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시사

세계화의 상황에서 이 사회가 존속유지될 수 있을까?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02-28 23:12
조회
1509
세계화의 상황에서
이 사회가 존속 유지될 수 있을까?

Julio de Santa Ana





에큐메니컬운동은 이 세계의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1989년도 "사회주의"(공산주의) 국가들의 갑작스런 몰락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의 결과에 대해 준비조차 하지 못했었다. 비록 1985년 초기에 동유럽 (잇따라서 중국 및 그밖의 "사회주의"국가들)에서는 이러한 조짐들이 분명히 있었다고는 하지만 교계로서는 동유럽의 이데올로기적 체계가 이렇게 완전히 붕괴되리라고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상황이었다.
1989년 5월 바젤에서 개최된 유럽에큐메니컬 총회는 동서간의 개방이 확산될 것을 예측하면서 유럽교회들이 두 경쟁적 이데올로기 블록간의 "대화가 용이"하도록 추진시킴으로써 평화적 공존을 이루도록 조성하는 것이 최우선적 과제라는 데에 합의했다. 6개월 후, 40년 동안 전세계와 에큐메니컬운동을 양분시켜왔던 주된 이데올로기적 분쟁은 마침내 가시적으로 종식됐다.
이 시기에 WCC는 1990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됐던 정의와 평화 및 창조의 보존(JPIC)을 위한 세계교회협의회의 최종점검 준비중에 있었다. 이 협의회는 오늘날의 교회들이 각기 다른 세계의 사회에서 직면하고 있는 도전들에 대하여 적절한 대응책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 특히 지속가능성과 관련된 사안들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었다.
당시의 정치-경제적 변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1991년도 WCC의 켄버라 총회에서 보다 충분히 논의됐었다. 당시에 발생된 경제-이데올로기적 변화의 결과에 대해 논의한 총회의 2차 토의결과는 1990년도 WCC중앙위원회의 입장보다는 덜 긍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총회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소위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제제도가 심각한 위기에 부닥치게되자 자유-시장경제제도에 대한 많은 희망들이 표출됐다. 그러나 자유-시장경제 역시 새로운 사회적 생태적 제도가 구비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새로운 세계경제질서에 부응할 수 없는 노릇이다.

2차 토의결과는 또한 "우리의 과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와 정의실현을 위안 채비를 갖추도록 세계의 경제 및 정치적 상황에 관한 인식을 고조시키기 위한 교육훈련에 있다"는 사실을 확고히 했다. WCC는 이를 위해 신속히 대처해야 한다고 촉구됐던 것이다.



세계화의 도전에 대한 WCC의 입장

켄버라총회에 따른 에큐메니컬적 입장은 WCC의 경제문제에 관한 초창기의 권고(AGEM)를 새롭게 추진시키는 것이었다. 1991년 8월 WCC중앙위원회는 AGEM으로 하여금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이슈를 새로운 "세계적" 상황에서 연구하도록 권고했다. 이로써 경제학자와 신학자 그룹이 연구한 1992년도 8월의 보고서, 기독교 신앙과 오늘날의 세계경제(Christian Faith and the World Economy Today)가 WCC중앙위원회에 의해 채택됐으며, 개 교회에서 연구하도록 권장됐다. 교회에 광범위하게 배포된 이 연구문헌은 냉전이후의 세계적 경제이슈에 대하여, 특히 강대국의 책무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보고서는 공산주의가 소멸됨에 따라 사회-경제적 질서 및 정의의 이슈가 새로운 "세계적" 접근방식으로 추진될 가능성에 대해 인정했다. 이 보고서는

맞물려 있는 오늘날의 세계적 현실은 조정되고 해결돼야 할 전반적인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위한 사고와 행동의 "정상적" 상황들이 가족단위의 보다 작은 규모나 마을, 또는 부족, 소도시나 지방에 있는 경우라면, 또한 많은 결정권들 - 및 교육적 이데올로기적 형성권 -이 유엔체제의 통상포럼에서 이루어짐으로 세계통치의 선구자로서 성장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한 상태에 놓여 있는 민족-국가의 주민들의 경우라면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분명 우리시대의 틀림없는 양상 가운데 하나는 "세계화"의 경향이 보다 더 확산된 추세로 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환경의 침해는 더 이상 국경선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에이즈를 비롯한 질병이나 마약중독과 같은 여러 문제점들 또한 더 이상 국내에 머물지 않게 된다. 세계적인 문제들은 어떤 어려운 문제이든 간에 이들의 정체가 무엇이며,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를 마땅히 인식해야 할 문제로서 취급돼야 한다.


이 보고서는 에큐메니컬적 성찰을 위한 9개조항의 주요 이슈들을 작성했다:

1. "만인의 최저생계비 보증을 위한 필수조건들이 전적으로 세계공동체의 권력층 내에 놓여 있는 이 세계의 역사적 현실"에서 "절대적 가난" 및 차별의 정도가 충격적으로 극대화되어 가는 현상.
2. 빈부 격차가 확산되며 "'선진세계'의 부국들과 '후진세계'의 빈국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지는 현상".
3. "재정적 채무의 영원한 볼모에 갇혀 어떤 방안으로도 헤쳐나갈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여러 국가들의 세계적인 부채위기의 문제.
4. "사회적 문화적 및 이데올로기적 전개에 박차를 가함으로써 환경의 파괴를 일삼고 있는 경제개발....일정한 신학적 사고로서는 이를 치유할 수 없으며, 심지어 이를 조장하기까지 하고 있는 현실" 가운데서 발생되는 환경에 대한 위협.
5. "투기의 대상으로 취급되며 보다 가능한 경제적 이윤의 산출로서 재생산"되고 있는 가운데 경제적 소모품이 되어버린 땅.
6. 여성과 남성의 차별된 역할. 이의 향상된 조짐이 보이고있다고는 하지만 "경제문제에 관한 대부분의 입장은 여전히 여성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여성에 대한 보다 적절한 역할과 보상이 여전히 방치되어 있는 상황이다. 여성에 의한 각종의 노동량은 미세한 수입으로밖에 환산되지 못하지만 우리사회 총체적인 노동시간의 3분의 2이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사회 대부분의 문화적 경향은 여성으로 하여금 "당연히" 가정의 모든 사역을 책임지도록 부과하고 있는 상황이며.... 비록 무임금노동으로 취급된다 할 지라도 이러한 여성의 노동은 엄연한 경제적 영역의 일환으로서 이 사회의 구조 및 여러 활동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이다."
7. 거의 모든 나라에서 발생되고 있는 실업과 불완전고용의 문제. "비록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는 있지만, 오랫동안 인구가 토지의 수용능력을 초과한 상태인 인도나 중국의 경우, ....2차 대전 이후 '복지국가' 건설수치에 대해 공히 자부하고 있는 서유럽 국가들의 경우, 1980년대를 강타한 경기침체 및 '자유시장'의 이데올로기정책이 뒤흔들고 있는 복합상황에서 불완전고용은 인제 전혀 새로운 상황이라 할 수 없다."
8. 분쟁, 전쟁 그리고 군사화의 문제. "바르샤바조약의 해체는 지난 40년이 넘도록 수많은 경제적 결과들을 낳았던 하나의 주요한 긴장관계를 해소시켰다. 적절한 경제적 '평화의 분배'를 위한 희망은 여전히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상태이다...이는 필경 실업의 공포 때문이다. 걸프전쟁과 코카서스 및 전 유고슬라비아의 내전으로 야기된 새로운 긴장관계로 군사적 채비에 적지 않은 우선 순위를 부여하게 된 것은 우리를 절망케 하는 조짐들이다."
9. 통신제도의 주된 역할 및 종종 보이지 않는 이의 지배력. "오늘날의 새로운 과학기술은 만인에게 광범위한 통신 및 교육의 확충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이의 남용은 이의 진정한 목적을 위협하고 있다....언론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는 많은 사람들의 사고와 상상력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언론의 남용으로 소비주의와 인종차별주의 및 성차별주의와 종교적 편협주의가 전파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1975년도의 제5차 WCC총회는 "각 개체의 삶의 질이 유지되거나 개선될 수 있는 안정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지속가능의 사회를 목표"로 설정한 "새로운 중점사안"에 대해 역설했다.
최근 몇년 동안 이 지속가능성에 대한 인식은 또다시 에큐메니컬적 성찰 및 논의의 대상으로 부상되어왔다. 이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도전은 급격한 과학기술의 변화로 인해 가능해진 시장의 통합이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자동차와 통신 분야에서 보다 극적으로 전개되어왔다. 현 세계적 무역구도의 틀 안에서 과연 지속가능의 사회가 성취될 수 있을까? 세계화의 경향에 따라 부과된 조건들 하에서 정의와 지속가능성 모두에 대한 도전을 과연 만족시킬 수 있을까? 사회적 사고 및 행동에 있어서 기독교인과 교회들로 하여금 우리시대의 기독교 신앙에 합당한 증인으로 살 수 있게 만드는 지침들은 어떤 것일까?
비써 후트 재단(Visser't Hooft Foundation)과 보쎄이 에큐메니컬연구소에 의해 기획된 세 가지 협의회는 기독교의 사회윤리를 위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의 용어에 대해 보다 뜻깊은 의미를 추구하도록 기여했다. 이들은 "지속적인 성장(Sustainable Growth)"(1993), "지속 가능한 사회의 활동(Work in Sustainable Societies"(1995), 그리고 "지속가능성과 세계화(Sustainability and Globalization)"(1997)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지속가능성"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의 본래적인 한계를 인식하며 유지할 수 있는 미래, 즉 언제까지나 지속될 수 있는 여정으로서의 미래에 관한 인류의 요구를 인정하도록 하기 위한 필요성과 관련된 용어이다.
이 용어가 점점 더 일반적으로 적용됨으로써 발생되는 기본적인 딜레마에 대해 이미 1974년도의 에큐메니컬 협의회는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최근 단기간의 역사를 통해 몇몇 사회들은 가난을 극복하는 차원에서의 무제한적인 부에 대한 꿈을 촉진시켰는데, 일차적으로 이는 부의 공유차원이 아닌 부를 확산시킴으로써 모두를 충족시킨다는 데에 있다. 현재 우리는 이에 대한 현실의 냉정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자원의 절약 및 세계경제 성장의 기대치 감소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 인류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낭비벽이 가장 심한 존재로서는 존속될 수 없는 노릇이며, 위로부터의 부가 넘쳐흐름으로 모두가 번영케 된다는 논리는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한때는 풍요의 비전을 제공했던 과학기술의 승리가 지금은 바로 자원의 소비증대 및 인구와 공해의 확산에 기여함으로 태평스럽고 풍요로운 미래에 대한 꿈의 종말을 가져오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다.


1987년도에 출간된 환경과 개발에 관한 부른트렌드 보고서,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는 "지속 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의 용어에 대한 광범위한 수용성을 시사했다. 이 보고서는 "미래의 세대가 접하게 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현재의 필요에만 부응하고 있는 개발"의 요구에 대해 다루고 있다. 잇따른 논의에서 이 용어는 여러 다른 각도에서 이용되어왔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적절한 정의를 위해서는 다음의 세 가지 기본적 요소가 참작돼야 한다:

1. 지속가능성은 미래 세대의 안녕 및 이들의 충만한 삶에 대한 관심을 내포한다. 각 세대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삶을 건설하며 이 지구의 외관을 변경시키고 있는 반면에, 어떠한 세대들도 지구적 삶의 조건의 질이 심하게 변화되는 것에 대해, 그리고 미래 세대 또한 나름대로의 삶을 건설하며 자신들의 권한으로 지구의 모습을 변화시켜 나갈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이는 각 세대들이 돌이킬 수 없는 위기의 상황을 가져오지 않도록 가능한 최대한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다. 1993년에 처음 열린 비써후트 협의회는 지속 가능한 사회에 대해 "이 세계에 부여된 자원과 기회들을 본래의 모습대로 보존하는 것으로.... 이는 갱신 가능한 자원들의 경우, 갱신할 수 있는 대체물이 발견되기 전에는, 즉 물이 천연적으로나 인공적으로 보유된 양보다 적은 비율로만 방출시키는 것과 같이 더 이상의 마구잡이로 소비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규정했다.
이들 원칙들은 분명히 분쟁으로 반영될 소지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어떻게 미래 세대의 권리가 현 세대의 권리에 반하여 측량될 수 있단 말인가? 사실 미래 세대의 권리는 대체로 부차적 차원으로 취급되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보다 긴밀한 탐사로서 주어져야 할 미래 세대를 위한 책임져야 할 이들 원칙들 가운데는 처음에 보여준 것 이상으로 보다 많은 사항들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2. 두 번째로 고려돼야 할 사안은 정의이다. 부른트랜드 보고서는 인류 공동의 미래를 말하고 있으며, 모든 노력을 기울여 현재와 미래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환경적 가능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세계적인 가난한 자들의 근본적 요구가 최우선적 순위로 주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정당하게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한 교회들의 관심사는 각별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교회는 정의의 수호자이다. 세계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기독인의 삶의 증거를 보여주는 기본 요소이다. 이 지속가능성이 정의를 희생하면서까지 성취될 수는 없다고 볼 때, 강조돼야 할 사안은 어떻게 정의가 지구의 제한된 잠재성내에서 실현될 수 있는가에 있다고 하겠다. 부른트랜드 보고서의 강조점 가운데 하나는 환경 과 가난 및 에너지의 문제점들에 대해 하나의 연결선상에서 이어진 위기사항이라고 주장한 데에 있다. 그러나 미래의 모든 나라들에 대한 개방이야말로 지속가능성을 위한 유일한 발전체계로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세계이지만, 이러한 원칙이 받아들여지기란 여하간 힘든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류를 위협하는 위험적 요소는 인류 자신의 미래적 관측으로부터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공동의 미래"를 위한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산업화된 국가들에 있어서 각별한 도전양상으로 대두된 현실이다. 이는 바로 부적절하게 상당한 몫의 자원을 소비하는 이들의 양태만이 아닌 개발도상국들의 생태적 평정상태를 파괴시키는 이들의 삶의 방식 또한 제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속가능성의 문제는 선진국에 의한 개도국의 착취행위에 대해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 것으로서, 즉 새로운 차원의 공유를 요구한 것이라 하겠다.

3. 세 번째로 고려해야 할 사안은 위협과 위험에 대한 평가이다. 우리는 오늘날의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위험을 얼마나 책임적으로 평가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광범위하게 다른 양상으로 주어진다. 종종 과학자들은 많은 분야에 있어서 이에 대한 해법이 근본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여주는 평가와 시나리오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무수한 연구는 역사적 발전의 예측 불허한 요소들에 대해서는 경시하는 반면 지속가능성의 의제가 원칙적인 안건으로서 실제상의 적용 및 이에 수반되는 정치적 과정에서 행동양식으로서의 실천분야 모두에 부합될 수 있는 양상으로만 보여진다. 예를 들어 환경연구들은 정상적으로 전쟁의 가능성 및 충돌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필요성에 대해서는 관련시키지 않고 있다. 또한 이들은 종종 각종의 미래적인 위협들의 상호연관성 및 상호적으로 이의 강화되고 있는 측면들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지속가능성의 문제는 책임질 수 있는 위험의 평가에 대한 이슈를 제기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점에 관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사안이 중요하게 고려돼야 한다:
a. 위험의 중대성은 별도로 판단될 수 없는 사안이다. 특수한 위험의 상황으로 야기된 위험은 이미 다른 양상의 위험으로 나타나게 될 경우 증폭된 위험의 상황으로 전이되기 마련이다.
b. 초기의 사전작업은 대체로 일단 벌어진 피해상황을 제거하는 것보다 비용이 훨씬 덜 든다. 발생 가능한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예측할 수 없을 경우에는 이의 예방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c. 발생 가능한 희생자를 위한 기독교적 양심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독자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에게 발생되는 것은 별개의 사안이다. 위험의 평가에 대한 대부분의 연구들은 이점을 간과한다. 경제 및 환경의 위험은 전세계의 다른 지역들에서 각기 다른 방법으로 인류를 강타할 것이다. 위험의 평가작업은 가장 취약한 나라들의 피해가능성에 대해 이례적인 관심을 마땅히 기울여야 한다.
d. 위험을 모면하기 위한 조치들은 비용과 불이익이 따르기 마련이다. 현재의 유익이나 미래의 해악에 대해 과연 얼마나 납득시킬 수 있을까? 브룬트렌드 보고서 출판의 잇따른 논쟁들은 "후회 없는 조치들(no regret measures)" - 예상된 위험에 의해 수반된 위협들조차도 없었던 일로 보증할 수 있는 차원에서 경제적으로 유용하게 적용될 수 있는 방어적 행위 - 에 대해 많이 다루어왔다. 이 용어는 종종 위험에 대한 진지한 평가를 바라는 결정에 대해 지연시키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근본적으로 장기적인 지속가능성을 보증할 수 있는 조치들만이 후회 없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현 경제제도의 틀 내에서 과연 지속가능성을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부룬트렌드 보고서는 "지속가능"과 "개발"의 용어를 결합시킴으로써 이에 대해 응답하는 것처럼 보여진 다. 그러나 이는 인정할 수 없다. 현 추세에 대한 단순한 수정보다는 보다 심층적인 근본적 변화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부룬트렌드 보고서는 바로 보다 나은 과학기술적 성취의 가능성에 대해 강조한다. 즉, 자원의 착취는 원칙적으로 보다 효율적인 사회단체들의 활동에 의해 대폭적으로 감소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표방한 것이다. 현 체제 내에서 새로운 전망이 제기될 수도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조절방침이 과연 지속가능의 사회를 위한 조건들에 부합될 수 있는지, 아니면 사회의 기본방침에 있어서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문제로서 남게된다. 따라서 협의체는 이러한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세계의 무역을 하나의 지구시장으로 편성하기 위해 새로운 모델을 추진하고 있는 현 추세에 대해 평가를 기울여온 것이다.



세계화(Globalization)

우리는 전환의 시기에 살고 있으며 역사적 상황의 전개가 구체화되지 못한 상황에 처해있지만, 경제적 세계화란 이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합되어진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로, 이는 일부 시장의 세계화 및 경제 기업들의 초국화를 통해 세계적인 경제제도를 창출시키고 있는 강력한 역사적 흐름의 현대적 표현이다. 둘째로, 시장의 세계화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특히 컴퓨터공학과 통신 분야에 의해 최근 몇 십년 동안 가속화되어왔다. 셋째, 사상 유례없이 통합된 세계적인 시장은 천연자원, 공산품, 금융과 그밖에 부차적인 생산을 위해 형성되어왔다. 이 결과, 현재의 지배적인 세계적 경향들은 차별된 시장기능의 방식을 위한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축적된 장치에 근거한 것으로, 특히 과학기술적 차원에서 복잡한 경제적 장치들의 창출 및 이의 발전을 가능케 했는데, 예를 들어 국제적 차원에서 남다른 세계적 경제제도와 제도 및 시장의 운영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적 장치를 말한다. 이러한 요소들의 결합은 인류에게 새로운 부담을 창출시키고 있으며 이의 부단한 절박성의 압력에 대응하지 못하게 만든 채, 차별된 교환양식의 결과를 낳고 있다.
많은 세계적 지도자들은 세계화야말로 세계적 번영을 위한 비결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명백히 인준하는 추세이다. 경제적 삶의 증진에 대한 이러한 약속의 배후에는 함축적인 희망이 놓여있는데, 즉 선진화된 세계에 있어서 대다수를 위한 상대적 번영을 약속했던 바와 같이 대중노동생산량의 증대를 위해 전개되는 이 방식은 지구의 모든 사람을 위해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며, 실질적으로 소득과 부의 현 세계적 분배에 있어 개선책을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계의 모든 기업들에게 경쟁성을 부여함으로써 소비자와 노동력 모두를 위한 수익에 기여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세계화의 과정은 경쟁력에 따른 산업체의 변화 때문에 새로운 분야와 영역을 통해 수천만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시키게 되는데, 이는 통상분야가 지금까지의 노동집약적인 산업(개도국들의 경우 이들은 이전까지 가장 고통받는 분야로서 보호받아왔던 산업체들)보다는 고도로 산업화된 기업의 경제로 전이되는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소련연방의 파국과 동유럽의 변화로 많은 이들이 시장제도에 대해 이에 견줄만한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는 이러한 단일 체제에 대해 자유화의 삶을 통해 엄청난 유익을 누리는 부의 특권을 확산시키기 위한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보호막으로서 철저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세계의 많은 이들에게 있어 세계화의 약속은 공허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인류와 문화 및 환경을 아주 철저하게 위협하는 과정으로서 반드시 거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에큐메니컬적 전망에서 볼 때, 향후의 방안은 다원주의와 더불어 가능한 여론의 일치에 근거하여 행위의 설정을 목표로 하는 건설적인 협력의 필요성을 인정함과 동시에 다른 입장과 현저한 사고의 틀 가운데서 대화를 성사시켜나가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도덕적 판단의 다양성은 "세계화"와 관련된 다른 차원에 대해 보다 세심한 평가의 필요성을 말해준다. 적지 않게는 독립적이지만 상호 관련된 활동의 일괄된 용어로서 이 세계의 금융과 통신 및 무역과 세력, 과학기술과 이데올로기적 개념은 "세계화"의 방향으로 형성되고 있다. 더군다나 HIV/AIDS의 역병과 역사적인 생태의 균형이 깨짐으로 전세계 지역들의 식물과 동물의 생태계로 전파되는 양상이 드러남에 따라 건강과 자연환경에 대한 세계화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현실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가치와 전통을 공유하게 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긴장 또한 유발시키고 있는 문화적 교류 역시 세계화의 용어로서 구사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인위적인 유형들은 언제나 문제가 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세계화"의 용어사용을 명확히 탐사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몇몇 요인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첫째, 과학기술은 그저 세계화되어 온 것들 중의 일부가 아닌 세계화된 세계를 가능케 하며 세계화의 특질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키는 데 기여한 제일의 요인으로 인식돼야 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이러한 여러 과학기술적 변화의 진행과정에 대한 명백한 불가피성으로 인해 우리의 도덕적 평가는 더욱 복잡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이 과정은 우리로 하여금 초기의 시대로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한다. 기독교는 각각의 가능성을 평가해야 하며, 어떤 것이 과연 지속 가능한 인류애와 문화 및 환경을 위한 우리의 근본적 실천에 위협이 되는 개발인지 아니면 이를 선호하는 개발인지에 대해 분별해야 할 것이다.
둘째, 많은 사람들이 경험적인 가치를 근거로 하여 유력한 경제제도에 대해 수긍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단일의 좌표지침을 거부하는 입장이다. 진정으로 일각에서는 이러한 지배적인 과정의 결과들에 대해 긍정적이다. 시장의 통합을 가능케 한 과학기술의 변화는 많은 인류를 위해 보다 나은 인간의 삶을 위해서도 역시 공헌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과정에는 파괴적인 측면 또한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세계화"의 이슈를 적절히 표방하기 위해서는 국제적 무역이나 투자 또는 통신과학기술의 특수한 용어를 다룰 수 있어야 하겠다. 예를 들면, 이에 대해서는 땅의 소유와 소득 및 부와 정치적 권력에 관한 고유한 제 각각의 분배양상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여러 나라들이 안고 있는 기업의 특수한 상품에 대한 무역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하겠다. 세계화의 과정에 대해 옹호할 수 있는 측면과 옹호할 수 없는 측면에 대해 구체적인 차원에서 다룰 수 있어야만 이를 식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작업을 통해 과연 주어진 행위나 정책이 인류에게 타당한 지를, 즉 "최소한의 우리 가족 구성원들"(마태복음 25:40)에게 이로운 지를 판가름하기 위한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 기능적인 준거에 사용되도록 우리는 부르심 받았다. 세계화의 어떤 측면이라도 이러한 비판적 평가에 거스른다면, 이에 대한 저항의 입지는 분명한 것이다.



지속가능성과 세계화의 긴장관계

세계화 과정이 지속가능성의 필요조건에 미치는 조건에는 여러 분야가 존재한다. 이에 대한 철저한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다룰 수 없을 것이다:

1. 윤리적 긴장. 세계화는 철학적 실용주의 전통에 입각하여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위에 대해 주장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지속가능성은 윤리적 강령이며, 이는 경제적 절대성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닌 정의와 사회적 책임성 및 참여 또한 고려하게 될 사회적 생태적 윤리를 증진시킬 것이다.

2. 무제한의 성장, 합리적인 인류의 만족, 그리고 부당한 자원의 분배. 세계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한한 경제적 성장을 목적으로 하는 현세적 경제동향은 세계화의 과정으로 특징지어진 가운데 생명과 미래 세대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더욱이 경제적 성장의 산물은 형평에 맞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빈부의 격차를 확대시키고 있다. 지속가능성을 대변하는 입장에서는 세계화의 과정으로 인해 유익을 점유한 세계의 소수 부자들이 어마어마한 지구자원을 낭비하고 있으며 인간이 필요로 하는 수준이상의 삶을 향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보다 더 경제적인 성장을 바라는 자들과 "충족의 경제"를 옹호하는 자들 사이의 논쟁은 점점 더 격렬해지는 양상을 띠고 있다.

3. 과학기술과 지속 가능한 인류애. 삶의 개선에, 특히 인간과 자연 및 사회적 환경의 절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기술혁신을 통해 지대한 공헌을 가져올 수 있게 된 과학기술은 또한 일자리를 파괴하며 인류공동체를 무력화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는 특히 이들 과학기술의 지식들과 지배력을 갖춘 경제적으로 막강한 자들에 의해 취해진 후진국들의 자원착취로서 야기되는 긴장관계를 말해준다. 더욱이 (적어도 대부분의 서구적 사고로 팽배한 가치기준에 따르면) 일부계층의 삶을 증진시킬 수도 있는 과학기술은 이와 동시에 많은 다른 계층들에게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있는 현실이다. 예를 들면, 보다 폭넓은 어떤 공공의 협의 없이도 막강한 경제적 기관들은 인류의 생명에 위협을 가져올 수도 있는 유전자조작에 대해 치명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4. 통신과 지속 가능한 인류애. 현대과학기술에 따른 정보의 발전이 통신과 상호관련성의 가능성을 확대시켜준 반면, 공공의 대중에게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 소수의 강력한 상업주의적 대가들의 방편으로서 무역에 관한 세계적 정보의 집중화를 향한 움직임이 매우 농후하다고 보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연합체와 비정부단체들 및 교회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들을 표방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며 공유하기 위해 컴퓨터의 새로운 자원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사안이다.

5. 인간관계와 상거래 순환의 가속화. 경제적 세계화 과정에 끼친 과학기술의 발전 은 사람들 사이의 계약이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것 이상으로 가장 빠르게 성사되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추진된다. 무역의 가속화는 금융상의 거래 및 경제적 성장을 위해 상당히 기여하고 있는 시장과 관련된 정보를 필요로 한다. 컴퓨터 프로그램들은 시장의 주기적 변동에 거의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기획되어 있다. 무역은 또한 사람들 사이의 계약관계를 보다 용이하게 성사시키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 과정에 고착된 이러한 새로운 현상들은 헤쳐나가기 어려울 정도의 긴장과 염려 또한 초래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인간적인지 아니면 지속시킬 수 있는 상황인지에 대해 의아해하는 판국이다.

6. 생산의 방향 및 금융의 영향력. 오늘날의 세계는 생산을 위하여 서로 공간의 연관관계를 요구함에 따라 인류의 가시적 기본연대를 이루는 데는 일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시대의 장애가 되는 현실은 금융자본의 현저한 지배세력이라고 하겠다. 구체적인 세계금융의 관심사는 거의 모든 인간의 삶의 영역에까지 자신들의 힘을 부과시키는 데에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비록 많은 금융시장의 대다수 투자액이 실업연금기금이나 시민보조금, 또는 교회 등에서 출자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매니저는 종종 공격적으로 대처하기 때문에 최종 분석결과로 보면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자들은 바로 궁핍한 자들이라 하겠다. 이들은 다름아닌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자유를 행사하거나 삶의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최소의 여유자금을 구하는 자들이다.

7. 무역과 외국인 직접투자. 확산된 국제무역과 해외직접투자는 개발도상국들의 국민들로 하여금 외국인들에 의한 번영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반열에 동참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류시키는 실정이다. 거의 배타적으로 선진화된 세계를 위한 우선적 생산 기회를 부여한 후에야, 수출을 위한 상품의 절차상과 국내외의 소비를 위한 거대한 상품의 다양성을 구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도국들에 세워지고 있는 공장들을 통해 일부계층의 경우 가난에서 탈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밖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점 더 가난해졌으며 불안감은 점점 더 확산되기만 하는 경험을 겪고 있는 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개도국들은 무역과 외국인 직접투자의 잠재적 혜택을 누리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더욱이, 무역의 조건들은 일부계층을 위해서는 부를 증진시켜주는 반면 대부분의 가지지 못한 자들의 삶은 일정하게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이미 보다 많은 이득을 점유한 층들의 유익은 확산되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궁핍에 처해있는 자들을 위한 모든 무역상의 유익은 상당히 축소된 현상을 말해준다. 다국적기업들은 세금의 인허가와 노동의 규제 및 환경기준들의 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타당치 않다고 여기면 어느 곳으로도 옮길 수 있다고 위협함으로써 정부들을 위협하고 있는 실정인데, 이는 특히 개도국들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따라서 사회적 정의가 뒤흔들린 상황에서 정부들은 필요한 공공분야의 서비스들을 유지하기 위한 총수입을 강탈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국제적 경쟁은 기업들로 하여금 기후변화와 지역의 오염을 저지하기 위한 엄격한 규제의 이행을 미루기 위해 정부들에게 압력을 가하도록 유발시키는 실정이다. 따라서 물질적 및 사회적 지속가능성 모두가 위협받게 되는 현실을 겪게 된다.

8. 경제적 세계화와 사회적 배제현상. 시장통합의 결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만성실업에 의해 영향받고 있으며, 적절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조치는 결핍되고 이들의 사회-경제적 권한들은 거의 혹은 전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뼈아픈 현실에 직면하게 된 상황에서 생산에 복무하고 있는 수만 명의 일자리가 상실되고 있다. 세계화의 주된 지표라 할 수 있는 인수와 합병의 절차들은 종종 일자리를 감축시킨다는 공표와 더불어 추진되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앙아메리카 등과 같은 세계의 특정한 지역들은 오늘날 국제무역의 수치상 20년 전보다 훨씬 작은 몫만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이들의 유일한 생존의 방편은 바로 비공식분야로서 이들의 사회적 권한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 "지하경제"이다.

9. 동력화된 유동성과 이주노동의 증가추세. 유동성은 언제나 무역의 추진력으로 작용되어왔으며, 현 세계무역의 수준은 노동과 상품 모두에 있어 보다 많은 개발과 보다 빠른 첨단의 운송수단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가능할 수 없는 세상으로 치닫고 있다. 점점 더 팽창되고 있는 세계무역은 동력화된 유동성의 확산이 보다 증폭되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지속가능성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불가피한 현상임에 틀림없다. 환경의 심각성을 우려하는 일각에서는 유동성 및 운송을 위한 새로운 접근법이 모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동성의 더 나아간 특성은 박탈당한 자들의 수가 확산된 추세로 나타나는 데에 있다. 경제적 난민의 현상이 10년 전에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추세를 띠고 있다. 인간답게 생존하기 위한 조건들이 고향 땅에서는 제대로 주어지지 못할 경우, 사람들은 시골에서 도시로, 작은 마을에서 큰 도시의 중앙으로, 가난한 나라에서 부자 나라로 이주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현세적 경제 흐름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적절히 헤쳐나갈 수 있는 가능한 사회들을 위한 필요조건들을 창출해낼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시장의 통합은 이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진척되고 있다. 이 결과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가 불법과 폭력이 확산되는 경향에 놓여 있다. 현재의 인구통계학적 흐름에서 볼 때, 특히 일부 후진국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현상이 악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10. 문화상호간의 긴장관계. 경제적 세계화가 보다 나은 인류의 미래를 위한 유일한 방편으로 단정될 경우, 이의 영향력에 대해 위협이나 심지어 공격으로까지 느끼고 있는 문화적 입장에서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추세의 흐름과 충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들은 국제적 시장으로 이루어진 통합과 이에 수반되는 보다 효율적이고 경쟁적인 절대사안을 거역할 수 없으며, 이와 동시에 이들의 전통과 가치 및 정체성이 (종종 자연환경을 존중하며 배려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긴장은 불행하게도 간혹 폭력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1. 국가의 역할. 세계화의 핵심적인 구조적 결과는 경제적 삶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약화시키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초창기에는 현대 민족국가 형성의 특질을 이루었던 요소로 지역에서부터 국가적 차원으로의 힘의 전환이 지역의 공동체를 붕괴시켰지만, 이는 그러나 인류의 삶을 위한 사회적 필요조건들에 대한 다소 지엽적이지 않은 평가를 위한 근거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작금의 국가적 정치세력 및 주권을 축소시키는 양태는 발생가능한 시장의 활동 내에서 적절하고도 민주적으로 한계를 규정지을 수 있는 초국적 정치권력의 창출에 의한, 이에 따른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에 놓여있다. 세계적 경제와 특히 금융시장들은 국가적 권력의 지배를 제한시키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분야에 대한 국가의 일정한 역할은 반드시 강조돼야 하겠다. 국가가 다른 나라들과 경쟁을 하면서도 이들 사이에서 경제적 주역이 될 수 없는 경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국가는 다른 나라들과의 경제적 교역을 비롯해 국가적 차원에서 경제적 발전을 위한 틀을 구축해야 하며, 이를 위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적 윤리와 공익을 추구하는 현세적 정책들에 대한 분석작업 모두에 있어서, 이들에 대한 처리방안의 세심한 조정이 필요하다. 세계의 가장 부유한 계층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노동규범과 환경정책 등과 같은 분야는 기업의 자유 및 순탄한 소비행위에 제약을 가져온다는 이유로 도덕적으로 필요한 합의를 지연시키며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는 반면, 명백히 자신들의 유익 분야에서는 발빠르게 국제적 합의를 창출하도록 강조하고 있는 이들의 양태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공통된 국가적 관심사가 존중받도록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이며, 또한 그렇게 행함으로써 국가의 일정한 역할이 충족돼야 할 것이다.



세계화의 상황에 처한 공동체들

인간은 정면으로 부닥치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발전할 수 있는 존재로서 "실질적인" 관계성만이 아닌 협력과의 관계를 위한 의미와 소속감을 추구한다. 이러한 계약은 현대성에 의해 보다 강하게 영향을 받는 사회보다는 전통이 우세하며 개인적인 차원에서 서로 알고 지내는 사회에서 보다 용이하게 성립된다.
여러 인간공동체의 형태들이 지니는 역할에 대해 인식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공동체의 삶에 참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사람들은 각기 나름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경험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부류의 인간관계는 대중사회의 삶을 특징짓는 것 이상으로 보다 의미심장한 관계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삶에서 공통된 관심사와 상호적 지지 및 연대를 공유하게 된다. 인간공동체들은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대화가 가능하며 삶이 보다 인간적이 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부 공동체들은 몇 가지의 공통된 행위에 구성원들을 포함시킬 수 있는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 이를 통해 이들은 공통된 신념 및 공동의 책임감을 표방한다. 이는 일정한 단체와 마찬가지로 공통된 관심사의 문제에 관해 각별한 어조를 띠는 집단적 존재임을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공동체들은 대중사회 내에서 명확히 구분될 수 있게 된다. 이들 구성원들이 모든 종류의 사회적 과정에 관여할 수는 없다지만, 이들은 어떻게 다른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연계되는 지와 더불어 자신들이 개발한 공통된 사고 및 행위 등에 의해 남다르게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사회들은 서로가 어떻든지 간에 세계화의 과정에 포함된 여러 요소들에 의해 영향받기 마련이다. 통신의 새로운 과학기술 및 시장통합의 영향력은 사람들의 삶에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화가 선호하는 사회적 관계성은 "가시적"이며 덜 개별적이다. 즉, 세계경제의 일반적 흐름은 대중매체, 대중소비, 삶의 패턴에 대한 획일화, 그리고 대중문화 등에서 보여주듯이 보다 더 대중적인 사회의 삶의 특질을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세계화는 복잡한 과정으로 이에 대한 포괄적 비준이나 총체적 거부 모두가 도덕적으로나 개념적으로 볼 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대중사회의 상황에서 비인간화된 존재로 처할 위험에 놓이게 된다. 사회와 공동체 사이에서 생겨나는 긴장은, 특히 경제, 정치, 문화적 영역이나 심지어 종교적 영역에서조차 사회적 삶 가운데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요인들과 남다른 관심사를 표방하는 공동체들 사이에 생겨난다. 이는 예를 들어 자연과 인간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주장하며 이를 옹호하는 공동체들 가운데서 발생한다. 마을이나 국가 또는 지역이나 지구적 차원에서 이들은 보다 더 인간적이며 개별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들은 대다수의 대중들 가운데 지배적인 공통된 감각에서부터 자신들이 유익한 감각이라고 생각되는 방식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이들 공동체들은 지배적인 경제적 세계화의 흐름과 더불어 야기된 긴장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약점과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정체성 또한 상실하게 되는 위험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자신들의 소명에 확신하고 있는 한 이 사회에서 이들이 발휘할 수 있는 카리스마, 즉 권력 또한 이들이 인식한다면 이들 스스로는 보다 강력해질 수 있다. 대중사회에서의 힘이 대중들의 수와 관계된다고 한다면 공동체들의 권력은 오로지 이들의 자질에 기초하여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들의 행위는 대중사회의 삶을 규정하는 거대한 세력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이들의 영향은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향력은 공동체의 고유한 특성 및 확신을 갖고 실천하도록 고무하는 공동체의 용기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윤리적 결단의 문제라 할 수 있다.


현 세계적 동향과 공동체의 삶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세계화 과정의 몇몇 요소들은 공동체의 삶을 위한 가능성들을 보여주었다. 과학기술의 진보는 최소한 실질상의 통신수단을 가속화시켰고 이를 확대시켰다. 정보가 널리 보급됐으며, 국제적 네트워크의 망이 형성됐다. 이러한 기회들과 더불어 여러 시민단체들(비정부기구)의 의사표방기구로서 국제시민사회가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는 환경에 대한 존중 및 가난한 자를 위한 정의와 인권 등과 같은 공적인 관심사를 표방하게 되었다. 어떻든지 간에 일반대중의 운동들 역시 세계화국면의 부분적인 혜택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는 한편으로 공동체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 첫째, 인간세계의 건설 및 이를 가능케 하는 최상의 모든 요소들에 의존하면서 세계화는 경제적 활동의 제도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대부분의 창조물에 대해 물질화 및 수단시하는 "기업의 문화"를 강화시킨다. 인간은 자신들의 환경과 더불어 살아있는 관계성이 고려될 때에만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는 존재로서, 오늘날 자신들의 중요한 부분이 잘라져나가는 위험을 겪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교류를 깨뜨리는 행위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환경과의 관계를 져버리게 할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생래적 한계 또한 무시하게 만드는 처사이다. 생명의 거룩한 차원과 이의 신비로운 상태가 더 이상 고려되지 않는 실정에 놓인 것이다.
수단이란 것은 불행하게도 의도하지 않은 수단적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는 결코 고려하지 않는 법이다. 이들 가운데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바로 인류공동체의 본질에 끼친 이의 결과라고 하겠다. 사회발전의 도구로서 전락된 인간은 자신들의 삶을 위한 의미를 창출함으로써 우주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이 상실되고 마는 위험에 처하게된 것이다.
두 번째의 위협은 독특한 이데올로기적 발상 -lapensee unique-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다른 모든 문화들이 순응해야 할 패러다임을 강요하는 가운데 세계화의 발전을 가져오고 있으며, 이를 유일하게 적용시키는 체제가 되도록 고무시키는 데에 있다. 이러한 상황들 가운데서 다른 입장들이 마땅히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된다. 세계의 시장들이 암암리에 의도한 인간행위의 획일화는 사람들의 고유한 문화들과의 관계성을 위협함으로써, 또한 인간관계들을 비인간화시킴으로써 인간공동체의 삶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있는 현실이다.
셋째로, 많은 인간들이 공통된 언어로서의 지배적인 기호적 코드를 받아들이면서 서로 연결짓기 위해 대부분 가상의 통신수단을 사용하게 될 경우와 이에 따른 결과로서 다른 언어에 대해서는 무시하게 될 경우, 공동체 자체는 질적으로 상실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된다. 가상의 관계는 인간관계를 비인간화시킨다. 대중문화는 대중매체의 수단이 확산됨에 따라 전달됐으며 계속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또한 대중소비문화의 결과를 낳고 있다. 따라서 문화적 단절의 위험이 거의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보여진다.
넷째, 세계화되고 있는 경제체제의 일반적 흐름의 결과 원주민 공동체들의 삶이 파괴되고 있는 특수한 현상이 각별히 강조돼야 한다. 천연자원을 착취하며 땅을 돌보지 않게 됨으로써 이들 공동체들의 존재 자체가 멸종의 위협아래 놓여 있는 판국이다.


공동체와 생명의 돌봄

시장의 발전과 이의 통합을 운영하려는 자들은 세계화를 선호한다. 이들은 세계무역의 전례 없는 성장에 힘입어 이의 발전을 낙관적으로 전망한다. 이들은 시장의 통합과 더불어 문화 및 대중의 통합 또한 가져올 것에 대해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대중들은 반드시 세계화에 부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큰 희생을 두려워하며 이를 우려하고 있다. 여전히 이들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는 처지이다. 세계화의 과정에서 소외된 자들은 아픔과 고통 및 무용지물의 상황을 느끼는 것이다. 이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대상으로서, 즉 권리와 책임감을 지닌 인간으로서가 아닌 다수로서 취급되는 현실을 느낀다. 선진국가이든 개발도상국이든 간에 대상의 일환으로 소외된 일반대중들은 마치 자신들이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닌 양 멸시받고 버려진 자라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지 못한 채,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지하경제는 이들에게 있어 유일한 호기라 아니할 수 없는 처지이다.
이러한 시장의 통합과 대중의 배제라는 역설적 공존의 상황에서도 인류의 삶을 확고히 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일부의 공동체들이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 실제로 인권을 옹호하는 단체들에 참여하는 많은 개개인들은 사회를 재생시키기 위해 생태운동 및 그밖에 여러 운동단체들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된 논조는 생명에 대한 주장에 있다. 즉, 불의가 만연하고 생명이 위험에 처한 이 세계에서 공존을 모색하자는 이들 나름대로의 자각에 대한 표출이다. 이들 공동체들은 세계화가 펼쳐진 상황에서 과연 지속가능성의 기회가 있겠는가에 대해 문제 제기한다. 세계무역과 인간의 유동성을 확산시키는 경향이 지배적인 틀 내에서 과연 지속가능의 사회가 출현될 수 있겠는가? "지속 가능한 발전"의 진전이 과연 실현될 수 있는가?
이러한 공동체들은 인류에게 부과시키고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시키며 유지시킨 가운데 다음 세대들에게도 적용될 이 세계화의 위협에 대해 저항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생명을 선호하며 무책임한 행위에 대해 저항하는 이들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과 책임감 또한 깨닫고 있다고 하겠다. 자신들의 신념을 펴기 위해 이들은 지속가능성을 위한 운동을 전개한다. 이들은 인정할 수 없는 사실들과 정면으로 부닥치면서 이를 거부하는 운동을 전개시킨다. 이들의 확신과 저항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즉, 생명의 돌봄을 말해준다. 이들 공동체들은 모든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연대할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을, 인간과 자연환경 사이의 신비스러운 공동체의 모습이 인식되고 존중돼야 하며, 이는 나의 삶 이상의 가치를 지닌 생명으로써 대상으로 취급될 수 없다는 사실을 관철시키기 위해 몸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신념과 책임감을 인식하는 윤리적 공동체들은 나름대로 치르고자 할 가치체계들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확신하고 있는 순간까지 주된 영역으로 남아있게 될 이들의 가치체계는 값진 행동을 통해 이 확신들이 구체화될 준비단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는 종종 대다수의 일반대중들에 의해 공유되는 저항개념과 사회적 운동들을 의미하는데, 즉 지배적인 공통된 의식 자체를 참된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는 행위를 말한다. 세계화의 과정에 대한 무비판적 주장과 절대화는 참된 의미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다수가 이를 장래의 유일한 방편으로 간주하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참된 의미란 현실에 적용되는 체제를 인정하고 지원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거룩한 생명의 신비가 돌보아져야 한다는 신념과 이를 책임지는 행동에 의해 이러한 인식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사실을 표방하는 데에 있다.


값진 공동체로서의 기독교 교회들

많은 기독교인들이 삶의 지속가능성을 염려하는 여러 형태의 공동체들과 관련되어있다. 기독교인들은 정의 및 연대를 추구하며 환경을 돌봄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들이다. 이들 공동체들은 자신들이 처한 삶의 상황을 이해하고 다른 측면들을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또한 영감을 얻기 위한 성서연구 및 행동의 지침을 연구한다. 그리고 이들은 일단 실제의 상황에서 실천하기로 다짐한 경우에는, 집단적인 동지적 관계로서 이를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참된 의미를 공유한다는 것은 또한 실천을 함께 한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믿음의 인식은 문화와 자연 사이의 분열을, 역사와 창조 사이의 분열을 극복시킨다. 사랑의 계명에는 하나님과 인간공동체(개개인, 사회단체, 미래세대)만이 아닌 창조의 보전 또한 포함된다. 하나님의 은총의 신비는 무한하기 때문에 기독교 공동체들은 이러한 은총을 증언하며 이러한 믿음의 인식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상의 권력들에게 이를 전파하려고 노력한다.
기독교 공동체들은 사회적 구조 및 기구들을 통하여 이 은총의 의미를 보다 구체화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인식을 사회에 전환시켜야할 도전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증언이 종종 매우 제한적이며 무가치한 것들로 판단되는 이 세계에서 은총의 현존을 위한 상징적 증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이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려고 노력한다. 지속가능성과 행동의 실천은 지속 가능한 사회를 세워나가며 정의 및 환경과의 연대를 선호하는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지속가능성의 실천 및 이의 운동은 우리시대에 없어서는 안될 기독교적 증언의 요소라 하겠다.
세계화가 유일한 방편으로 천명될 경우, 이는 신격화되기 마련이다. 우상이 형상화되고 숭배의 형상이 주조된다. 이 거짓된 신은 자연도 존중하지 않으며 이들 이웃들의 권한 또한 존중하지 않는 강력한 지배체제를 정당화시킨다. 기독교인들은 정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그리고 하나님을 만몬주의와 혼돈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도록 부르심 받았다.



신학적 통찰


지속가능성 및 정의의 이중적 도전양상

기독교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믿음의 확신들 가운데 하나는 모든 창조의 거룩한 차원에 대한 인식이다. 창조는 창조주에 대해 말해준다(시편 19:1-6; 104:1-30). 이는 "자연적 계시"가 아닌 바로 신비로운 방법에 의한 하나님의 모습이며 창조가운데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에 대한 깨달음이다. 창조는 완료되지 않았으며, 기독교 공동체들은 이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기를 예기하며 바라는데, 이들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이에 협력하도록 초대받아온 자들이다(고린도 후서 5:16-6:2 참조).
따라서 기독교 공동체들에게 있어서 창조의 돌봄은 불가피한 사안이다. 이는 이웃을 섬기며 사회적 환경과 자연환경을 돌보라는 구체화된 행동을 요구한다.
참된 기독교신앙은 온전한 창조세계와의 올바른 관계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이는 창조세계의 자연적 한계 내에서의 삶을 말하는 것이며, 총체적인 하나님의 창조의 일환이 되는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시키지 않은 채 이의 은총을 확산시키고 누릴 수 있도록 자연을 돌봄으로 이를 다음세대들에게 물려줄 수 있게끔 관리하는 것을 뜻한다.
참된 기독교신앙은 또한 창조의 일환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이외의 여러 다른 종들과도 올바른 관계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한다. 이는 타자에 대해 하나님 창조세계의 총체적 요소로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며, 타자를 돌보는 것은 모든 인간의 삶의 목적이지 단순히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 아님을 자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보호받아야 할 자연세계와 인간사회 세계 모두가 생래적 가치를 지닌, 복잡하게 얽혀진 상호의 관계적 존재로 간주한다. 이들 모두는 값진 존재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창조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이웃사랑을 핵심적인 기독교신앙의 윤리적 강령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간직한다. 세계화의 과정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이러한 경제적 발전들이 이의 본연의 한계 및 재생산능력을 훨씬 초과함으로써 자연을 착취하며 황폐시킬 뿐만 아니라 수백만 명의 도시와 촌의 근로자들로 하여금 빈곤세대로 살도록 운명짓고, 수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공식적인 경제적 정치적 삶에서 완전히 배제시킴으로써 인간을 착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착취와 배제 행위는 엄연히 잘못된 것이다. 이는 분명 인간과 자연세계 모두의 생래적 가치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수긍할 수 있는 대안들을 모색해야 하며 이를 당연히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이는 아마도 수억만의 인류가 자손 대대로 시장발전과 시장이데올로기 및 인간의 편의와 탐욕의 희생물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뻔한 이치이다.

우상의 유혹

안위함에 대한 자가도취는 쉽사리 우상의 형태로 전환될 소지가 충분하다고 보여진다. 이에 대해 깨닫지 못한 채, 사람들은 시장을 자산으로 간주하며 자신들의 몸과 마음으로 이를 하나님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수동적으로 허용하게 된다. 사람들은 마치 이에 대한 복종이 유일한 선택인양 시장에 의해 할당된 운명을 따르게 된다. 따라서 효율적인 생산과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 인간에 의해 고안된 메커니즘 자체가 실제로는 개인과 공동체들의 삶을 지배하게 되는 통치세력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몇 번이고 거듭하여 성서는 스스로가 자치적이며 독립적인 창조주의 시대로 간주되는 인간체제 및 이의 실제상황을 창출하려는 경향에 대하여 경고한다. 자신들의 논리를 관철시키려는 이러한 경향들은 이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며, 결국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하여 한정된 인간의 창조에 복종하도록 만든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를 보면, 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금을 녹여 형성됐으며 그리고는 하나님으로 숭배됐던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우상숭배라 일컬으며, 또한 이는 인간의 제일 가는 죄의 덕목이라고 주지시킨다.
성경기자들은 우리 인간이 이룩한 창조를 마치 하나님인양 숭배하면서 이와 동시에 하나님을 경배할 수는 없다고 증언한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두가 우리가 만들어놓은 거짓 신의 희생물로 전락되고 이를 믿고 의지하게 된 결과 불안전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 우리는 결코 이웃을 섬길 수가 없게 된다.
성경본문들은 제일의 존재로 탄생된 우리는 거짓 신을 섬기도록 창조된 것이 아님을 거듭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장경제 규모 및 발전양상을 보면, 수천만 인류의 생존권과 지구전체 자체가 지금까지 이처럼 우상숭배의 위기에 처해본 적이 없었던 실제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이러한 우상의 실체를 밝혀내며, 이의 분명한 바른 관계를 정립하고, 오늘날 감쳐져있고 신비에 쌓여있는 여러 가시성을 수반하지 않고는, 이러한 세계시장경제의 우상을 해체시키리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관계들을 청산하고 타파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 재구성의 과정을 착수해야 한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가 각기 나름대로 세계시장경제과의 우상관계를 스스로 청산해야 한다. 일부는 이 경제체제의 건설에 참여한 것을 고백해야 할 것이며, 그밖에 다른 이들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영구화시킨 것에 대해 참회해야 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쉽사리 안락함에 빠진 것에 대해, 그밖에 다른 이들은 시장의 찬란한 현혹의 약속에 모든 가치와 전통들을 묵인하려했던 자신들의 의지에 대해 고백해야 할 것이다.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특히 부자들의 경우, 시장을 기독교적 덕목 및 이의 가치체계로 전환시켰으며, 시장의 가치체계와 실상을 자신들의 기독교신앙 이해에 도입시키면서 기독교를 시장경제의 체제와 동일시해왔던 것이다. 시장경제에 대한 일부의 비판적 시각들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공격들임을 알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은연중에, 또는 간혹 분명하게 가난한 자의 실질적인 영적 실패의 증거는 가난이라면서 물질적인 성공을 영적인 안녕과 동일시해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물질적인 부가 결코 영적인 풍요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부자들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심오한 경험을 통해 부는 믿음의 분명한 비전과 목적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장애만 될 뿐이라는 예수의 거듭된 경고를 깨닫고 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시장경제도 아니며 더더군다나 인간과 자연을 시장발전의 희생물로 요구하신 적이 결코 없다. 오늘날의 믿음은 시장경제의 미혹과 권력에 전적으로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배제가 아닌 포용을, 파괴보다는 보호를, 탐욕보다는 청지기를, 그리고 적자생존보다는 연대의 가치를 표방하는 인류의 제도와 이를 성취하는 창조 및 이의 재창조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비판적 현실주의를 위한 탄원

우리 기독교인은 우상의 유혹에 굴복할 수 없다는 믿음과 마찬가지로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온전한 국가들의 비전을 쫓아서 잘못 인도될 수 없는 노릇이다. 온전한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고 하겠다. 현 체제의 본래적 우상의 실체를 밝혀내고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저항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우리 기독교인은 정의, 평화, 창조와의 온전한 조화를 보장할 수 있는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하거나 예측하지 않는 편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복음의 메시지가 주는 가치들에 따라서 가장 폭넓은 참여가 촉진될 수 있는 체제가 조성되기를 염원하며 이를 추구할 것이다. 이들은 모든 이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강화되기를, 특히 유약하고 미천한 자들을 위해 이를 실천할 것이다. 이들은 연대의 요구에 일차적인 관심을 부여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인류의 삶이 경쟁사회 속에서 고갈되어가고 있으며 사회의 질서와 기능이 불가피하게 타협에 기초한다는 사실 또한 인식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복잡한 네트워크 내에서 수행 가능한 최상의 해결책이 반드시 책임적으로 추진돼야 할 것이다.
정의와 평화 그리고 환경에 대한 존중이 유지되는 체제와 이를 위한 솔선정신은 다각적이며 다양하게 이루어 질 것이다. 기독교인은 이들에 대해 제한된 인간의 기구들로 여길 것이며, 전지구적으로 이루어진 인간공동체들의 산물이요, 함께 삶을 살아온 결과물들로 간주할 것이며, 따라서 이해와 관심사에 있어서 이견이 분분한 가운데 결국에는 변화될 수 있는 형태가 설립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러한 체제를 마련하기 위한 준비로서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분석이 필요하며, 또한 국가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적 평가 부족으로 인해 낙후될 수 있는 가치체계들을 전환시킬 수 있는 솔선정신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차적인 관심사는 이웃들과 총체적인 창조세계 모두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공동체들을 강화시킴으로써, 이를 이루어나가는 데에 있다. 이들 공동체들 가운데 일부는 분명히 기독교적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지속가능성과 정의를 위한 이 이중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는 모든 단체들이나 운동들과 더불어 활동하는 데에 있어서 어떠한 주저함도 없이 펼쳐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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