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계약법 새로읽기-III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8-01-30 23:29
조회
1102
3. 설교자 모쉐: 출20:18~21
출애굽기 보도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모쉐에게 십계명을 따로 수여한 것이 아니다. 모쉐와 백성을 산기슭에 세워둔 채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산꼭대기에서 선포하신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유추는 출19:25의 ‘모쉐가 내려가서 그들에게 고하였고’ 그 후에 십계명이 선포되기 때문이다. 이 유추를 입증해주는 보도는 신5:4~5에 나온다. ‘야훼께서 산 위 불 가운데서 너희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파님 버파님, ???? ?????) 말씀하시매 너희가 두려워하여 산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 신명기의 보도에 의하면, 야훼께서는 호렙산 위에서 불길에 싸여서 말씀하셨는데 백성에게 얼굴을 보여주시면서 대화를 나누셨다는 것이다. 백성은 호렙산에서 하나님과 눈을 마주보면서 대화하였다고 모쉐는 회고한다(민14:14, ??? ????아인 버아인).
모쉐가 회막에 갔을 때 야훼께서 구름기둥으로 내려오셔서 모쉐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한 채로 대화하시곤 했다(출33:11, 파님 엘-파님, ???? ?? ????). 미르얌이 비방했을 때 하나님은 모쉐와 입을 맞대고 대화하는 사이임을 주시시켰다(민12:8, ?? ?? ??페 엘-페). 모쉐가 비스가 산정에서 소천하였을 때 신명기 저자는 모쉐처럼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 ????) 친히 대화를 나눈 예언자는 전무하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본디 사람이 야훼의 얼굴을 보면 살아남지 못한다(출33:20; 창32:31). 이러한 긴장관계를 의식하면서 성서의 본문을 깊이 들여다보자.

<본문사역>
출20: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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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한편 온 백성은 큰 소리와 나팔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연기가 자욱한 그 산에 큰 횃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고 있다. 그 백성은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멀찌감치 물러가 서 있었다. <19> 그들이 모쉐에게 말하였다. ‘당신께서 우리와 함께 말씀을 나눕시다. 우리는 듣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말씀을 나누지 않게 하십시오. 우리가 죽을까봐 무섭습니다.’ <20> 모쉐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하나님께서 오신 까닭은 너희를 시험하기 위해서, 그리고 너희가 항상 주를 경외하여 죄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21> 백성은 멀찌감치 물러가 서 있었다. 한편 모쉐는 그 하나님이 계시는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사역해설>
18절. 한편 온 백성은(??? ?? 워콜-하암). 접속사 ‘워’ 다음에 바로 주어가 나오면 새로운 분위기의 장면이 연출됨을 알린다. ‘?와브’ + ‘주어’ + ‘동사’의 형태는 새로운 문단을 알리는 분리법이다. 분위를 바꾸기 위해서 접속사 ‘?워’를 ‘한편’이라고 번역해 주었다.
18절. 큰 소리(????? 하콜로트). ‘콜로트’는 ‘???콜(목소리/소리)’의 복수형이다. 복수형은 크고 위대하다는 뜻을 전달하기도 한다. 큰 소리가 우우우 들렸다는 것이다. 개역에서 ‘우뢰’, 개개역에서 ‘우레’, 표역에서 ‘천둥소리’, 공역에서 ‘천둥’이라고 번역했다. 이 단어는 출19:16의 ‘콜’을 복수형으로 되풀이한 단어기 때문에 출19:16과 동일한 번역어로 일치시켜 주는 것이 좋다. 출19장에서 단수형이어서 ‘소리’라고 번역했으나 여기서는 ‘큰 소리’라고 번역했다. 이 단어를 읽는 독자들이 상호간의 연관성을 느낄 수 있도록 번역해 주어야 한다. (칠역, th.n fwnh.n; 라역, voces; NKJV, thunderings; NRSV, thunder; JPS, thunder ; 루역, den Donner)
18절. 큰 횃불(?????? 하라피딤). ‘하라피딤’은 ‘????라피드’(횃불)의 복수형인 ‘라피딤’에 정관사 ‘하’가 붙은 꼴이다. 단수형 ‘라피드’는 창15:17에 나온다. 아브람이 하나님에게 후손번영의 약속을 받을 때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는 가운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 때 ‘타는 횃불’의 히브리어가 ‘라피드 에쉬’이다. 출20장에서는 복수형 ‘라피딤’이 쓰였으므로 ‘큰 횃불’이라고 번역해 주었다. 창15:17의 단어와 동일하게 ‘횃불’이라고 번역해 주어서 이 두 구절 사이의 연관성을 표현해 주는 것이 좋다.
출19:16의 ‘?????버라킴’이란 단어가 ‘번개’라고 번역되어 있다. 출20:18과 출19:15에서 한글역본들은 똑같이 ‘번개’라고들 번역했다. 그러나 출20:18에서도 ‘번개’라고 번역하면 곤란하다. 출20:18의 ‘라피딤’은 출19:16의 ‘버라킴’과 다른 단어이기 때문이다. ‘라피딤’은 창15:17의 ‘라피드’와 일치한다. 그리스어 역본과 라틴어 역본에서 이것을 ‘람프/등불/횃불’로 번역했다(칠역, lampa,daj; 라역, lampadas; NKJV, lightning flashes; NRSV, lightning; JPS, lightning; 루역, Blitz)
18절. 나팔소리(??? ????, 콜 하쇼파르). 출20:18의 ‘콜 하쇼파르’는 출19:19에서 ‘콜 하쇼오파르(?????)’라고 장음화된 꼴로 쓰였다. 출19:16에는 단모음 ‘쇼파르’가 쓰였다. 장모음은 세월이 지나면서 단모음으로 변천하였다고 보인다. 이러한 언어의 발달상이 옳다면, 출19:19이 먼저 작문되었고 출19:16; 출20:18이 나중에 작문되었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출19:16과 출19:19 사이의 저자의 차이나 시대의 차이와 같은 발달상을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쇼파르’란 요소 자체가 P의 작품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칠역, th.n fwnh.n th/j sa,lpiggoj; 라역, sonitum bucinae; NKJV, the sound of the trumpet; NRSV, the sound of the trumpet; JPS, blare of the horn ; 루역, den Ton der Posaune)
18절. 연기가 자욱한 그 산(??? ??? 하하르 아쉔). ‘아쉔’은 상태동사(형용사)이므로 연기가 자욱한 상태를 나타낸다. 이 용어는 출19:18에 세 차례 각각 동사형(아샨 쿨로), 분사형(아샤노), 명사형(에쉔)으로 쓰였다. 출20:18이 출19:18을 겨냥함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이 단어는 창15:17의 아브람 계약기에도 등장한다. 해가 지자 ‘연기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연기를 뿜는 화로’(타구르 아샨)에 명사형이 쓰인다. 출19:18에는 연기가 용광로의 연기처럼 피어올랐다고 묘사한다. ‘용광로의 연기처럼’(커에쉔 하키브샨)에서 명사형이 쓰인다. 그러므로 출20:18과 출19:18과 창15:17의 긴밀한 연관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번역어를 세 곳에서 동일하게 맞추어 주었다(칠역, to. o;roj to. kapni,zon; 라역, montemque fumantem; NKJV, the mountain smoking; NRSV, the mountain smoking; JPS, the mountain smoking; 루역, [sah ~] den Berg rauchen).
이사야가 성전에 있을 때 연기가 성전에 충만하였다는 영상이 시나이산 신현현의 배경에 놓여 있다. 시나이산 신현현은 성전신학의 바탕을 깔아주는 역할을 한다(사6:4, ????? ???? ??? 워하베이트 이말레 아샨, 그 집에 연기가 가득 찼다‘). 아니면 성전신학을 바탕으로 작성된 원형의 신현현일 수도 있다. 문체가 고어체라고 고대에 작성되었다고 판단할 수 없다. 작가가 고어체를 동원하여 옛 시대를 서술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18절. 보고 있다(???? 로임). ‘로임’은 기본형 ‘라아’의 칼/현재/복수/분사형이다.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려고 현재진행형을 사용한 작가의 의도가 돋보인다. 온 백성이 연기를 뿜는 그 산을 보고 있다. 그러나 ‘보다’라고 번역하면 ‘큰 소리’와 ‘나팔소리’에 연결이 어색하다. 소리는 듣는 것이지 ‘소리를 본다’라고 말하는 우리말은 없다. 그래서 영역본들에는 이 단어를 ‘witness’나 ‘perceive’ 등으로 번역하여 시각에 한정되지 않도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나는 ‘보다’란 동사는 19절의 ‘듣다’란 동사와 긴밀하게 상응하고 있기 때문에 ‘보다’란 번역어를 고집해야 한다고 본다. 큰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치솟는 큰 불길을 백성이 보았다. 큰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연기를 뿜어 올리는 시나이산을 백성이 보았다. 백성은 본디 큰 소리를 내며 오시는 야훼의 현현을 보았지만 두려움에 야훼를 경외한 나머지 첫 신현현 이후로는 모쉐의 중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받는 방식을 취하였다(신5:22~31). 결국 신명기의 신학 그대로 ‘듣고 순종하라’는 말씀의 신학이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보다’라고 번역한 한글역본들이 더 마음에 든다(개개역,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표역, 천둥소리와 번개와 나팔소리를 듣고 산의 연기를 보았다; 공역, 천둥과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에 자욱한 연기를 멀리서 바라보고).
18절의 사역에 대해서. 소리를 본다는 표현이 우리말 어법에 맞지 않기 때문에 ‘큰 소리’와 ‘나팔소리’ 부분을 합쳐서 ‘울리는 가운데’라고 표현했고 ‘보다’는 시각 동사는 ‘큰 횃불’과 ‘연기나는 산’에 연결시켜 적용하였다. 이러한 번역은 네 가지 명사들이 모두 ‘와브’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지만 [소리] + [횃불] // [나팔소리] + [연기나는 산]이라는 형태의 평행법으로 읽을 수도 있기 때문에 무리가 없다고 본다.
18절. 벌벌 떨면서(????? 와야누우). 기본형은 ‘???누아’로서 ‘벌벌 떨다’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창4:12(?? ??? ???? ???? 나 와나드 티흐예 바에레츠,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와 창4:14(?????? ?? ??? ???? 워하이티 나 와나 바에레츠,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에도 쓰였다. 여기서 ‘누아’ 동사는 칼/분사형 ‘??나’의 꼴로 쓰였다. 한글로 ‘피하며’라고 번역되었다. 카인은 동생을 죽인 후 주께 벌을 받는다. 가인은 ‘벌벌 떨면서 세상을 유랑하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누아’ 동사를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동일한 단어로 번역해 주어야 독자들이 이 단어들이 동일한 것임을 감 잡을 수 있다.
백성이 거룩한 산 신현현 앞에서 벌벌 떠는 것은 백성이 죄많은 존재임을 표현한 것이다.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였들 때 그는 벌벌 떨면서 세상을 유랑하며 살아야 했다(창4:12). 그는 죄 때문에 벌벌 떨었다. 더구나 하나님의 존전에서 더욱 떨리지 않으랴(출20:18). 이 ‘떨림’의 표상은 일정한 성전신학을 표현한다.
이와는 달리 출19:16에는 동사 ‘??? ㄱ하라드, 진동하다/떨다’가 쓰였다. 출20:18~21의 저자는 출19장의 어휘들을 숙지하면서 문학의 다양성을 기하고 있다. 동의어들을 신중하게 골라 사용한 것이다. 이외에도 출19장의 ‘버라킴’(번개)을 출20장에서 ‘라피딤’(횃불)이란 단어로 바꾸어 쓴 것은 저자의 탁월한 솜씨로 보인다.
18절. 멀찌감치 물러가(????? 메락호크). 동사 ‘??? 락하크’ 히필형이 출33:7에 쓰였다. 진 바깥에 멀리 떨어진 곳에 모쉐는 천막을 쳤다. 백성이 산에서 멀리 떨어지는 동작과 회막을 진영 바깥 멀리 떨어진 곳에 치는 동작은 서로 동일한 성전신학을 나타낸다. ‘물러가’라는 번역어는 문맥에 맞추어 내가 추가한 요소이다. ‘물러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마소라본에 없다. ‘메락호크’는 출20:21에도 되풀이 되며 문단의 앞뒤에서 포괄법을 이루고 있다. 출24:1에도 이 단어가 나온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통해서 출20:18~21의 문단이 매조져지며 출24:1로 곧바로 이어진다. 출24:1에도 성전신학이 유감없이 표현된다.
18절. 죽을까봐 무섭습니다(?? ????, 펜-나무트). 직역하면 ‘우리가 죽지 않도록’이 된다. ‘무섭습니다’란 어귀를 추가하여 문학의 효과를 더 하려 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뵈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상이 배후에 깔려 있다(창16:13; 32:30; 출23:20; 사6:5, 등). 이 또한 거룩한 성전의 신학을 나타낸다. 이사야도 성전에서 신현현을 경험하고 죽을까봐 무서워했다(사6:5).
19절. 당신께서(??? 아타). 이인칭대명사가 또렷이 명기되어 있기에 이것을 눈에 확 띠게 번역해 주었다.
19절. 우리와 함께(???? 임마누). 보통 전치사 ‘??엘’이나 ‘??에트’가 ‘다바르’ 동사 다음에 나온다. 그러나 간간이 전치사 ‘??임’이 동사에 동반되기도 한다. 이 경우는 매우 드물다(창29:9; 31:24, 29; 출19:9ㅈ; 20:19[2x], 22; 33:9; 민11:17; 22:19; 신5:4, 등). 이처럼 극히 드문 경우에 출19:19이 해당한다. 이것은 신5:4의 용법과 평행된다. 이 둘은 아마도 동일한 저자의 솜씨일 것이다. ‘임마누엘’ 신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어귀이다.
19절. 말씀을 나눕시다(??? 다베르). 명령형이어서 ‘우리와 함께 말하라’라고 번역해야 하겠지만, 우리말 어법에는 맞지 않다. 청유형으로 ‘말씀을 나눕시다’라고 존대말로 번역했다.
20절. ~ 오신 까닭은 ~ 위해서, 그리고 ~ 위해서다(~러바아부르 ~ 우바아부르 ~ 러빌티). 접속사 ‘와브’를 통하여 두 차례의 ‘바아부르’ 전치사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러바아부르’는 ‘~을 하기 위하여’란 뜻이다. 주절은 ‘그 하나님이 오셨다’ 하나뿐이다. 그래서 주절을 먼저 번역해 주고 두 가지 전치사구 ‘바아부르’를 그 다음에 연달아 이어서 두 가지 ‘위해서’란 구문으로 병치해 주었다.
20절. 시험하기(???? 나소트). ‘나소트’는 ‘시험하다’를 뜻하는 동사 ‘???나사’의 피엘 구성형(동명사형)이다. 시험의 주제는 출15:22~17:16장에서 진하게 다룬 바 있다. 이 문단에서 ‘나사’ 동사는 도합 네 차례 언급되었다(출15:25; 16:4; 17:2, 7). 출1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시험했고 출17장에서는 거꾸로 백성이 하나님을 시험했다. 이제 다시 또 출20장에서 하나님께서 백성을 시험하신다. 시나이산 신현현의 목적은 백성을 시험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다.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기 위해서이다(tou/ peira,sai u`ma/j, 투 페이라사이 휘마스). 이것은 출15:25에서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물을 달게 만드시면서 모쉐를 시험한 대목과 상응한다.
20절. 주를 경외함이(????? 이르아토). 동사 ‘???야라’는 ‘두려워하다/무서워하다/경외하다’란 뜻이다. 이 동사는 20ㅈ절에 나왔다(‘두려워 말라’). 그 명사형은 ‘????이르아’이다. 여기에 삼인칭 소유격 접미사 ‘그의’가 붙었다. ‘이르아토’를 직역하면 ‘그의 경외’로 된다(칠역, o` fo,boj auvtou/ 호 포보스 아우투). 이 경우 삼인칭단수 속격은 목적격의 의미로 쓰였다. 삼인칭단수가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여기서 ‘그를 경외함’이라고 하기보다 ‘주를 경외함이’라고 존칭으로 번역했다. ‘주를 경외함이 너희들의 얼굴 앞에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말은 ‘너희가 항상 주님을 경외할 수 있도록’이라고 의역하면 더 부드럽다. 그러나 원문을 그대로 반영해주는 번역을 택하여 주어 ‘주를 경외함’을 그대로 살려서 번역했다.
20절. 그 하나님께서(?????? 하엘로힘). 여기에는 정관사 ‘하’가 있다. 앞의 두 경우에 정관사 없이 ‘엘로힘’이라고만 나오다가 여기서 돌연 정관사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라고 정관사의 존재를 표시하였다. 특이하게도 민22~24장의 발락/발람 이야기에는 정관사 없는 ‘엘로힘’만 나온다.
21절. 멀찌감치 떨어져(???? 메락호크). 위의 18절 해설을 참조하라.
21절. 한편 모쉐는(???? 우모쉐). 21절 하반절에서 갑자기 ‘우모쉐’라는 분리형이 나타났다. 새로운 문단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경우는 ‘모쉐’를 강조하는 기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문단을 시작할 때 ‘우모쉐’라는 분리형이 18절 문장 머리에 나왔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문단의 맨 뒤인 21절에 다시 ‘우모쉐’가 나왔다. 이것은 문단을 앞뒤에서 매조지는 포괄법이다. 그래서 ‘한편’이라고 18절과 동일하게 번역했다.
21절. 그 칠흑 같은 어둠속으로(?? ????? 엘-하아라펠). ‘아라펠’이란 ‘깜깜한 어둠/칠흑의 어둠’이란 뜻이다. 이것은 출19:9(먹구름), 16(먹장구름)에 상응하는 표현이다. 신4:11; 5:22에도 나온다. 특히 신5:22의 언급은 출20:21의 언급과 상응한다. 앞으로 지을 성막의 지성소는 깜깜해야 한다. 성소와 지성소 사아에 휘장을 쳐야 한다(출26:33). 하나님은 칠흑의 어둠 속으로(‘그노포스’ eivj to.n gno,fon) 강림해 오셨다. 솔로몬은 계약궤를 지성소에 그룹의 날개 아래 안치하고 기도하였다. ‘주께서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계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왕상8:12, 야훼 아마르 리쉬콘 바아라펠).

<공시읽기>
‘파투카’가 21절 끝에 붙어 있음으로 미루어 18~21절이 하나의 독립된 문단임을 알 수 있다. 내용도 일관성을 보인다. 22절부터 법문이 새롭게 다시 등장한다. 이 문단은 십계명과 계약법 사이에 끼어 있다. 그 모양을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출19:1~27출20:1~17출20:18~21출20:22~23:33출24:1~12가. 이야기체나. 법문중앙. 이야기체나′. 법문가′. 이야기체

위의 그림을 보면 이야기체 문단과 법문의 문단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가-나-중-나′-가′]. 출20:18~21 문단은 출19:1~24:12의 커다란 문단에서 중심부에 놓여 있다. 교차구조에 있어서 중심부는 가장 핵심되는 주제를 담고 있기 마련이다.
출20:18~21의 핵심주제는 무엇인가? 우선 이 문단의 짜임새를 분석해 보자.

가. 18절, 멀찌감치 물러서 있는 백성
중앙. 19~20절, 말씀 중개의 요청/ 신현현의 목적(경건하여 죄짓지 않게 하려고)
가′. 21절, 멀찌감치 물러가는 백성/ 다가가는 모쉐

이 문단의 짜임새를 보면 중앙부에서 백성이 모쉐를 말씀의 전달자로 초청한다. 그 양쪽(가와 가′)에 백성의 위상과 모쉐의 위상이 설정되어 있다. 백성은 산에서 멀찌감치 물러서 장막으로 돌아가 있고 모쉐는 산 속으로 들어간다.
중앙단락에서 말씀의 공동체를 위해 활동하는 설교자상이 정립되고 있다. 말씀의 전달자는 기존의 예언자들과는 다른 직분을 수행한다(민12:7~8). 설교자는 하나님과 입을 마주하고 대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사람이다. 설교자는 공동체에서 가장 중심되는 위상에 놓여 있다.
또 한 가지 핵심주제는 신현현의 목적이 경건한 생활을 통하여 죄짓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본디 에덴에서 무죄했을 때 사람은 하나님과 친견하던 사이였다.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거니시면서 그와 일상 대화를 나누시곤 했다(창2:16; 3:8~11). 한 사람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 속으로 죄가 들어 와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이격이 났다. 죄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더 이상 친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시나이산에 오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두렵게 느껴졌다. 백성은 벌벌 떨면서 멀찌감치 물러나야 했다. 모습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조차도 백성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본디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하나님과 친견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시나이산에서 말씀을 계시하시고 이어서 백성 한 가운데로 오셔서 성막의 지성소, 법궤뚜껑 위에 임재하실 참이다(출25:22). 법궤뚜껑 위에 두 그룹이 조형되어 있다. 이것은 솔로몬 성전 지성소의 그룹들과 동일한 조형물이다. 왜 성막의 지성소 법궤뚜껑에 두 그룹의 조형물이 놓여 있나?
법궤 안에는 말씀을 새긴 두 돌판을 안치한다. 하나님께서 법궤뚜껑에 임하시는 것은 법궤 속에 말씀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씀의 현존은 하나님의 현존을 알린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동산 입구에 도는 화염검과 그룹들을 배치하셨다(창3:22·24). 아담이 다시 돌아와 영생에 이르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을까 적이 염려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 편에서 인간의 모든 죄과를 도말하고 화해를 꾀하신다(롬3:25, ‘화목제물’, 휠라스테리온 = 카포렛 = 법궤뚜껑).
열국백성 가운데 애굽에서 노예된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셔서 광야에서 혹독하게 말씀의 연단을 받게 하신다. 말씀대로 사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세상에 창설하시려고 한다. 이 공동체를 제사장으로 삼으시고 인류의 죄를 속하시려 하신다. 이 제사장 공동체 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하여 거주하시려 하신다. 이로써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에덴추방의 저주가 풀리고 하나님과의 소통이 활발히 이루어질 것이다. 에덴동산을 가로막고 생명나무를 지키는 그룹들이 이제 큰 횃불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신현현 현장에 등장한다. 그룹이 목격하는 가운데 인간은 하나님과 친교룰 나누면서 영생에 이르는 말씀의 열매를 받아먹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의 연관성은 토라의 큰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서두에서도 보았지만 모쉐가 하나님과 친견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토라의 구조의 정중앙부인 출33:7~11에 나오고 있다. 그런데 신명기 34장의 마지막 장면에 모쉐는 하나님과 친견했던 전무후무한 예언자라고 평가한다. 하나님을 '대면하였다‘는 심상이 토라의 중앙부와 끝부분을 연결하고 있다. 따라서 출20:18~21의 위치는 출33장에 가까이 있어서 모쉐의 독대하는 지위를 묘사하기 위한 교두보의 역할을 하고 있다.
모쉐가 위대해서 하나님과 친견한 것이 아니다. 죄많은 백성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백성이 말씀의 중개자를 요구하였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좋게 여겨 승낙하신 결과일 뿐이다(신5:28~29). 출애굽기 19장에서도 표현된 바와 같이 말씀의 중개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한편 백성에게도 봉사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공동체에서 가장 낮은 사람이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는 목적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백성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주려는 데 있다(20절). 백성을 시험하는 과정을 신설하신 것이다.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백성은 정금과 같이 나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선포하시는 율법은 사람을 정죄하려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람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도우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출애굽기의 이 문단은 예수님의 복음에 튼실한 배경을 제공해 준다. 특히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바울서신에 직결된다고 판정할 수 있다.
본문의 공시읽기는 창세기 15장과 신명기 5장의 평행요소들을 긴밀하게 평가하도록 밀어 붙인다. 창15:17에 ‘연기나는 화로’와 ‘타는 횃불’의 영상이 나오는데 이것은 출20:18의 ‘큰 횃불’(개역, ‘번개’)과 ‘산의 연기’와 동일한 용어로 나타난다(참. 출19:18[3x]). 신5:4이 회고하는 신현현 장면의 불 영상은 신5:22에도 나타나는 데 창15:17과 출19:18에도 나타난다. 출20:18의 ‘큰 횃불’은 출19:18의 ‘타는 횃불’을 더 강화한 것이므로 서로 상응한다. 신현현의 불 영상은 출19:18; 20:18을 중심으로 신5:4, 22과 창15:17이 양편에서 서로 상응하고 있다. 그러므로 토라의 최종저자는 창세기와 시내단화와 신명기가 교차구도 안에서 서로 상응하도록 만들어 놓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통시읽기>
신명기 단권의 내용을 보면 모쉐가 이스라엘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기록한 회상기이다. 신명기의 회고담을 바탕으로 추정해 보면, 신명기저자와 동시대의 신명기학파가 [창세기-출애굽기-민수기]의 기본내용을 갖춘 토라초본을 이미 작성하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레위기는 순전히 P의 작품이기 때문에 여기서 제외된다. 레위기는 토라에서 P의 솜씨를 판별하는 데 기준점을 제공한다. 이 점은 신명기 5:22~33과 출20:18~22을 비교해 보면 더 확실해질 것이다.
이 비교작업을 통해서 신명기학파의 초본을 촘촘히 재건할 수 있다면 현재의 본문이 성장해 온 과정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신학사상의 발달사를 추적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신명기학파가 몸담은 공동체와 제사장학파가 몸담은 공동체가 처한 정황과 시대를 각각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신5:22~33출20:18~21, 2222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 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23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26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28 여호와께서 너희가 내게 말할 때에 너희의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29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30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31 너는 여기 내 곁에 섰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로 이를 행하게 하라’
하셨나니 32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3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18 뭇 백성이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19 (백성이) 모쉐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20 모쉐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강림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치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21 백성은 멀리 섰고 모쉐는 하나님의 계신 암흑으로 가까이 가니라

22 여호와께서 모쉐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이 두 본문은 십계명이 허여된 다음에 백성이 견디지 못하여 모쉐를 말씀의 전달자로 초빙하는 장면을 진술한다. 이 장면에 대한 모쉐의 회고문이 신5:22~31의 내용이다. 신명기의 본문은 출애굽기의 본문에 비해서 매우 길다. 출애굽기 20:18~21의 문단이 네 개의 절로 구성되어있는 반면에 신명기의 회고문은 열 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다.
신명기 회고담을 보면 몇 가지 장면요소들이 발견된다. 맨 먼저 백성이 신현현을 목격했다고 회고한다(一). 이어서 백성 중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모쉐에게 나아와서 부탁을 한다. 부탁의 말씀이 24~27절까지 길게 이어진다(二). 그 다음에 야훼께서 그 부탁의 말을 듣고 모쉐 대신에 직접 응답한다. 야훼께서는 백성의 경건한 태도를 칭찬하면서 계속 야훼를 경외하는 경건을 유지할 것을 권한다(三). 마지막으로 야훼의 이 명령을 회고하면서 모쉐는 계명을 힘써 실천하자고 설교한다(四). 이것은 토라신파본의 시나리오를 반영한다. 신파본은 말씀전달자로서의 모쉐상 보다는 야훼의 경외사상을 더 강조하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최종본문은 신명기의 회고담과는 많이 다르다. 백성이 신현현을 보았다(18절). 백성이 모쉐에게 말씀의 중개를 부탁한다(19절). 모쉐가 백성에게 ‘두려워말라’고 말하면서 백성을 시험할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강림하신 것이라고 해명해준다(20절). 이에 백성은 멀찌감치 물렀고 모쉐만 주님을 뵈러 칠흑의 어둠 속으로 나아간다(21절). 여기서는 오직 모쉐가 말씀의 전달자가 된 경위만을 보여줄 뿐이다.
21절 끝에 파투가가 붙었으니 문단은 21절에서 끝난다고 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18절에 ‘보았다’란 동사가 22ㅎ절의 ‘보았다’란 동사와 상응하여 포괄형을 이룬다. 그러므로 실제 저자는 18~21절이 22절과 단단히 연결되도록 기획했다. 그리고 22ㅈ절로 하여금 계약법을 시작하도록 만들어서 출20:22~23:33의 계약법 문단과 단단히 물리도록 만들었다. 그러므로 출20:22의 전반절은 계약법에, 후반절은 18~21절의 문단에 걸리도록 엇갈리게 교차시켜 두었다.
이런 모양은 민20:1~3; 4~9의 작법에서도 관찰된다. 아랏왕을 물리치는 기사인 민20:1~3은 민20:10 이하의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와 옥의 정벌 이야기와 ‘야훼의 전쟁’이라는 동일한 주제로 단단히 물려있다. 한편 놋뱀을 거양한 불평과 거역의 이야기인 민20:4~9은 민11~20장에 보도된 불평과 거역의 이야기와 동일한 주제로 맞물려 있다. 이처럼 문단들을 엇갈리게 배치하는 기법은 토라의 최종저자의 솜씨에 속한다. 그러므로 출20:22을 둘러싼 교차구조는 토라의 최종저자 P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본문의 통시읽기는 창15:17의 ‘횃불’ 영상과 신5:4, 22의 ‘불’ 영상, 그리고 출20:18의 ‘횃불’ 영상의 관계를 밝혀야 한다. 이어서 ‘연기’의 영상도 창15:17과 출20:18(출19:18), 그리고 신5:22의 ‘아라펠’(칠흑 같은 어둠), 또는 신5:23의 ‘어둠’ 사이의 통시적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 조사해야 한다(참. 신4:11, ‘어둠과 구름과 아라펠’).
신명기에는 일관되게 ‘불’ 영상이 신현현에 등장한다. 따라서 신파본 호렙 신현현기에도 ‘불’ 영상이 나왔을 것이다. ‘횃불’ 영상은 ‘불’ 영상을 응용한 기법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최종본문이 보여주는 영상은 ‘불’과 ‘횃불’ 등 다양성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구름’ 영상도 출19:9, 16에 나오지만 출20:18~21에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연기’ 영상으로 발전하였다. 신5:22에는 ‘구름’ 영상이 언급된다. 그러므로 ‘구름’은 신파본의 것이며 신5:22의 ‘아라펠’도 출19:21의 ‘아라펠’과 더불어 신파본의 것이다. ‘연기’ 영상은 신명기의 신현현 장면에 동원되지 않았다. ‘연기’는 성전에서 번제를 드릴 때 제물에서 뿜는 연기를 연상하여 성전장면을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토라의 최종저자 P의 솜씨이다.
그러므로 신파본은 신5:22~33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복구될 수 있다.

<출20:18~21의 신파본>
야훼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 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모쉐에게 주셨다. 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백성이 듣고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모쉐에게 나아와 말하였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하였느니라.
여호와께서 백성이 모쉐에게 말할 때에 백성의 말하는 소리를 들으신지라. 여호와께서 모쉐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네게 말하는 그 말소리를 내가 들은즉 그 말이 다 옳도다.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나의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 가서 그들에게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이르고 너는 여기 내 곁에 섰으라. 내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네게 이르리니 너는 그것을 그들에게 가르쳐서 내가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는 땅에서 그들로 이를 행하게 하라’하셨다.

위의 신파본을 보면 신현현 당시에 백성이 모쉐와 함께 산에서 총회로 모여 있었다고 한다. 산꼭대기가 아니라 산기슭임을 암시한다. 신파본에는 산꼭대기인지 산기슭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신현현은 그냥 산에서 일어난 일이며 백성이 두려워하자 야훼께서는 백성에게 하산하여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명하셨고 모쉐는 산에 그대로 남아 있으라고 명하셨다.
백성이 장막으로 돌아갔다면 그 장면은 출33:7~11의 장면과 상통한다. 백성은 저마다 자기 장막 앞에 서서 모쉐가 진 바깥 멀리 쳐둔 회막으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회막에 야훼께서 구름으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고 백성은 자기 장막에서 엎드려 절하였다. 이러한 출33장의 장면은 신파본의 장면묘사와 그대로 합치된다.
이 신파본의 본문 다음에 신명기법이 개진되었을 것이다. 위의 재건된 본문에서 ‘두 돌판’에 써서 주신 내용은 십계명의 말씀이다. 백성이 모쉐의 중개를 요청한 후에 모쉐가 ‘모든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전달하고 가르쳐줄 그 법은 신명기법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토라신파본은 여호수아~열왕기로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로 되어있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신명기법은 현재의 모양과 같이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의 서문역할을 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명기 저자의 작품이 나중에 민수기와 여호수아 사이에 끼어 들어와서 모쉐의 설교문을 작성하였다. 즉 신명기사가의 초본과 신명기저자의 초본이 동일한 신학사상의 궤도를 타고 발전하였다. 이 두 가지 발전단계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이같이 상정된 두 단계를 신파본의 단계로 합쳐서 하나의 단계로 판단한다. 나는 신명기는 토라의 최종저자에 의해서 다시 개정되어 현재의 모양을 띠게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토라신파본의 이야기 순서를 추정하면 다음과 같은 순서가 나온다.
[홍해도해] → [물공급] → [만나공급] → [호렙산 신현현] → [십계명 허여] → [두 돌판 수령과 모쉐의 중개자 수임] → [모쉐가 사십일 호렙산정에 체류함] → [신명기법의 허여] → [금송아지 사건] → [타베라기] → [맛사] → [키브롯하타아와기] → [카데쉬바르네아기] → [광야유랑38년] → [아랏왕 물리침] → [아모리왕 시혼] → [바산왕 옥] → [모압왕 발락/ 바알브올기/ 발람] → [미디안 정벌] → [벧브올 맞은 편 모압에 도착]
이러한 추정은 앞으로 논의를 진행할수록 그 면모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설교명상>
1. 백성과 모쉐의 위치. 신파본에 의하면 백성은 모쉐에게 나아와서 말씀의 중개를 요청한다. 그들의 청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장막으로 돌아가 대기하도록 명령하신다(신5:30). 모쉐만 산에 당신 곁에 남아 있으라고 허락하신다. 그러나 출애굽기의 최종본문에 의하면 백성은 본디 진영 안에 벌벌 떨면서 머물러 있다가(출19:16) 모쉐의 인도로 하나님의 강림을 맞으러 진영 밖으로 나왔다. 백성은 신현현 장면에서 아예 처음부터 산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물러가 서 있다. 백성이 멀리 떨어져 서 있는 가운데 모쉐는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깜깜한 어둠(아라펠)으로 나아갔다.
신파본에서 최종본문으로 개정되는 과정을 살펴볼 때 토라의 저자들 사이에 백성관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느낄 수 있다. 신파본에서는 백성이 워낙에 하나님을 친견하였고(신5:4), 하나님의 신현현 장면을 가까이서 경험하였다. 최종본문에 이르러서는 백성이 하나님을 친견할 수 없었으며 무서워서 아예 멀찌감치 물러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출19장에서도 백성은 아예 산에 접근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묘사된다. 거룩한 산을 침범하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산은 곧 성막의 원형이다. 성막에는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임재하셔서 현존하시는 장소이다(출33:7~11). 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긴 돌판이 안치된다. 말씀을 함부로 취급하거나 세상의 많은 종교서적 중의 하나로 간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제 마음대로 자신의 목적대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의 개념은 본디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백성이 산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산이 거룩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산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말씀이 선포되는 그 산이 거룩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 말씀을 모시고 있고 그 말씀이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다면 그 교회당은 세상 한 가운데서 거룩한 장소이다. 죄많은 백성은 모름지기 교회당 앞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거룩에 임해야 할 것이다.

2. 말씀의 중개자 모쉐. 신파본에서 백성이 청하기를, ‘당신이 가까이 나아가서’ 말씀을 듣고 전달해 달라고 한다. 백성은 그 말씀을 ‘듣고 행하겠습니다’고 하면서 모쉐에게 중개를 요청한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카인의 살해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창4:12, 16에 출20:18과 마찬가지로 ‘누아’ 동사가 쓰였다. 창세기에서는 칼/분사형 ‘?? 나’의 꼴로 쓰였다. 한글로 ‘피하며’라고 번역되었다. 카인은 동생을 죽인 후 주께 벌을 받는다. 가인은 ‘벌벌 떨면서 세상을 유랑하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출19:16에는 동사 ‘??? ㄱ하라드, 진동하다/떨다’가 쓰였다. 백성의 죄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친견하는 일은 지속될 수 없다. 모쉐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활동해야 한다.
모쉐는 오늘날 교회의 설교자 위상에 서 있다. 설교자들이 말씀을 읽고 주석하고 명상하고 설교를 작성한다. 설교자는 모쉐와 같이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서 있는 존재이다. 설교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설교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 있을 수 없다. 설교자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들어야 한다. 들은 말씀을 백성에게 전달할 때 설교자는 거룩한 존재이다. 설교자가 스스로 죄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임무를 주셨기 때문에 설교자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인습에서 나온 고정관념이나 인간의 뜻에 따라 설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명료하게 듣고 나서 그 말씀을 가감 없이 백성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3. 신현현의 의의. 신현현은 시험과 경건을 통해 죄짓는 일을 예방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졌다(출20:20). 즉 미츠라임 제국에서 탈출하여 구원받은 백성이 이제 바야흐로 성화의 훈련 단계로 접어들려고 한다. 이런 국면에서 신현현이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성화는 불가능하다.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용서받고 거룩한 백성으로 성장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신현현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비로소 참된 거룩함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4. 보는 일과 듣는 일. 성경은 듣는 것 못지않게 보는 일도 강조한다. 장일선은 기장회보에 기고한 글에서 성서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을 더 강조한다고 분석했다. 성경은 비디오나 영화 등 보는 것에 열중하고 있는 현대문명에 대해서 경종을 울린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분석은 잘못이다. 백성은 본디 야훼의 현현을 보았던 존재였고 더구나 첫 신현현에서 야훼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듣는’ 청종의 행위는 다만 경건의 표현으로서 말씀의 신학의 기초를 이룬다.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서 말씀을 전달해 주는 설교가의 증언을 듣는 일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친히 하나님의 친견하는 경험을 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