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성령으로 가난을 누리자 (이영재 목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6-12 21:46
조회
2012
2007년 6월 두번째 주

성령으로 가난을 누리자
(마 5:2, 눅 6:20)

이영재 목사 (본원 연구 실장)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 사건을 기념하여 온 교회는 성령강림절을 지킵니다. 이 기간에 교회는 성령님이 세계를 움직여 가고 있음을 지켜보면서 성령의 운동에 동참하러 나섭니다. 성령강림절에 우리도 한국사회를 꿈틀거리게 만드시는 성령님을 인식하면서 성령운동에 우리를 투신해 나갑시다.

한국기독교 백년사는 한국근현대사와 일치합니다. 교회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서 열심히 섬겨왔습니다. 서구에서 온 선교사님들은 서구의 문명을 기독교의 이름으로 전파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한국인 전통의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성서를 한국의 상황에서 읽고 사고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한국교회는 서로 다른 동서양의 두 문명들을 무리 없이 잘 융합해 냈습니다.
서양의 자본주의 운동을 기독교운동과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자본의 논리에 따라 동양으로 진출한 서양의 상인들은 큰 이득을 올려 부자가 되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해적처럼 상선을 타고 왔습니다. 서양인의 상선에 예수님의 복음도 실려 왔습니다. 복음은 서양상인들의 악한 야욕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동양인 가운데서 역사하였습니다. 복음은 악한 세상 속에 누룩으로 들어가 온 반죽을 부풀렸습니다. 인권, 자유, 사유재산권, 참정권, 노동권,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근대문명의 가치들이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에서 정립되었습니다. 그 과정에 교회는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이런 방식으로 이 땅에 복음의 씨알을 뿌렸습니다.

사회운동가들 중에는 더러 기독교를 서양제국주의자들의 침략도구로 비난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동서양의 문명충돌이라는 큰 흐름에 대해 너무 비관하고 있습니다. 침략자는 새로운 문물을 전달하고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갈 뿐입니다. 땅을 딛고 사는 주민들은 끊임없이 바깥에서 오는 충격들을 흡수하고 자기 안에서 부정과 긍정의 과정을 거쳐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융합해 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운동하는 방식입니다.
기실 제국주의는 그 안에 기독교를 안고 있어서 기독교 때문에 스스로 변화될 것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또한 기독교를 움직이는 것은 성령님이시며 성령님을 통해 성경의 말씀이 세상에 선포됩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움직이는 어떠한 운동도 가로 막고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사회운동은 흥할 것이요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사회운동은 절대 망할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은 생명을 착취하고 부정하는 어떠한 세력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임을 알려 줍니다.

마태복음서에는 ‘산상설교’가 있고 누가복음서에는 ‘평지설교’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큰 기쁨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서 6장 20절에 ‘가난한 사람들은 지극히 해복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문에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Maka,rioi oi` ptwcoi,)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 지극히 행복한 상태에 있다는 새로운 인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평생 부자로 한번 살아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인생들에게 이 복음은 거침돌이 됩니다.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깨우치는 사람에게 이 말씀은 무한한 행복과 자유의 원천이 됩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깨우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습니다. 더구나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 중에서도 이 ‘가난한 자의 복음’을 깨우쳐 살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박사학위를 하고 신학교 강단에서 가르치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이 진리를 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성서번역자들이 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에 마태복음서 5:3의 말씀을 잘못 번역하였습니다. 원문을 보면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Maka,rioi oi` ptwcoi. tw/| pneu,mati)라고 되어 있습니다. 개역성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복되다’라고 번역했고 표준새번역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누가복음서의 말씀에는 없는 ‘토 프뉴마티’란 어귀를 마태가 첨가하였습니다. 이것을 ‘심령/마음이 가난하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실제로 가난한 것과 마음이 가난한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토 프뉴마티’를 ‘마음이’라고 번역한 것은 말씀을 깨우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오역입니다.
‘가난한 자가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태가 이해하지 못하여 왜곡시킨 것일까요? 아니면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덧붙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도 저도 아닙니다. 마태는 누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수받은 분입니다. 마태가 ‘토 프뉴마티’란 말을 덧붙인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바르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뉴마티’는 ‘프뉴마’의 여격입니다. 직역하자면 ‘프뉴마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복되다’가 됩니다. ‘프뉴마’를 히브리어로 보면 ‘루악흐’입니다. 오경을 보면 ‘루악흐’란 히브리어 단어가 딱 70회 나옵니다. 그리스어 성경은 이것을 모두 ‘프뉴마’라고 번역했습니다. ‘루악흐’나 ‘프뉴마’나 같은 말입니다. 이 단어들은 보통 ‘성령’, ‘영’, ‘신’, ‘바람’,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 뜻은 매우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을 발휘하시고 창조하신 세계를 만들어 가실 때 상용하시는 ‘힘/에너지/기(氣)’입니다. ‘프뉴마’를 ‘마음’이라고 번역하면 너무 좁게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에게 가난하다’란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마음’을 가리키는 그리스어는 ‘카르디아’입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을 보면 ‘마카리오이 호이 카타로이 테 카르디아’ (maka,rioi oi` kaqaroi. th/| kardi,a|)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카르디아’를 ‘마음’으로 번역하는 것은 옳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복되다’라고 번역됩니다. 그러나 ‘프뉴마’를 ‘마음’으로 번역한 것은 지나치게 인간중심의 번역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에게 가난한 사람’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두 가지 원리를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마5:3의 바탕에 눅6:20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 둘째는 마태는 산상설교를 작성하면서 출애굽기나 신명기의 십계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주지할 것. 첫째 원리를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은 실제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 변함이 없습니다.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는 있으나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는 식의 도피구는 없어집니다.
마태는 산상설교를 쓸 때 출애굽기의 시내산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소위 ‘팔복’이라 불리는 말씀을 잘 뜯어보면 십계명처럼 열 가지 사항으로 된 ‘십복(十福)’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의 십복은 구약성서의 십계명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야훼는 애굽에서 노예노동에 고통받는 히브리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점(출20:2)을 마태는 주시한 것입니다.
십계명은 야훼 이외의 ‘다른 신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출20:3). 세상의 다른 신들은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표상했습니다. 상층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며 왕정체제를 옹호했습니다. 노예노동을 정당화하는 신들이 곧 ‘다른 신들’입니다. 십계명은 이러한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오직 구원하시는 야훼 하나님만을 섬겨야 합니다.

노예를 억압하는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전용된 ‘다른 신들’을 형상으로 만드는 일체의 조삭행위를 근절하고 또 그 조형물인 우상에게 절하는 어떠한 복종행위도 해서는 안 됩니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취하려는 인간의 어떠한 시도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출20:4). 노예들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일주일에 하루를 쉬어야 한다는 안식일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출20:8~11)는 것이 십계명의 요체입니다. 이것은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노예들에게 복음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원리를 따를 때, 마태복음에 번역된 ‘심령/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번역은 이제 ‘성령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고쳐서 읽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서의 산상설교를 흔히들 ‘제자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에게 산에 않으시고 제자들을 불러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난해진 사람들입니다. 마태10:9~10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아무 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야말로 알거지로 다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피골이 상접하신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몇 시간도 견디지 못하고 절명하실 만큼 허약해져 있었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온 무리들은 광야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었습니다. 모두 주린 배를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바울 사도도, 요한 사도도 아무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무능해고 게을러서 가난했습니까? 바울 사도는 끊임없이 천막짜는 일을 했습니다. 예수의 사망 후에 베드로가 다시 고기잡는 어부의 생업으로 돌아갔을 때 주께서 다시 베드로를 심방하여 그를 생업으로부터 이끌어내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이 스스로 가난한 상태로 뛰어 들어가서 거기서 가난을 누리고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 가운데서도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원효대사는 ‘배가 고파 창자가 끊어질듯 한데 먹고 싶은 생각을 버린다’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스스로 가난한 상태로 돌입하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것이며 성령께서는 하나님나라를 향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천상의 지복을 내려 주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에게 멸시당하고 천대받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인간은 더욱 물질에 종속되고 사람들에게 아첨을 당하여 저도 모르게 교만해 집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낮은 위치에 처할 때 성령이 강하게 작용합니다(민12;3).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부흥은 오직 이 원리 위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은 가난하게 사는 길입니다. 부자로 살면 수많은 유혹과 난관이 있어서 넘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내려 주시는 ‘만나’로 생활할 것을 백성에게 권유했습니다. 이틀분도 비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만나’의 생활은 소유의 관념을 떨쳐 버리고 자연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의 영장으로서 온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먹고 사는 원인간, 타락 이전의 아담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처럼 무소유의 길을 걷도록 권유하는 것이 마5:3의 본뜻입니다.

세상은 물질을 소유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서로 싸우고 다툽니다. 물질 때문에 전쟁을 일으킵니다. 물질은 경제의 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사회운동은 이러한 물질의 운동을 예의 관찰해야 합니다. 그래야 관념에 따른 헛된 운동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물질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물질을 가지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과 물질운동을 예의 관찰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물질소유로부터 홀연히 초월한 자유인입니다.
세간은 늘 시끄럽습니다.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끼리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각에서 FTA를 추진하는가 하면 반대각에서 FTA가 나라를 망친다고 결사반대합니다. 정당들은 서로 이익집단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에 부단히 서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2007년 대선을 위한 과정에서도 서로서로 검증공방을 벌리고 네거티브 선전을 계속 이어갈 것입니다. 이로써 상당한 정도로 국민정서에 악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더 가지려는 경쟁의 대열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상대를 짓눌러 거꾸러뜨려야 하기에 온갖 수단을 동원합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흉악한 기운에 휩싸이고 민심이 흉흉하게 돌아갈 것이 뻔합니다.

순수하게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오랜 정원’을 거닐고 싶어 합니다. 순수했던 열정이 식어간 혼미한 시대에 몇몇 친구들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김지하 선생이 우리나라를 불러 ‘국민국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일구었습니다. 그러나 이 국민의 욕망으로 온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과거에는 왕들과 귀족들이 턱없이 나라를 독점하여 국민을 괴롭혔습니다만, 이제는 국민이 스스로 더 가지려고 싸움박질하여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이 싸움의 소용돌이에 열심히 가담하는 교회들도 더러 있습니다. 마음이 곱고 아직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그러나 이런 혼미한 정국일수록 복음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더 크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가난한 사람’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성령으로 가난해진 사람들의 행렬이 참 교회를 이룹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을 2007년 오늘에 되살리려면 교회가 먼저 가진 것을 다 내놓고 가난해져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돈으로 선교하는 곳에서 결코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등지에 가난한 형제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아시아에만 해도 인도의 달릿피플, 미얀마의 민중들, 필리핀의 가난한 사람들, 방글라데쉬, 동티모르, 등등 생각만 해도 그리스도인은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 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님의 제자들이며 성령의 일꾼들입니다. 이들을 두고 호의호식하는 그리스도인은 위선자입니다. 가진 것을 주의 사역을 위해 다 내놓읍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 그의 나라를 상속받읍시다. 하나님은 온 땅의 주인이시고(출19:6) 세상 모든 은금의 소유주이십니다(학2:8).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시어 일하십니다. 성도들은 십계명과 산상설교를 가슴에 깊이 새기고 예수님의 사도파송사를 그대로 받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이세종, 이현필, 주기철, 손양원, 유명모, 프란체스코, 마더 테레사와 같은 수많은 주의 제자들의 행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들과 함께 ‘성령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행진을 계속 이어갑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만나 주시고 동행할 것입니다(출33:7~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