㆍ조선인의 「개인」으로서의 지문거부 투쟁은 계속되어, 동년 12월 현재, 지문거부자 1944명, 보류자 2737명에 달하였다.
한편 법무성은 각 자치단체에 통달의 실시를 재촉함과 함께, 1985년 11월부터 86년에 걸쳐서 선교사 비자 등 영주자격을 가지지 않는 지문거부자에 대하여 재류기간의 단축, 혹은 재류갱신자체를 불허하는 입관법에 의한 제재조치를 가했다. 지문거부자에 대한 재입국신청을 불허할 뿐만 아니라 재류까지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치는, 「외등법이 인정하는 벌칙」이라는 일선을 넘어선 스스로 엄명해 마지않던 「법치주의」를 포기하였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경찰청은 1986년 12월 10일, 문서조회를 거부하여 오던 오오사카부(府)의 히가시 오오사카, 타카츠키, 토요나카, 하치오의 4개시에 대하여 강제조사 영장을 가지고 지문거부자의 등록원표의 복사를 제출하도록 재촉하였다. 히가시 오오사키시만은 임의 제출을 거부하여 원표를 강제적으로 압수당한다. 그리고 지문거부자에의 집요한 임의출두요청, 체포가 거듭되었다.
이에 대하여 각지의 시민운동단체를 연결한 전국적인 공동행동이 전개됨과 아울러 한국을 비롯한 미국, 캐나다 등으로부터 국제적인 지원이 확산되어갔다.
이와 같이 지문거부운동에 대한 국내외의 지지가 급속히 확산되어가는 가운데, 일본정부는 1986년 9월 21일, 한일정상회담에서 지문문제의 한일「외교결착」을 꾀함으로, 이듬해 3월 31일에는 지문날인 1회제와 등록증의 카드화를 주축으로 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날인 1회에 한함」이라는 것은, 일본에 1년 이상 재류하는 16세 이상의 외국인은 등록증의 5년 마다 갱신등록과 분실 등으로 재교부를 신청할 때에만 등록원표와 지문원지에 날인시켜 그것을 등록증으로 전사하여 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법무성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등록 외국인의 동일인성의 유지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을 두고 2번, 3번 찍지 않으면 그 의미가 없고……만일 한 번만 찍게 한다면, 등록의 지문제도는 전연 그 의의를 잃게 되고, 외국인에 대한 괴롭힘이 될 뿐이다」(『외인등록』1980년 12월호).
결국 「날인 1회에 한함」은 「괴롭힘이 될 뿐이다」는 것에의 변경이며, 법무성 스스로가 지문제도 필요론의 논거를 파탄시킨 것이 된다.
또한 「등록증의 카드화」란, 지금까지의 수첩형의 등록증을, 얼굴 사진과 지문(등록원표에 찍힌 지문을 전사)등을 입력한 laminate card로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laminate card 기계를 각 자치단체에 배치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기 때문에 지방 입관국이 그것을 배치하여 집중적으로 카드작성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때문에 외국인이 갱신등록 등으로 자치단체 창구에서 신청하면 그 자리에서 등록증이 교부되었던 것이, 이번에는 1) 자치단체에서 신청ㆍ수리하여 등록증의 원고를 작성, 2) 지방 입관국에서 카드 작성, 3) 그 카드를 자치단체에서 교부하는 방식이 되므로, 외국인은 2번 자치단체 창구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 등록증 작성에 지방 입관국이 직접 관여함으로 지문이 전사되어 있지 않은 등록증원고를 「서류미비」로 자치단체에 되돌려 자치단체의 광범위한 외국인 등록사무(각종 신청의 수리를 비롯하여 불 신청자와 지문거부자의 고발까지)를 낱낱이 첵크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3) 제3기 : 1988년 6월 ~ 2000년 4월
이와 같이 결코 「개정」이라고 할 수 없는 개정안은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1987년 9월 18일, 국회에서 성립되어, 88년 6월 1일부터 실시되었다. 그러나 많은 재일외국인들이 개정안에 동의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동년 5월 말 현재의 지문거부자가 769명이라는 숫자에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개정안이 실시된 후에도 지금까지 한 번도 날인한 적이 없는 지문거부자 63명(대부분이 일본에서 태어나 날인 의무연령인 16세 때 지문을 거부한 재일한국ㆍ조선인 3세)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또한 예전에 한번은 날인하고 1980년대에 들어와 갱신등록시 지문을 거부한 706명의 대부분은, 이번에는 「전사거부」혹은 「갱신거부」등 다양한 현태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개인, 단체로부터 『지문 전사는 해당 외국인에게 무단으로 일방적으로 행하여져, 프라이버시 침해이다』라는 등의 비판받았다. 또한 시ㆍ정ㆍ촌의 창구에서도 지문 전사 외국인의 요망대로 지문이 전사되지 않은 등록증명서의 기본이 되는 등록증명서 조제용 원지를 작성하여 그것으로 지방 입관국에 등록증명서 조제를 의뢰한다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지문 전사 거부로 불리 우는 것이다」(법무성 입국 관리국 『출입국관리 (1992년 판)』)
이 글에서도 법무성이 당황하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법무성에서는 지문 전사 거부자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를 공표하지 않았지만, 자치단체에 따라서는 전사 거부를 표명하는 외국인에 대해 「등록증」이 아닌 1개월 혹은 3개월, 6개월, 1년마다 「등록증 교부 예정기간 지시서」를 발급하는 등, 고육책을 행하였다.
1989년 2월 6일, 정부는 천황 히로히토의 죽음과 관련한 「대사면」조치에, 2회 이상의 지문거부죄와 등록증 불휴대죄를 그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것은 외등법 개정을 요구하는 여론에 굴복한 판단이라기보다는 법 개정 후에도 29건ㆍ 33명에 달하는 지문 재판과 상시 휴대 재판을 교묘하게 봉쇄하려는 목적으로, 대사면의 대상에 개정법으로 정해져있는 「첫번째의 불날인죄」가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 그 목적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각 재판소는 지문제도와 상시휴대제도가 위헌인지 아닌지를 판시하는 일도 없이 대사면에 의한 「면소판결」을 선언하였다. 그 이 후, 재판투쟁은 첫 번째 날인을 거부한 론ㆍ후지요시 선교사의 형사재판 1건과 지문거부에 의한 체포ㆍ재입국 불허ㆍ재류갱신불허를 둘러싼 국가배상소송으로 계속되었다.
1991년 11월, 일본 국회에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에 의거하여 일본 국적을 이탈한 자 등의 출입국관리에 관한 특례법」(입관특례법)이 성립되었다. 그 때까지 일본에 거주하는 구 식민지 출신자와 그 자손(재일한국ㆍ조선인, 대만인)의 법적지위는 1965년 한일법적지위협정에 의거한 「협정영주」와 그 이 외의 「조선적」을 가진 자와 대만인의 「특별영주」는, 퇴거강제조항이 설치되어 있어, 「특별 자격」
이 있어도 「영주하는 권리」를 보장받는 것은 아니었다.
재일한국ㆍ조선인 고교생을 비롯하여 한 번도 날인을 하지 않은 지문거부자가 260명에 달하는(1992년 6월 현재) 가운데, 정부는 1992년 2월, 재일한국ㆍ조선인, 대만인 등 특별 영주자와 일반 영주자를 지문제도에서 제외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이것도 또한 정부ㆍ법무성이 지금까지 국회와 법정에서 「불법 잔류자가 타인의 등록증을 입수하여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영주자를 포함한 장기 재류 외국인에게야말로 지문제도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해온 것을 스스로가 포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개정안은 1992년 5월에 국회에서 성립되어, 93년 1월부터 실시되게 되었지만, 법안가결에 있어서는 「5년 후의 재검토」가 중참양의원에서 부대결의 되었다.
그리고 이 개정법이 실행되어 6년 후인 1999년, 지문제도를 전폐한다는 「4번째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동년 8월, 일부 수정되어 가결ㆍ성립되었다.
「일부 수정」이란, 재일한국ㆍ조선인 등 특별 영주자의 등록증 불휴대에 대한 벌칙이 「20만 엔 이하의 벌금」에서 「10만 엔 이하의 과료」로 된 것을 말한다. 형사처벌이 아닌 행정처벌로 되었다는 것은, 경찰은 등록증 불휴대의 재일한국ㆍ조선인, 대만인을 체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외국인등록제도의 발족에서 반세기 이상 강경하게 유지되어 온 상시 휴대제도의 일부가 확실히 풀리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같은 「일부 수정」으로 특별 영주를 정하는 입관 특례법의 부칙에 1조를 추가함으로 지문거부자 최선애씨의 영주자격을 회복시키는 조치가 취하여졌다. 재일 2세 최선애씨는 1982년에 지문거부를 하여, 1985년, 재입국 불허인 채로 미국에 유학. 일본을 출국했던 시점에서 협정영주를 박탈당하였다. 그녀가 1988년 유학에서 일본으로 「귀국」하였을 때에 법무성은 「신규 입국자」로 취급하여, 그녀는 이 후 재류 갱신 신청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개정」은 대상자가 그녀 한 사람뿐이며,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지금까지의 입법례에서 보면, 「단 한 사람을 위한」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는 그 자체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2000년 4월 1일, 개정등록법이 시행되었다. 지문제도가 전폐되었다고는 하지만, 외국인의 일상생활을 구석구석까지 「관리」하는 법제도 시스템의 근간도 그것을 지탱하는 사상도 개변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45년간 재일한국ㆍ조선인을 비롯한 재일 외국인에 대한 「굴욕의 낙인」을 강요하여 온 지문제도는, 재일한국ㆍ조선인을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의 끈질긴 투쟁에 의해 전폐되었다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하겠다.


3. 지문거부운동이 야기한 것

(1) 일본 정부의 기대에 어긋난 법 개정
이러한 1980~90년대의 지문거부ㆍ외등법 개정운동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어떻게 대처하려 하였던 것일까?
정부ㆍ법무성은 1982년에 날인 의무ㆍ상시 휴대 연령을 14세에서 16세로 상향 변경을 시작으로, 87년에는 1회 날인제로, 92년에는 영주자ㆍ특별 영주자를 지문제도에서 제외시키고, 99년에 지문제도 전폐로, 17년 동안 4번이나 법 개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1947년부터 반세기에 걸친 외국인등록제도의 역사 가운데 처음 있는 일로, 정부ㆍ법무성으로서는 지극히 기대에 어긋난 일이었다.
또한 일본 정부는 1960년대, 70년대에 예측하고 구상하였던 것이, 80년대에서 90년대의 지문거부운동에 의해 궤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1965년 한일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때 재일 한국인에 대한 자자손손의 영주권을 주장한 재일 한국 민단과 한국 정부를 누르고, 일본 정부는 3대에 한한 영주자격으로 하며(협정영주), 25년 후에 재협의하기로 한 「한일법적지위협정」의 체결을 제의하였다. 당시 일본의 법무 관료의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25년 후인 1991년에 일본국에서 출생하는 자는 현재의 재일한국인으로부터 헤아려 3세, 4세에 해당하며,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며, 한국의 풍습ㆍ관습과도 동떨어져 완전히 일본 사회에 융화되 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예측되는 일이다. …… 그 때까지는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로 귀화 해 있을지도 모른다. …… 이러한 자의 거주 문제는 협의 [25년 후의 한일 재협의]가 실시되지 않던가, 혹은 협의가 성립되지 않을 때에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국내법상의 문제로서의 외국인 규제문제로, 그 거주가 통제ㆍ관리된다」(『시대의 법령ㆍ별책/ 한일조약과 국내법 해설』, 1966 년 3월).
즉, 일본 정부는 1980년대, 90년대가 되면 재일한국ㆍ조선인의 세대교체에 의해 귀화ㆍ동화 경향이 심화될 것이니, 정부도 완만한 촉진정책을 추진하면 될 것이고, 25년 후의 재협의(1991년 문제)도 필요없게 되던가, 필요하더라도 큰 쟁점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ㆍ법무성은 1980년대, 지문거부운동이 고양됨에 따라 영주자격의 존속문제 뿐만 아니라, 재일한국ㆍ조선인의 처우 전반(외등법 문제, 재입국 문제, 공립학교 교원ㆍ지방 공무원 재용 문제, 민족 교육 문제 등)에 걸친, 「1991년 문제」에의 대응에 쫓기게 되었다.
또 하나를 지적한다면, 외등법을 비롯하여 일본의 인권 상황(특히 재일한국ㆍ조선인의 인권 상황)이, 국제인권제조약이 정하는 국제 인권기준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다는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는 점이다. UN의 자유권 규약 위원회는 일본 정부의 제2회 보고서의 심의 가운데 외등법 문제에 언급하며(1988년 7월), 나아가 제3회 일본 정부 보고서 심의에서는 최종 의견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1993년 11월 4일).
「영주적 외국인이다 하더라도 증명서를 상시 휴대하지 않으면 안 되며, 또한 형벌의 적용대상이 되며, 같은 일이 일본국적을 가진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유권 규약에 위반한다」
이것은 정부ㆍ법무성에 있어서 적어도 1950년대와 60년대와 같이 재일한국ㆍ조선인에 대한 정부결정을 「국내 문제」로, 혹은 「한일 양국 간 문제」라는 구실 하에 자유롭게 처리하는 일이 곤란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재일」에 있어서, 일본인에 있어서 지문거부운동은
1993년 2월, 가와사키시에서 「민족차별과 투쟁하는 관동교류 집회」가 개최되어, 분과회의 하나인 「교육문제 분과회」에서 동경도와 카나가와현의 공립학교ㆍ사립학교에 근무하는 10명의 재일한국ㆍ조선인, 중국인 교원이 실천 보고를 하였다. 마치 일본인 교원ㆍ부모와 대치하고 있는 듯 한 형태로, 각 학교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는 모양을 이야기하는 그들을 보며 느낀 것이 있다. 그들의 대부분이 1980년대의 지문날인을 거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운동의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었지만 자신들의 등록증 갱신일에 지문을 거부하였고, 재류기간의 단축 처분까지 받은 자도 있었다. 즉, 1980년대의 지문거부운동은 이러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재일을 사는」투쟁이었으며, 그것은 그 후에도 다양한 모양으로 계속되고 있다.
재일한국ㆍ조선인의 지문거부는 자기의 양심에 의거한 자기의 책임과 결단에 의한 주체적인 투쟁이었다(따라서 개성이 강한 지문거부자를 횡적으로 조직해 나간다는 것은 극히 곤란하였다). 게다가 지문거부는 정치운동으로써의 「◯◯반대」「◯◯실현」운동이 아닌, 스스로가 치고 나가는 능동적인 투쟁이었고, 재일 2세ㆍ3세에게 있어서는 지문거부를 통하여 일본사회와 일본국가가 보다 명확하게 보여 오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특히 재일 2세에 있어서는 분단된 조국을 직시하며, 「재일을 사는」투쟁으로써, 또한 민족적인 일체감을 갖는 장을 빼앗기고, 작열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단되어 오는 가운데 「새로운 공동성」창조를 희구하는 투쟁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재일한국ㆍ조선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 악법은 타파하는 것, 권리는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라는 권리 의식이 광범위하게 정착하여 간 것도 큰 특징이라 하겠다.
한편 우리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어떠하였는가?
말 그대로 「민초」운동을 하는 가운데, 추상적ㆍ개념적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지역에 사는(같은 공간과 동시대를 공유한다) 살아 있는 구체적인 재일한국ㆍ조선인과의 만남과, 그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일본사회ㆍ일본국가의 모습과 그 역사를 보게 되었다.
이러한 귀중한 체험과 인권 규범 확립의 지향이 기초가 되어, 1990년대에 전후보상운동을 비롯하여, 재일한국ㆍ조선인의 지방 참정권 운동과 민족교육권 운동, 그리고 이주 노동자ㆍ국제결혼 이민의 인권 문제로 과제가 확산되어 갔다.
1980년대 지문거부 운동의 「또 하나」 특필하여야 할 의의는,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외국적 주민」이라는 개념을 정립시켰다는 것이다.
지문거부는 외등법의 발본적인 개정을 요구하는 것으로, 정부ㆍ법무성 및 국회를 향한 투쟁이었다. 그와 동시에 1980년대의 지문거부운동에서는, 창구에서 외국인에게 지문을 날인시키는 업무 등의 외국인 등록사무를 「기관 위임사무」로 행하는 자치단체에 대하여 작열한 교섭이 거듭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자치단체는 동지역에 살며 일본인과 동등한 세금을 납부하며, 주민으로써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외국인을 「주민」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앞서 말 한 바와 같이 지문거부운동은 그 때까지 지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던 일본인 및 자치단체에 「주민으로서의 외국인」의 존재와 그 의사를 인식시켜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이 1990년 이후의 지방참정권 운동의 준비가 되었다.
1980년대의 지문거부자에 대해서는 자택이나 직장에서도 경찰의 거듭되는 임의출두 요구와 체포, 법무성에 의한 재입국 불허와 재류기간의 단축ㆍ재류 갱신불허 처분이라는 국가권력에 의한 노골적인 폭력이 가해졌다. 체포된 지문거부자는 22명, 재류 갱신불허 처분을 받은 자 6명, 재류기간 단축 처분 3명, 재입국 불허 처분 107명에 달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위축됨이 없이 스스로의 의사를 표명하고, 그것을 관철시킨 지문거부자의 투쟁에서 일본사회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이야말로 이 사회를 변화시켜 나감에 있어서 우리들의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동역자」라는 것, 그 인식을 부여해 주었다는 것이 우리 일본인의 「1980년대」의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