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광야로 돌아가자-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교회가 본질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들(장윤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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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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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19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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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로 돌아가자
-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교회가 본질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들

장윤재 (이화여대 기독교학부 교수)

교회의 물신화 현상이 이제는 세속을 뺨친다. 어느 목사가 자비로 땅을 사서 개척한 교회를 7년 만에 새 목사에게 1억을 받고 넘기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그것도 교회 사택에 있던 정수기, 피아노, 키보드, 책상, 에어컨까지 싹 가지고서. 너무도 큰 배신감에 그 교회 교인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는데, 그에 대한 답글이 더 재미있다. “뒤에 오실 목사님이 1억을 주었다구요? 그럼 어쩜 정당한 ‘거래’를 했다고 봐도 되겠네요. 목회도 사업인지라 어느 정도 하다보면 동네 프리미엄이 있거든요. 그걸 다 감안해서 1억원으로 합의해서 받았겠지요. 뒤에 오신 목사님도 그걸 밑천으로 영업개시 하실거구... 새 목사님은 분명 원가개념을 갖고 한 1~2년 노력하실 겁니다. 신도분들... 헌금 꾸준히 해야겠네요... 쩝.”
대한민국 땅값은 캐나다를 다섯 개 사고도 남는다 하는데, 급기야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부동산 투기 문제가 도마에 오르고 말았다. 정부의 8.31 부동산 종합대책 발표를 앞두고 일부 뜻있는 기독교계 인사들이 ‘토지정의를 위한 기독인 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많은 중대형 교회들이 예배당과 수련원, 기도원 건축과 교인묘지 구입을 빙자해 부동산 투기를 하면서 교회를 성장시켜왔고, 기독인들은 부동산 투기를 통해 번 돈을 십일조와 감사헌금으로 드리고 목회자는 그것을 축복해 왔다고 반성하고, 교회와 기독인의 부동산 투기로 큰 고통을 받아온 가난한 이웃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 후 교회와 기독인들은 부동산 투기를 중단하고 토지 불로소득을 자발적으로 지역사회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교회의 대다수는 스스로를 정통주의로 간주한다. ‘올바른 믿음’을 뜻하는 정통주의는 원래 이단이나 오류에 반대되는 말이지만, 실제로 기독교 자유주의와 싸우며 자라왔다. 기독교 자유주의는 신앙의 개방성, 관용성, 인문주의적 동기, 이성(理性)에 대한 존중, 그리고 교조주의적 전통에서의 자유의 추구를 그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교회와 과학의 화해를 추구하여 성서에 대한 고등비평과 진화이론을 받아들였으며, 이 세계 안의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죄성 문제는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이에 반해 정통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폴 틸리히가 말한 ‘개신교 원칙(protestant principle),’ 혹은 ‘저항의 원칙’이다. 이것은 이 세계에 내재한 그 어느 것도 초월적 실재인 하나님을 대변할 수도, 대표할 수도, 그리고 표현할 수도 없다는 믿음이다.
바로 이 정통주의의 초월에 대한 신앙이 ‘이 세상’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저항의 힘이다. 즉 이 세계에 대한 강력한 종말론적 부정의 원동력이 된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이 ‘감각의 질서(sensory order)’가 최종의 질서가 아니기에, 정통주의적 신앙은 이 세계의 모든 우상들에 대해 ‘아니오’ 라고 단호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히틀러 통치 때의 저 바르멘 신학선언(1934)처럼, 그리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때의 일부 조선 기독교인들의 저항처럼 말이다. 그것이 바로 근대세계에 대한 예언자적, 종말론적 비판의 힘을 상실하면서 제1차 대전의 포성과 함께 종말을 고한 자유주의와 다른 점이었다. 그런데 이 세계의 모든 우상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초월적 비판의 힘이요 원리인 정통주의는, 불행히도, 자신이 종종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곤 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실제 역사적으로 볼 때 정통주의는 - 그 중에서도 특히 근본주의는 - 너무도 자주 강대국의 애국주의(patriotism), 군사주의(militarism), 그리고 자유시장 이론(free-market theory)과 결합해 왔다. 오늘날 저마다 정통주의의 원류임을 자처하는 한국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위기다. 그런데 그 위기는 진보가 퇴조해서 온 위기가 아니다. 정통이 정통이 아니고 보수가 보수가 아닌데서 온 위기다. 진보가 퇴조해서 온 위기가 아니다. 진짜 보수가 없어서, 진짜 정통이 없어서 닥쳐온 위기다. 이 세계에 대한 초월적 비판과 종말론적 부정의 힘을 상실해서 생긴 위기다. 머리로는 정통이라고 생각하지만 몸은 이 세상이 주는 달콤한 물질적 혜택에 취해 살아온 ‘두 얼굴의 이중생활’이 자초한 위기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 이 시대에 순응하지 말라고 - 하신 말씀(롬 12:2)을 잊어서 생긴 위기다. 구체적으로는 초월의 세계를 상실한 무신론적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에 맞서기는커녕, 바로 그 논리로 자기의 몸집 불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지난 날의 자기기만적 신앙이 만들어낸 위기다.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은 1970년대 이후 세계 경제의 주류사상으로 급부상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론은, 고전적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시장은 정부의 개입이 최소화되었을 때 훨씬 더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경제 이론을 넘어선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시장에 대한 일종의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리킨다. 사람이 시장을 위해 지어졌지, 시장이 사람을 위해 지어지지 않았다는 일종의 종교적 믿음이 바로 신자유주의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 근본주의 사상의 기초를 놓은 것은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오스트리아 경제학자이자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F.A. 하이에크다.
하이에크는 1899년 비엔나에서 출생하여 1992년에 죽었다. “아담 스미스 이후 가장 위대한 자본주의 철학자”로 불린 하이에크는 마르크스에 대한 철저한 반대자였다. 하지만 그는 - 재미있게도 - 마르크스와 똑같이 독일어권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사람이었고, 또 마르크스와 똑같이 대부분의 시간을 대영 박물관에서 보내며 자본을 주제로 연구 활동에 몰두했던 사람이다. 두 사람 사이에 유일한 차이점이 있었다면, 마르크스는 오른쪽 귀가 먹었던 반면 (때문에 ‘우파’의 소리를 듣지 못했고) 하이에크는 왼쪽 귀가 먹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좌파’의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하이에크는 평생을 ‘급진적 자유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가 꿈꾸었다는 급진적 자유주의 사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 사회였다.
첫째로 그것은 사회적 정의가 완전히 거부된 극도의 불평등 사회였다. 하이에크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정의는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사회정의를 신기루고, 미신이며, 자유문명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간주했다. 둘째로 그의 급진적 자유주의 사회는 성서가 말하는 이웃사랑의 윤리가 전면적으로 거부된 사회였다. 하이에크는 성서의 이웃사랑 윤리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적용될 수 없는, 원시적 부족윤리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성서가 말하는 ‘이웃’이라는 개념은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우리가 가까이에서 보고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들로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이웃사랑이라고 하는 종교적] 가르침은 소그룹 부족사회를 위해 개발된 지침이다. 이제 우리가 그런 원시적인 사회를 떠났다면 우리는 그런 태생적 도덕률을 뒤로 버리고... ‘상업적 도덕률’을 따라야 한다.

정말이지 하이에크가 꿈꾸었다는 급진적 자유주의 사회는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 부정을 의미했다. 이번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벗겨버린 베일 뒤에 나타난 뉴올리언스의 참상에서 우리가 본 그대로 말이다.
이번 미국 뉴올리언스의 참상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디인지를 너무도 극명히 보여주었다. 물에 잠겨 썩어가는 시신들, 마실 물이 없어서 졸도한 사람들,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응급실 환자들, 풋볼 경기장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재민들... 이번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가른 생사의 기준은 ‘뜻밖에도’ 빈곤, 나이, 그리고 피부색이었다. 뉴올리언스 시내 인구의 3분의 2가 흑인이라지만 피해자 거의 모두가 흑인들이었다. 그들은 자동차와 같은 탈출수단을 갖지 못한 빈곤층이었다. 부자들의 세금은 열심히 깎아주는 부시정권에게 빈곤과 환경 문제는 늘 뒷전이었다. 세계화란 미명 아래 시장주의, 정부 개입 축소, 개인끼리의 무한경쟁, 그리고 자연자원의 무제한 약탈을 토대로 초강대국을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미국의 사회적 연대는 갈가리 찢겨졌으며 미국이라는 나라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일종의 무정부상태로 들어갔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신자유주의가 결국 어디까지 갈 것인지를 우리에게 미리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떠한 하이에크의 사상이 이런 극단적 사회 불평등주의와 사회적 연대의 파괴 그리고 무한경쟁을 낳았단 말인가? 하이에크의 사상의 핵심적 주장은 시장은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사회질서는 시장이라는 자생적 질서가 만든 진화의 결과물이다. 아무도 사회질서를 계획하지도, 조직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 역시 아무도 책임질 일이 아니다. 둘째로, 그의 사상의 핵심적 주장은 초월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부정이다. 그는 인간이 보고 만지고 느끼는 이 감각의 세계(sensory order) 외에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시장의 힘에 의해 자생적으로 진화하는 이 물질의 세계 바깥에 또 다른 세계는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이에크에게 있어서 시장이란 자연세계의 바람과 물처럼 성스러운 것이어서 인간이 통제할 수도 또 통제하려해서도 안 되는 어떤 신비한, 신적 존재였다. 하이에크는 하늘 높은 보좌 위에 앉아 이 세상을 통치하는 초월적 신의 존재를 거부했고, 그렇다고 그 자리에 신격화된 인간의 이성을 대신 앉히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시장이라는 자생적 질서가 만들어가고 있는 사회적 진화에 전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맡겨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시장이 자생적 질서라는 그의 주장은 사실적으로 틀렸을 뿐만 아니라 - 역사적으로 자유시장은 사회적 진화의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한 국가의 개입과 통제에 의해 만들어졌다 -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초월의 세계를 거부하는 그의 사상은 이 세계를 넘어선 궁극적 실재를 말하는 모든 종교가 수용할 수 없는 사상이라는 점이다. 하이에크 사상에서 사회질서는 비인격적 시장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자생적 질서이기 때문에, 그 질서 바깥에서 그것의 의미를 묻고 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초월의 영역을 아예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하이에크는 ‘내재적 비판’이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인간사회에 대한 모든 열려진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였다. (내재적 비판의 원칙이란 “한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과 개선의 노력은 반드시 주어진 가치의 틀 안에서만 수행되어야 한다”는 대단히 보수적인 원칙이다) 그는 이렇듯 ‘이미 주어진 것’ 이외의 것에 자신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그러니까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하이에크에게는 ‘이미 주어진 것’이 반드시 절대적일 필요는 없다는 믿음, 즉 ‘기독교적 이상주의’의 믿음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적 이상주의란, 루벰 알베스에 의하면, “어떤 완벽한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지금의 이 불완전한 질서가 운명적일 필요는 없다는 믿음”이다) 바로 이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하이에크의 사상에는 역사를 해석하는 초월적인 힘, 혹은 갱신과 희망의 초월적 원리가 없다. 한마디로 하이에크의 자유주의 유토피아의 세계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없다. 이 세계로 침범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나라도 없다. 오직 스스로를 성취해 나가는 시장의 무한한 진화 사슬 밖에는 없다. 이처럼 하늘의 가능성에 스스로를 걸어 잠근 철저한 자연주의 사상을 우리는 ‘자폐적 세속주의(self-enclosed secularism)’ 고 불러야 한다. 오늘날 사회적 연대와 이웃사랑의 윤리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극단적 시장 자유주의 사상은 바로 이러한 무신론적 자연주의 세계관에 기초해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시대에 한국교회가 ‘해결’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문제의 일부’가 된 이유는 바로 이렇듯 초월의 세계를 상실한 자연주의적 사상 앞에서 초월의 세계를 말할 신학적 힘과 역사적 상상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모든 우상들, 특히 맘몬이라는 재물의 우상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종말론적 부정의 힘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는 스스로를 구원하고 성취해 나간다는 자연주의적 경제사상이 물신숭배와 공동체의 파괴를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확산시켜가고 있는 이때, 한국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중요한 과제의 하나는 다시 한 번 폴 틸리히가 말한 ‘프로테스탄트 원칙,’ 즉 이 세계에 내재하는 어떤 것도 신의 초월적인 실재를 완전히 소유하거나 대표하거나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원칙을 회복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 사상은 자유시장 이론의 탈을 쓴 자폐적 세속주의에서의 해방의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몇 년 전 나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시내산의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기 위해 새벽 일찍 길을 떠났다. 베두인족의 낙타 뒤를 따라 터벅터벅 시내광야를 걷다가 나는 문득 아주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사막같이 척박한 그 광야의 거친 돌짝밭 사이사이에 자라고 있던 잡초들이었다. 키도 작고 볼품도 없으며 간간이 피어있어,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존재조차 모르고 지나칠 하찮은 들풀들이었다. 하지만 메마른 땅에 피어있는 작은 생명들이 너무도 귀하고 놀라와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를 뽑아 보았다. 그 때 두 가지에 크게 놀랐다. 하나는 그것이 지닌 짙고 푸른 향기였다. 너무도 싱싱하고 상큼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더욱 놀라웠던 것은 그 풀의 뿌리였다. 키가 5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작은 풀이라 쉽게 뽑힐 줄 알았다. 하지만 돌들을 헤치고 한참 땅을 파고 나서야 겨우 그 뿌리의 끝이 나왔다. 놀라운 것은 그 뿌리에는 잔뿌리가 거의 없었고 자신의 몸통보다 더 굵고 긴 중심뿌리가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짙고 푸른 향기는 바로 그 굵고 튼튼한 중심뿌리에서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 때 내 머릿속에는 일본의 본사이가 떠올랐다.
일본에 본사이, 즉 분재(盆栽)라는 것이 있다. 큰 나무를 작게 축소하여 조그만 화분에 가꾸는 기술이다. 본사이를 영어로는 ‘dwarf tree(난쟁이나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이 기술을 사용하면 느티나무처럼 10m 이상 자라는 나무도 30-50cm의 난쟁이나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같이 커다란 나무들을 하염없이 작은 난쟁이로 변신시키는 일본의 본사이 기술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정작 이 본사이 기술의 핵심비밀을 알고 나면 감탄은커녕 경악하게 된다. 본사이 기술의 비밀은 아주 간단하다. ‘중심뿌리’ 곧 주근(主根)을 잘라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이제 나무는 나머지 ‘잔뿌리’ 곧 세근(細根)만 가지고 연명해야 한다. 잔뿌리는 그 숫자가 아무리 많고 무성해도 그 합계 표면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때문에 성장에 필요한 양분과 수분을 충분히 빨아올릴 수 없게 된다. 그러니까 이제 중심뿌리가 잘려나간 나무는 성장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못하고, 마치 ‘식물인간’처럼, 겨우 숨만 쉬며 간신히 목숨만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본사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본사이, 알고 보면 그것은 잔인한 ‘식물학대’ 행위에 속하는 일이다.
한국교회는 그 중심뿌리를 잃어버렸다. 초대교회의 종말론적 신앙이 가졌던 그 엄청난 역사적 에너지와 차고 맑은 시대적 상상력을 상실했다. 이 세상의 기초를 흔드시는 저 심연의 하나님에게 자신의 중심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았기에,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양분과 수분을 공급받지 못하기에, 겉은 살았으나 실상은 그 영혼이 죽어가고 있다. 때문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 광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볼품은 없지만 거친 돌짝밭 위에서도 억센 생명력을 자랑하는 저 시내광야의 이름 모를 들풀처럼 신앙의 생명력을 회복해야 한다. 비록 낮과 밤의 기온 차이로 생기는 작은 이슬 외에는 아무 것도 마실 것이 없지만,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그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강인하고 싱그러운 생명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그 들풀과 같이 한국교회도 본래의 생명력을 회복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의 시대에 교회가 본질적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자신의 신앙의 중심뿌리다. 곧 이 세계에 내재한 그 어느 것도 초월적인 실재인 하나님을 대변할 수도, 대표할 수도, 그리고 표현할 수도 없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의 모든 우상들을 침몰시킬 수 있는 강력한 비판과 저항의 종말론적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