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뉴라이트 운동과 기독교의 보수화에 대한 신학적 성찰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5 21:55
조회
2350
** 이 글은 제 1차 기획위원회 세미나 발제문입니다...(유경동 교수)


뉴라이트 운동과 기독교의 보수화에 대한 신학적 성찰

유경동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1. 들어가는 말

한국 사회에 등장하는 ‘뉴라이트(New Right)’운동은 현 한국 사회 내 386세대, 또는 주사파들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반발로서 진보 세력의 사회 개혁에 대한 독주를 견제하고 안정적인 질서를 우선으로 하는 일종의 ‘정치적 저항 의식’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뉴라이트’는 1980년대 영국의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의 정책기조를 이룬 사상에 그 어원을 두고 있으며 케인스주의의 복지국가론을 비판하면서 공공정책을 위한 시장기구의 부활과 시민권의 제한이라는 두 가지의 뚜렷한 주장을 담고 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가 결합된 이 사상에서 자유주의는 개인주의와 제한적인 정부의 역할, 그리고 자유시장이라는 전통적인 자유주의 가치로 구성되어 있고, 반면에 보수주의는 사회와 종교 그리고 도덕적 보수주의에 기초한 사회적 질서와 권위의 확립을 강조한다. 이 두 가지 사상이 합쳐져 등장한 ‘뉴라이트’는 국가개입의 축소와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시장 기구를 옹호하고 지나치게 인위적인 평등지향을 배제하고 재산권을 다른 시민권보다 우위에 둔다.

반면 ‘뉴라이트’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네오콘’(Neo Con)은 강경 보수로, 국가 안보를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유형의 보수라고 할 수 있다. 현 미국 부지 행정부 체제의 딕 체니 미국 부통령,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 그리고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안보를 중시하며 특히 미국의 '힘'을 내세워 세계 제1의 대국 위치를 유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다.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뉴라이트’는 위와 같은 정치적 흐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서구에서 우익은 자유주의, 즉 자본주의 개념아래 정부의 역할보다 시장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고 좌익은 사회주의의 개념아래 시장의 역할보다 정부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은 천민적 자본주의를 통하여 경제구조가 형성이 되었으며 근대화의 과정에 ‘개발’의 논리는 있었지만 도덕적 ‘발전’이 생략이 된 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현재 기독교의 ‘뉴라이트’는 자유시장이나 정부의 권한에 대한 대항적 담론이 아니라 과거 근대화과정 중에 형성된 기독교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 수구적 움직임으로 비쳐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필자는 이 글에서 한국 사회를 변혁시킬 바람직한 기독교의 나아갈 방향을 ‘탈식민지’의 문제와 ‘시민사회’의 과제를 연결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2. 기독교의 보수화

기독교의 보수화는 기층 ‘국가’의 영향력과 깊은 관계가 있다. 기층 사회의 정치적 이념이 종교적 신념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전형적인 예는 막스 베버(Max Weber)의 이론에서 나타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베버는 자본주의와 루터의 ‘직업소명설’과 칼빈의 ‘예정론’ 사이의 선택적 친화력과 상관관계를 분석하였다. 이러한 것은 종교사회학파의 트뢸치(Ernst Troeltsch)의 ‘유형론’에서, 그리고 니버(Richrad Niebuhr)가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에서 복음을 순수한 종교적 이상으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복음에 담겨져 있는 종교적 이상과 그 이면에 있는 기층 세계관이 어떻게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여 왔는지에 대하여 분석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트뢸치나 니버의 분석이 다소 교회 중심적이고 기독교적 가치관을 상대적으로 세속적 가치관보다 우위에 두었다면, 현대의 포스트모던 신학은 서구적 근대주의와 함께 발전하여온 서구 신학의 전통적 신학적 메타담론들에 대하여 수정을 가하고 있다. 해방신학, 흑인신학, 민중신학, 아시아신학, 여성신학등은 외적으로는 남성, 백인중심주의, 제국주의, 식민지적 문화, 그리고 국가의 왜곡된 정치적 형태를, 그리고 내적으로는 성서와 교리, 그리고 교회의 구조 속에 역사적으로 방치된 억압적인 ‘권력구조’를 밝힘으로써 올바른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고 그 백성의 책임과 역할을 요청하고 있다. 특히 로마 카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카톨릭의 대 사회적 관심과 세계교회협의회(WCC)를 중심으로한 다양한 에큐메니컬 연합운동은 종교적 가치가 국가나 집단의 도덕성에 맹목적으로 야합하지 않도록 ‘간접적’(indirect)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나름대로 국가의 정치적 구조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피려하였다. 예를 들어 어거스틴(Augustine)은 플라톤(Plato)의 영향으로 지상의 국가는 천상국가의 순례의 여정으로 가는 임시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심지어 악과 전쟁까지도 그것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질서 속에 있음을 어거스틴은 보여주고 있다. 반면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국가를 사회성을 가진 인간의 공동선을 위한 역사로 보았기 때문에 국가는 하나님이 주신 이성으로 인간의 행복과 평화를 추구할 수 있는 신의 권위가 부여된 현세적인 질서이다. 이 국가는 교회와 함께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와 초자연적인 요구를 둘 다 충족하며 천상의 선한 의지로 공동체 성원을 인도하는 것이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국가관은 국가가 하나님의 통치의 권한에 있으며 이 지상의 국가는 천상의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되는 곳이며, 따라서 통치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한을 부여 받았다는 점에서는 강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국가와 통치자에 대한 다소 낙관적인 모습은 권력에 탐닉하는 인간과 그 집단의 본성에 대하여 간과하는 점들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루터(Luther)의 정치사상의 특징은 통치자에 대한 무력 사용을 절대 금지한 초기의 입장에서 적극적인 자기 방어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데 있다. 이것은 기독교 국가개념에 있어서 최초로 ‘저항 의식’을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며 이는 후에 민주주의의 기본 의식으로 발전되었다. 한편, 칼빈(Calvin)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정치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라’는 그의 견해에도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진 신정정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시를 이루려고 시도하였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 윤리학에 있어서 시민적 저항,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국가를 이루려는 신앙적 비전을 고무해 왔다는 의의가 있다. 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칼빈의 정치 신학적 견해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주권론에 근거한 신정론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다.

칼빈 이후 기독교는 근대국가와 현대국가의 발전을 통하여 다양한 정치이론을 발전시켰다. 주로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세계대전의 절망을 경험한 후 등장한 정통주의, 이 양자 사이에서 제 3의 길을 택한 근본주의, 근대주의 국가관을 해체하는 서구의 포스트모던주의, 그리고 서구적 근대주의에 대한 제3세계 계열의 탈식민주의 등, 다양한 신학이 전개되어왔다. 이와 같은 다양한 논쟁은 기독교가 각 시대의 정치적 조건을 분석하고 나름대로 ‘기독교의 국가관’ 형성에 일조를 하였지만 한계는 교회의 보수성 때문에 사회 개혁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 한계는 각각 ‘종말론’적인 해석이 지상의 나라에 대한 정치적인 무관심을, 기성 국가의 권력 구조 틀 속에서 ‘지상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윤리적 모순을, 국가의 신탁기능에 대한 기대는 귀족정치나 왕정정치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되고, 역사적 낙관주의는 세계 대전을 일으킨 전제주의의 출현을, 근본주의로의 회귀는 전투적인 교파주의로 변질되는 등, 역사 속에서 지상의 국가와 연관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각각 나름대로의 시대를 변화시키려는 개혁적 성향과 동시에 그 한계를 노출하였다.
물론 중세이후의 종교제도와 정치제도의 상호 독립을 인정하는 신정 분리의 상황아래 교회가 지상국가 안에서 발전한 자본주의의 병폐나 정치적 권력을 비판하고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실현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아울러 인본주의와 지식정보화시대를 앞세우며 부의 민주화를 희구하는 ‘정경분리’를 시행하는 현대국가에서 경제정책까지 간섭하여야 하는 기독교의 입장은 더욱 더 난감하다.

설상가상으로 현대 국제사회에서의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서구 국가의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더욱 더 곤경에 빠트리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직면한 것은 문명간의 전쟁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에너지에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문명내의 전쟁이며, 각 문화가 세계적으로 네크워크가 갖추어진 풍요한 미래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문화적이며 민족적인 자율성이 유지되기 보다는 근대성의 명백한 이익과 거기에 드는 명백한 비용 사이에서 고심하는 각 개인의 양면성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한 현대 사회는 대중문화(맥월드)의 세계화를 위한 책임도 그 강력한 물질주의의 세속화와 일상화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여전히 주권의 독립성을 누리고 있는 척하는 미국과 달리 최근에 테러리스트들은 21세기 인간관계를 규정짓는 실제적인 상호의존성을 인식하고 이용하고 있다.

단적으로 표현하여 ‘세계화’의 허구는 역사적으로 자유시장의 불가결한 요소인 시민적, 민주적 제도를 세계화시키지 않은 채 상품, 노동, 통화와 정보시장을 세계화시키고 있으며, 이에 따라 결과적으로 발생한 세계의 불균형성은 전통 국가를 약하게 만들고 시장은 사적 경제에만 도움이 되게 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민주적 시민 질서뿐만이 아니라 제도로 작동하는 국제적 경제 질서에도 악영향을 주었다. 더군다나 사유화되고 시장화된 세계화에는 시민성이 부족하여지고 시민문화, 종교와 가족과 연관된 가치나 제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세계화는 정부와 공공의 문화를 공격하면서 민주주의를 소진시키는 민영화 개념을 동반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장이 한때 정부가 수행했던 모든 것을 대치 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 무한한 시민적 자유를 요구한다. 그러나 소비자의 선택이 사적이고 개인적인 선택에 머무를 때 이것은 공공의 결과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민주정치 체제는 선택에 관한 것만은 아니라 공공의 선택에 대한 것도 신중하게 다룰 수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공적이고 민주적 결정만이 사회정의와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족국가내의 민영화는 시장규제 완화로의 길을 터놓으면서 시장규제 완화는 또 다시 세계화와 경제의 민영화를 촉진하게 된다. 이것은 정치제도의 쇠퇴를 인정하도록 시민들이 자신을 공공의 시민이 아니라 개인적 소비자로 인식하게 될 때 잘살게 되고 보다 자유롭게 살 수 있을 것 이라고 시민을 설득한다. 그러나 결과는 CEO가 민주주의 정치가의 무능한 대체물인 것처럼 소비자는 시민에 대한 별 볼일 없는 대체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국가 개념은 이성적 분열과 윤리의 내적인 모순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국 중심적인 가치를 이상으로 삼는 개인의 자폐적인 민족주의는 국제사회에서 자칫 타 국가가 내세우는 정치적 이념이나 문명적인 가치를 무시하게 된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닫힌 해석을 타자 중심적인 열린 해석으로 재구성하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근대화를 넘어 세계화의 과정으로 향하고 있다. 심각한 문제는 한국 사회 근대화(modernization)의 이면에 진정한 발전(development)이 뒤따르지 못한 결과로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태로워진 현 한국사회는 근대화가 우리에게 던져준 숙제를 미처 해결하기도 전에 탈 근대화의 과정으로 이행하고 있다. 미국의 패권주의와 신 자유경제주의를 등에 업고 등장한 ‘세계화’라는 거대한 이념은 식민지와 분단, 그리고 독재와 폭력으로 점철된 한국 근대성의 문제들을 ‘기억함’으로써 ‘반성’하고 ‘재구성’하기보다는 ‘망각하기’로 우리를 몰아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의 로고스 중심적 담론들을 해체하여 제국주의의 중심과 그 외 주변으로 나누었던 이원적 은폐성을 고발하기 보다는 우리는 서구적 문화를 ‘자기 것으로 착각’하여 변종적인 문화적 식민지를 재창출하는데 공모하고 있다.

3. 기억과 망각


아시아에 있어서의 ‘타자’는 식민주의를 통하여 형성이 되었다. 이 ‘타자’의 특징은 식민 지배자와 식민지인, 서양과 동양, 문명인과 원시인, 과학적인 것과 미신적인 것, 선진과 개발 도상 사이의 지속적인 위계 속에서 폭력에 시달려 왔다. 그리고 서구는 아시아의 문화적 가치와 차이를 체계적으로 폐기하거나 부정하는 역사적 과정의 시발을 반복하였다. 그러므로 아시아는 ‘서구’의 ‘식민지’주의에서 ‘탈’이나 ‘해체’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재 구성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필자는 ‘탈식민주의’에서 ‘탈’은 ‘후기’(post)와 ‘해체’(de)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후기’는 식민전/식민화/식민후의 역사적 이행 과정의 결정적인 시기 구분의 지표로 이용될 수 있으며, 포스트식민 조건은 식민 점령이 종결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식민 점령 전을 포함하여 식민점령이 개시되면서 시작되었다는 연속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한 연대기적 입장에서 식민점령 전의 식민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규명도 중요하기 때문에 식민지 전후를 둘러싼 시대적 상화에 대한 논의도 중요한 주제로 부각된다.

‘해체’로서의 탈식민주의는 식민주의와 그 직후 사이에 연대기적 기술을 나타내는 ‘후기’(post)로는 탈식민주의를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점들을 극복하기 위한 이론적 전술이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탈식민주의와 그 궤를 같이하는 점도 많지만 ‘후기’(post)의 논쟁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이나 여성해방의 과제가 은폐될 수 있으며 ‘후기’를 모더니즘과 이어지는 연속성의 맥락에서 이해할 때 근대화의 모순을 재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식민주의’는 ‘포스트식민적(postcolonial)’이나 ‘포스트식민성(postcoloniality)’이라는 단어가 지닌 실존적 의미를 해체하여 무엇보다도 자기 반성적 계기를 가지고 식민 점령 전후에 등장한 복잡한 조건을 얼마나 적합하게 개념화하느냐 하는 차원에서 그 이론을 전개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문제는 ‘후기‘(post)가 암시하는 연대기적 맥락에서 우리는 과거에 대한 식민지적 기억을 망각으로 덮는 모호성에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포스트(post)라는 접두어는 ‘전통과 결별하고 절대적으로 새로운 생활 방식 및 사고방식을 개시하는 것이 필요함과 동시에 가능하다’는 확신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종류의 유토피아는 거의 언제나 역사적 기억 상실이 행하는 침묵과 생략을 통해 자신의 미래상을 그리지만 그것은 과거라는 것이 실체가 없고 언제든지 처분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과거와의 단절은 과거를 억압하거나 망각하는 방식으로서 과거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는 방식이다.

특히 포스트식민 장면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식민 지배자와 식민지인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 적대와 욕망의 관계를 드러내어 주며 포스트식민성에서 ‘식민 억압’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라면, ‘식민 권력’에 대한 유혹이 무엇이었는지 또한 규명하여 주어야 할 것이다. 즉 식민의 과거는 단순히 현재의 개화되고 사심 없는 시각에서 이론화 될 수 있는 가공되지 않은 정치적 경험들이 보관된 저장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억과 회상이라는 방식을 통한 단순한 물리적 시간은 자칫 알맹이가 없는 역사로 탈바꿈할 수 있다. 식민주의 이후 ‘반 식민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 국가들이 출현할 때 흔히 식민 과거를 망각하려는 욕망이 수반될 수 있는데 이 망각하려는 의지는 여러 역사적인 형태를 취하며 이것들은 다양한 정치적 및 문화적 동기들에 의하여 고무된다. 무엇보다도 탈식민적 기억 상실은 식민 종속에서 비롯된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비워버리려는 욕구로서 역사를 스스로 창안하려는 충동이나 새롭게 출발하려는 기대에서 생긴 것이지만 문제는 단순하게 식민 기억들을 억압하는 것만으로 식민 경험이라는 불편한 현실에서 해방되거나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탈식민주의는 식민 직후의 신비한 효과를 갖는 기억 상실에 대한 이론적 저항으로 간주될 수 있다. 즉 식민 과거를 다시 방문하여 기억하고, 특히 따져 물으려는 학문적 임무를 맡은 하나의 학문 분과적 전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논란의 여지없는 역사의 후진성과 식민주의의 정치적 연대기적 파생물에서 생겨난 모순들을 아시아가 인식하면서도 부정하려는 유혹을 필자는 아시아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문제라고 본다. 그 이유는 아시아가 소위 식민지 경험으로부터의 독립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전 경험의 지식과 가치의 식민적 위계들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식민성’에 대한 아시아의 과제는 자의적인 역사적 기억 상실에 대한 유혹을 단절하고 망각된 기억들을 되 살려 아시아 사회 속에서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함에 있는 것이다.

즉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의 학술적 임무가 조심스러운 연구를 통하여 잊혀진 역사적 내용과 의미를 회복하는데 있다고 한다면, 그 일차적 주요 목표는 정치적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포스트식민성의 주체들이 자신들의 모순적 조건들을 이해하고 갱신하여 나아가는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식민주의의 ‘기억’이 식민주의와 문화적 정체성 문제 사이에 필요한 요소이지만 ‘기억하기’는 결코 자기반성이나 회고와 같은 정태적 행위가 아니라 현재의 외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조각난 과거를 짜 맞추어 보는 것, 즉 고통스러운 ‘다시 떠올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식민 직후에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태는 그 과거를 겁에 질려 거부하거나 유토피아적으로 추방하고자 하는 것과 서로 짝을 이루는데, 여기에서 ‘기억하기’는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첫 번째 기능은 불쾌한 기억을 보다 단순화시켜 드러내는 과정에서 식민화의 압도적이고 지속적인 폭력을 보여주는 것이고 두 번째 기능은 적대적인 과거를 보다 친숙하게 만들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한다는 면에서 궁극적으로 화해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포스트식민성의 망각된 내용이 식민 지배자와 식민지인 사이의 양가적이고 공생적인 관계를 다시 재구성하며, 식민 지배자와 식민지인을 불가피한 상호 의존 관계로 엮고 있는 각각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의 왜곡된 상호성은 식민지인들로 하여금 식민 지배자들을 증오하면서도 또한 그들을 열렬하게 찬탄하는 증오와 욕망을 동시에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포스트식민적 정신분열은 동양인들이 정복한 타자를 갈망하는 모순과 같은 것이며 식민 조건 속에서 식민지인들이 ‘공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는 물론 ‘권력’의 기제에 대한 더 심층적인 해석이 필요하게 되는데, 즉 권력의 논리는 근본적으로 강제적이지만, 반면 권력이 행사하는 켐페인은 종종 유혹적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민주의 유형은 우선 ‘영토의 물리적 정복’에 초점을 맞추어 폭력을 수반하지만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자아와 문화의 정복’으로 특징 지워지는 식민주의는 합리주의자들, 근대주의자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시작되는데 이들은 제국주의가 실로 문명화되지 않은 세계에 대하여 문명의 메시아적 선구자라고 주장하여 기층 민중들을 호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주의의 특징은 서구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이전의 식민지를 ‘동일화’하고 ‘재정복’하는 ‘동일성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동일성의 정치학’은 타자(차이)를 부정함으로써 주체는 타자 속에 반영된 그 자신을 보고 그 자신을 긍정적인 성질로, 그리고 타자를 부정적인 성질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성의 정치학은 동화냐 배제냐 하는 이원론적인 대립만을 낳을 뿐인데, 즉 동일성과 차이라는 이원론적인 대립을 그 특징으로 하는 상상적 구조에서처럼, 동일성의 정치학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논리를 통하여 주체의 자기 동일성에 대한 주장으로 결국 타자의 죽음을 초래하게 된다.

‘무력’을 앞세우고 세계화의 기치를 내세우는 현대 문명의 허위의식은 현대 패권 국가간에 나타나는 ‘동일성의 정치학’에 그 원인이 있다. ‘동일성’이란 ‘타자’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힘으로 ‘동일화’하려는 정치적 의도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동일성의 정치학’의 적자인 아시아적 ‘타자’는 서구가 각인시켜 논 ‘타자’의 ‘타자성’을 내면화해 왔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패권전략의 모습이나 중국과 일본이 보여주는 국제정치에서 힘을 과시하는 군국주의 모습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동서양이라는 지리적인 차이 말고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세계는 서구나 동양이나 예외 없이 ‘힘’을 논리로 한 ‘동일성’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서구가 동양을 동일성의 타자로 세뇌하기 위하여 소위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적 가치인 ‘유교’적 계급질서가 오히려 서구의 타자를 동양적 질서의 상부 구조에 놓음으로써 식민적 구조를 공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냉전 체제의 교두보로서 미국의 패권 질서 아래서 경제 성장을 추구해 왔던 한국 사회의 궤도에 교회는 철저하게 순응하였고 양적 성장을 추구하며 경제 규모를 키우는 국가의 방식은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구현이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다는 믿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한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만연하였고 이러한 믿음으로 한국 기독교는 공세적인 성장전략을 추구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회의 현실 문제를 등한시 하고 점점 지역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한편, 교회 내에서는 경쟁적인 교파 주의가 생기게 되는데, 이것은 문명 발달을 근거로 한 서구 모방주의가 중요한 원인인 것이다.

위와 같은 비판은 한국 교회에 복음을 전달하여 준 서구 교회의 역할과 그 희생마저 희석하자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 개신교가 세계화를 외치면서도 그 종교시장에서의 주류 패러다임은 여전히 서구적인 것을 답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교회성장에 관계된 문화적 패러다임이나 전략도 미국 성공사례를 복사하여 미국식 설교, 미국식 기독교 음악, 미국식 설교예화, 미국식 성장모델을 재생산하는데 한국 대형교회가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의 어떤 교회의 미국식 성공 사례가 알려지면 마치 그것이 교회 성공의 비결인양 유행처럼 번져 한국 교회 강단과 세미나를 독점하고 교회 성원들은 그 전략에 동원되며 이러한 답습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한국 기독교의 사대성과 연관된 한국 교회의 권력화의 문제는 우리를 더 암담하게 한다. 한국 사회에서 탈/근대화의 식민지 담론은 공적 영역에서는 이전 식민지의 정당성을 상쇄하고,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근대화가 배태한 정치권력의 독점을 분산하고 이와 연계한 천민적 독점자본에 대한 경제적 분배에 대한 문제로 나아가고 있다. 식민지의 정당성을 잃어버린 자리에 드러난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계층화’의 분열에 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빈/부의 이론적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빈/부의 사이에서 기독교는 오히려 메타 담론의 제국주의적 식민지성을 문화적인 것으로 수용하여 서구적 기독교를 기독교 본래의 것인 양 착각하여 교회의 배타주의와 성직의 특권화, 한국 사회 기층의 불합리한 물적 토대의 모순을 ‘해방적 영성’으로 극복하기 보다는 ‘기복주의’로 공모하고 그 본말을 은폐시키는데 앞장서고 있다.

한국의 종교 집단은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 집단이면서도 별로 견제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 집단이 방자하게 권력을 휘둘러 사회를 마비시킬 정도의 충격을 줄 가능성은 언제라도 존재하고 있는데 사회 일각에서 점점 이런 위험성이 인식되고 있기는 하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당황하는 빛이 역력하다. 이러한 종교 권력의 이면에는 개신교 근본주의의 기본적 에토스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승리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근대화는 서구화와 미국화의 과정이었기 때문에 서구 종교이자 미국 종교로 간주된 개신교는 처음부터 문화제국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명개화의 종교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지 않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개신교는 의식적 ???? 무의식적 차원에서 강력한 ‘승자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불과 한 세기 만에 소수의 종교집단에서 다수의 종교집단으로 성장한 사실에 대한 성취감에 도취되어 거대한 종교 권력인 교회가 원하는 것이라면 국가 권력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승리주의가 자리 잡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승리주의는 항상 힘을 숭배하고 외형적 팽창주의로 나아가며 타자에 대하여는 정복주의로 일관한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승리주의는 다원적 종교 시장을 교란시키는 주요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현재 대형 교회의 먼 거리 차량운행이라는 변칙을 낳고, 지역사회의 기존 교회들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지성전을 건축함으로써 지역사회의 종교적 다원성과 특수성이 무시되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현대 교회의 위기는 교회 성장이 둔화되면서 교인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점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교회 위기론에 주로 등장하는 변명은 포스트모더니즘 신학과 종교 다원주의 신학에 대한 비판, 여성 신학에 대한 공격, 타 종교에 대한 공세 강화나, 젊은이들의 세속화 등으로 몰아붙이지만 이는 위기의 진원지를 은폐시키고 기존의 교회 권력을 정당화하고 유지시키기 위한 교회의 몸부림일 뿐이다. 교회위기의 진원지는 기복신앙을 이용한 정통주의, 근본주의, 승리주의, 패권주의, 가부장주의의 절묘한 공모에 있다. 특히 한국 개신교 종교 권력은 성 차별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고 있으며 성직의 영역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교회가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권력의 그물을 해체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해체 작업은 교회가 자발적 가난의 에토스에 입각하여 기복 지향적 신앙을 넘어서고 교회 운영상의 가부장적 파시즘을 무력화시키고, 종교시장에서 패권주의를 불식하고 통치 권력에 대한 비판적 견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여 나가야 한다.

필자가 ‘교회 권력’의 문제에 대하여 교회 안에 교회의 본질과 관련된 목회직에 대한 총체적인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식민주의적 기독교의 전통 속에 배태된 천민적 자본주의체제를 심층적이고 비판적으로 탐구하여야 하며 그렇기 위하여 교회는 더욱 더 교회다워야 하고 더욱 사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자세로 변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의 제도는 제도 자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신앙공동체에 봉사함으로 존재한다. 현대 한국 교회의 모습은 자신을 일차적으로 권력이 없는 공동체(하나님의 백성, 평신도)와 함께 권력을 가진 공동체(성직계급)의 혼성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교회의 그리스도는 황제와 우주적 주님이 되어 이 세상 권력들과 맞서는 고난 받는 종과도, 세속적인 모든 권력과 영광을 단호히 거부한 예수님과도 거리가 멀다.


4. 시민사회에서 기독교의 과제

한국 계급의 중간층에 주된 기반을 둔 시민운동은 한국 사회에서 넓은 의미에서는 민중운동의 일환으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시민운동이 자신의 정체성을 민중운동과 구분하면서 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민운동을 민중운동과 구분하는 것이 더 현실적합성을 지닌다. 시민운동단체들은 ‘공공선의 추구’ 등을 명분으로 실제로는 민주적-합리적 부르주아지배질서의 구축을 추구한다. 때문에 이들 단체들은 부르주아적 지배질서의 민주화-합리화 등이 이루지면 질수록 외형적으로는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지닌 단체라는 형태를 띠고 출현할지라도 실질적으로는 성립된 지배질서를 뒷받침하는 준(準)국가적 장치의 성격을 더 많이 지니게 된다.

서구의 근대화 과정에서는 사회 문제를 국가와 시민사회라는 이원적인 틀에서, 즉 국가와 시민사회 양자간의 갈등이나 해결이라는 도식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었다. 90년대 이후 한국 시민사회의 다원화 과정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 사회 안에서 시민사회 논쟁은 개인과 집단으로 분화되어 나타나는 개별적인 상충적 이해관계를 과연 국가가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간의 자율적인 합의에 의한 공적 이성을 기반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으며, 이러한 것은 서구의 것과는 그 성격이 상이하다는 점에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을 바르게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시민사회를 논할 때, 소위 서구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시민의 역할이나 운동이 한국사회에 과연 어떻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서구 사회에서의 시민운동은 국가의 정당성과 정통성의 위기에 대한 이론과 실천적인 대안으로 나타난 시민운동인 반면 오랜 유교의 전통과 억압적인 구조를 해체하며 나타난 한국의 시민운동은 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난 제3섹터로서의 운동이다. 성숙한 시민운동으로 과연 성장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먼저 한국의 시민사회의 이론적인 틀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그 한계점과 대안을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민사회를 재 정치화하는 실천적인 문제가 한국사회에서는 심각한 논제로 부각되는데, 현 정부 체제 내에서도 정당성의 시비가 끊이지 않는 점을 고려할 때, 정당성과 정통성에 대한 이해는 시민사회운동의 방향에 많은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다. 한국 시민운동과정을 분석하는데 있어서, 정통성과 정당성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는 시민운동의 줄기가 될 수 있는 학생운동이나 종교운동이 모두 시작부터 서구와는 달리 정통성과 정당성이 없는 가운데서 시작이 되었으며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시민사회의 운동과정은 ‘영역운동’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영역 또는 운동 영역이란 1987년 민주화 투쟁을 기점으로 하여 권위주의 체제 시기에서 민주화로 이행할 때, 운동세력의 운동 영역이 권위주의를 해체하여 나가는 과정을 설명할 때 중요한 용어로 사용된다. 영역 현상은 주어진 경제체제와 정치체제를 모두 부정하는 변동 현상이라기보다 기존의 사회 부문들을 상당 부분 긍정하고 몇 개의 전위 영역들을 앞세워 한시적이나마 폭 넓게 지향 세력을 형성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에서는 식민지 체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배의 정당성을 개발이라는 이데올로기로 급조하여 결국 체제 밖의 영역 또는 준영역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영역은 그 규모로 보아 아주 빈약하였으나, 반정부 반체제 운동을 통하여 정권의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부각시켜서 사회적으로 주체적인 시민을 형성시켜나가면서 정치적인 상부구조를 점차적으로 제약할 수 있는 힘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은 외부에 대한 운동 노선의 표명에 있어서는 강한 반체제성을 보여주었지만, 현상의 국면에 작용한 변동의 실제 값은 체제 내외의 밀고 당기는 과정사의 어느 지점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실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국가와 허상으로서의 시민사회라는 측면에서 보지 말고, 국가와 영역에 놓여있는 주요 정치 세력간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정치적 사회의 형성이라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주요 민간 세력들이 참정적인 자기 변화를 통하여 어떻게 촉매적인 역할을 사회에 행사하느냐가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중요 변수라고 여겨진다.

이와 같이 시민사회를 ‘영역’이라는 관점에서 시민사회운동을 평가하는 입장들은 기독교적인 대안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틀을 제공한다. 즉 단순히 한국 시민사회운동을 국가권력과 시민의 관계라는 단일적 해석을 피하고, 한국사회 내 하부적인 여러 시민 단체들의 영역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수용하여 그 영역성이 지향하는 소위 다원화, 다양성, 상호성 등의 통전적인 성향을 고려하고, 이에 따른 사회 윤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 내 시민 사회운동에 대하여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요소들을 고려하여야 한다고 본다. 첫째, 인간의 노동에 대한 보다 심오한 해석을 제시하여야 한다. 한국의 시민운동이 인간의 노동에 대한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것 못지않게 정신적인 영역에서 노동에 대한 보다 가치 지향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한국 시민사회 운동이 자율적인 영역운동이라고 할 때, 그 영역의 다자성과 다원성에 대한 특성을 수용하기 이전에 그 영역의 규범과 도덕성에 대한 준거점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오랜 독재 아래 민주화라는 상징은 한국의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정신적인 가치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 민주화가 자칫 정치적인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정치윤리 또는 더 나아가 사회윤리적인 가치체계로 승화되어야 하는 문제점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셋째, 시민사회의 영역운동의 특성인 다원화에 나타나는 ‘시민의 힘’에 대한 보다 냉철한 이해가 전제된다. 특히 지구의 생태적 위기와 문화적 충돌론이 인류생존마저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는 현 시점에 인간의 힘에 대한 보다 윤리적인 이해가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필자는 시민사회가 극복할 위의 세 가지 내용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사회윤리적인 대안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우선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기독교 사회윤리적인 각도에서 이해하자면 인간 노동에 대하여 보다 윤리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생산양식, 즉 자본과 시장이라는 갈등구조에서 인간노동의 소외에서 인간노동의 관계성을 부각시키는 생활양식의 문제가 공감대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점이 특징으로서 주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기 산업화의 특징인 정보 사회적인 정황은 시민들로 하여금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부터 교육, 환경, 여성, 법률, 여가, 복지, 종교들의 다양한 영역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다. 이러한 움직임을 시민사회운동에서 해결하려면, 정치적인 운동에서 정치 사회 윤리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되며 기독교적인 운동에서 기독교 사회 윤리적인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하는,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노동과 그 가치에 대한 보다 창조적인 해석이 필요하게 된다.

사실 한국의 시민사회 운동은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세속화의 물결과 서구 자본주의와 결합한 한국적 천민자본주의의 틈바구니에서 나름대로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애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공적인 영역에서 나타나는 한국의 시민사회 운동이 너무 경제적인 영역의 노동과 그에 대한 가치에만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경제 정의 문제는 열악한 분배 구조에 그 원인이 있다. 정치 경제적인 부조리와 유교문화적인 복합적 요인들과 성장위주, 사용자 위주, 대기업 위주의 경제 정책은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과제도 중요하지만 기독교 사회윤리적인 맥락에서 윤리적인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더군다나 한국의 기독교가 노동의 정신적 가치를 회복하고 이에 따른 바른 사회적 윤리를 제시하여야 함에도 물질을 절대시하고 끝없는 탐욕에 물들어 부의 축적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천민적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시민사회 운동에 있어서 인간의 노동행위에 대한 보다 창조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노동가치에 대한 한시적인 민중운동에 머무를 수 없으며 노동가치의 공정한 분배를 보장하는 경제 정의의 실현만이 목적으로 되어서도 안 된다. 기독교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바로 노동을 생산하는 그 규범적인 틀에 대한 자기반성과 체제 반성을 요구하는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며, 동시에 노동이 성숙하고 자유를 향하지만 책임적인 행동 양식으로 발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 베버(Max Weber)가 자본주의에서 발견한 개신교 윤리는 이 세상적 금욕주의와 천직으로서의 의무감이 결합되어 소명감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동반한 윤리였다. 한국 시민사회운동은 따라서 노동에 대한 주체성의 확립과 인간이 자유를 향하여 행동하는 것이 바로 노동의 정신적 기제가 된다는 노동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천민자본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도록 힘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와 경제의 부패를 해소하려는 노력은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근거점을 형성하여 주었다. 그러나 시민사회운동은 단순히 정치 경제의 부패 해결뿐만이 아니라 그 원인이 되는 근대성에 대한 이해와 나아가 인간 주체성의 소외 원인인 도덕적 규범에 대한 회복이 운동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서구 사회에서 보았듯이 무한히 팽창하는 공공권역 경제영역이 사적 영역에 침투하자 시민은 물질적 만족이라는 식민지화에 지배되게 되었다. 한국 시민사회운동에서 민주화 이후에 단순히 공공 영역의 경제분배 정의에 그 운동이 국한된다면, 경제 정의 전에 먼저 존중되어야 할 노동의 존엄성과 그 가치를 담고 있는 인간성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둘째, 한국 시민사회운동은 서구의 경우와 같은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난 합리성의 충돌, 즉 하버마스적인 입장에서 본 도구적 합리성과 목적적 합리성간의 우위다툼, 혹은 체계와 생활세계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시민사회의 출현이 아니라, 그 중간과정으로서의 민주화 과정 중 체제 내 영역간의 서로 밀고 당기는 다원성과 상호 교환성에 서있다는 입장을 지금까지의 논지에서 강조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권력이나 자본과 시장의 힘이 여전히 시민사회 운동의 사회적 공간을 위축시킬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한편 미래 지향적인 한국 시민사회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이전의 이데올로기적인 틀에서 단순히 보수나 진보라는 성향만으로 운동의 성격을 규명할 수는 없다. 또한 시민사회 운동이 현실 괴리적이고 자폐적인 패권주의 지향적인 운동성을 뛰어넘어 보다 큰 공공영역으로 가기 위하여서는 이 운동이 정치적인 것이 아닌 정치 윤리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에서 극복되어야 하는 중요한 점은 각 영역의 도덕적 규범과 윤리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유교적인 억압의 틀에서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아직까지도 주도적 가치에 대한 타 영역의 지배에 너무 익숙하여 무감각한 상태에 있거나 반대로 자기 영역에 고착화되어 배타성을 띠고 있다고 진단이 된다. 시민사회에서의 다원적 평등은 영역의 사회적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며, 그 고유한 분배영역의 핵심이 된다고 한다면, 한국 기독교는 선교 초기부터 그 분배정의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경우가 될 것이다.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한국 개신교 초기의 문제는 복음을 매개로 하는 양 영역 사이에 복음의 사회, 정치, 경제적 해석이 생략됨으로써 복음을 단순화하였다. 굳이 월쩌(Michael Waltzer)의 용어로 재해석하자면 복음의 단순 평등은 이루어진 셈인데, 다원적 평등은 생략된 셈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에 대한 보편적인 얇은(thin) 진리는 전하여졌지만, 특별한 배경을 가진 인간의 상황에 대한 두꺼운(thick) 진리는 삭제된 것이다.

한국 시민사회 다양한 운동영역의 특징은 각 가치영역을 존중하는 상대적인 자율성의 확보에 있다. 그러나 그 영역이 유지되는 전제조건은 각 영역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공통의 언어와 다원적 영역의 평등 속에 지배적 가치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 비판적인 시민정신에 있다. 그 시민정신은 종교적인 영역에서 뿐만이 사회 각 영역에서 다원적으로 서로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시민사회운동과 아울러 기독교 운동은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사회적 가치와 상징을 지속적으로 공평하게 나누는 데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사회의 경제 정치적 독점이 더 이상 묵과될 수 없듯이, 교회의 지배적 패권주의와 경쟁적 성장주의는 한국 시민사회운동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가 교회를 위하여 존립하지 않고 사회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사회 없이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교회의 가치조차도 우세한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아니하고 교회는 바뀌어야 한다는 교회를 향한 사회의 불안한 열정과 사회는 변화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사회를 향한 불안한 열정이 서로 만나 보다 다원적 평등성을 확립하는 열정으로까지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 시민사회의 다원화 과정에서의 문제점은 개인과 집단으로 분화되어 나타나는 개별적인 상충적 이해관계를 과연 국가가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개인간의 자율적인 합의에 의한 공적 이성을 기반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으며, 또한 시민사회를 재 정치화하는 실천적인 문제가 한국사회에서는 심각한 논제로 부각되는데, 필자의 견해로는 여기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문제가 소위 ‘시민의 힘’에 대한 문제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유교적인 전횡으로 힘의 분배나 정의에 익숙하지 않고, 편당적이며 민주화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서구의 것과 견주어 짧기 때문에, 힘의 균형과 억제에 대한 교육과 실천의 시간이 부족하여, 성숙한 시민사회를 형성하는데 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앞에서 한국 시민사회 성격을 논할 때 강조하였듯이 정통성과 정당성에 근거한 계급의 개념이 전무한 상태에서 영역을 구축할 때 나타나는 소위 시민사회 변동의 힘을 지지할 사회 윤리 도덕적인 기반의 토대가 무엇이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한국 시민사회운동에서 나타나는 ‘시민의 힘’이 기독교 사회 윤리적인 각도에서 책임윤리의 문제로 부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민주화 과정에서 한 영역의 패권주의를 거부하고, 통전적인 의미에서 사회 생태 환경적인 성격을 띠며 사회의 여러 목소리를 수렴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영역적인 요소를 포용하여 결국은 공동체성을 형성하는 데까지 발전하여 나가야 한다. 그것은 한국 시민사회의 특징인 다원성을 수용하여야 하는 통전적인 윤리를 지향하는 것을 뜻한다. 즉 한국의 시민사회운동은 민주화라는 가치 지향과 상징성을 향한 각 영역의 존립성만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그 영역의 주체인 인간의 존재방식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이것은 곧 영역과 영역의 행위자 양자의 윤리적인 틀과 강도를 고려하는 책임적인 윤리를 요청하는 것이다.

한국의 시민사회 운동은 기독교 사회윤리의 맥락에서 도덕적 행위의 조건으로서 시민의 자유로운 행위가 지향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재확인하여야 한다. 시민운동이 자율적인 사회 공간을 확보하여 각 영역의 정당성을 통한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사회의 토양에 구체적인 영역화를 구축하여 나가야 하는 책임의 영역에는 생태계를 포함하는 우주적인 질서를 포함하여야 하는 요청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인간이 사회에서 가지는 책임은 도덕적 실존에 근거하여야 한다. 그것은 유한한 세계 안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하나님의 자기 제한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남겨진 것은 자유의 영역이며, 그 영역에서는 도덕적인 책임만이 강조될 수 있는 것이다.

시민사회운동에 있어서 교회가 추구하여야 할 윤리적인 책임성과 연대성의 기준이 되는 공적윤리는 무엇인가? 만일 사람들이 윤리적 규범과 기준을 감지하고, 특히 종교와 교회를 통해서 한국의 시민사회가 정착된다면, 서로가 종교적인 의무로 족쇄를 얽어매려는 노력을 지양하고,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사회가 성숙하게 발전하는 방향을 지속적으로 재발견하고 실현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교회는 자기 교파의 종교적 정당성만을 강조하지 말고, 사회를 갱신할 도덕성이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한스 큉의 이론을 시민사회 운동에 차용하자면, 그것은 자기의 종교나 정당, 혹은 영역만이 정당하다는 요새전술이나 진리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각 종교나 영역간의 차이점과 모순을 무시하는 무차별 전술이나 하나의 영역을 절대시하여, 종교나 영역의 통합을 통하여 평화를 실현하려는 포옹전술을 뛰어넘어, 각 영역과 종교가 가지고 있는 자아비판을 통하여 각 영역과 종교에 있어서의 상징이나 가치 형태의 독특한 기준을 넘어서, 인간의 참된 의미의 일치는 참된 의미의 인간적인 것을 겨냥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향하는 가치를 시민사회가 이루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5. 결론

리바니오는 영성적 분별력에 있어 정화(purification)를 선행조건으로 삼는다. 일반적으로 영성적 분별력은 개인의 차원에 속하고 정치는 집단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와 같은 입장이 이분법적으로 빠지지 아니하고 한 영역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리바니오가 주장하는 진정한 영성의 해방이다. 왜냐하면 영성적 분별력이 하나님의 뜻을 사회에 안에서 발견하는 경건한 실천이라고 할 때 정치는 결국 정의의 실현을 위한 특별한 영역이 되고 영성적 분별력이 그 기능을 발휘하여야 될 특수한 영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성적 분별력이 필요로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이 정치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정치와 권력이 서로 결탁하게 될 때 거만한 지배욕과 압제라는 간악한 탐욕이 인간을 사로잡기 때문에 정치적 경험 속에서 필연적으로 분별력이 요청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분별력은 단순히 새로운 현실 속에서 적절한 인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변혁이다.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정치적인 책임에 대한 면제가 아니라 정치 분야에 대한 비판적 감시를 통하여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것이고 나아가 역사에 적용시켜 그 역사를 변혁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한국 교회와 개인이 영성적 분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금욕적인 실천을 통하여 이룩한 영성에 대한 너무 과도한 애착과 개인의 영적 차원을 넘어선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회 현실에 대한 무지가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볼 때, 우선 해결하여야 될 과제는 개인의 의식이 사회적 영역과 연관을 맺는 변증법적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윤리는 도덕적 행위의 조건으로서 자유로운 행위가 지향하는 목적성이 무엇인지를 재확인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 목적성은 존재의 무에 대하여 항거하는 존재이며 정신과 자유가 여타의 나머지 실재들과 연속성을 지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한국의 근대사에 있어서 사회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급변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전근대적인 교회의 구조로는 당면한 사회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해결하여야 할 난제들이 산적하여 있다. 필자는 한국교회가 21세기로 나아가는 미래 사회의 공존과 평화를 구축하기 위하여서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가 제시하는 한국 교회의 실천적 대안은 탈식민주의 문제를 기독교 공동체의 삶 속에 안치시켜 자칫 “전식민주의”(pre-colonialism) 단계로 후퇴하는 “순환적” 모순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필자는 위에서 제기한 “교회의 식민성,” “교회 권력,” 그리고 이에 대한 “예언적 담론”이라는 관점을 전개하는 중심으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자한다.

첫째, 탈식민주의 담론에서 한국교회가 해결하여야 할 당면한 문제는 서구적 기독교가 제공한 기능적 조건들에 더 이상 의존하지 말고 한국 기독교 자체적인 갱신의 토양을 형성하여야 한다고 본다. 이 과제는 단지 교회 내적인 종교적 요소들에 대한 재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과 한국형 자본주의 경제에서 한국교회가 추구하는 교회선교의 기능적인 조건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한국교회는 정당성과 정통성에 근거한 시민사회 형성에 공헌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정당성이란 정치적인 질서의 근저로서 이 정당성의 요청은 한국교회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사회적인 자기 정체성의 사회 통합적인 보존과 연관되어있다. 한편 정통성이란 한국교회가 과연 정치적인 힘을 사용하여 한국사회의 발전 위하여 구성된 가치들을 실현 시키는 데에 적합한지를 밝히는 것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정통성 정당성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의의 문제인데, 이것은 한국교회의 구성원이 집단의 결정과 정책 집행 과정을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여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만일 동의가 뒤따르지 않을 경우, 한국교회의 윤리적 책임성과 정치적 능력은 물론 나아가 정통성과 정당성 양 자가 다 위협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탈식민지로의 이행이 단순한 사회진화에 순응하는 것이 아닌 한, 이 과정에 참여하여야 할 현 “한국교회의 환경”에 대한 내적 모순에 대한 성찰과 개혁의 의지가 철저하게 성숙하게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 한국 사회가 근대화되어 가고 복잡성이 증대되면서 국가의 체제와 시민의 생활세계 간의 관계는 체제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 내 만연하는 상품, 자본의 논리와, 민주화의 과정에 있긴 하지만 아직도 불안한 국가권력으로서의 체제의 힘은 시민 사이에 이성적인 담화 형성의 과정을 다원 다자적이기 보다는 여전히 양극화의 구조로 만들어 가고 있다. 결국 체제와 생활세계의 관계의 불균형은 사회적으로 병리현상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사회통합을 분열하는 위기를 발생시킨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교회도 권력화 되었으며 성직/평신도, 대형/소형, 서울/지방, 성골/진골, 남성/여성 등의 이원론이 이익의 공모에 따라 그 형태가 변종되는 “혼성적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여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적 이념과 그 실천에 대한 요구와,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 지향적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이익의 방기” 사이에서, 상생의 정신으로 풀어야 할 정치적 민주화의 문제를 방기하고 사회 문제에 대한 “저항의 정신”보다는 세계화라는 “보편적 인식”에 집착하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메타담론에서 취급하여야 할 중요한 이슈이지만 한국교회의 과제는 세계화 이전에 (1) 한국의 식민지의 경험을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2) 한국 전통에 대한 재인식을 통한 한국교회운동의 토착화와 (3) 서구적 가치개념에 의존하지 말고 동양적/한국적 가치관에 근거한 민주화 운동의 역량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셋째, 만일 한국교회가 한국 사회 내에서 그 도덕적 역량을 인정받고 한국 사회의 당면한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한 정당성과 정통성의 위용을 갖추고 “혼성적 정체성”을 극복할 수 있다면 한국교회의 구조는 보다 유연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한국교회가 전통적인 세 가지의 S에서 세 가지의 P로 이행하여야 함을 강조한다. 즉, 조직(structure), 계통(system), 전략(strategy)을 중시하는 체제에서 사람(people), 과정(process), 우선순위(priority)를 중시하는 교회의 민주적 체제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외형적 성장주의는 자본주의이행 과정의 관료제의 성격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관료적 발전은 체제의 분화를 통하여 복잡성의 증대를 가져오게 되고 전문화는 한국교회 체제에 대한 합리성의 향상을 가져온다. 한국교회의 조정 능력을 대변하는 목회자와 목회자,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의 교회의 경제와 관료적 행정의 부각은 보다 심오한 관계를 중시하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해체되고 상호 작용의 영역으로부터 분리되어 차츰 효율성의 원칙에 의하여 지배되는 계통을 중시하는 하위 체계로 전환하여 가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부목사나 전도사, 그리고 평신도들은 목회자나 교회발전의 전략에 따라서 교회 상부구조의 도구적 제어에 통제되기 때문에 한국교회의 개개인이 결국 교회 성장을 그 목적으로 전술적인 조작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한국교회는 보다 기독교적인 이념에 충실 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란 교회 권력화 되어 버린 현대사회의 병리적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인간을 중시하는 기독교 본래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특히 인격성의 함양은 개개인 주체의 말하고 행위 하는 능력, 즉 그로 하여금 이해의 과정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자기 동일성을 증명하게 만드는 능력을 뜻한다고 할 때 한국교회운동은 한 사람을 중시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예언적 운동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점은 한국 근대사의 왜곡된 역사관을 재해석하거나 정화할 수 있는 기독교적 영성의 정체성 혼돈에 있다고 본다. 더군다나 그 영성의 역사적 정황을 끊임없이 재해석하여 궁극적 의미를 삶과 연관하여 전하여 줄 교회 자체도 세속화와 물신화 풍조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에 교회의 임무에 대하여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의 영성은 관념론으로 포장된 이데올로기에 헌신하는 사회적인 입장을 포기하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이 세상 속에서 진리와 보편적인 사랑을 획득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예언적 담론으로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교회는 먼저 공동체성을 회복하여 사회 정화 역할을 감당하는 진리의 파수꾼이 되어야 할 것이며 진정한 섬김으로 사회 속에서 거룩성을 회복하는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이것이 기독교인다운 형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