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논문

라멕의 노래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8-08 22:09
조회
1928
라멕의_노래(김기석목사).hwp


라멕의 노래

김기석 목사

? 여름비
우리나라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산간 마을들이 떠내려가고, 저지대의 주민들이 긴급히 대피하던 시간, 팔레스타인의 가자 지구에는 이스라엘의 포탄이 빗발치고 있었다. 이른바 ‘여름비’ 작전의 시작이었다. 지독히도 잔인한 여름비이다. 팔레스타인 인민저항위원회 대원들에 의해 납치된 이스라엘의 탱크병 길라드 샬리트 상병을 구출하고, 저항 세력의 로켓 발사대를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전쟁은 엄청난 살육전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무참한 살육전은 이스라엘이 인민저항위원회 위원들 4명을 살해하고, 베이트 라히야 해변을 폭격해 일가족 7명을 죽이고 32명에게 부상을 입힌 지난 6월 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민저항위원회는 즉각 이스라엘에 로켓포로 응사했고, 길라드 샬리트 상병을 포로로 잡았다. 이것이 전쟁의 빌미였다. 가자 지구에서 유대인 정착촌의 철수를 단행했던 이스라엘의 의도가 무엇인지가 분명히 드러난 셈이다. 그들은 이제 거리낌 없이 가자 지구에 포격을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가자 지구에 대한 공격의 명분은 갈리드 샬리트 상병의 구출에 있지만, 그 속내는 집권 하마스의 지지기반인 가자 지구를 초토화시킴으로 하마스 정권의 토대를 허물려는 데 있음을 알고 있다. 이 파괴의 여름비는 아직도 그치질 않고 있다.
‘여름비 작전’ 말고도 이스라엘은 자국의 북부에서 ‘정의의 처벌’ 작전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그것은 레바논 시아파의 무장 조직인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병사 2명을 납치한 데 대한 보복 작전이다. 15년 내전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레바논이 또 다시 전쟁터로 변하고 있다. 지난 2월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멀리서 바라보며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으로 처참하게 무너진 집의 잔해를 바라보며 “너희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하고 탄식했던 예수님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내 마음이 이리도 아픈데, 시리아와 이란을 제외하고는 아랍권의 반응이 의외로 담담하다. 그것은 수니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다른 아랍 국가들이 시아파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 이란의 영향력이 아랍 세계에 확대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종파간의 미묘한 갈등을 이용해서 헤즈볼라의 근거지를 없애려는 작정한 것이다. 그 작전의 이름 ‘정의의 처벌’이 참 맹랑하다. 과연 헤즈볼라는 전적으로 불의하고 이스라엘은 정의로운가?

? 강자의 편익
불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일쑤 ‘우리’와 ‘그들’을 가르고, ‘우리’에게는 ‘정의’의 옷을, 그리고 ‘그들’에게는 ‘불의’의 옷을 입힌다. 하지만 전적으로 정의로운 나라도 없고 전적으로 불의한 나라도 없다. 불의한 것이 있다면 ‘전쟁 그 자체’일 뿐이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전쟁광들은 그들의 죽음을 ‘부수적 손실’이라고 말한다. 더 큰 악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희생은 부득이한 일이라고 말한다.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들이 부수적 손실이 되어 스러지고, 땀 흘려 세워놓은 삶의 기반이 부수적 손실이 되어 무너진다. 죽기 싫으면 피난하라고 말하고는 피난 행렬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한다. 이것이 전쟁의 실상이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전승기념탑이 서 있다 한다. 드네프르 강 언덕에 세워진 그 기념탑은 용감한 군인들의 모습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팔을 벌리고 서있는 어머니상이라 한다. 전쟁에 정의는 없다. 전쟁의 승리는 살아남는 것뿐이다. 키예프의 전승기념탑은 그런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현인 노자는 “군대가 처한 곳에는 가시덤불이 생겨나고, 대군이 일어난 후에는 반드시 흉한 해가 따른다”(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고 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가도 이런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옛 사람들은 전쟁을 상례(喪禮)로서 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을 그다지도 많이 죽였으면 애통하는 마음으로 읍할 것이다. 전쟁엔 승리를 거두어도 반드시 상례로써 처할 것이다(殺人之衆, 以哀悲泣之, 戰勝, 以喪禮處之).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이 전쟁에 참여할 수는 있다. 하지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도 죽은 자들의 아픔과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기초이다. 지금은 이런 기초가 철저히 무너진 세상이 아닌가 싶다.
이스라엘이나 미국이 벌이는 전쟁을 보면 탈리오 법칙을 넘어서는 일종의 광기를 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은 필요 이상의 보복을 금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미국은 ‘라멕의 노래’를 불러 세계를 전율케 하고 있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 남자를 내가 죽였다. 나를 상하게 한 젊은 남자를 내가 죽였다.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4:23-24). 라멕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또한 트라시마코스의 제자들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國家 政體>>에 등장하는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는 올바른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 자(ho kreitt?n)의 편익(이득: to sympheron)이라고 말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힘이 정의’라는 말이다. 오늘 우리는 ‘힘이 곧 정의’임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나라들을 보고 있다. 강자의 편익은 결코 정의일 수 없다. 우리의 양심이 그렇게 말하고, 경전이 그렇게 말한다.

? 살인 앞에 중립은 없다
다니스 타노비치(Danis Tanovic) 감독의 영화 <>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 내전을 다루고 있다. 감독은 이 영화에서 전쟁에는 승자는 없고 패자만이 있다는 사실을 매우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자욱이 낀 밤에 보스니아의 지원병들이 길을 잃는다. 그들은 더 이상 전진이 불가능하자 행군을 멈추고 아침을 기다린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세르비아 군인들의 총격이었다. 죽음의 자리에서 살아난 사람은 오직 하나이다. 그는 가까운 참호에 뛰어들어 구조를 기다린다. 한편 세르비아 진영에서는 적의 생존자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병사 두 명을 보낸다. 어느 순간 그들은 교전을 벌이고 니노(Nino)와 키키(Ciki) 두 사람만이 남는다. 그들은 증오와 적대감을 가지고 서로를 대한다. 그런데 참호에는 또 한 사람의 생존자가 있었다. 강력한 대인 지뢰를 깔고 누운 보스니아 병사였다.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그들은 각각 자기 부대에 구조를 요청하고 얼마 후 유엔 평화유지군이 도착한다. 하지만 평화유지군 지휘관은 그 복잡한 일에 연루되기를 꺼린다. 언론이 이 일에 개입하면서 그 조그마한 참호는 순식간에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된다. 평화유지군의 부사관은 상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참호 속에 있는 부상병들을 구하기 위해 진력한다. 기자가 묻는다.
“왜 이런 일을 하죠?”
“방관만 하는 게 신물 나서요.”
“어떻게 할 건데요?”
“이 나라를 전쟁광들이 망치는 걸 막아야지요. 우린 그럴 힘이 있어요.”
“당신은 중립이 아닌가요?”
“살인 앞에 중립은 없어요. 막지 않으면 이미 편든 거죠.”
“멋있군요. 카메라 앞에서 말해 주세요.”
“나는 미쳤는지는 몰라도 어리석지는 않아요.”
살인 앞에 중립은 없고 막지 않으면 이미 편든 거라는 말이 우리의 가슴을 때린다. 우리는 지중해 근방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우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 전쟁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떠한 전쟁이든 죄 없는 방관자란 없다. 막지 않으면 이미 편든 것이다. 무기보다 강한 것은 마음의 힘이다. 우리가 전쟁에 반대한다고 분명한 소리를 내게 될 때 세상은 변하기 시작한다. 이스라엘이나 미국에 반대하여 팔레스타인이나 레바논을 편들자는 말이 아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고통당하는 현실 속에서 가장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하나님의 꿈을 함께 꾸는 것이라 했다. 하나님이 지금 아파하신다. 이제는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들이 레바논을 향해 쏠 로켓탄에 ‘사랑을 담아 이 포탄을, 이스라엘로부터’라는 문구를 썼다는 말을 들었다. 이게 전쟁이다. 그 어린 아이들에게 전쟁중독자들은 공포와 미움을 주입하고 있다. 죽음을 놀이로 만드는 이 놀라운 상상력! 나의 귀에는 하박국 선지자의 음성이 절절하게 울려온다.

“네가 레바논에서 저지른 폭력이 이제, 네게로 되돌아갈 것이다. 네가 짐승을 잔인하게 죽였으나, 이제는 그 살육이 너를 덮칠 것이다.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땅과 성읍과 거기에 사는 주민에게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합2:17)

? 마음이라는 무기
이 무서운 폭력의 세상을 이길 새로운 무기는 우리 마음이다. 폭력과 전쟁의 광기에 대해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말할 때, 그리고 평화의 노래를 힘차게 부를 때 폭력과 전쟁의 먹장 구름은 사라질 것이다. 세상은 어처구니없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나는 정현종 시인의 <요격시>를 다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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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발사합니다

두루미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미사일에
기러기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폭탄에
도요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전폭기에
굴뚝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포탄에
뻐꾸기를 발사합니다 무기 공장에
비둘기를 발사합니다 무기상들한테
따오기를 발사합니다 정치꾼들한테
왜가리를 발사합니다 군사 모험주의자들한테
뜸부기를 발사합니다 제국주의자들한테
까마귀를 발사합니다 승리 중독자들한테
발사합니다 먹황새 물오리 때까치 가마우지……

하여간 새들을 발사합니다 그 모오든 死神들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