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참평화 (장윤재 교수)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6-25 21:47
조회
1938
2007년 6월 24일

“참 평화”
(요한 14:27, 마태 18:12-14)

장윤재 (기획위원)

미국의 하버드 보건대학원이 미국인에게 가장 흔하면서도 치명적인 질병의 순위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1위였겠습니까? 암? 뇌졸중? 심장병? 놀랍게도 1위는 mental depression 그러니까 우울증이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신체에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사람도 평생 한번 이상 앓는다는 가장 흔한 질병이 바로 우울증입니다. 그런데 이 병이 왜 치명적인가 하면 자살자 2명 중 1명, 곧 절반이 바로 우울증 환자이기 때문입니다.

우울증은 소득수준이 올라갈수록 증가한다고 합니다.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의 국민 중에 우울증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는 듣기 어렵습니다. 부유한 북유럽과 북미주의 선진국에서 자살자가 많습니다.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유명인들과 부자들에게도 우울증이 많다고 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서도 살면서 인생이 너무 고달프고 외로워 죽고 싶을 때가 있으셨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그럴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제가 잡지 기사 하나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제목은 ‘죽고 싶을 때’입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하루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말아 보십시오. 배고파 죽습니다! 죽지 않았다면 그 전날 하루 동안 못 먹었던 음식을 몽땅 다 먹어 보십시오. 배 터져 죽습니다! 이것도 안 되면 하루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말아 보십시오. 심심해 죽습니다! 그래도 안 죽으면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두 배로 열심히 해보십시오. 힘들어 죽습니다! 혹시 그래도 안 죽으면, 5백 원만 투자해서 즉석복권을 산 뒤 긁지 말고, 그냥 하염없이 바라만 보십시오. 궁금해 죽습니다! 한참 뒤 궁금해서 죽을랑 말랑할 때 긁어보십시오. 반드시 꽝일 겁니다. 그러면 열 받아 죽습니다! 그렇게 하고도 못 죽었다면 길거리로 뛰어나가 미친 듯이 마구 소리를 질러 보십시오. 창피해 죽습니다! 이상의 방법으로도 죽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직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신의 메시지입니다.”

우울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중 하나인 ‘분노’를 잘 조절하고, 표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분노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단지 지금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려주는 신호등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분노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싫어해 무의식 세계에 차곡차곡 쌓아두면 어느새 심한 우울증과 자신감 상실로 이어집니다.
얼마 전 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미국 버지니아공대 무차별 총격사건의 범인 조승희씨도 마음속에 분노가 끓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아가 완성되지 않은 시기에 이민을 가 성장하면서, 갑작스런 언어와 문화의 단절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아픔을 겪게 되었습니다. 어눌한 영어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고 아무도 자신의 아픔에 귀기울여주는 사람 없는 세상에 대한 미움을 하루하루 키워갔습니다. 그는 상처받고 좌절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참 평화를 갖지 못했던 영혼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총 쏘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하면서, 정신적인 탄약을 장전해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순간 거대한 굉음을 내며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조승희씨 사건에서 우리의 마음이 더욱 아파지는 것은, 우리 사회에도 손에 총기만 주어진다면 조승희씨보다 더 무서운 일을 내고도 남을 분노한 영혼, 좌절과 비탄에 빠진 영혼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안의 분노는 어느 정도일까요? 제가 드리는 다음의 열 가지 질문에 답해 보십시오. 10개 중 몇 개나 해당되는지, 옆 사람 안 보이게 손꼽아 보시기 바랍니다. (1) 너무나 화가 나 남에게 물건을 집어던지거나 문을 세게 닫은 적이 있다. (2) 불쾌했던 장면을 떠올리면 금세 화가 난다. (3) 미용사나 이발사가 내가 원했던 것보다 더 짧게 자르면 며칠이 지나도 계속 화가 난다. (4) 운전 중 누군가가 앞으로 끼어들면, 경적을 누르며 욕을 한다. (5) 지난 몇 년 동안 친한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절교를 선언한 적이 있다. (6) 가족의 고쳐지지 않는 작은 습관들이 나를 분노하게 한다. (예를 들어 치약 짜는 습관 등) (7) 타인과 논쟁할 때 맥박이 더 심하게 뛴다. (8) 다른 사람의 무능함이 나를 화나게 한다. (9) 상점 점원이 잔돈을 잘못 계산할 경우 나를 의도적으로 속이려했다고 생각된다. (10) 다른 사람이 약속시간을 어기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 몇 개나 되십니까? 이상의 질문에 4-7개 정도 ‘예’라고 답한 분들은 지금 신체적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분노상태에 있으며, 8개 이상이면 지금 즉시 예배를 중단하고 병원으로 달려가야 할 매우 위험한 상태입니다.

분노에 대한 바람직한 해결방법은 남에게 소리를 지르는 ‘공격적’(aggressive) 방법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못하고 당하는 ‘수동적’(passive) 방법도 아니라고 합니다. 대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하고 적절하게 표현하는 ‘단언적’(assertive) 방법이라고 합니다. 조승희씨가 남긴 메모 속에는 이런 섬뜩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너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you caused me to do this). 여기서 ‘너’가 누군지 아직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기서 주어는 ‘너’이고 그에 대한 원망이 표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건설적인 분노 표현방법에서 주어는 ‘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너’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나’의 아픔이 표현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너가 어떻게 잘못했다’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상처 받았어’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나는 이렇고 저렇다’는 식의 표현이 분노를 다스리는데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분노라는 감정은 정확하고 적절하게 표현되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살다가 ‘자랑거리’도 속에 가두고 있으면 병이 되는데 하물며 분노야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뒤늦게 골프하는 재미에 푹 빠지셨습니다. 틈만 생기면 골프장에 나가 스윙 연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처럼 구름 한 점도 없이 화창하고 맑아, 골프치기 딱 좋은 주일날 아침, 이 목사님은 갈등에 빠졌습니다. ‘내가 우리교회 예배를 인도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그러나 골프에 대한 욕망이 그를 압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곧 교회에 전화를 걸어 오늘 몸이 아파 못 나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골프장으로 직행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천사가 하나님께 달려가 보고했습니다. “하나님 저 목사 좀 보세요. 혼 좀 내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시원한 필드 위에 선 목사님, 1번 홀에서 티업을 하고 볼을 향해 힘찬 스윙을 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뒤에서 바람이 불더니 그 볼이 무려 350m나 날아가 그린 위에 떨어졌습니다. 이어 볼은 데굴데굴 구르더니 홀컵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홀인원’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 한 번도 하기 힘들다는 그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목사님은 자신이 한 일에 너무도 놀라고 흥분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놀라고 충격을 받은 것은 천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달려가 따졌습니다. “하나님 뭔가 실수하신 것 아닙니까? 벌을 주셔야지 홀인원이 말이 됩니까?” 그 때 하나님은 미소를 지으시며 천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한번 생각해 보렴. 저 목사가 저걸 누구한테 자랑하겠니?”
그게 바로 벌이었습니다. 평생 자랑하며 살아도 될 일을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만약 벌이라면, 내 마음 속의 분노를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벌 중의 가장 큰 벌입니다. 분노라는 정상적인 인간의 감정은 정확하고 적절하게 표현되어야 하겠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최소한 1시간 정도는 가족과 대화시간을 갖고 힘들고, 불쾌하고, 좌절하고, 기뻤던 일이 무엇인지 마음의 통로를 열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분노감이 우리 안에 누적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합니다.
그런데 분노가 우리 안에 누적되지 않기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기도할 줄 모른다는 데서 비롯된다.” 요즘 기독교인들의 기도는 이것저것 달라는 요구로 시끄럽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뜻하는 구약성서의 ‘히트파레르’라는 낱말의 원뜻은 ‘거울에 비추어 보다’입니다. 기도는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하나님이라는 절대자의 맑은 거울 앞에 비춰보는 명상의 행위입니다. 때문에 기도는 무엇보다도 침묵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어느 시인은 “침묵 속에 느림의 여유가 있고, 영혼의 자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가장 낮고 겸손한 침묵의 눈으로 보면, 사람들의 온갖 상처가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시기 위해 먼저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고 침묵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생각을 하면 사람을 움직일 수 있지만,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로써 사람은 강해지고 하나님의 마음은 약해지신다.” 그리고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면 믿게 됩니다. 믿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섬기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참 평화를 주는 가장 큰 힘의 원천인 것입니다.

그런데 참 평화는 우리들 가운데 부서지고 상처 입은 영혼이 없도록, 돌보는 것에서 완성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평화를 뜻하는 말이 있습니다. ‘샬롬’입니다. 그런데 샬롬은 특별한 신학적 용어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의 매일의 인사말입니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여 밤낮으로 전쟁에 시달리다보니 그들에게 평화보다 더 값진 것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한 나라의 인사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나라 국민의 역사와 삶을 엿볼 수 있다고 합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인사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혹은 “진지 잡수셨나요?”였습니다. 얼마나 밤새 안녕하지 못한 일이 많았으면, 얼마나 밥 굶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그것이 인사말이 되었겠습니까. 샬롬, 그 성서의 용어는 이스라엘 역사 한 가운데서 간절하게 피어났던 소망의 언어였습니다.
사용하는 평화라는 말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물론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사용하는 평화라는 말과 다른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샬롬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더 능동적입니다. 비록 전시가 아닌 평시라 하더라도, 만약 전쟁과 갈등의 불씨가 되는 사회적 불의와 억압이 남아 있다면, 성서는 그것을 결코 샬롬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샬롬은 소극적인 평화가 아니라 적극적인 평화입니다. 샬롬은 첫째 ‘정의’를 강조합니다. 정의의 바탕 위에 세워진 평화가 샬롬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특별히 돌보시는 야훼 하나님은 ‘정의에 기초한 평화’를 공조하십니다. 둘째로 샬롬은 사회 전체의 ‘온전성’을 강조합니다. 샬롬의 반대말은 ‘쉐다’인데, 그 뜻은 무엇이 ‘깨지다’ ‘쪼개지다’ 혹은 ‘상하다’입니다. 만약 한 마을 구성원 100명 가운데 99명이 아무리 행복해도 그 중 단 한 명이라도 슬픔과 고통으로 깨지거나 쪼개지거나 상하면, 성서는 그것을 샬롬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저 끔찍했던 대구 지하철 화재참사가 우리에게 그것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제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첫 학기 지방의 한 신학대학으로 강의를 갈 때의 일입니다.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냄새 하나는 참 잘 맡습니다. 서울에서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거기서 안심역까지 대구 지하철을 이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코가 예민한 저는 대구 지하철 중앙역 쪽에서 불어오는 그 참혹했던 사건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뉴욕 맨해튼에서 유학할 당시 911 사태로 무너졌던, 그 쌍둥이 건물에서 불어오던 것과 똑 같은 냄새였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모든 물질들과 시신들이 함께 타서 만드는 지옥의 냄새였습니다. 57세의 한 남자가 IMF 이후 어려워진 삶을 비관하다, 혼자 죽기는 억울하다고 휘발유를 뿌려 지른 불에, 아무 죄도 없는 수백 명의 고귀한 생명이 그렇게 덧없이 죽어가지 않았습니까. 그 때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도 지하철 근처는커녕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 가지도 못하는,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겪고 있다고 합니다. 한 개인이 깨지고 쪼개지고 상하니 온 사회의 평화가 깨졌습니다. 샬롬의 평화가 깨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 남자가 정신병자여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경찰청 통계에 의하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에 대한 사회적 원한으로 방화범죄가 꾸준히 증가해 왔다고 합니다. 눈에 띄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 한국사회 상류층의 범죄는 17%나 줄어든 반면, 하류층의 범죄가 수직 상승했는데, 그 범죄자들의 연령이 청년대가 아니라 40-60대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렇게 그 57세의 대구 지하철 방화범은 ‘만들어’졌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도 들어주지 않던 그의 분노는 한순간에 폭발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적 정의와 서로 돌보아주는 관계가 끊어져버려, 샬롬이 깨진 사회 속에서 이미 그 끔찍한 범죄는 자라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 이태수는 그의 시 ‘이제는 촛불을 밝힐 때’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누가 이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랴. 이 경악을 남의 탓으로 돌릴 수 있으랴. 우리는 사랑으로 따스하게 끌어안지 못하고 나눔과 베풂보다는 차지하고 빼앗았으며, 위로 아래로 자기밖에 몰랐다. 재앙의 불씨를 키웠다.”
조승희씨 사건이 미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에 쌓인 분노를 표출시키는 도구만 달랐을 뿐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번 버지니아공대 총기 참사를 계기로 미국 네티즌 사이에 ‘외톨이들에게 관심을 갖자’는 운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미국의 네티즌들은 “이 사건 이후 나는 모든 외톨이들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려고 한다”며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미소를 던지고 외로워 보이고 말이 없는 사람들을 반갑게 대하고 직접 찾아 가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한 네티즌은 “이번 총기참사가 우리에게 교훈을 남겼는데,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미소 짓고,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고 썼습니다. 여기 이 ‘의무가 있다’는 말, 참 중요하게 들렸습니다.

1935년 어느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피오렐로 라과디아 판사는 뉴욕시 한 빈민가의 야간법정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날 누더기 옷을 걸친 한 노파가 끌려 왔습니다.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였습니다. 그 노파는 울면서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사위란 놈은 딸을 버리고 도망갔고, 딸은 아파 누워있으며, 어린 손녀들은 굶주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빵가게 주인은 비정했습니다. 고소취하를 권면하는 라과디아 판사의 청을 물리치고 빵가게 주인은 법대로 처리할 것을 강력히 요청했습니다. 도리가 없었습니다. 라과디아 재판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노파를 향해 이렇게 선고합니다. “법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할머니, 벌은 받아야 합니다. 10달러의 벌금을 내시거나 10일 동안 감옥에 가십시오.” 그러더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주머니에서 10달러짜리를 꺼내, 자신의 모자를 뒤집어 그 안에 넣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최종선고를 내렸습니다. “여러분, 여기 벌금 10달러가 있습니다. 할머니는 벌금을 완납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굶주린 손녀들에게 빵 한 조각을 먹이기 위해 도둑질을 해야 하는 이 비정한 도시에 사는 죄를 물어 이 법정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50센트씩의 벌금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자를 법정 경찰에게 넘겼습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빵을 훔쳐 손녀들을 먹이려 한 노파에게 총 47달러 50센트의 벌금이 전해지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된 빵가게 주인과 법정에 있다가 갑자기 ‘죄인’이 돼버린 70명의 방청객들, 그리고 뉴욕 경찰들까지 범금을 물어야 했다. 어젯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빵가게 주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벌금을 낸 흐뭇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뉴욕시에는 두 개의 공항이 있습니다. 하나는 J.F.K. 공항이고 다른 하나는 라과디아 공항입니다. 라과디아 공항은 뉴욕의 맨해튼을 오늘날의 맨해튼으로 만든, 뉴욕시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바로 그 피오렐로 라과디아 재판장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그는 깊은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법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나눔의 정신이, 참 평화가 다스리는 사회를 만드는 진정한 힘임을 알고 실천했던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요한 14:27) 그는 또 그가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의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의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1)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와 기쁨입니다. 그가 주시는 평화와 기쁨은 내 영혼 가장 깊은 곳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해주시는 하늘의 능력입니다. 또한 그가 주시는 평화와 기쁨은 우리 가운데 깨어지고 상처 입은 영혼들의 작은 신음소리에도 귀 기울이게 만드는 하늘의 힘입니다. 이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 가운데 항상 넘쳐흐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