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부활의 주를 아는 사람들 (유연희 목사)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6-04 21:46
조회
1606
2007년 6월 첫 주

부활의 주를 아는 사람들
(행 9: 36-43)

유연희 목사 (본원 기획위원)

기독교인의 별명 중 하나가 Easter People입니다. 부활절 사람들이라는 말은 부활 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 부활을 믿는 사람 들이라는 뜻이라고 봅니다. 부활이란 어떤 것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말 그대로 하자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음이란 모든 불가능 중에서도 가장 불가능한 것을 상징하 기 때문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모든 가능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가능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기독교인에게 모든 불가능을 절대 가능으로 바 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앙의 사건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죽은 후 언젠가 다시 살아나는 것만을 믿 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부활을 믿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 그것도 한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을요. 인생살이에서는 문자적으로 죽을 듯 힘든 절망과 고통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상처들이 죽음과 연결되기도 합 니다. 요즘 뉴스에서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은 버지니아 공대 사건이고, 그와 관련 되어 한국에서 학교에서의 왕따 사건들을 다룬 것입니다. 참으로 외롭고 괴로워서 어린 영혼들이 스스로 죽든가 남을 죽이며 자기도 죽든가 한 사건들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비록 어렸지만 부활을 알았 다면 왕따로 자살한 어린 친구들이 달리 행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봅니 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불가능한 인생 상황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그 가능성들을 경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주변의 지인들에게 자신이 죽은 지 사흘 후에 부활하시겠다고 미리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을 막 연하게 들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념대로 언젠가는 부활한다는 식으로 믿었 지 정말 사흘 후 부활하셔서 자기들의 눈으로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만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 이 십자가 달리신 전후로 애통하고 절망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정말 믿었다면 그들 의 반응은 달랐을 것입니다. 당장은 눈물이 나지만 곧 다시 실실 웃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잠깐 죽으셨다가 낼 모레 글피 다시 살아나실 건데 뭐.’ 하면서요 . 뒤에서 은근히 잔치를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함께 하던 사역을 접고 낙향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본 제자들이 그 놀라운 경험을 가지고 그리 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적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땅을 걸었고 그 의 죽음과 부활을 목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말씀을 전할 때 특별히 힘이 있었 습니다. 절대 불가능이 절대 가능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 것입 니다. 특히 베드로는 절대로 좌절했다가 절대로 희망하게 되었고, 절대로 못 믿다 가 절대로 믿게 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오늘 읽은 사도행전의 이야기에서 베드로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얘기가 나옵니다 . 다비다 또는 도르가라고 하는 여제자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이분은 삯바느질을 했는데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여 평소 덕을 많이 쌓았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죽었 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애통해했습니다. 베드로가 와서 이 사람을 다시 살려냈다는 일화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이야기를 다비다가 착한 사람이라서 부활의 은 혜를 입었다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고 기독교인들, 곧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이 한 사람의 죽음 사건을 에워싸고 어떤 반응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함께 사역을 하던 사람, 다비다가 죽었습니다. 동료 교인과 사역자들은 우선 장례 절차에 따라 시신의 몸을 씻어 다락방에 잘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인들은 특이합니다. 다비다를 묻을 생각을 하지 않고 부활시킬 생각을 합니다. 다른 지역 에 있던 베드로를 급히 모셔온 것입니다. 부활의 주를 믿기에 다비다가 죽었을 때 다시 살릴 수 있다고 베드로를 부른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다비다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교인들을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 베드로는 죽은 사람을 살리러 왔습니다. 베드로는 다비다를 아낀 교인들이 하도 재촉하고 기대해서 다비다를 살려내려고 애써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목회 하면서 교인들이 애통해하는 것을 볼 때 가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예수 님이나 베드로처럼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힘이 있으면 어떨까 하는. 그런 말은 성 경에 안나오고,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나가라고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먼저 합 니다. 기도를 마친 후 시신 쪽으로 몸을 돌려서 시신에게 말을 합니다. “다비다 , 일어나시오!” 그랬더니 다비다는 눈을 뜨고 베드로를 보고는 일어나 앉았습니 다. 베드로 역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들어 오라고 해서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온 욥바에 소문이 나서 많은 사 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다는 맺음말이 나옵니다. 시간이 흘러 2001년 서울. 교회에서 누가 죽었다고 하면 부활시킬 생각들을 아예 안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죽은 이들이 다 함께 부활한다 는 교리 덕분에 우리의 부활 신앙은 유대인들이 믿었던 식으로 다시금 먼 미래로 연기되었습니다. 죽은 이들이 종말론적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사고방식 말입니 다. 저는 부활 신앙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여러 번 실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 것이 바로 예수께서 전에 마르다에게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 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 11:25-26)라고 새 의미를 주신 것 의 한 의미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가능한 인생 상황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 그 가능성들을 경험하며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오늘 벌어지는 좌절과 실망의 자리에 내일 벌어질 희망과 성공을 놓는 일 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늘이라는 자리에 과거를 갖다가 둡니다. 지금 내일에 대 해 꿈꾸고 희망하면서도 과거에 겪었던 몇 번의 좌절과 실패를 기억하면서 “역시 안될거야. 전에 그랬으니까”라고 생각합니다. 아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기들은 모든 가능성을 갖고 삽니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고, 되고 싶은 것은 다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천사도 되고 대통령 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좌절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아기들은 작은 좌절들을 힘겨워 합니다. 생후 4년 반이 좀 안된 조카가 있습니다. 벌써 글씨를 배웠더군요. 토마토를 코마코라고 쓰니까 엄마가 아주 부드럽게 지적을 해줍니다 . 그랬더니 샐쭉 삐치더군요. 약간 상처를 받은 것이지요. 제가 볼 때는 글씨에 힘이 있고 또박또박 웬만한 것은 다 쓰는 게 초등학교 2학년생 글씨는 되던데 (요 새는 조카 자랑도 돈 내고 해야 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지적을 상처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작은 좌절을 오랫동안 간직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극도로 예민한 사춘기, 질풍노도의 젊은 시절을 지내보신 분들 입니다. 좌절의 깊은 나락, 상실의 공허를 맛볼 때 그것이 우리의 일부가 죽는 경 험이었음을 아십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생각해 볼 때, 앞날에는 새 기회가 있었고 새 가능성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지요? 여행?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유럽? 두 주간 어때요? (눈 감고 생각 따라하기) 떠나기 전에 여러 날을 부푼 기대로 지냅 니다. 여행 중에도 하루하루 즐겁습니다. 그런데 여행 마지막 날이 다가옵니다. 한국에 도착해 다음 날부터 출근해서 일해야 합니다. 그 생각을 하면 어떻지요? 다시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오늘은 이처럼 미래의 영향을 받습니다. 미래에 대한 생각이 오늘을 바꿉니다. 여러분의 오늘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평범하게 그저 그런 날인지, 아니면 실패 속에서 고민 중인지, 아니면 큰 꿈이 있는데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 것 같아 힘든 상황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의 오늘은 여러분이 창조하는 내일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내일이라는 가능성이 크고 분명하고 확실할수록 여러분의 오늘이 그것에 영향을 받습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재기한다고, 꿈을 이 룬다고 확실히 알고 믿는다면 좌절과 불행한 상황에서도 웃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날마다 부활 신앙 속에서 살기를 원하십니 다. 부활은 먼 미래에 벌어질 기적이 아니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우리의 신 앙입니다. 이 신앙을 날마다 실천하시면서 여러분에게 향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의 소망을 이루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