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2006년 3월 버마 단신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3 23:37
조회
564
2006년 3월의 버마 단신

ASEAN 특사 버마 방문
안보소식통들과 외교관들의 말에 따르면, ASEAN의 한 특사가 장래의 어느 날 버마를 방문하기로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군사정부에 민주개혁을 요구하고 아웅 산 수지 여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말레시아 외무장관 니에드 하미드의 요구는 거부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태국의 전 유엔 대사 아사드 주야나마는 “버마는 그를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버마는 ASEAN에 나쁜 평판을 주어 왔기 그를 초청하도록 압박하였습니다. 버마는 자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ASEAN의 이미지를 실추 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가 버마 정부하고 만 대화를 할 경우, 그의 초청은 속임수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 일은 버마의 선전용으로 좋을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버마 내의 조류 인플루엔자:
식량 농업 협회는 당국으로부터 42개 가금류 농장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된 것 같다는 통보를 받은 후 만달레이가 조류 인플루엔자의 발생을 막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밝혔다.

SPDC는 6천 마라의 병아리와 메추라기가 이 지역에서 폐사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당국은 그에 따라 2십 만 마리 이상의 가금류를 골라 폐사시켰다.

버마 내 연구소들의 실험에서 조류 인플루엔자 양성반응을 보인 모든 경우는 만달레이 부근 최초 전염지역인 한 농장 주변 7km 반경의 “단속지역” 내에서 발생하였다.

이 사실은 이 병이 처음 발생한 이틀 후인 3월 11일에 발표된 3km의 “제한지역”을 넘어서 이 바이러스가 퍼져나 온 것임을 말해 주고 있다.

새로운 망명자들의 물결:
<카렌 망명자 위원회>(KRC)에 의하면, 버마의 수도 이전과 <카렌 민족 연합>과 버마군 사이에 벌어진 새로운 전투 이후 7백 명 이상의 카렌족 주민들이 고향을 떠나 태국으로 망명했다는 것이다.

1월과 2월에는 656명의 카렌족 망명자들이 타이 매 라 무 망명자 캠프에 들어 왔으며 3월 중순에는 141명이 들어 왔다고 국경 근방의 한 소식통이 말했다.

캠프에는 새로 온 망명자들을 위한 주택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신입자들은 임시 주거처나 친구나 친척과 함께 묵고 있다.



<특별기고>
모든 것이 사라지다
나우 카 무 씀

“난 1953년 5월 6일 태생으로 태어난 후 한 번도 자유라는 것을 맛보지 못했어요. 우리는 우리의 마을, 집, 그 어디에서도 안전하게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항시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 번 망명을 시도했으나 아직도 죽지 못하고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 눈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아왔어요.”
이것은 북 카렌주 나웅 라이 빈 군에 있는 타이 니에 케 학교의 교사인 IDP(국내망명자) 여성인 나우 파우 파우의 증언이다. 그녀는 투 와 루 학교에서 7학년까지밖에 배우지 않았지만, 자신의 생애 가운데 26년을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쳐 왔다.

4대 차단 정책(아래 **참조를 보라)의 한 결과로 군의 공격이 있은 후인 1974년 나우 파우 파우는 지금 가르치고 있는 이 초등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에는 30명의 학생들이 있는 데 상황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그녀는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사람들은 항시 도망 다녀야 하였고, 학생들은 숲 속 나무 밑에서 시험을 보아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또한 그들의 마을이 SPDC 군사진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언제 그들이 처 들어 올지 알 수 없다. 이는 그들의 하루하루 생활이 위험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나우 파우 파우는 항상 이 사실을 학생들에게 명심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생들의 부모들은 SPDC가 자기들의 농토와 집을 부수는 일이 자주 일어나고 그래서 쌀이나 먹을 것이 부족하여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른 먹거리를 찾아나서야 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 어떤 학생들은 자신들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도와 먹거리를 찾아 나서는 동안 동생들을 돌보아야 한다. 이런 일 때문에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난다. 때때로 부모들이 하루나 반나절 돌아오지 않으면 아이들은 굶주리는 배를 움켜잡고 있어야 한다. 나우 파우 파우는 이런 모습을 보지만 자기도 그들보다 나을 바 없어서 그들을 돕지 못한다.

나우 파우 파우는 주민들의 건강이 또 다른 큰 걱정거리라고 말한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약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니 아픈 사람을 치료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약을 팔로 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약을 얻으면 설명서를 읽어 질병을 치료하기도 한다. 때로는 위생병의 경험이 있는 자들이나 간호원들이 약들을 팔러 와 사용안내서를 주기도 한다. 그녀의 학교에서는 약이 없을 때에는 숲에서 나는 나무나 식물 뿌리 같은 민간약으로 아이들을 치료해야 한다. 아이들이 나아지면 학교에 오지만 , 흔히 심히 앓아 낮지 못해 학교에 출석하지 못하고 시험을 보지 못하여, 수업에 많이 뒤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학생들은 부모가 없어 책을 사지도 못한다. 이런 경우 그녀는 다른 망명자 캠프 학교나 다른 마을 학교 등 여러 곳에서 학습용품들을 찾고자 애쓴다. 분필이 떨어져도 가까운 곳에서는 살 수도 없다. 버마에서는 학용품을 사는데 매우 특별한 제한들이 많다. 이런 이유에서 학생들은 강가에서 돌을 주어와 날카롭게 갈아서 칠판에 분필대신 쓴다. 이처럼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자기 아이들이 자기 부족 언어를 읽고 쓸 수 있도록 교육을 받기를 정말로 원하고 있다.

나우 파우 파우는 매년 5,000 타이 바트(US$ 130)에 해당하는 월급을 버는데 이 돈으로 그녀는 쌀과 소금, 고추 등 가계의 필수품을 사, 가족들을 부양해야 한다. 그녀가 망명을 했을 때, 그녀의 네 아이들과 그녀의 아버지는 세상을 떴다. 이는 1997년의 일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너무 몸이 허약하여 함께 갈 수가 없어, 뒤에 남겨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SPDC가 그의 곁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돌아 갈 수가 없었다. 홀로 있는 그에게 쌀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떠날 때 쌀을 조금 남겨 두었지만, 남겨 두고 온 성량이 켜지지를 않아 아궁이에 불을 집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두 주일 후였고 그때 누군가가 야음을 타서 그의 아버지를 찾아 갔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그녀는 SPDC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언덕을 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니 들이 타고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 돌아가 아버지를 묻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흘 후 그녀는 마을로 돌아 가 아버지를 묻었다. 그 때에도 근방에는 SPDC 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런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서 그녀는 다른 주민들과 함께 아버지를 급히 묻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녀의 아버지는 영국군에 있었는데 그는 영국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은 분이었다. 이제 SPDC 때문에 그는 자기가 가진 모든 신분을 상실하였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막내 아이가 심히 아팠지만 먹일 약이 없어 그애를 잃었다. 같은 날 다른 두 아이가 먼저 죽었다.

나우 파우 파우는 IDP(국내 망명자)의 한 사람으로서 만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녀는 항복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일을 자기 공동체를 위해서 계속하고 있다. 때때로 나는 이렇게 자문한다. “항상 도망 다니고 있는 우리는...... 어디에서 편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긍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적당한 답을 알지 못한다.

**참조
4대 차단 정책(Four Cuts Policy)
군사정부는 1970년대에 4등분 정책을 도입했다. 이 정책은 반란세력들의 지원망을 줄이기 위해 그들이 정보, 공급, 모병, 식량 등 네 가지 것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였다. 이 연결망을 자르기 위하여, 독재자들은 민간인들을 목표로 했다. 이 정책으로 말미암아 버마주민들의 군사화, 강제 이주, 인권침해, 압제 등이 증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