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신국가주의에 대한 고찰-ㅣ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8-07-24 23:34
조회
598
본 논문은 2008년,6월 30일~7월 2일 일본 아이치현 이누야마시 '리버사이드 이누야마' 국제유스텔에서 개최된 <제13회 외등법문제국제심포지움>에서 재일대한기독교회 나고야 교회 목사인 김성제박사(신학박사)가 "공생의 천막을 넓히고 평화의 샘을 파는 선교를 지향하며--공범자 신자유주의·신국가주의, 그리고 도래하는 이민 감시국가에 저항하며-"라는 제목의 주제 강연의 제1부이다.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현 이 명박 정권의 기본 경제정책인 세계화와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게 된 배경과 그 문제점, 그리고 식민지 지배를 부인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등을 결성한 일본 우익세력들의 음모가 이것들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를 일목요원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운영자


-공생의 천막을 넓히고 평화의 샘을 파는 선교를 지향하며
-공범자 신자유주의·신국가주의, 그리고 도래하는 이민 감시국가에 저항하며-
김성제 (金性濟, 신학박사, 재일대한기독교회 나고야 교회 목사)

1.들어가며
"오직공법을 물같이,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어다."(아모스 제5장 24절)

1980년대 중반, 제가 오카야마 재일 코리안 교회에서 처음으로 목회를 시작한 때, 제와 거의 나이가 같은 남신도가 외등법의 지문날인을 거부한다는 것을 저에게 통보하였다. 기자회견 때에, 무슨 이유로 지문날인을 거부하는 것인가? 하고 기자가 묻자, 그는, “나에게는 지금도 일어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3세의 딸이 있습니다. 이 아이가 16세가 되는 때에, 이 나라가 이 아이에게도 지문을 채취할 것을, 저는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네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가능한 싸움은 하려고 한다’ 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여, 지문날인을 거부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문날인재판의 피고석에서 했던 말을, 방청석에서 듣고 있던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는 자기의 딸은 ‘땅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한 것에 대해, 변호사가, 그 말은 어떤 의미인가하고 반문하였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딸은 장애 때문에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때때로 나는 딸처럼 마루에 누어서 놀곤 합니다. 그러면, 방 안의 옷장 위에서 무엇이 떨어지지 않을까, 혹은 이 아이가 잠을 자다가 뒤척일 때, 어디에 얼굴을 부딪칠까 등을 잘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일어나서 이 아이를 볼 때는 신경 쓰이지 않던 방 안의 위험한 것들이, 이 아이와 똑같이 누어 낮은 자세가 되면그것들이 보입니다. 나는 이 아이로부터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 재일 한국인이 왜 이렇게 괴로운 역사와 현실을 살게 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이 나라 안의 무엇이 인권을 해치는 위험한 것인가? 를 어떤 사람들보다 잘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방청석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그의 말에 압도되어 가슴이 뜨거워졌던 것이 생각난다. 그로부터 20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0년대의 약 10년에 걸친 외국인등록법 지문거부운동·재판 투쟁 끝에 재일 한국·조선인은 1991년에 ‘특별영주자’가 되고 그리고 1993년부터는 영주자들의 지문날인의무가 철폐되었다. 1991년 당시 약 58만이었던 특별영주자는 지금에는 약 43만인까지 감소되어, 법무성이 지난 6월 3일에 발표한, ‘ 2007년 말 외국인 등록자 수’에 의하면, 한국·조선적은 59만 3489인(전 등록외국인의 27·6 %)이고, 중국적이 60만 6889인(전체의 28.2%)으로 제 1위가 되었다. 한국·조선적 다음으로는 브라질 인, 그리고 필리핀인이 그 뒤를 잇는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당시에는, 약 210만인의 재일 코리안이 있었지만, 지금에는 전 등록 외국인의 수가 마침내 215만인을 넘기에 이른 것이다.
다만, 오직 재일 외국인의 양상의 변화에만 눈 여겨 보지 않고, 이 21세기의 세계화의 시대에 있어서, 우리들의 인권운동과 다문화 공생의 투쟁은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 있는가를 파악해 놓지 않으면 아니 되는 시점에까지 와 있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이 강연의 주제는 <신자유주의, 내셔나리즘, 경제격차와 소수자의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의 이 큰 변화에 관하여 고찰 하는 것에 있어서도, 나는 나 자신의 변할 수밖에 없는 관점에 관하여, 아까 소개한 그의 법정에서의 말에서 배운 것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먼저 표명해 두고 싶다.

II 일본을 석권하는 세계화라는 거친 들

A. 신자유주의란
1990년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양상을 ‘글로벌라이제이션’(지구규모화·세계화)라고 하는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이 말은 1980년대, 경제대국에 올랐던 일본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국제화’와도 전혀 그 의미가 다르다. 상품 외에도, 컴퓨터 기술의 현저한 발달에 의해, 정보가 국민국가체제의 국경의 벽을 순식간에 뛰어넘어, 지구의 구석구석 모든 지역에 리얼 타임으로 전달되게 되고, 그 기술의 발달에 의해.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실체경제의 내실·역량을 뛰어 넘어, 금융자본이 사이버 공간을 이동하여, 한 나라나 한 지역, 또는 세계경제에 거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세계사적으로는, 확실히 이 기술진보에 의해 가능하게 된 정보·금융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은, 동서냉전체제의 종결(1990년 이후)과 함께 가속화되고 있다. 이 글로발라이제이션의 세계적 동향을 긍정하고, 그 위에 추진하고 있는, 현대국민국가의 정치경제를 지탱하는 여러 가지 규제를 완화하는 변화를 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우리들은 ‘신자유주의’라고 부른다.
이 신자유주의가 무엇인가에 관하여 데이비드 하베이는 그의 저서 ‘신자유주의’(2007년, 원저는 2005년 출판)에서 역사적, 체계적인 고찰을 전개하고 있다.
하베이는 이 신자유주의의 발생과 전개의 역사에서 1978-1980년의 시기를 “세계의 사회 경제사에 있어서 혁명적인 전환점”(하베이 9쪽)으로 위치를 잡고 있다. 이 역사적 시기는 우선, 1978년에 등소평의 중국 ‘개혁·개방’ 노선이 시동되고, 1979년에 대처 영국수상의 취임과 함께 영국에서는 노사타협에 의한 복지국가정책이 중단되고, 1980년에는 레이건 미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미국에서도 대감세정책에 국민의 동의를 받아가면서, 철저한 경제자유경쟁과 군확노선이 추진되었다. 영국이나 미국에 있어서 그 이전의 시대에는 고도경제성장기로서 ‘노사타협’ 체제를 기초로 하여, 복지국가 노선, 그리고 케인즈적인 조정혼합경제정책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70년대에 들어 가, 고도경제성장기의 종언과 함께 위기에 빠져 든다. 거기에서 이 위기를 넘어 설 세력으로서, 대담한 시장화, 자유화, 민영화, 규제완화, 대기업감세 등의 정책으로 경제를 활성화 시켜, 인프레이션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대 자본가 계급과 거기에 연계되는 정치적 엘리트가 등장한다. 그들은 하이에크 등의 신고전파경제학이론에 입각하여, ‘계급권력의 부흥’을 실현해 나가면서, 그 본질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이론을 표방하게 되었다. 이 “신자유주의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사적 소유권, 자유 시장, 자유 무역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제도적 구조의 범위 내에 개개인의 기업 활동의 자유와 그 능력 등이 무제한으로 발휘되는 것에 의해 인류의 부와 복리가 한층 증대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경제적 실천의 이론이다. 국가의 역할은 이러한 제도적 실천에 걸 맞는 제도적 구조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것이다.”(하베이 10 쪽) 이 이론과 세력은, 공적인 분야로서의 공적기관과 사회복지·의료제도 안에 시장원리를 도입하여, 사유화와 상품화를 철저히 주진한다. 기업이나 금융기관은 보호되고 세제 면에서 우대받게 되지만, 노동자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법은, 기업 측에 유리하게 규제 완화되어, 기업과 노동자의 개별적인 자유계약화가 추진되어 간다. 하베이는 이와 같은 부가 노동자라 하는 하층에서 자본가·경제 엘리트들이라고 하는 상층으로 재분배되어가고 있는 메카니즘을 ‘계급권력의 부흥’에 수반하는 ‘약탈에 의한 축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주 흥미 깊은 점은 이와 같은 신자유주의의 폭주에 의해 나타난 사회적 유대의 붕괴의 위기를 의식하면서, 신보수주의의 세력이 대두해 온다. 그들은 사회적 유대의 재구축을 노리고, 도덕과 내셔날·아이덴티티를 창도하는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미국에 있어서는 그것은 우파 내지는 복음주의 기독교를 중심으로, 가족의 가치강조, 낙태반대, 동성애 합법화 반대 등의 형태로 현상화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보수주의는 결국 내셔날 아이덴티티에로 수렴하여 가고 있다는 의미에 있어서, 표면적으로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추진하자고 하는 신자유주의와 상극·길항(拮抗)한다. 그렇지만, 이 양자는 표면적으로 상극·길항하면서도, 반 ‘테러’·‘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전쟁이라는 대외적인 위기에 대하여 자국의 안전이라는 정책을 추진하는 측면에 있어서의 공범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 관하여 현저한 역사적 사실이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에 빠져 간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B. 군사대국 일본에로의 길

그런데, 이 일본은 어떻게 하여 이 신자유주의에 빠져들면서, 세계를 석권하는 글로벌라이제이션에 대응하여 온 것인가?
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고도경제성장을 이룬 일본은, 1980년대에 들어감과 동시에, 일·미, 일·유럽간에 있어서 경제 마찰을 격화시켰다. 더욱이, 1985년 프라자 합의에 기반을 두고 본격적인 엔고(圓高)가 개시되자, 그때 까지 수출지향형산업으로 성장해 온 일본 기업은 궁지에 빠지게 되고 말았지만, 그 돌파구로 다국적기업으로의 길로 맹진하였다.
와타나베 오사무(渡邊治)는 ‘일본의 대국화와 네오 내셔나리즘의 형성’(2001년) 속에서, 일본의 ‘신대국주의’에로 나아가는 길로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渡邊, 141쪽)
제1은, ‘냉전후 새로운 세계질서를 일·미동맹관계의 축으로서 형성’하는 ‘일·미대국주의동맹’ 에로의 길의 개시
제2는, 국제적인 경제대국화를 추진하는 가운데 장해가 된 보호주의적인 경제정책을 방기하는 일.
다시 말해, 미곡의 자유화, 유통업의 규제완화와 시장개방을 꾀하면서, 자국의 저생산성부문인 농업, 소매업 등의 중소·영세기업의 무시를 용인하는 일.
제3은, 중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소선거구제를 선택함에 의해서, 국내의 지역사회에 뿌리를 둔 중소기업의 이권과 결부되어 있는 전통적인 이익 유도형 정치를 온존시켜온 기존의 보수정치를 봉쇄하는 일.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대국주의 이데올로기는, 군사대국화에의 충동을 동반한다.(渡邊, 157 쪽). 왜냐하면, 다국적기업이 진출한 여러 나라에서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로운 기업 활동, 자본의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아니 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는, 세계와 다국적기업이 진출한 여러 나라의 정치·사회적 질서의 안정을 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일본 한 나라가 돌출된 군사적 진출을 실현할 수 없어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마침내, 미군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는 단계에 도달하게 된 것은 1990년대이었다.
일본의 신자유주의 개혁노선은, 정치노선으로서는 ‘전후 정치의 총결산’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등장하여, 국철 민영화 등의 행정개혁에 몰두한, 1982년의 나카소네(中曾根) 정권에서 시작되지만, 본격적인 추진은 1990년대 초두의 하시모토(矯本)에 의해 시작되어, 모리(森 )정권을 지나 고이즈미(小泉) 하에서 가속화되어 간다. 이 일련의 정권하에서 축적되어, 고이즈미 정권 하에서, 집대성되지만, 대기업에 있어서 매우 큰 질곡이 된 법인세의 경감, 치료·사회보장비의 대폭적인 삭감정책이, 구조개혁의 이름으로, 특수법인·우편민영화와 함께, 90년대에 들어 와 본격적으로 전개되어가게 되었다.
1996년 4월, 일·미 안보 공동선언을 기초로 한, 미·일 안보조약이 실질적으로 개정되었다. 그것은, ‘미·일동맹의 글로발화 선언’(渡邊, 162 쪽)을 의미한 것이다. 세계평화의 확립을 위해서의 ‘국제공헌’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뿐 만 아니라, 국제적 안전보장의 재편을 꾀하는 미국의 군사전략 속에 일본이 본격적으로 가담해 가는 것이다.
이 흐름 속에서, 1999년 5월 24일, 제145회 국회에서 신가이드라인관련법(주변사태법, 개정 자위대법, 개정 일·미 물품·역무상호제공협정)이 성립한다. 이것에 의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전략 속에 일본의 군사력이 통합되는 체제가 확립되어 가는 것이다. 일·미군사동맹 확립의 문맥에서, 이 신가이드라인은, 마침내 일본의 군사력이 자국 발 다국적기업의 자산의 보전에 착수하자고 하는 준비체제임과 동시에 “아시아 제국을 거슬러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는 군사대국화를 강행하여 아시아 제국의 민중의 분노를 사는 일을 피하는“(渡邊 181 쪽) 길이기도 했다. 1992년의 PKO 협력법의 제정을 강행한 것은, 유엔의 깃발 아래 아시아 지역에 자위대가 관여함으로써, 신가이드라인 체제로 가는 포석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8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걸쳐, 미국에서도, 미국의 세계전략·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안전보장을 위해, 군사적 부담에 일본이 ‘무임승차’하면서, 경제대국으로 거만하게 올라서는 것에 대한 심한 비난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2007년 말의 일본의 대외순자산(대외채권에서 대외부채를 뺀 것)은 역대 최고의 250조 2210억 엔으로, 전년 말 비 16.3% 증가로, 2위인 독일(107조 엥)을 능가해 세계 제 1위에 군림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제1의 대외 채권을 보유하면서, 그것을 훨씬 능가한 부채에 시달리고 있는 부채국으로 전락하여 있다. 일본은 1991년 이래, 17년 연속으로 세계최대의 채권국의 자리를 유지하여 오고 있는 것이다.(賣讀新聞 2008년 5월 23일자)

C. 일본에서 전개되고 있는 대국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신자유주의의 특징.

전후 일본의 내셔날리즘은 상징천황제를 구가하는 일본헌법을 근거로 하여, 야스쿠니진자 국가호지운동(靖國神社國家護持運動)으로 상징되고 있는 것 같이, 천황제에 입각한 국체사상을 근저에 두는 전통적인 내셔날리즘으로서 뿌리 깊게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뿌리 깊게 존재하는 이 전통적인 내셔날리즘의 조류의 심층에 흐르고 있으면서도, 일본이 신자유주의적 대국화노선으로 나아가고 있는 1990년대에 들어 와, 신자유주의적 대국화 노선과 공범이 되고 있는 내셔날리즘을 네오·내셔날리즘(신국가주의)이라고 우리들은 이해하고 있다. 와타나베 이사무는 경제적 글로발리제이션의 사상적 추진이념으로서의 신자유주의와 논리적인 상극을 이루면서도, 공범·연동이 되고 있는 신국가주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특징을 말한다.
1. 전후의 대국주의 이데올로기나 복고주의·전통주의적 내셔날리즘과는 달리, 과거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에 관해 일정한도 내에서 반성함으로써, 과거의 제국주의와의 단절성을 강조한다.(渡邊, 142 쪽)
2. 전전 이래의 내셔날리즘의 중심이었던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지 못하게 되었다(渡邊 145 쪽). 천황은 아시아 제국을 역방하면서, 일본의 과거를 ‘사죄’하며 다니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용되어 가고 있다.(渡邊, 146 쪽)
3. 천황제 내셔날리즘의 대신으로, ‘국제공헌’이라는 이데올로기가 강조되어 간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신국가주의 이데올로기적 특징이 2005년 가을에 발표된 자민당의 헌법개정안(제 2차), 개정교육기본법(2006년 12월 성립), 또한 금년 6월에 자민당의 ‘외국인재교류추진의원동맹’에 의해 발표된 이민국가에의 정책전환 제언 속에 반영되어 있는 것을 비판적으로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D. 일본의 사회통합의 붕괴
일본에서는 1960년대부터의 고도경제성장기에, 기업체제 속에 노동조합운동이 통합되어 가면서, 기업적인 사회 통합이 일본 사회에 확립되어 왔다. 노동자의 정치적 요구는, 기업의 성장·번영과 일심동체화되어 온 것이다. 본래, 강력한 사회운동의 압력에 기반을 두어 확립되어 있는 복지국가 체제는, 일본에서는 결국 미성숙 상태에 머물렀다. 복지국가적인 부의 분배보다도,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이익유도형 정치와 공공사업유치에 의한 재분배의 길을 일본은 선택하여 온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80년대 후반부터, 그때까지의 수출 지향형 산업에서 다국적 기업으로 해외 진출에 나선 이후, 일본국내에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재편이 개시되어 갔다. 일본의 거품 경제의 붕괴가 분명해진 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 재편의 상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동력고용정책전환의 지침으로서, 1995년에 일본 경영자 단체 연맹(日經連)에 의해, “신시대의 ‘일본적 경영’”이 발표되었다. 거기에서는 노동시장의 신자유주의화를 획책하기 위해, 그때까지의 노동자의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고, 유연한 노동계약에 기초한 노동형태, 별명, ‘고용의 포트폴리오 화’를 외쳐가면서, 기업 측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형태의 파견을 시작으로 하여, 비정규고용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고 있다.(丹野 , 76쪽.) 노동시장에서 규제 완화의 추진이 눈에 띄게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이 발표가 있던 다음 해(1996년) 6월, 1985년에 시작된 노동자 파견법이 개정되고, 개정은 1999년, 2003년에 반복되면서, 노동 분야의 규제 완화가, 기업 측의 부담을 적게 하는 비정규노동자 (파트 노동자, 파견노동자, 계약사원)를 동원하는 것이 유리하게 전개되게 되고 있다.(鴨挑代 ‘비정규노동자에게 다가오는 장래’) 우리들은 이 90년대의 노동시장의 재편과 병행하여, 반사회적 사건이 비극적으로 빈발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자기책임론’ ‘자유계약’의 이름하에 세분화되고, 한층 쓰고 버리기 쉬운 저임금노동자로 몰린 젊은 노동자는, 한층 프리타(아르바이트로만 살아가는 사람-역주)로서 불안정·불안·사회적 <히키코모리>(집안에 틀어 박혀 있는 사람-역주), 자학=타학적 학대, 가정내 폭력, 등 계속 파괴적인 진퇴유곡에 몰려 들어가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일본인 자신의 기류자(데라시네=뿌리없는 풀), 즉 게르 화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은 거대한 르상티만(ressentiament;니체의 용어로 원한·증오·질투 등의 감정이 반복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역주)과 불안을 잠재하게 하는 포퓨리즘이 되어, 일본 사회의 우경적 운동에 의해 동원·회수되는 최하의 인생이 될 위험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E. 신국가주의(네오 내셔날리즘)의 고양
와타나베 오사무는 신자유주의·대국주의 노선에 대응하는 이데올로기를,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는 일을 자제하고 그 대신‘세계평화를 위한 일본의 책임’이라는 ‘국제 공헌’이데올로기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국민주의적 내셔날리즘’이라고 부른다(渡邊 186 쪽). 다시 말해, “지배층이 현대의 대국화를 정당화하는 데는 인터내셔날리즘과 전통적 내셔날리즘을 국민주의적으로 재편성한 네오·내셔날리즘을 병용하는 것 외 다름이 아님이 틀림없다.”(渡邊, 189 쪽)고 본다.
일본의 대외순자산의 보존과 글로발화 된 자본이동의 안전보장을 위해, 미국의 세계전략과 연동해 가면서, 일본의 군사력으로서의 자위대를 해외 파병시키는 길을 열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적 대국화 노선과 동향에 대해, 신자유주의적 국내정책이 가져 온 사회적 통합의 붕괴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국민적 통합을 재구축하자는 네오 내셔날리즘(신국가주의)이 동시에 대두한다. 양자는 이론적으로는 배반·상극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결과적으로는 공범·보완적인 두 개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새로운 우경화의 움직임은 1990년대 전반부터 본격화한다. 1993년 8월, 카와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중대하고도 획기적인 담화를 발표하였다. 그 담화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일본군을 위해 위안소를 설치하고, 또한, ‘위안부’를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하여 간 것에 구 일본군이 관여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담화를 일본정부가 발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배경에는, 요시미 타다아키(吉見義明; 일 추오대교수)가 1992년, ‘종군위안부’자료를 국립도서관에서 발견해, 공표한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일본의 역사교과서에는 일제히, 각주적 처리방식이기는 하지만, ‘종군위안부’ 기술이 등장하게 되었다. 마침내 이 흐름은 호소카와 정권을 경과하여 1995년 8월에, 무라야마 정권하에서 일본의 전쟁책임문제에 커다란 전진을 하는 ‘전후50년’을 기한 무라야마 담화‘로 승계되어 갔다.
그러나 일본정부의 이와 같은 움직임에 대해 익년(1993년)부터, 자민당 반 주류 매파 의원들은, ‘역사검토위원회’를 조직하고, 결국, 그것이 2년 후인 1995년 1월에, ‘자유주의사관’ 연구회를 발족시켜 가게 되었다. 이 ‘자유주의사관’ 연구회에 계승된 ‘역사검토위원회’의 의도는 (1) 중국·동남아시아의 일본의 전쟁을 구미·러시아로부터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2)‘종군위안부’ ‘남경대학살’은 없었다; (3)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라는 말을 빼는 것, 등이었다.
이 역사 수정주의적 우익운동은 1996년 12월에, 고바야시 요시노리,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 니시오 미키지(西尾幹二)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역사교과서 만드는 모임’(약칭‘만드는 모임’)으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들이 개최하는 집회에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학생들에게 가르쳤을 때 당혹해 하는 학생들과 함께 침략의 역사를 직시한 후, 다음의 단계와 어떻게 연결시키면서, 역사교육에 임하여 가는 것이 좋을까를 알지 못 해 곤혹해 하는 일정 수의 교사가 동원되어 왔다.. 마침내, ‘만드는 모임’은 중학교의 역사교과서, 혹은 공민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이 교과서는 2001년 4월 3일, 문부과학성교과서 검증에 합격하여, 일본 국내외에 커다란 충격을 주게 되었다. 그해 8월까지는, 새롭게 채용된 역사교과서가 각 지역에서 결정되어 있었지만, 도쿄 도의 양호학교나 아이치 현의 일부를 제외하고, ‘만드는 모임’ 역사교과서는 거의 채용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주목하여야만 할 것은,이와 같은 역사수정주의적 우익운동과 문부과학성의 동향에 발맞추어 다른 교과서 출판회사의 역사교과서에 있어서도,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했다는 역사기술의 목소리가 일제히 다운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 우익운동은 그 후, 니시오 미키지의 ‘국민의 역사’(1997년 12월),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전쟁론’(1998년 7월)을 이용하여, 대중운동화되어 갔다. 그들의 이데올로기에서는 “현대일본사회의 병리를 문제 삼아 우연히 현대 내셔날리즘이 떠맡게 된 또 하나의 과제, 즉, 일본의 사회적 통합의 해체를 국가적 통합에 의해 수복한다고 하는 과제를 스스로의 논의에 끌어넣었다..”(渡邊, 235 쪽)는 점, 다시 말해, 일본의 공동성의 복권의 필요성이라는 점에서 공통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논리에서 볼 때, 일본의 전통적 공동성의 복권의 이데올로기는, 신자유주의와 배반·상극이 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999년, 일본은 이상과 같은 신자유주의·대국 이데올로기에 의한 노동시장의 재편, 사회적 통합(세이프티네트)의 붕괴, 그리고 국민주의적 내셔날리즘(신국가주의)에 의한 국민적 재통합의 운동을 배경으로 하면서, 전쟁이 가능한 국가가 되기 위해 헌법개정의 기반을 확립하여 가게 된다. 그 해 7월 29일의 ‘헌법조사회’를 중·참 양원에 설치하기 위한 국회법개정, 8월 9일의 국기·국가법의 성립, 8월 12일의 주민기본대장법의 개정, 그리고 8월 20일의 통신방수법(通信傍受法)의 성립 등이 차례차례로 전개되어 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치적 동향 속에서, 2000년 4월 9일, 이시하라 신타로(石原 愼太郞) 토쿄도 지사는 육상자위대 네리마[練馬] 주둔지에서 개최된 ‘창대기념식전’의 석상 인사에서 “제3국인, 외국인들이 흉악한 범죄를 계속 범하고 있어, 커다란 재해에서는 소요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도 상정된다. 경찰력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여러분이 출동해 주시면 좋겠고, 치안 유지도 큰 목적의 하나로 수행해주시기를 바란다”는 발언을 했다. 이시하라 지사 자신은 그 ‘제3국인’에는 차별적인 의미는 들어있지 않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는 바대로 순수하게 종전 후의 GHQ 지배하에서, 연합국에도 패전국에도 속하지 않는 집단을 가르키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는 석명을 반복하며, 최근의 외국인 범죄의 증가를 구체적인 자료의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자기논리의 정당화를 위해 끌어대어 왔다. 그 후의 계속 질문을 받자, 이시하라 지사는 자신의 발언이 부적절했다는 점을 표명했지만, ‘일부의 불량외국인’에 의한 소동의 가능성과 그를 위한 자위대동원요청에 관한 발언은, 재일 코리안의 적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관동대진사의 조선인 학살이라는 공포의 역사적 기억을 되살아나게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