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신자유주의적 세계'와 '또 다른 세계'의 경계에서...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2-03-11 00:02
조회
1171
'신자유주의적 세계'와 '또 다른 세계'의 경계에서...

최전승민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 picis@jinbo.net)


"민중의 생활 조건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전세계 사회운동들인 우리 수 만 명은 포르투알레그레 제2차 세계사회포럼에 모였다. 우리는 우리의 연대를 깨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모였다. 신자유주의와 전쟁에 대한 우리의 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지난 사회포럼의 결의를 되새기기 위해, 그리고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여기에 다시 모였다." - 제2차 세계사회포럼 결의문 '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에 대한 저항: 평화와 사회정의를 위하여' 중

군중 속에서 일행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나는 길가에 앉아 5만 명의 각양각색 시위대가 지나가는 것을 구경했다. 전형적인 동양인이 시위에 참가한 것이 신기한 지, 지나가던 몇몇은 "어디서 왔냐"는 질문으로 추정되는 말을 하면서 내 명찰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노동자당과 공산당의 붉은 물결, 국제 농민 조직 비아 깜페시나의 녹색 행렬, 페미니스트들의 보라색 깃발. 진지한 표정으로 구호를 외치는 MST(무토지농민운동) 어린이들, 냄비를 두드리는 아르헨티나인들, 점거한 건물 창틀에 걸터앉아 깃발을 흔드는 MNLM(무주택빈민운동) 가족들, 방송차 위에 올라가서 랩을 하는 사회주의자들. 대오 맨 끝에 '빚진게 없으니 갚을 것도 없다!' 힌두어 플랭카드를 든 인도 참가단, '금융세계화 반대, 구조조정 반대!' 한국어 플랭카드을 들고 행진하는 한국 참가단... 2002년 1월 31일, 브라질 노동자당(PT) 대선주자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가 앞장섰고 그 뒤에 거대한 시위대가 '신자유주의 반대, 제국주의 반대'를 외치며 포르투알레그레 시내를 통과해 뽀르두술 노천극장에 모여들었다. 해외참가자 1만 명을 포함해 131개국 활동가 5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이렇게 제2차 세계사회포럼은 막을 올렸다.

결코 새롭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중심부 시장에 대해서는 중상주의로, 주변부 시장에 대해서는 자유주의로 해석되어 제3세계의 종속화는 심화되고 초국적 자본의 주머니는 돈독해진다는 사실을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해가고 있었다. 이 속에서 1999년에 브라질의 사회운동, 노조와 NGO들은 스위스 다보스(올해에는 뉴욕)에서 매년 개최되는 세계경제포럼에 맞선 시민사회운동의 대항회의를 제안했고, 여기에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ATTAC) 등 국제 네트워크들이 합류하면서 '세계사회포럼'이라는 대규모 회의가 브라질 남부 포르투알레그레(노동자당 집권 하에 나름대로의 참여민주주의가 13년 째 실험되고 있는 상징적인 도시)에서 작년에 처음 개최되었다. 그리고 첫 회의의 성공에 힘입어 올해 제2차 세계사회포럼은 작년의 4배에 가까운 규모로 열렸다. 한국에서도 작년의 4명에 비해 올해에는 투자협정·WTO반대 국민행동, 민주노총, 필자 등 12명이 참가했다.


<위기를 거듭한 위기 - 신자유주의의 완전 실패>

2월 1일, 카톨릭대학을 중심으로 시내 전역에서 워크샵, 세미나, 문화행사와 전시회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번 포럼은 '부의 생산과 사회적 재생산', '부에 대한 접근과 지속가능성', '시민사회와 공공영역',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정치 권력과 윤리'라는 4가지의 큰 주제로 열렸다. 이 네 가지 주제 하에 워크샵, 세미나와 총회가 800개나 개최되었고, 이를 통해 참가자들은 금융세계화의 폐해를 파헤치고, 민중의 구체적 삶을 살피고, 대안적 세계를 그려보고, 향후 운동의 전략을 수립했다.

2001년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의 모순이 여지없이 드러난 해이다. 아르헨티나 경제의 파탄, 엔론의 몰락, WTO 뉴라운드 출범 강행, 9.11 사태와 전지구적 對테러 '테러리즘'... 세계사회포럼 참가자들은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를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알리는 명백한 징후라고 규정했다. 에릭 뚜상 등이 발제자로 나온 제3세계 외채 컨퍼런스에서는 외채가 제국주의 국가들이 남반구 국가들을 분할통치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외채탕감에 있어 전지구적 민중연대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제3세계 외채에 관한 국제민중법정'에서 한국 금속연맹을 포함한 20개국 증인들의 고발을 들은 배심원과 검사는 외채가 불법이라는 판결과 함께 IMF, 채권국 및 외채 부담을 민중들에게 떠넘긴 채무국 정권들을 '기소'했다. '전지구적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제목의 세미나에서는 러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과 아르헨티나에 강제된 IMF의 구조조정은 경제위기의 근원인 외채를 갚는 데나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데에 모두 실패했다고 각 국 발제자들은 주장했다.

같은 라틴아메리카인 만큼, 아르헨티나 경제위기는 이번 사회포럼의 최대 화제 중 하나였다. 무려 7-800명이나 참가한 아르헨티나인들은 매우 고조된 분위기의 워크샵과 회의들을 개최했다. 작년 사회포럼과 경제포럼 간 생중계 토론에서 조지 소로스에게 "당신이 몇 명의 아이들을 죽였는지 알기는 아냐!"라고 울부짖어 유명해진 '5월 광장 어머니회'의 헤베 할머니, 좌파 지식인, 노동운동가, 학생운동가들이 나와 지난 수년 간 독재 정권 하에서 억압받고 뿌리가 뽑혔던 사회운동들이 다시 활력을 되찾고 있다고 흥분에 찬 발제를 했다. (발제자들이 너무 흥분해 통역사가 중간에 통역을 포기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주류 언론에서 그려낸 무정부적 '폭동'과 달리, 이들은 경제위기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지배계급 대체, 채무불이행 원칙 고수, 은행 국유화 등 '또 다른 세계'에 대한 그들의 열망과 강한 의지는 한국에서 온 나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신자유주의, 군사주의와 제국주의 - 끔찍한 삼위일체>

'군사주의' 문제도 아르헨티나만큼 여러 곳에서 제기됐다. 최근의 플랜 콜롬비아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신자유주의는 항상 총대를 들었다. 이들에게 신자유주의, 군사주의와 제국주의는 불가분의 삼위일체이며, 수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현실임을 각종 회의와 2월 4일에 있었던 FTAA 반대 시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라틴아메리카인에게는 별로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9.11 사태와 아프간 공습도 군사주의에 대한 논의를 불붙이는 데 한몫 했다. 9.11 이후에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행하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은 사실상 '테러'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히려 경제적 이익을 위한 술책이라는 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했다. 그럼에도 무역센터에 대한 공격을 테러리즘이라 규정할 것인가 범죄행위라 규정할 것인가, 아프간에 대한 공습을 미국의 일방적 군사행위라 할 것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이라 부를 것인가를 놓고 늦은 밤까지 논쟁이 진행되었다. 사회포럼 참가자들의 다양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편, 노엄 촘스키와 제임스 페트라스 등 저명한 학자들도 참여한 '전쟁없는 세계는 가능하다' 회의에서 참가자들은 유엔이 아프간 전쟁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개입해야 함을 주장하는 공동성명서를 채택해 유엔 사무총장 코피 아난에게 보냈다.
안 그래도 포럼 첫 날부터 소말리아, 이라크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확전 가능성을 규탄해왔는데, 2월 4일 세계사회포럼 결의문이 낭독되고 있을 때 미국이 이라크 공습을 시작해 이미 4명이 죽었다는 쪽지가 사회자에게 전달되었다. 수천명이 모여있던 '사회운동들의 최종회의'는 불가피하게 반미·반제·반전 집회로 변모했다.


<반신자유주의 국제연대 운동의 일보전진>

2001년도가 세계 정치경제적 지배질서의 강화 및 동시에 모순의 극대화를 가져온 만큼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 역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고 이에 대한 평가가 세계사회포럼에서 진행되었다. 월든 벨로, 사미르 아민 등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참여한 '사회운동의 평가와 전망' 회의에서는 폭력 시위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고, (주로 북반구에서 개최되는) 상징적인 대규모 시위에 (주로 남반구에서 벌어지는) 작지만 소중한 투쟁들이 묻히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다. 그럼에도 7월 제노아 G8 정상회담 반대 시위에 30만 명이라는 역사적 인원이 집결했고, 그 후 이탈리아에서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전국적 대중운동으로 확산하고 있다고 이탈리아 활동가가 힘주면서 말했다. 9.11 이후 각종 '반테러' 조치로 사회운동을 범죄화하려는 시도를 효과적으로 무력화시켰다는 점도 큰 성과로 지적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세계적으로 폭발한 반전평화운동, 제3세계에서 붉어져 나온 반미반제운동, 그리고 반신자유주의 운동 간 형성된 상호 연대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줬고, 중산층 중심의 기존 평화운동이 급진화되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대안'에 대한 토론도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과제 중 하나였다. 소농, 노동자, 지역조합 활동가, 공공주택 관련자 등이 모여 탈세계화(deglobalisation), 지역화(regionalisation), 연대에 기반한 경제(economy of solidarity) 등 다양한 개념과 명칭을 도입하면서 탈중심화되고 지속가능한 대안적 경제체제에 대한 토론을 진행했다. 물론, 많은 이들은 '사회주의만으로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주로 농민들이 이러한 입장인 것에 상당히 놀랬다.) 제도적 차원의 '대안'은 세계사회포럼 기간 중 개최된 세계의원포럼에서 모색되었다. 전세계에서 진보적 지역 및 국회의원, 그리고 관련 NGO 등 약 600명이 참가한 가운데 토빈세 등 국제 금융 거래에 대한 규제 방안 도입을 위한 압력을 한층 강화하기로 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여성들이 적극적인 주체로 나섰다는 점도 반신자유주의 운동에 있어 분명히 주목할 만한 '일보진전'이다. 브라질여성연합, 경제 변혁을 위한 라틴아메키라 여성연합(REMTE), 세계여성행진(WMW) 등 페미니스트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과 이에 대한 여성주의적 대안에 관한 세미나와 워크샵을 개최했고, 2월 2일 여성의 빈곤화와 폭력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으며, 낙태권 캠페인을 진행하기도 했다. '여성주의 없이 또 다른 세계가 불가능하고, 세계가 변해야 여성의 삶도 변한다'라는 구호 아래 세계사회포럼 조직위원회에 가입해있는 세계여성행진은 또한 국제연대운동을 평가하거나 조망하는 모든 세미나 자리에 발제자로 참석해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운동을 평가하고 새로운 전략을 내세우기도 했다. 실제로 세계여성행진의 촉구 및 '감시' 덕분에 각 세미나 주최측들은 최소한 발제자의 남녀비율을 맞추는 데에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경계에서 또 다른 세계 만들기>

2월 5일 오전, 수천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2차 세계사회포럼 폐막식이 거행되었다. "환영합니다. 여기가 바로 또 다른 세계입니다"라고 쓰여진 무대 위에서 라틴아메리카 원주민을 비롯한 대륙별, 인종별 참가자들이 발언을 했고, 참가자들은 깃발을 흔들고 대회가 'Um outro mundo possivel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를 부르며 옆 사람 손을 잡고 의자 위에 올라가 춤을 췄다. 그리고 내년에는 포르투알레그레 뿐만 아니라 네팔, 에콰도르, 미국, 지중해와 팔레스타인에서 대륙별로도 모이기로 약속했다.

참가자들은 역시 이번 회의도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리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에스끼벨, 멘추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 소말리아 ILO 사무총장, 로빈슨 유엔 인권고등판무관 등 국제적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것은 세계사회포럼, 나아가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시민권'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 동안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대안이나 어떠한 제도적 기반도 없는 맹목적 비판이었다는 '누명'을 씻었고, 그 어느 누구도 이 운동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발전'은 운동이 제도화 또는 관료화되거나, 명망가 중심의 운동으로 흘러갈 가능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또한, 지지도를 잃어가고 있는 노동자당이 사회포럼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고, 주와 시의 적극적 후원으로 가능했던 이 대규모 행사를 과연 어느 국가(특히 남반구)가 개최할 수 있겠느냐는 제기도 있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에서의 참여도가 여전히 미미하다는 점도 지적되었다. 이것은 실제 인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결의문 작성위원회(drafting committee)'에 참여하면서 내가 든 생각은 세계사회포럼으로 '대변'되는 이 운동은 과연 누구의 운동인가라는 것이다. 작성위원회에 추천된 것은 내가 동양인이고 여성이기 때문에, 한 마디로 인종과 성별 형평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거대한 '국제연대의 장'에서 여전히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북반구 사회운동 세력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어깨가 무거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엇보다도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씁쓸했다. 급진적인 반신자유주의 운동은 여전히 라틴아메리카나 아시아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지 않는가!

아무튼, 여러 가지 우려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세계사회포럼은 분명히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세계'에 균열을 내면서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세계사회포럼은 이 두 세계 사이의 경계에 있는, 하나의 '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다. 포르투알레그레에 모였던 5만 명은 서로 피부색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함께 '신자유주의 반대'와 '전쟁 반대'를 외쳤다. 세계경제포럼이 신자유주의의 첨병들 이윤을 극대화하고 다수를 빈곤의 굴레 속에 빠뜨리기 위한 전략을 짜는 연례 행사라면, 세계사회포럼은 이에 맞서 민주주의와 평등이 실현될 수 있는, 자본이 아닌 민중 중심의 대안적 세계화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실천에 옮기기 위한 실험의 광장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이 실험을 계속 하기 위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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