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향유 부은 여인 (김기석 신부)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8-03 21:47
조회
2586
2007년 7월 30일

향유 부은 여인
(눅 7:36`50)

김기석 신부 (기획위원)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죄 많은 여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방금 복음서 낭독을 통하여 들으셨듯이, 예수께서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음식을 잡수시는데 그 동네에 사는 행실이 나쁜 여자가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의 발에 부어드렸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은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이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 하며 못마땅해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더 크게 기뻐하고 탕감해준 사람을 더 많이 사랑한다면서, 죄 많은 그 여자의 극진한 사랑을 칭찬하며 그 여자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시면서, 마침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라”고 선포하십니다.

먼저 오늘의 본문을 성서 전체의 맥락 속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시다.
오늘 본문과 비슷한 내용이 다른 복음서에도 모두 나옵니다만,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약간씩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복음본문인 루가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마태복음과 마르코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모두 베다니아에서 일어난 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와 루가복음에는 나병환자 시몬의 집으로, 요한복음은 누구의 집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대신에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가장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즉 나자로와 마르타가 나오고 향유를 부은 여자는 바로 마리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마태와 마르코는 향유를 머리에 부은 것으로, 요한복음과 루가복음은 발에 부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도 재미있는 차이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본문인 루가복음과는 달리 나머지 세 복음서에서는 모두 향유를 부은 여자의 행위를 나무라는 사람들이 제자들이며, 그들 모두는 향유를 팔면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값비싼 향유를 낭비했다는 비난을 여인에게 퍼붓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장례를 예비한 것이라며(요한), 또는 자신이 그들과 오래 같이 있지 못할 것임을 알려주면서 여인의 행위를 옹호하고 칭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루가복음 외에 나머지 세 복음서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장소의 공통점과 비난한 사람들이 제자들이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병행구절로 소개되고 있습니다.(마태 26: 6-13, 마르코 14: 3-9, 요한 12: 1-8) 따라서 어떤 여자가 예수께 향유를 부어 드린 일이 베다니아에서 한 번, 그리고 루가복음에 나온 것처럼 바리사이파 사람 집에서 별도로 또 한 번, 즉 두 번 일어나지 않았을까 추측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이런 일은 좀처럼 자주 일어나기 어려운 매우 희귀한 사건이므로 아마도 단 한 번 일어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서학자들은 이런 점에 대해서, 복음서가 입으로 오래 전승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기록되는 과정에서 각 복음서 기자마다 전해들은 이야기가 조금씩 차이가 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문자적으로 읽고 해석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소위 창조과학회라는 사람들은 성서의 창조 이야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쓰여진 문자 그대로 6일만에 세계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만, 그 신앙을 지키려는 뜻은 가상하지만 성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우리를 올바른 신앙, 진리로 인도할 수 없다는 점을 여러분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오늘의 말씀으로 되돌아가서, 루가복음과 다른 세 복음서의 이야기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사건으로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집에 초대 받아 제자들과 식사하러 갔었는데 어떤 여인이 와서 향유를 부어드렸고, 그 여자는 동네에 소문난 여자였다는 사실, 그래서 제자 또는 지켜보던 사람들이 이를 두고 예수께서 예언자라면서 행실 나쁜 여자의 시중을 받는다느니,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줄 것을 낭비한다느니, 이러쿵 저러쿵 수군거리며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자를 적극 옹호하시며, 이 여자의 죄는 용서 받았다고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서 본문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정리하고, 향유를 부어드린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봅시다.
제가 요즘 깊이 공감하면서 읽고 있는 신학자가 있는데 원복이라는 책을 쓴 매튜 폭스라는 사람입니다. 원복이란 책 제목은 오리지날 블레싱을 번역한 것으로, 원죄라는 단어에 대칭되는 개념입니다. 그는 원래 가톨릭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였는데 얼마 전 미국성공회 사제로 적을 옮겼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영성에는 두 갈래의 전통이 있는데, 하나는 원죄를 강조하는 타락/속량의 전통이요, 다른 하나는 원복을 강조하는 창조중심의 전통이라고 합니다. 타락/속량 전통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신앙이 죄와 죽음, 심판과 구원 등 부정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해왔다고 지적하면서, 창조중심 영성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선한 의지로 창조하신 우주와 자연 속에서 기쁨을 누리고 인간에게 내려주신 원래의 복(원복)을 경축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즐거운 친교를 나누고 희망을 일으켜 세우는 일들로 채워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오늘날 우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들, 즉 생태계 파괴의 위기와 핵 무기의 위협, 폭력과 전쟁, 굶주림과 과소비, 그리고 무관심과 절망으로 나타나는 우리들의 근본적인 위기를 해결하려면 타락/속량의 패러다임에서 창조중심의 영성의 새로운 종교적 패러다임으로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타락/속량의 전통은 기껏해야 어거스틴(354-430)의 시대부터 그 사상적 기원을 찾을 수 있으나, 창조중심의 영성의 뿌리는 창세기를 기록한 야훼 신앙이 형성된 기원전 9세기 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합니다. 타락/속량 전통은 자연을 타락했다고 보며 자연 속에서는 하느님을 추구하지 않고, 개인의 영혼 속에서만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는데, 이것이 잘못된 신앙으로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나누어 영혼만이 하느님께 속한 것이고 육체는 악마에세 속한 것으로 보는 편협된 신앙을 가져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느님께서 매일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한 가지씩 창조 사역을 마칠 때마다 매번 “보시기에 참 좋았다”라고 감탄하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자연 세계와 육체는 하느님이 저주한 영역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쁨으로 복을 주신 영역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책을 사서 읽거나, 신학교에 입학하시어 다음 학기부터 저와 같이 공부하시면 되겠습니다.
“타락/속량 영성은 믿는 이들에게 새 창조계나 창조성, 정의 구현과 사회 개혁, 에로스나 놀이나 기쁨을 가르치지 않으며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고 만다. 땅을 사랑하거나 우주를 돌보기를 가르칠 줄 모르며, 열정을 하도 겁내는 나머지 인간 역사상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인 아나윔(가난한 사람들)의 열정적 호소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오늘날 서구 기독교가 급속도로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전 유럽의 교회들이 텅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많은 분석들이 가능하지만, 지난 수 세기 전부터 서구가 근대과학과 산업혁명 이래 세계를 이끌어온 정신적 가치는 기독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와 개인의 존엄성, 자유 등의 소중한 것들을 얻었지만 반면, 어두운 그림자로서는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생물 멸종과 남성에 의한 여성차별, 인종차별, 종족살상, 제 1세계와 3세계간의 극심한 빈부격차, 폭력적 공산주의, 과소비하는 자본주의, 개인주의 등의 문제를 낳았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기독교가 마땅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서구 교회가 비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파를 막론하고 전체 기독교가 고전하는 와중에서 그나마 신자가 증가하거나 현상 유지를 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는데, 그것은 성령운동을 강하게 실천하는 복음주의 내지는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게 대안인가보다 하고 그쪽으로 가서 기웃거리는데 제가 보기에 그게 대안은 아닙니다. 일시적, 피상적인 위안을 주기는 합니다만, 성령운동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회심과 영적 각성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위에서 말씀드린 전 지구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생기는 그런 문제점들을 직면할 수 없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전 지구적, 우주적인 차원을 함께 고려하는 성령운동이라야 올바른 회심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몸과 마음의 통일을 강조하고, 자연과 영적인 세계를 동시에 하느님의 축복의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매튜 폭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2천 년 전 소위 차축시대라 하여, 인류가 바퀴를 발명한 뒤로 끊임없는 대규모 전쟁과 살육을 통해 제국을 세우던 시대에 예수께서는 사랑과 평화와 용서의 원리가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전쟁 로마군대가 세계를 정복하고 힘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던 시대에, 예수께서는 끝없는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당시 모든 종교가 사람들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가르치던 시대에 예수께서는 무제한적 용서가 하느님의 본성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사실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 속에서 이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웠습니다만, 특히 당시의 학식이 높거나 종교 지도자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치였으나, 가난한 이들, 창녀와 세리들, 죄인으로 여김 받은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을 복음, 즉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무의미한 물리적 세계로부터 아름다운 별과 지구와 생물들을 탄생시켰고, 향기로운 꽃들과 온갖 열매 맺는 곡식과 나무들, 그리고 갖가지 뛰노는 동물들을 지어내셨으며, 마침내 당신의 모습을 닮은 우리 인간들, 성인과 예술가들을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창조세계가 전쟁과 탐욕으로 고통 받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는 생태계 파괴와 전쟁, 기아 질병 등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2천년전 예수께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셨듯이 우리도 지금의 세계와 다른 새로운 세계를 꿈꾸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창조질서가 회복되는 세상입니다. 일례로 오늘날 전 세계 국가들이 전쟁과 전쟁준비를 위하여 소비하고 있는 군사비의 단 2주일 치가 170억이라고 하는데 이 비용이면 전 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왜 필요합니까? 전쟁도, 전쟁준비도, 군사훈련도 국방비도 필요없는 세상이 왜 가능하지 않은건가요? 우리는 군사훈련이라는 놀이 대신에 연극과 노래와 서커스와 불꽃놀이와 꽃잔치가 더 재미있고 즐겁지 않습니까?

오늘 복음 본문의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예수의 말씀을 복음으로, 즉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인 사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으나, 예수께서는 그 여자의 죄를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는 향유로 주님께 응답하였습니다. 그 향유는 삶을 경축하는 아름다운 향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식물이 꽃과 열매에 향기를 머금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 식물들을 향기롭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향기로운 기름에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깃들도록 축복하신 아름다움이 담겨있습니다. 그 여인은 타인의 삶을 단죄하고 심판하고 손가락질하는 타락/속량의 논리에 구속되지 않고, 하느님의 창조의 기쁨을 내면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기에 당당하게 나아와 향기로운 기름으로 예수님을 씻겨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이 여자처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하늘나라가 여기 임하였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죄인들의 마당에서 바로 하늘나라의 잔치판을 벌리셨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해 봅시다.
먼저 우리는 최소한 향유를 바치는 자리에서 헐뜯는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남이 뜻있는 일을 할 때 격려나 축하하지 않고 꼭 뒤에서 이러쿵 저러쿵 딴지 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기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느님 창조사역의 기쁨을 가슴으로 경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남이 향유를 바칠 때 비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향유를 바치는 사람이 됩시다. 가정에서 가족을 사랑함에 있어서, 말로만 아니라 몸으로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향유를 사용해서 하느님의 창조세계에 주신 낭만과 에로스를 보다 풍성하게 향유하시기 바랍니다. 자녀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몸으로 안아주며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 말로 하는 것보다 훨씬 좋을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 자신이 이 사회 속에서 이웃들에게 향유를 바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여자가 향유를 바칠 때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 찼습니다. 향기 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기쁨과 즐거움이 솟아납니다. 우리는 예술과 에로스와 낭만을 즐기고 인생을 경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선 싼 종이에 생선냄새 나고 향 싼 종이에 향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슴에 향기를 품은 사람이 되어 이웃들에게 향기를 전해 주는 사람이 됩시다. 교회에서도 열심히 예수님께 향유를 바치고 교우들에게 향기를 전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가장 귀한 피조물인 우리에게서 향기가 아니라 악취가 나면 되겠습니까? 내가 전할 수 있는 향기가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향기의 원천은 하느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식물이 태양빛을 받고 온 힘을 다해 양분을 빨아들여 향기로운 액체를 꽃과 열매로 맺어 다른 생명에게 기쁨을 주듯이, 우리의 향기 역시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소중한 삶의 열매들을 기쁨으로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