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법 새로 읽기-VI(계약법 3)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8-06-18 23:34
조회
934
4.3. 계약법의 통시읽기
역사비평을 노리는 학자들은 계약법에서 마리문서와 누지문서와 함무라비법전의 평행구들을 발견한 것을 근거로 계약법을 매우 고대의 법전이라고 판단한다. 이로써 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왕국 이전 시대에 가나안에 존재하고 있었다고 단정한다. 그러나 혼인법이나 배상법이나 동태복수법 등이 모두 마리와 누지에서 출토된 서판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성서의 계약법과 이 고대의 서판들이 그것들과 동시대의 것이라는 주장을 지지해 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하무라비 법전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하무라비 시대 이후로 무려 천년 이상이나 하무라비 법전이 성문화되어 고대 근동의 관습들을 지배하였는데 이 천년의 기간 동안에 고대근동의 법들이 구전법이나 성문법이나 간에 일반에 통용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법이 하무라비 시대와 동시대의 것이라고 결론을 지을 수는 없다. 계약법이 기록된 것은 고대에 통용되던 관습법들, 곧 마리나 누지의 법문 보다 훨씬 후대에 작성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계약법의 서문과 결문을 이루고 있는 문학과 사상들에서 신명기학파의 작문의 손길을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계약법이 포로기에 작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컨대 반시터즈 같은 학자는 계약법을 포로기 및 포로이후기 초기의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작성되었다고 추정한다(A Law Book for the Diaspora, Oxford, 2003). 또 블룸 같은 이는 계약법의 고대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페르시아 시대에 여후디 속주의 자치를 위한 법률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역사비평의 결과물들을 놓고 독자들은 설왕설래하고 있다. 계약법을 여후디 왕조의 법률이라고 본다면 그 계약법은 제국의 법률로 통용될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무리 페르시야 제국이 종교관용 정책을 취하였다 하더라도 제국의 종교제도 일속을 부정하는 반제국의 사상을 고취하는 계약법을 통치의 법으로 허용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오히려 나는 제국의 치하에서 숨죽여 살던 믿음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에서 내부용으로 규약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곧 계약법을 작성한 동기가 되었고 세대를 거듭하면서 이 법은 신학의 의도로 개작되어서 현재의 계약법 형태를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 법은 초기의 토라(초기의 오경?: 레위기 없는 사경 내지는 여호수아를 포함한 오경?)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계약법은 십계명에 대한 해설서로 작성되었으며 십계명은 포로기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노예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한 반왕정체제의 요구로 터져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서 그들 존재를 구성하는 대강령으로서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통시읽기의 판단을 토대로 볼 때 우리는 계약법과 레위기의 법문들과 신명기법이 지니는 통시의 관계를 재구성해 볼 수 있게 된다. 워낙에 레위기 없는 사경, 곧 신명기학파가 작성한 [창세기-출애굽기-민수기-신명기]의 초본이 존재했는데 여기서 십계명과 계약법이 처음부터 들어와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 사경이 기왕에 존재하던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와 결합하면서 신명기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이 때 신명기법이 역사서들과의 연결고리를 구축하기 위해서 크게 확대되었을 것이다. 이로써 창세기에서 열왕기서까지 이어지는 구경의 큰 역사서가 만들어졌다. 이것도 역시 신명기학파의 노작이라는 범주에 속했을 것이다. 아마도 포로기나 포로기 이후시대의 초엽에 해당하며 에즈라/느헤미야 시대까지도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질서와 교육을 위한 교과서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에즈라/느헤미야 시대 이후에 제사장 집단들이 과거에 이어오던 예루살렘 성전제의의 제도들을 크게 신학화하여 성막을 중심한 말씀의 신학을 구축하였는데 이 때 레위기가 작성됨과 동시에 신명기학파의 사경이 이 제사장 동아리의 의도에 맞추어 크게 개정되고 확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확장의 과정은 마카베오 시대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마카베오가의 독립전쟁 이후 예루살렘 성전 재봉헌과 큰 규모의 문서 정리 작업이 이루어졌을 때 아마도 현재의 토라(오경)가 완결되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문서자료설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토라는 최종저자의 P의 작품이며 P의 손길을 벗어나 구절은 토라 속에 한 구절도 없기 때문이다.

4.4. 계약법 서문 출20:22~26에 대한 별도의 감상

4.4.1. 공시읽기>
출20:22~26 문단의 최종본문의 형태를 짜임새분석을 통해서 알아보고 중심 주제를 찾아낸다. 이어서 이 문단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서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이 문단이 오경의 다른 문단들과 어떠한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본다.

4.4.1.1. 문단의 짜임새
출20:22절은 문단을 서로 이어주는 연결 장치로서 계약법의 서론부를 도입하는 역할을 한다. 신현현 광경을 목격하였음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을 일체 만들려고 시도하지 말라고 입을 떼고 있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짜임새를 분석해 낼 수 있다.

가. 출20:22~23, 신상제작 금령: 하나님께서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만들려 고 시도하지 말라. 은신과 금신, 곧 주물상의 제작을 금지함.
중앙. 출20:24, 제단법과 약속: 흙으로 제단을 쌓아라. 양과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라. 주께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할 모든 장소에서 백성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가´. 출20:25~26, 제단법과 금령: 돌로 제단을 쌓을 경우 쪼갠 돌을 쓰지 말라. 돌 쪼는 정 을 사용하지 말 것. 제단에 오르는 계단의 설비금지. 알몸 노출 금지.

가단락에서 마세카(주물신상)를 제작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마세카는 출34:17에서 명기된다(출32:31, ‘금신’). 이에 대칭되는 부분인 가′단락은 ‘까지트’(떠낸 돌)의 사용을 금지한다. 더 나아가 ‘돌뜨는 정’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여 채석장의 작업에서 나온 건자재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는 일이 없도록 경고하고 있다. 이것은 출20:4의 ‘페셀’금령을 더욱 상론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마세카와 페셀의 금령이 제단건축과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는데 이것은 중앙부분에서 흙제단을 쌓도록 권하는 데로 모두 귀결된다. 흙제단에서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

4.4.1.2. 문단의 위치와 역할
계약법 서론부가 출20:22~26이라면 계약법의 결론부는 출23:20~33이다. 서론부에서 마세카와 까지트(=페셀)과 같은 조형물을 금하고 있다면 결론부에서 가나안의 신들을 예배하거나 섬기지 말며 그들의 주상들(마체보트)을 훼파할 것(출23:24)을 명하며 가나안인들의 신들과 계약을 맺지 말 것(출23:32)을 명하고 있다. 이들 상응하는 요소들을 통해서 서론부와 결론부는 각각 계약법의 앞과 뒤에서 서로 상응하도록 짜여 있음이 분명하다.
처음 선포된 십계명 출20:4의 ‘페셀’이 서론부 뒷부분 25절의 ‘까지트’와 상응한다면, 나중에 새로 체결된 십계명 출34:17의 ‘마세카’는 서론부의 앞부분 출20:23절의 ‘금신과 은신’과 교차되게 상응하고 있다. 이것은 시나이단화 제I부(출19:1~24:11)를 시나이단화의 중앙부(출24:12~ 40:38)와 단단히 물리도록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금송아지 제작과 숭배로 인해서 깨어진 두 돌판을 새로 만들었을 때(출34:1~4) 그 위에 하나님께서 다시 손수 열 마디 말씀, 곧 십계명을 기록해 주셨다(출34:28). 모쉐는 맨 처음에 기록한 계약법(출24:4)을 다시 또 기록하였다(출34:27). 이와 같이 계약법의 서론부는 결론부와 상응하도록 배치되어 있는 동시에 ‘금신과 은신’이란 ‘마세카’ 함의를 통해서 다시 체결되는 새계약의 법들까지도 포괄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나이계약 이야기의 제I부를 기록한 저자는 제II부도 기록하였다고 판단된다. 그 증거로 ‘금신과 은신’ 금령은 출32:31에서 ‘금신을 만들었습니다’란 모쉐의 말 속에 명백하게 인용되어 백성의 죄상을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말하는 것을 보았다는 출20:22의 진술은 신5:4; 민14:14(참. 출33:20)의 진술과 일치한다. 그리고 창16:13에 하갈이, 창32:31에 야곱이, 각각 하나님을 뵈었다고 진술한 것과 일치한다. 출20:22의 진술을 통하여 이 계약법 서론은 광야 제II부와 상응하며 더 멀리는 창세기와 신명기에 서로 연관된다. 가장 가깝게는 출20:18의 진술, ‘그들이 볼 때 떨며 멀리 서서’란 진술을 잇고 있다. 백성이 하나님의 현현 장면을 보았다고 해서 그들이 본 대로 그 영상을 더듬어 야훼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명한다.
층계로 제단에 오르지 말라는 뜻은 제단에 층계를 두지 말라는 금지를 의미한다. 층계로 오르면 알몸이 드러난다는 뜻은 에덴동산에서 알몸임을 깨닫고 몸을 숨긴 아담을 연상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 대홍수로 심판을 받고 온 세계가 멸망을 당한 뒤에 노아는 술에 취해서 알몸으로 누워있었다. 이로 인해서 아들들이 시험을 당하여 그 중에 함은 저주를 받고 말았다. 출20:26의 ‘알몸’ 주재를 볼 때 창세기의 원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마지막으로 흙으로 제단을 쌓으라는 명령과 떠낸 돌로 제단을 쌓지 말라는 금령은 솔로몬의 성전건축을 보도하는 신명기사가와 대비된다. 신명기사가는 이 법을 의식하여 성전건축 현장에 돌을 쪼는 정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채석장에서 미리 돌을 떠서 그곳에서 다듬어 운반하여 성전을 지었다고 보도하였다(왕상6:7). 솔로몬 성전에 옥에 티와 같은 것이 있다면 채석장에서 떠낸 돌을 사용했다는 점뿐만 아니라 성전에 층계를 많이 두었다는 점도 있다. 이것은 출20:26의 눈으로 볼 때 잘못된 처사였다.
신27:5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제단을 쌓을 때 자연석으로 쌓으라고 명한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을 때, 수8:31에 보도하는 대로, 이스라엘은 에발산에서 쇠연장으로 쪼개지 않은 자연석으로 제단을 쌓았다. 이처럼 출애굽기에서 신명기로, 신명기에서 여호수아로, 그리고 열왕기상서 6장으로 이어지는 성전제의의 신학은 수미쌍관 십계명이 금지하는 대로 페셀과 마세카를 배격하고 있다. 이 배격의 의미는 페셀과 마세카를 상용하며 웅장한 신전을 건축하는 제국의 지배이데올로기로 봉사하는 종교들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4.4.2. 통시읽기
계약법 서론에 나오는 흙제단에 대한 규정은 신명기법에 나오지 않는다. 오직 돌제단에 관한 규정이 신27:5~6에 평행본문으로 나올 뿐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lz<)r>B; ~h,Þyle[] @ynIït'-al{ ~ynIëb'a] xB;äz>mi ^yh,_l{a/ hw"ßhyl; x:Beêz>mi '~V' t'ynIÜb'W 5
`^yh,(l{a/ hw"ßhyl; tlêA[ 'wyl'[' t'yliÛ[]h;w> ^yh,_l{a/ hw"åhy> xB;Þz>mi-ta, hn<ëb.Ti 'tAmlev. ~ynIÜb'a] 6
(5절) 거기에서 너의 하나님 야훼를 위해서 한 제단을 쌓되 쇠연장을 그 위에 흔들지 않는 돌들로 제단을 쌓아라. (6절) 온전한 돌들로 너의 하나님 야훼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서 너의 하나님 야훼께 번제를 올려 드려라.

이 평행본문에는 흙제단 건립의 명령은 암시조차 되지 않는다. 초점은 오직 쇠연장을 대지 않은 ‘온전한 돌’에게 쏠려 있다. ‘온전한’이란 뜻의 단어 ‘쉴레모트’는 형용사이며 ‘샬렘’의 복수형이다. 이 평행본문이 명하는 바는 여호수아서에서 실행된다. 수8:31의 본문을 살펴보자.

tAmêlev. ~ynIåb'a] 'xB;z>mi hv,êmo tr:äAT rp,se'B. bWtK'K; laeªr"f.yI ynEåB.-ta, hw"÷hy>-db,[,( hv,'mo hW"ci rv<åa]K;
`~ymi(l'v. WxßB.z>YIw:) hw"ëhyl;( 'tAl[o wyl'Û[' Wl'[]Y:w: lz<+r>B; !h<ßyle[] @ynIïhe-al{) rv<±a]
야훼의 종 모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대로, 즉 “쇠연장을 그 위에 흔들지 않은 온전한 돌들로 쌓은 제단”이라고 모쉐의 토라책에 기록된 그대로, 그들은 온전한 돌들로 단을 쌓고 그 위에 야훼를 위한 번제를 올려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려 제사지냈다.

이 경우에 ‘온전한 돌’(아바님 쉴레모트)이란 무엇인가? 돌을 그 박힌 곳에서 떠내어 그것에 정으로 쪼거나 깎는 등 아무런 조삭행위도 가하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의 돌을 가리킨다. 이 돌은 출20:25에서 금하는 ‘까지트’(새긴 돌)가 아니기에 하나님의 법에 합당한 석재이다. 위의 밑줄친 부분은 신27:5~6의 구절과 동일하다. 이 구절을 출20:25과 비교해 보자.

`h'l,(l.x;(T.w: h'yl,Þ[' T'p.n:ïhe ^±B.r>x; yKió tyzI+G" !h<ßt.a, hn<ïb.ti-al{) yLiê-hf,[]T;( '~ynIb'a] xB;Ûz>mi-~aiw>
만약 나를 위해 돌 제단을 만든다면 너는 새긴 돌들로 쌓지 말라. 왜냐하면 네가 너의 칼을 그 위에 휘두르면 너는 그것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이다.

‘미쯔박흐 아바님’(돌제단)이란 어귀와 ‘바나’(짓다/세우다/쌓다) 동사와 ‘누프’(흔들다) 동사가 신명기학파의 문장들에 평행하는 동일한 요소이다. 그런데 ‘까지트’(떠낸 돌)와 ‘ㄱ하라브’(칼)는 신명기학파의 문장에 없는 낯선 요소이다. ‘까지트’에 해당하는 단어는 ‘아바님 쉴레모트’(온전한 돌들)와 상응한다. 즉 ‘까지트’(떠낸 돌)로 제단을 짓지 말라는 말은 ‘온전한 돌로’ 제단을 쌓으라는 말과 동일하다. ‘ㄱ하라브’(칼)를 돌들 위에 흔들지 않았다는 말은 ‘바르쩰’(쇠)을 돌들 위에 흔들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하다.
신명기학파는 ‘쇠’(바르쩰)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지만 출애굽기 본문은 무기로 쓰이는 ‘칼’(정)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낸다. 쇠를 칼로 바꾸어서 표현했다. 그리고 ‘온전한 돌’은 곧 ‘쪼은 돌’(까지트)이 아닌 돌을 의미한다. 신명기사가의 글에서 ‘까지트’란 단어는 여러 군데 등장한다. ‘까지트’란 단어는 왕상5:17[힙31](표역, ‘다듬은 돌’)에서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위해 준비한 석재를 지칭한다. 출애굽기의 계약법은 이 ‘까지트’로 제단을 쌓지 말 것을 명령한다. 왕상6:7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At*nOB'hiB. tyIB:ßB; [m;îv.nI-al{) lz<ër>b; yliäK.-lK' !zG:h;w> tAbÜQ'm;W hn"+b.nI [S'Þm; hm'îlev.-!b,a,( AtênOB'ähiB. 'tyIB;'h;w>
그 집을 지을 때 그 집은 채석장에서 떠낸 온전한 돌로 지어졌다. 그 집을 지을 때 그 집 안에서 망치나 정 등 일체의 쇠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싸아’는 ‘천막의 말뚝을 뽑다’/‘출발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사아’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왕상6:7에서는 박힌 돌을 제자리에서 떠내는 채석장의 작업을 가리킨다. 왕상5:31의 동사 ‘나사아’가 이 명사에 상응한다. 솔로몬은 계약법의 취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쇠연장으로 돌을 쪼을 때 나는 소리를 성전마당에서 들리지 않게 하는 것으로 계약법을 지켰다고 자위했을 것이다. 그러나 계약법의 본뜻은 채석장에서 떠낸 돌에 정이나 끌로 조삭행위를 가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즉 채석장에 투여된 노예노동력의 불법성을 지적한 것이 계약법의 참뜻이다. 솔로몬은 노예노동을 부리면서 소리만 나지 않게 함으로써 율법의 참뜻을 왜곡하였다.
다시 정리해 보자. ‘까지트’는 채석장에서 떠낸 돌들을 쪼아서 조삭행위를 가한 돌들이다. 왕상6:7의 ‘에벤-쉴레마 마싸아’를 직역하자면 ‘채석장에서 떠낸 온전한 돌’이 된다. 그렇다면 신27:5, 6과 수8:31에서 사용된 ‘아바님 쉴레모트’라는 복수형은 왕상6:7의 단수형 ‘에벤-쉴레마’와 동일한 용어임이 드러난다. ‘마싸아’가 없이 ‘에벤-쉴레마’만 쓰일 때 그것은 자연석이다. 신명기와 여호수아서의 ‘아바님 쉴레모트’도 채석장에서 떠낸 돌들이 아니라 지표에 널린 자연석들을 가리킨다. 이 돌들은 조삭행위를 가한 ‘까지트’가 아니다.
출애굽기의 저자는 계약법 서론에서 그러한 ‘까지트’로 제단을 쌓지 말라는 규정을 소개한다. 신명기사가는 여호수아가 쌓은 제단과 달리 솔로몬은 채석장에서 떠낸 돌들에 조삭행위를 가한 ‘까지트’로 성전을 지었으며 성전에 층계들을 많이 놓았다고 서술한다. 계약법 저자는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대 솔로몬 성전이 붕괴된 사실을 해석하고 있으며 왕국시대의 종교를 반성하는 모종의 신학을 펼치고 있다. 그 성찰의 결과, 시원의 제단법이 계약법 서론부를 장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흙제단이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제단이다. 불가피하게 돌제단을 쌓을 경우 쪼갠 돌(까지트)로 쌓지 말고 자연석 그대로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법규는 고대국가의 왕들이 저마다 앞 다투어 건립한 거대한 신전들과 정교하게 조각한 제단들과 그 제단에 접근하기 위해 장치한 엄청난 높이의 계단들을 반대하는 선언문이다. 솔로몬이 이러한 제왕들의 일반 관행을 떠나지 못하고 그들의 관행을 따라 조각물(까지트)로 야훼의 신전을 건설하였다. 그는 다만 정과 끌 소리가 성전마당에서 들르지 않도록 채석장에서 모든 작업을 마무리했을 뿐이다. 왕상5:32의 동사 ‘파살’이 조삭행위를 보여주고 이것은 출20:4의 ‘페셀’금령과 무관하지 않게 보인다. 느부갓네살에게 솔로몬성전이 파괴된 것은 하나님께서 성전에 부재하신 때문이었고, 주님의 부재는 성전의 불법성 때문이었다. 성전의 파괴를 목도한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이제부터 다시는 웅장한 신전을 짓지 말자고 굳게 다짐한다. 이동할 때마다 간편하게 흙으로 제단을 쌓는 것이 오히려 야훼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방식이다. 이것은 모든 왕들과 지배자들이 자랑하는 모든 제국의 위업들에 반대하는 선언이다. 더 나아가 다시는 제국을 건설하지 말자는 다짐이기도 하다.
에스겔이 제시한 성전 청사진에는 깎아 만든 돌(‘까지트’)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겔40:42은 번제에 쓰는 상을 다듬은 돌로 만들 것을 제안한다. 까지트를 금지하는 신학사상은 에스겔의 동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후대의 저자들인 신명기사가에 의해서 펼친 사상이다. 솔로몬성전의 안뜰 벽은 ‘까지트’로 건축되었고 솔로몬의 궁전도 까지트로 건축되었다(왕하7:9, 11, 12). 암5:11에는 세금포탈자의 집이 ‘다듬은 돌’로 건축되었다고 꼬집는다. 이처럼 ‘까지트’는 거룩한 제단건축에 금지되는 자재로서 이것을 금지하는 금령은 ‘너를 위하여 페셀을 만들지 말라’는 출20:4의 계명을 더 상론하는 해설문이라 할 수 있다.
출20:22~26은 신명기사가의 본문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돌제단 건축법은 신파본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신명기 27장에 언급된 제단건축명령은 여호수아 8장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의 진척요소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흙으로 제단을 쌓으라는 규정과 계단금지의 근거가 되는 ‘알몸’금지의 사상은 창세기의 에덴동산 이야기를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또한 신파본의 요소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토라의 신파본은 신명기사가의 역사서보다 더 후대의 본문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 신파본은 P에 의하여 그대로 활용되어 출애굽기의 P십계명을 위한 해설문으로 동원되었다고 판단된다.

4.4.3. 출20:22~26의 본문명상
1.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히브리어 동사형에는 대체로 인칭대명사 주격이 접미사나 접두사의 요소로 첨가되어 있기 때문에 히브리어 문장에는 평소에 별도의 인칭대명사 주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22절에는 별도의 이인칭 복수 인칭대명사 ‘아템’(אתם아템, ‘너희들은’)이 동사 ‘러이템’(ראה > ראיתם, ‘보다’)의 바로 앞에서 동사를 이끌고 있다. 별도의 인칭대명사 주어가 사용될 경우에 저자는 그 주어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22절은 ‘이스라엘 자손’을 강조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보았다는 목격행위가 강조된다. 목격한 자들은 곧 이스라엘 자손들이다. 무엇을 목격했는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늘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말씀하시는 것을 직접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스스로에 대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증인이며 간증자이다. 하나님과 친견하고 대화를 나눈 체험을 지닌 이스라엘 자손이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다. 이들이 하나님의 계약체결 상대이다.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과 친견하는 가운데 하나님과 말씀을 나눈 체험을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저마다 하나님에게서 직접 들은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스스로 만천하에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노예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다. 하나님께서 분명 시내산에 강림하셔서 그 산 꼭대기에서 백성에게 말씀하셨다(출19:18). 22절의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부터’ 말씀하셨다고 술회한다. 출20:22은 출20:18을 반복하고 있는데 출20:18은 출19:18을 잇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표현된 ‘하늘에서’란 어귀는 ‘산정에서’라는 표현과 동일하다고 이해된다. 하늘에서 ‘너희들과 함께 말씀하셨다’란 표현은 출20:19의 ‘우리와 함께’란 표현과 출24:8의 ‘너희와 함께 맺은 계약’이란 표현과 상통한다. 하나님과 말씀을 나눈 것이 출24:8에서는 계약체결로 이어진 것이다.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계획이 드러났다. 야훼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신 이유는 이 노예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려는 데 있었다. 지금까지 노예가 되어 고생하던 이스라엘 자손이 이제 막 황송하게도 바야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승격하려는 참이다. 세상의 왕들이 백성위에 군림하고 강제로 지배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은 백성 위에 군림하시지 않으시고 친히 백성과 대화를 나누시는 가운데 백성과 평등하게 계약을 체결하시는 공평무사하시고 평등하신 하나님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에게 선택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백성이 목격하고 간증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는 성립되었다. 출20:18에서도 ‘보았다’는 증언이 또렷하게 강조되어 있다(출20:18, ‘ראים로임’/ 보고 있다).

3. 하나님을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을 친견하고 그의 말씀을 들었던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만들어내려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될 수 없다. 23절의 ‘너희는 나를(‘אתי잇티’) 만들지 말라’는 말씀은 독자들을 깊은 명상으로 안내한다. ‘나를’ 만들지 말라고 강조하는 것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출20:4)을 만들지 말라는 말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역사를 속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모든 제국이나 제후국이나 왕들은 신관들을 임직시켜서 국가의 신전을 섬기게 하였다. 신전에는 그들의 신들이 봉안되어 있었고 백성들은 그 신들을 예배하도록 강요되었다. 종교의 정책에 관용을 베풀었던 페르시아 제국 조차도 왕정통치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신학체제를 강고하게 구축하고 있었다. 바빌로니아와 이집트는 더 말할 나위 없었다. 왕실에서는 특별히 금신과 은신을 많이 제작하였다. 석공예물이나 목공예물에 금과 은을 덧입히는 도금의 기술이 발달하였다. 금과 은을 입힌 신상들을 통해서 왕국의 부귀와 위용을 한껏 뽐내었다. 이로써 신들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정한 권력집단들의 이익을 대변하였다. 이것이 바로 출34:17에서 금지하는 ‘마세카’(부어만든 신상/ 주물상)이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모쉐는 그것을 일컬어 ‘금신’이라고 호칭하였다(출32:23).
서구신학에서 신인식은 신존재증명의 작업과 맞물려 있다. 인간의 인식에 하나님이 인식의 대상으로 가능하다는 이론은 하나님을 인간의 관념으로 창출할 때만 가능하다. 현대 서구문명의 신인식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최근에 ‘The God Delusion’(런던, 2006년 9월 출간)이란 책에서 종합되어 있다(‘만들어진 신’, 서울:김영사).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체제도 신의 이름으로 불리어서는 안 된다. 다만 성서가 야훼의 이름으로 명하는 말씀의 공동체만이 지구 상에 있는 모든 사회체제들에 대한 대안이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23절의 문장구문은 매우 독특하다. ‘만들지 마라’는 문구가 문장의 앞과 뒤에 반복되어 23절의 문장을 따로 독립되게 만들어서 강조한다. 동사 ‘만들다’(עשׂה아사)가 앞뒤로 배치되어 문장 전체를 포괄함으로써 문장은 교차구도를 이룬다. 이러한 문장은 열왕기상 6:7에도 나온다. 출20:23의 문장을 왕상6:7의 문장과 비교해 보자.

출20:23, `~k,(l' Wfß[]t; al{ ï bh'êz" yheäl{awE '@s,k,' yhel{Üa/ yTi_ai !Wfß[]t; al{ï 23
왕상6:7, `At*nOB'hiB. tyIB:ßB; [m;îv.nI-al{) lz<ër>b; yliäK.-lK' '!zG:h;w> tAbÜQ'm;W hn"+b.nI [S'Þm; hm'îlev.-!b,a,( AtênOB'ähiB. 'tyIB;'h;w> 7

위의 밑줄친 부분은 반복어로써 문장의 앞뒤를 장식하고 있다. 이처럼 문장의 짜임새가 서로 평행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출20:23의 문장이 신명기학파의 솜씨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신명기학파란 포로기를 살았던 신학도들이었다. 그런 만큼 페셀금령과 마세카금령은 공히 포로기 시대의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신앙을 구성하는 사상체계의 대강령이 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포로기 시대의 사회상에 비추어 출애굽기의 계약법을 읽어야하는 필요성이 여기서 제기되는 것이다.

4.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참된 예배. 출20:24에 ‘나를 위하여(לי, 리)라는 특이한 표현이 나온다. 이것은 출20:3~4에 두 차례 나오는 ‘너를 위하여’란 표현과 뚜렷하게 대비되고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만들거나 신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사람이 제사를 드릴 때는 ‘하나님을 위하여’ 드려야 한다. 제사를 드리되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는 야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제사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인 제단을 쌓을 때도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여 자기의 필요에 따라 제단을 쌓아서는 안 된다. 교회의 모든 예배는 사람이 저마다 소원을 빌면서 하나님의 자신의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는 예배일 수 없다. 오직 성도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고 하나님을 위해서 드리는 예배만이 참된 예배가 된다.

5. 인권회복의 종교로서의 야훼 종교. 하나님을 위하여 쌓을 제단으로 으뜸가는 것은 흙으로 쌓은 제단이다. ‘나를 위하여 흙제단(מזבח אדמה‘미쯔박흐 아다마’)을 만들어라‘란 표현은 출20:4의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표현과 자자구구 대조된다. 이 문장 끝에 쉐골타를 표시하여 문장을 일단 끊었다(출20:24ㅈi). 따라서 출20:24ㅈ절은 별도의 독립된 명령으로 읽어야 한다. ‘흙제단’은 이 대조법 문장에서 ‘새긴 우상’(페셀)에 상응한다. 제단을 채석장에서 떠내어 새긴 돌, 곧 페셀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신다. 채석장의 노예노동은 사람의 피를 흘리는 강제노동이다. 사람의 인권이 유린되고 착취를 당하여 사람이 피를 흘리는 과정이 야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조금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흙은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언제나 수시로 쌓을 수 있는 소형 제단으로서 어떠한 노예노동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부득이 돌로 제단을 쌓을 경우에도 역시 ‘야훼를 위하여’ 제단을 만들어야 한다(출20:25). 야훼 하나님의 제단은 이처럼 인간의 자유와 평등과 복지의 바탕 위에서 쌓아야 하는 것이다.

6. 하나님께 드리는 올바른 제사. 번제는 ‘올로트’의 번역어이다. ‘올로트’는 ‘올라가다’란 동사 ‘알라’의 명사형이다. 제물을 통째로 태워서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게 하여 하나님께 온전하게 바쳐 드리는 제사를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제물을 통째로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것을 ‘온전제’라고 번역하거나 연기가 올라가는 것을 나타내어 ‘올림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너의 번제(עלתיך ‘올로타이카’, עלה ‘올라’의 복수형 עלת ‘올로트’).
화목제는 ‘쉴라밈’의 번역어이다. 그 어원은 동사 ‘샬람’이다. ‘샬람’에서 ‘화목제’라는 뜻의 명사형 ‘쉘렘’이 나왔다. 샬람은 ‘완전함/완성함’을 의미하는데 값을 지불하거나 빚을 갚음으로써 종래의 어그러진 관계가 화평한 관계로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맹세한 것을 지키면 협약이 이루어져서 쌍방 간에 화평한 관계가 정립된다. 이것이 샬람이다. 형용사형 ‘샬렘’은 속이지 않는 정확한 저울추를 묘사하거나, 죄나 민족이나 금액 등 온전한 전체를 표현하거나, 온전한 마음자세를 나타낼 때 쓰인다. 이 형용사는 제단을 쌓을 자연석의 온전한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러한 동사, 형용사, 명사와 연계하여 ‘쉘렘’은 화목제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전하고도 충만한 계약관계를 이루는 것을 표현한다. 온전한 축복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שׁלמיך ‘쉴라메이카’, 너의 화목제물: שׁלם 쉘렘, 복수형).
출10:25에는 모쉐가 야훼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파라오에게 가축을 달라고 요구한다. 이 장면에서 모쉐는 ‘쩨박힘’과 ‘번제물’을 내달라고 요구한다. 출18:12에서 모쉐의 장인 이트로가 하나님을 위하여 ‘번제물’와 ‘쩨박힘’을 취하였다. 이 때 ‘쩨박힘’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번제물과 화목제물’은 토라에서 출20:24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그리고 이 ‘번제물과 화목제물’은 출24:8에서 처음으로 바친다.
‘너는 그 제단 위에 너의 올림제와 너의 화목제, 곧 너의 양과 소를 제물로 바쳐라. 여기서 ‘제물로 바치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원어는 ‘짜박흐’ 동사이다. 이 동사는 ‘도살하다’를 뜻한다. 동물을 잡아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가리키므로 우리말로 ‘제물로 바치다’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너는 그 제단 위에서 너의 올림제물과 너의 화목제물, 곧 너의 양과 소를 잡아라’라고 할 수 있다. 이 동사 ‘짜박흐’는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아가 야훼께 제사를 지내는 행위를 가리켜 사용된다(출3:18; 5:1<광야에서 나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5:3, 8, 17; 8:8[힙4], 25~29[힙21~25]<이 땅 안에서 제사를 지내라>). 광야의 제사는 애굽을 탈출한 후 광야로 사흘 길을 나아간 후에 드린다(출3:18; 5:3; 8:23). 이 모든 경우에 ‘번제물과 화목제물’이란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다만 출10:25에서만 번제물(올림제/온전제)을 드리기 위해서 가축을 달라고 모쉐는 요청한다.
창세기에서 화목제를 드린 이야기는 전혀 없고, ‘번제(올림제)’를 드린 경우는 더러 있다. 노아가 대홍수 후에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번제물을 바쳤다(창8:20).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모리아산으로 간다(창22:2). 번제에 쓸 장작은 준비하였으나(창22:3, 6), 번제에 쓸 어린양은 없다(창22:7~8).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에 숫양을 잡아서 바쳤다(창22:13). 조상 대대로 번제를 드렸으나 시나이산에서부터 화목제를 드리기 시작했다. 시나이산에서 비로소 이스라엘의 제의제도가 정립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이 드리는 올바른 제사법은 레위기 1~10장에서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7. 올바른 예배 장소. 24ㅎ절에 기묘한 표현이 나온다. 히브리어 ‘버콜-하마콤 아쉘 아쯔키르 엩-숴미’란 표현이다. ‘아쯔키르’(אזכיר ‘아쯔키르’)는 ‘짜카르’ 동사의 히필형으로서 일인칭 단수가 주어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이름을 기억하다’가 된다. ‘내가 나의 이름을 기억할 그 모든 장소에서’란 어디를 가리키는가? 신명기 12:5의 표현은 이것과 약간 다르다. ‘야훼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장소’는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는 것이 신12:5이 말하는 바이다. 여기서는 동사 ‘심’(שׂים)과 ‘박하르’(בחר)가 쓰였다. 그러나 출20:24에서는 ‘짜카르’(기억하다) 동사가 쓰여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할 모든 장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짜카르’ 동사가 신명기에서는 통상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역이나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사실 등을 기억하라고 권면하는 데 쓰인다. 단 한 군데 신8:18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다란 말씀이 나온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신8:18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라고 권면하지만 출20:24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한다고 언급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정하신 그 곳이 바로 성전이 된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중앙성소에 한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시는 모든 장소가 성전이 된다. 예수께서 ‘내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이는 그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은 출20:24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임에 틀림없다. 올바른 예배 장소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기억하시고 응답해 주시는 장소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이나 조형물로 장식한 예배실이 아니라 하여도 오직 예배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과 그 이름을 부르는 성도들과 그 이름을 기억하여 임재하시는 성령님이다. 그 이외의 것은 사족에 불과하다.

8. 올바른 성전. 내가 네게 와서(אבוא 아보오) 복을 주겠다(וברחתיך ‘우베랔티카’, ברך ‘바라크’)고 약속하신다. 이 경우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표상은 신12:5에도 나온다. ‘너희는 주의 거처를 찾아서 그곳으로 와야 한다.’ 동사 ‘보오’의 주어는 출20:24에서는 하나님이 되므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리킨다. 신12:5에서 동사 ‘보오’의 주어는 이스라엘이 되므로 백성이 성전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오신 그 곳이 하나님의 머무시는 거처, 곧 성소가 된다. 성소에서 하나님 야훼의 이름이 불리어지고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실 때 그곳이 바로 참다운 성전이 될 것이다. (‘바라크’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일 경우에 ‘하나님께서 축복하다’라고 번역하면 안 된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주체이시기 때문이며 ‘축’이란 말은 빈다는 제의행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9. 하나님 예배와 생명·평화사상. 부득이 돌제단(מזבח אבנים ‘미쯔박흐 아바님’)을 만든다면 조각한 돌(גזת ‘까지트’)로 제단을 쌓아서는 안 되며(בנה ‘바나’, 건축하다/짓다) 자연석으로 쌓아야 한다. 열왕기상 6:7을 보면 정(מקבת, 마케베트)이나 끌(גרזן, 까르쩬) 등 쇠연장(כל כלי ברזל, 콜-컬리 바르쩰)으로 돌을 조각할 때 그 돌쪼는 소리가 성전뜨락에서 들리지 않도록 조치하였다고 한다. 출20:25ㅎ에는 정이나 끌과 같은 연장이 아니라 아예 ‘칼’을 돌 위에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다(חרבך ‘ㄱ하르버카’, חרב ‘ㄱ헤렙’, 칼; הנפת, ‘헤나프타’, > נוף ‘누프’). ‘칼을 휘두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땅에 피를 흘리는 일을 금하시는 생명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전쟁이나 생명을 앗아갈 때 쓰는 칼을 제단돌 위에 휘두르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써 제단이 더럽혀진다. 그렇게 더럽혀진 제단에서 드리는 어떠한 제사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ותחללה ‘와턱할레하’, חלל ‘ㄱ할랄’).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은 그 예배에서 생명과 평화의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전쟁을 보면서 정당화한다든가 인권유린이나 생명파괴를 보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침묵하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10. 계단 없는 제단에서 예배를 드리자. 출20:26은 계단을 이용하여 제단에 오르지 말 것을 규정한다. 야훼를 위하여 쌓은 하나님의 제단 위에 올라가는 행위가 금지된다. 제단에 오르려면 의당 층계를 놓아야 하겠지만 아예 제단에 오르는 행위를 금하게 되면 어떠한 층계도 필요가 없게 된다(במעלת ‘버마알로트’, מעלה ‘마알라’). 제단에 오르게 되면 알몸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란다(ערותך ‘에르와트카’, ערוה ‘에르와’의 단수구성형, ‘나체/알몸’; תגלה ‘틱갈레’, גלה ‘갈라’, 드러내다/계시하다). 중동지방을 관광하면 하늘에 닿을 듯한 천제단과 같은 지구랏과 피라미드 등 신전들이 위용을 자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높고 웅장한 제단을 하나님께서는 금지하신다. 그 제단을 쌓으려면 까지트나 페셀로 작업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제단에 제사지내려면 층계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웅장한 건물을 위해서 노예노동력이 투여되어야 했을 것이고 사람이 억울하게 흘린 피는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상달된다. 인간의 억압이나 착취 위에 세워진 어떠한 종교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을 때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비로소 인지하고 수치심을 느꼈다고 한다. 성행위나 성의 노출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범죄의 결과이다.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께 제사를 지낼 때 하나님께서 만들어 입혀주신 가죽옷으로 나체를 가려야 한다. 제국의 종교들이 거대한 신전을 짓는 것은 인간이 범죄한 죄악의 결과이며 그곳에서 계단으로 제단에 오르는 행위는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로서 바벨탑을 쌓는 짓이나 마찬가지이다. 현대 교회가 더러 대형교회를 흠모하고 세상에서 그 위용을 자랑하려는 목회자들의 모든 시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리는 악한 행위가 된다. 대형교회는 이 점에서 매우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