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한국사회 담론지형이 바뀐다] 달라진 세상 갈라진 좌파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3-06-27 00:29
조회
1375
** 이글은 중앙일보 2003년 6월 23일자 [연예, 생활/문화] 지면에 실린 내용입니다.

[한국사회 담론지형이 바뀐다]

- 달라진 세상 갈라진 좌파 -

[중앙일보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대표적인 사례가 세계화에 반대하는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의 모임인 대안연대와 소액 주주운동의 대부인 참여연대에 소속된 교수들 사이에서 벌어진 재벌개혁을 둘러싼 논쟁이다.

지난 달 중순 재벌개혁을 적극 주장하고 있는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운영위원장인 장하성(고려대)교수가 어느 인터뷰에서 대안연대회의를 겨냥해 "민족자본론을 앞세운 극좌세력이 재벌옹호론 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논란은 시작됐다.

이는 대안연대가 참여연대에 대고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자는 개혁 노선으로 결국 외국 자본에 민족자본을 헌납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한데 따른 것이다.

이에 대안연대 정책위원인 정승일 박사, 이찬근 교수(인천대) 등이 대응에 나섰다. 그들은 참여연대에 대해 "근대화를 위해 일본 사무라이 세력과 손잡는 것을 마다않는 세력이다. 소액 주주운동은 미국 월스트리트와 암묵적 연대를 통해 국부를 유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같은 주장에는 '한국의 재벌은 경제성장의 엔진이며, 따라서 해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전제돼 있다. 종래 재벌을 민족자본이 아니라 매판. 종속자본으로 봤던 시각과 큰 거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재벌개혁이란 논제에 대해 진보/보수의 구분이 사라졌다. 대신 세계화에 반대하는 진보성향의 대안연대가 결과적으로 보수적 재계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같은 착종. 전도현상은 북한 인권에서도 나타날 조짐이다. 아직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북한 문제를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볼 것이냐, 아니면 민족적 주권의 입장에서 볼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박순성(동국대. 북한학)교수는 "지금까지 북한의 인권 문제는 보수 세력들이 북한을 압박하기 위한 정치공세로 치부해왔던 것이 사실"이라며, "그러나 최근 세계적 보편가치의 관점에서 북한의 인권문제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비판적 시각이 등장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북한 인권을 둘러싸고 진보진영 내부에서 분열과 재편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


반전 평화운동에 대해서도 유사한 현상이 나타나는 추세다. 지난 이라크 전쟁당시 파병을 둘러싼 논란에서 보여주듯 반전 평화운동을 보편적 인권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민족적 주권의 관점에서 바라 볼 것인가를 놓고 진보 진영 내부가 갈라졌다. 같은 반전 평화운동이라 하더라도 민족적 주권의 관점에 선 지식인들은 결국 파병에 동의해 보수파들과 같은 정치적 선택을 했다.


민족주의/세계주의 담론은 페미니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신대 문제를 둘러싼 여성계의 대응이 페미니즘이라는 보편적 인권의 측면보다 민족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 이런 논란과 관련, 정현백 교수(성균관대.서양사)는 '민족과 페미니즘'(당대刊)을 통해 "민족주의는 위험한 방식으로 여성주의와 결합하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아 주목된다. 정교수는 "정신대 문제는 외적으로 민족주의의 틀 속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내적으로는 여성의 희생정신을 강요한 이중성을 띠고 있었다"면서 "세계화 시대 페미니즘이 민족국가 테두리에 갇혀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국가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지난 해 월드컵에서 보여준 열기가 단순한 애국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는 진보 진영의 비판이 제기된 바 있다. 임지현(한양대.서양사)교수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학자들은 친일파 청산 등을 예로 들면서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는 국가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세계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 탈민족주의화만이 갈 길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같은 일련의 변화는 진보 진영의 분화와 전세계적으로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정보화. 세계화 물결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희연(성공회대.사회학)교수는 "세계화와 함께 정보화의 물결이 워낙 커 기존의 민족주의. 세계주의의 담론이 진보/보수 이분법을 압도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손호철(서강대. 정치학)교수는 이 현상에 대해 "세계화가 일정 정도 진보의 산물인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측면(신자유주의)과 미국의 정치군사적 패권을 강화하는 측면(신보수주의의)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민족주의/세계주의가 진보/보수보다 더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wjsan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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