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계약법새로읽기-II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12-26 23:28
조회
3142
2. 출20:1~17: 십계명
출애굽기 20:1~17은 흔히 ‘십계명’(十誡命)이라고 알려진 문단이다. ‘십계명’이란 명칭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출애굽기 20장에 나오지 않고 금송아지 범죄사건 이후에 모쉐가 새 계약을 받아 하산하는 장면인 출34:28에 나온다. 히브리어로 ‘아세레트???? 하드바림??????’, 곧 ‘열 마디 말씀들’이라고 언급되어 있다(칠역, tou.j de,ka lo,gouj). 출20:1~17의 말씀은 열 가지 계명으로 딱 떨어지지 않는다. 그 구분 방식은 여러 가지다. 유대교에서는 출20:1을 제1계명으로 간주하는가 하면 개신교에서는 출20:2을 제1계명으로 규정한다. 카톨릭교와 개신교가 각각의 계명을 구분하는 방식도 다르다. 학자들은 이 문단에서 계명을 정확하게 열 가지로 구분하기 어렵다고 본다.
출34:28의 ‘열 마디 말씀들’이란 표기 앞에는 ‘계약의 말씀’(디브레이 하브리트)이라는 동격의 표기가 나온다. 따라서 이것은 금송아지 사건 이전에 주어진 모든 ‘계약법’을 통칭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즉 출20~23장에 나오는 모든 법문을 통칭하여 ‘열 마디 말씀’이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복잡한 논의를 피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관례에 따라 출20:1~17의 문단만을 ‘십계명’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본문과 사역>
출20:1~17(십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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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0장 1절~17절
<1> 하나님께서 이 모든 계명들을 말씀하여 가라사대, [?스투마]
<2> 나는 미츠라임 땅, 곧 노예들의 집에서 너를 탈출시킨 너의 하나님 야훼다. <3> 너를 위하여 다른 신들을 내 앞에 있게 하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페셀을 만들지 말라. 또 위로는 하늘, 아래는 땅, 그리고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5> 너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에게 노예살이하지 말라. 왜냐하면 나는 너의 하나님 야훼, 곧 ‘엘칸나’(질투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아비가 나를 미워하여 지은 허물을 나는 그 자손 삼사 대까지 찾으며, <6> 나를 사랑하고 내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천대에 이르기까지 은총을 베푼다. [?스투마]
<7> 네 하나님 야훼의 존함을 헛되어 대지 말라. 왜냐하면 야훼께서는 당신의 함자를 헛되이 대는 자를 용서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파투카]
<8> 안식일을 기억하여 성별하여라. <9> 육일은 노동을 하고 모든 작업을 하여라.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야훼를 위한 안식일이다. 너와 네 아들과 딸과 남녀노예와 짐승과 네 대문 안에 있는 이주민, 어느 누구도 작업을 해서는 안 된다. <11> 왜냐하면 야훼께서 육일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일곱째 날에는 쉬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훼께서 안식일을 복되게 하시고 그것을 성별하신 것이다. [?스투마]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러면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게 주신 그 땅에서 길이 살 것이다. [?스투마]
<13> 살인하지 말라. [?스투마]
<14> 간음하지 말라. [?스투마]
<15> 훔치지 말라. [?스투마]
<16> 네 이웃을 해치려고 거짓증언으로 대답하지 말라. [?스투마]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와 그의 남녀노예와 그의 소나 나귀와 네 이웃에 속한 일체의 것을 탐내지 말라. [?스투마]

<사역해설>
1절. ‘하나님께서’(엘로힘). 여기 ‘엘로힘’에 정관사 ‘하’가 붙어 있지 않다. ‘하엘로힘’이라고 일관되게 정관사가 붙어 있는 19장의 용례와 확연하게 구분된다. 왜 그리하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것을 ‘한 하나님께서’라고 번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냥 ‘하나님께서’라고 하였다.
1절. ‘계명들’(하드바림). ‘드바림’은 ‘말하다’란 뜻의 동사 ‘따바르’에서 파생된 명사 ‘다바르’의 복수형이다. 그러니 ‘말씀들’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 복수명사는 토라에 자주 나오는데 대체로 하나님의 명령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것을 ‘계명’이라고 번역하여 앞의 동사 ‘다바르’와 중복되는 것을 피하였다. ‘말씀들을 말씀하셨다’라고 번역할 수 없으니 ‘계명들을 말씀하셨다’라고 번역하였다.
1절. ‘가라사대’(레모르). ‘레모르’는 [전치사 ‘러’ + 동사 ‘아마르’]가 결합된 상투어이다.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번역하여야 하지만, ‘가라사대’라는 좋은 표현이 있다. 이것이 요즈음 잘 쓰이지 않는 말이긴 해도 ‘가로되’의 높임말일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상투어 ‘레모르’를 일관되게 통일시켜 번역해 주기에는 딱 좋다.
2절. ‘너를 탈출시킨’(호체티카). ‘호체티’는 ‘나가다’란 뜻의 동사 ‘야차’의 히필형으로 ‘데리고 나오다’란 뜻이다. 여기에 접미사 ‘카’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너/당신’을 뜻하는 이인칭단수 목적격 접미사이다. 그러므로 ‘너를 이끌어내다’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을 나는 ‘너를 탈출시키다’라고 번역하여 더욱 실감나게 해 주었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너희들’이라고 하지 않고 ‘너’라는 단수형을 사용한 점에 주목하자. 이것을 ‘집단적 단수’라고 하여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서 간주하여 하나의 몸체로 보는 어법이라고들 한다. 여기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대체로 인정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것을 ‘너희’라고 복수형으로 번역하지 않았다. 히브리어가 단수이면 그대로 단수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2절. ‘미츠라임 땅에서, 즉 노예들의 집에서부터’(메에레츠 미츠라임 미베이트 아바딤). ‘메에레츠’와 ‘미베이트’에서 각각의 경우에 앞머리에 붙어 있는 ‘메’와 ‘미’는 탈격 전치사 ‘민’의 축약형이다. ‘~로 부터’란 뜻이다. 이 두 가지 탈격 전치사 어귀가 나란히 중복된 모습은 이 두 어귀를 동격으로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즉 ‘미츠라임의 땅’이란 곧 ‘노예들의 집’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으로 ‘미츠라임 땅’을 추가로 설명해 주는 어법이다. ‘종들의 집’이라고 한글역본들은 번역하였으나 나는 ‘종들’ 보다는 좀 더 사회과학적인 용어를 채용하여 ‘노예’라고 번역하였다. ‘너희가 종 되었던 집’이라고 하면 이스라엘의 경우에만 한정짓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본문은 다른 느낌을 준다. 미츠라임이란 제국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많은 족속들을 노예로 끌어와 강제노동을 시키는 나라라는 것이 본문이 풍기는 느낌이다. [개역개정,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표준, ‘이집트 땅, 종살이 하던 집에서’; 공역, ‘에집트 땅 종살이 하던 집에서’]
3절. ‘너를 위하여’(르카). 전치사 ‘르’에 이인칭단수명사 ‘카’가 접미사로 결합된 형태이다. 전치사 ‘르’는 ‘~ 을 위하여’란 뜻이다. ‘너를 위하여’란 표현은 ‘너 자신을 위한 인간중심적인 신앙’을 표현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으나 나는 그렇게 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다른 용례들을 볼 때 이 어귀는 어떤 행위을 할 때 그 결과가 행위 주체자에게 돌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보통의 용법으로 거의 모든 제작행위를 나타내는 동사들에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상에서 별 다른 깊은 뜻 없이 사용하는 상투어라고 할 수 있다. 창6:14, 21; 7:2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독자가 이 경우에 굳이 신학의 깊은 의미를 부여하겠다면 굳이 말릴 필요는 없다. [개역개정, ‘네게’; 표역/공역, 생략]
3절. ‘있게 하지 말라’(로 이흐예). ‘로’는 ‘아니’라는 부정어이다. 이것을 동사 앞에 두면 ‘하지말라’는 금지를 표한다. 동사는 존재동사인 ‘하야’이다. 이것은 우리말에는 ‘있다’ 내지는 ‘~이다’이고 영어에서는 be동사이다. ‘이흐예’를 ‘있게 하지 말라’라고 직역할 수 있다. [개개역, ‘두지 말라’; 표역, ‘섬기지 못한다’; 공역, ‘모시지 못한다’]
3절. ‘다른 신들’(엘로힘 아하림). ‘다르다’란 뜻의 형용사 ‘아하르’의 복수형 ‘아하림’이 ‘엘로힘’을 수식하고 있다. 그래서 ‘신들’이라고 복수형태로 번역해 주었다.
4절. ‘페셀을 만들지 말라’(로 타아세-르카 페셀). ‘로’는 부정어이고 ‘타아세’는 동사 ‘아사’(만들다/행하다)의 이인칭 남성단수 미완료형이다. ‘너는 만들어서는 안 된다’란 뜻이다. 그리고 ‘페셀’을 칠십인역에서 ei;dwlon (에이돌론)으로, 라틴어역에서 sculptile로, KJV에서 any graven image, NKJV에서 a carved image, RSV에서 a graven image, NRSV에서 an idol, 루터역에서 Bildnis, TNK에서 a sculptured image로 번역했다. 탈굼에서는 ‘찰람 첼림(??? ????)’으로 번역했다. 한글성경들은 개역/개개역/공역은 ‘새긴 우상’으로, 표준역은 ‘우상’으로 번역했다. 우리말 역본에서 ‘페셀’을 ‘우상’으로 번역한 점은 공통된다. ‘우상’이란 번역어는 칠십인역 ‘에이돌론’과 동일하다.
우리말 사전에 ‘우상’이란 단어는 ‘1. 목석이나 금속 따위로 만든 상 .... 5. [기] 하느님에 대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신의 형상이나 개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여기서 5번은 기독교신학의 영향을 받은 정의이므로 순전히 우리의 개념에서는 1번으로 정의해야 한다. 내가 보기에 히브리어 ‘페셀’은 바로 이 1번의 정의와 동일한 것으로 판단된다. 페셀은 나무나 돌로 새겨서 만든 신상을 가리킨다. 한글개역의 ‘새긴 우상’이란 번역어는 딱 좋다. 금속으로 만든 주물상의 경우에는 ‘마세카’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별도로 사용되었다(출34:17, 개개역, ‘신상’). 그러나 나는 개념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서 ‘페셀’을 ‘새긴 우상’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원어의 발음 그대로 ‘페셀’이라고 번역해 주었다.
4절. ‘그리고’(페셀 워콜-터무나). 접속사 ‘워’는 ‘그리고’, ‘또는’, ‘즉’으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그리고’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5절에서 ‘그것들에게(라헴)’라고 복수형으로 지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페셀은 단수이기에 여기에 ‘터무나’가 합해서 ‘그것들’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리고’라고 번역했다.
5절. ‘그것들에게’(라헴). 복수형 ‘그것들’이란 바로 앞의 4절에서 언급된 ‘페셀’과 ‘콜-테무나’를 가리킨다.
5절. ‘그것들에게 노예살이하지 말라’(로 타오브뎀). 이것을 2절의 ‘노예들의 집’이란 어귀와 상통하도록 ‘노예’란 요소를 공통되게 넣어 주었다. ‘아바드’란 동사의 파생어들, ‘아바딤’과 ‘타오브뎀’은 2절과 5절에서 긴밀하게 상응하고 있다. 5절에는 호팔형이 쓰여 피동태의 의미가 더 강하게 풍긴다. 이 동사의 파생어들은 2절, 5절, 9절, 10절, 17절에 도합 다섯 차례나 언급된다. 이 모든 경우에 일관되게 ‘노예노동’을 떠올리도록 번역하기는 어렵다. 9절은 꼭이 노예노동이 아닌 모든 노동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절과 17절에 명사형 ‘에베드’가 나오는데 이 경우에 ‘남자 노예들’이라고 번역해 주는 편이 좋겠다. 이로써 독자들이 다섯 절들의 동일한 단어에서 서로의 연관성을 느낄 수 있도록 번역해 주었다.
5절. 곧 ‘엘칸나’(질투하는 신)(엘 칸나). 이렇게 번역한 이유는 ‘칸나’ 아래에 분절표시 아트나가 찍혀 있기 때문에 이 요소를 앞의 야훼와 동격이 되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다. 전반절에서 문장을 끊고 후반절을 독립된 문장으로 번역해 주었다.
7절. ‘존함을 헛되이 대지 말라’(로 티싸 엩-쉠). ‘~[물건]을 지고 나르다’라는 동사 ‘나사’의 목적어에 ‘이름’이 붙으면 ‘이름을 댄다’는 우리말의 어법과 동일하게 된다. 어떤 음식점에 사장의 이름을 대고 요리를 시켜 먹었다고 말하는 경우와 흡사하다. ‘이름을 빙자하다’란 표현은 사기를 치는 경우에 쓰이므로 딱 맞지 않다. ‘존함’ 또는 ‘함자’라고 극존칭으로 번역하여 그것이 신명임을 표기하였다.
10절. ‘야훼를 위한’(라아도나이). 이 어귀는 상투어로 자주 나온다. 예컨대 출32:5에서처럼 ‘야훼를 위한 축일’(하그 라아도나이)과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공시읽기>
출20:1~17은 하나의 독립된 문단이다. 1절은 그 앞 절인 출19:25절과 확연히 구분된다. 25절 끝에 스투마가 있어서 문단이 구분됨을 표시한다. 내가 보기에 스투마는 작은 문단을, 파투카는 큰 문단을 구분한다고 판단된다. 출19장 끝에 파투카를 찍지 않은 이유는 20장이 19장에 긴밀하게 이어지는 부분이기 때문에 큰 문단으로 나누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소라의 노력으로 보인다. 그리고 법문인 17절의 바로 다음에 완전히 다른 이야기 문체의 본문 18~21절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17절에서 문단이 매조져진다. 여기서도 스투마를 찍어서 문단사이의 긴밀성을 표현하였다.

1. 문단의 짜임새
출20:1~17 문단의 짜임새를 살펴보자. 7절 끝에 파투카가 있기 때문에 우선 1~7절을 하나의 단락으로 떼어 보자. 그 다음에 안식일법이 장황하게 나오는데 11절 끝에 스투마가 있기에 8~11절을 따로 떼어놓아 보자. 그러면 나머지 12~17절이 남는데 이것을 또 하나의 커다란 단락으로 간주해 보자. 그러면 아래와 같은 삼단구조가 나온다.

가. 출20:1~7, 하나님에 관한 법
중앙. 출20:8~11, 안식일에 관한 법
가′. 출20:12~17. 사람에 관한 법

중앙부분이 안식일법이라는 점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에 관한 법 가와 사람에 관한 법 가′는 안식일법을 중심고리로 서로 연결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 후 제칠일에 쉬셨기 때문에 사람도 모든 노예들이나 가축까지도 안식일에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법은 노동과 휴식의 순환 법칙 속에서 서로 만나고 결합되어 있다.
안식일은 야훼공동체를 규정하는 고유한 특성이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공동체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아니다. 이 점에서 모든 다른 열방의 무리들과 이스라엘은 확연하게 구별된다. 안식일을 지키는 한 노예노동제도를 체제로 견지해 나갈 수 없다. 그러므로 고대노예제사회에 있어서 안식일 공동체는 노예노동 위에 세워진 기존의 사회체제를 지양하고 사람의 쉴 권리를 보장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체제에로 변혁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안식일법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백성의 속성이 만난다. 야훼께서는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던 백성을 해방시킨 하나님이시다. 세계의 어떤 제국이 신봉하는 다른 신들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노예노동이 산출하는 어떤 신상들도 금지하시며 칼이나 군대로 행동하시지 않고 말씀으로 사역하시는 하나님이시다(1절). 이러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노예살이에서 해방된 천민이지만 부모를 공경할 줄 알며 살인하지 않고 거짓말하거나 간음하지 않으며 이웃을 해치려고 법정에서 거짓증언을 하지 않고 남의 재산에 군침을 흘리는 파렴치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마음에서 아예 탐심 자체를 근절한 백성이다. 이러한 속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열방의 백성들과 완연히 구별되는 거룩한 백성(출19:6)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신의 속성과 백성의 속성이 만나는 시간과 자리는 바로 안식일에 모이는 말씀의 예배 자리이다. 이 때 백성이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백성과 만나신다. 이것이 십계명의 짜임새이다.

2. 문단의 위치와 역할
토라에서 십계명이 놓여 있는 위치는 어디인가? 얼핏 보아도 그 위치는 매우 또렷하다. 시내단화의 초입부에 놓여 있다. 초입에 놓여 있다는 것은 그 뒤로 주어질 수많은 법문들을 도입하는 위치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출20:22~23:33에 나오는 ‘계약법’과 출애굽기 25~31장에 나오는 성막/회막 건립법과 레위기의 법문들과 민수기의 법문들이 모두 십계명의 대원칙 아래서 해석되고 준수되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십계명은 다른 법문들의 내용을 요약한 법이 아니다. 십계명은 안식일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디아스포라 공동체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선언하고 공동체가 누구인지를 밝히며 그들의 사명을 알려 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나라의 본질과 사명을 선포한 것이 십계명이다. 문자에 묶여 안식일을 지키는 행위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휴식 없이 노예를 착취하는 열국들에게 하나님의 안식을 선포함으로써 이 땅에 모든 노예들의 해방을 전취하려는 노력이 따라 와야 한다는 것이다. 노예들 각 개인을 힘겨운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하나님나라의 공동체로 불러내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 뜻을 이루는 데 안식일 준수의 대의가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밝히는 대강령으로서 세계의 제국들의 지배 권력에 대한 철저한 심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강령이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를 바탕으로 펼쳐졌다는 사실을 더 깊이 통찰하면 좋겠다. 창세기 1장은 토라의 맨 처음에 등장하여 토라 전체를 지배한다. 십계명은 시나이산 이야기의 맨 처음에 등장하여 시나이산 법문 전체를 통괄한다. 이 십계명에 창세기 1장의 문구가 또렷하게 인용되어 있다는 사실은 토라의 최종본을 구성한 최종저자가 시나이단화를 토라의 중심부에 창설하여 토라의 교차구조를 짜내었다고 판단된다. 그 상응관계는 창세기 1장이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 상응하며 출애굽기 1~15장의 탈출사건이 신명기 5장의 십계명에 상응하므로 서로 교차되는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토라의 최종저자는 두 가지 십계명들이 서로 교차되도록 구조를 짜놓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얼기설기 연결되도록 짜놓은 이유는 창세기에서 신명기에 걸쳐 있는 다섯 권의 두루마리들이 서로 떨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연결되도록 만들려는 데 있다.
출20:1~17 문단과 출20:22~23:33 문단 사이에 출20:18~21의 문단이 끼어 있다. 이 중간 문단을 끼어 넣은 이유는 십계명과 계약법을 등치시켜보려는 수법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십계명을 해설한 것이 계약법이며 계약법을 총괄한 것이 또한 십계명이라고 감상해도 좋을 것이다. 즉 ‘페셀’을 ‘금신과 은신’(출20:23)에 대비시키고 있는 수사법이나, 또 정을 쪼지 않은 자연석으로 쌓은 제단(출20:25)을 ‘페셀’금지의 이유로 대고 있는 것, 등등을 근거로 댈 수 있다.

<통시읽기>
토라의 본문이 어떤 경로를 거쳐서 지금의 모양을 띠게 되었는지를 질문하자면 신명기의 본문이 가장 중요한 준거점으로 떠오른다. 신명기의 본문에 일치하는 사경의 본문들은 신명기학파의 차원에 속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 때 주의할 점은 후대의 오경저자 P는 토라의 신파본을 숙지하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신파본을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재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문체와 사상이 개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P의 인용이나 활용의 산물이 아닌지 판단해야 한다.
십계명의 경우에는 신파본의 십계명이 매우 분명하게 보전되어 있다. 신5:6~21의 신명기 십계명은 본디 지금의 출애굽기 20장의 자리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후대에 오경을 저작하는 과정에서 P는 십계명을 신명기에 보전하는 대신에 자신의 신학에 따라 십계명을 개작하여 현재의 출20:1~17의 위치에 수록하였다. 독자들은 그 유명한 신파본의 십계명이 신명기에 보전되어 있는 것을 확연하게 의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명기 5장의 십계명을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출20:1의 말씀을 강조하는 긴 문장은 신5:5ㅎㅎii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레모르)’의 짧은 어귀와 병행된다. 토라의 최종저자가 말씀의 신학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2) 신5:9에서 장모음을 가진 ‘아보오트’가 출20:5절에서는 단모음의 ‘아보트’로 바뀌어 있다. 옛 발음 중에 장모음이 후대에 갈수록 단모음화되어 가는 흐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3) 신명기본에는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라는 상투어가 12절과 16절에 있는데 이것은 출애굽기 십계명에 보이지 않는다. 이 상투어절은 신명기에 전형으로 나온다.
4) 신5:13~15은 애굽탈출의 사건을 전거로 안식일을 강조하는 반면 출20:8~11은 창세기 1장의 창조신학을 전거로 인용한다.
5) 신5:12에 동사 ‘샤마르’가 쓰인 반면 출20:8에는 동사 ‘짜카르’가 쓰였다.
6) 신5:16의 ‘야아리이칸’의 장모음 ‘이’는 출20:12에서 ‘야아리쿤’의 단모음 ‘이’로 개정되었다. 이 역시 장모음이 단모음화되는 현상이다.
7) 신5:21에 쓰인 동사는 민수기 11장의 ‘키브롯핫타아와 이야기’에서 쓰인 동사 ‘타와’(탐욕을 품다)인데 반해 출20:17에는 ‘ㄱ하마드’ 동사가 일관되게 쓰인다.

위의 비교 중 2)와 6)이 보고하는 대로 장모음이 단모음으로 변한 현상이 보인다. 장모음이 후대로 갈수록 단모음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신명기의 십계명 본문이 출애굽기의 것 보다 더 옛 것임을 말해 준다. 그리고 위의 4)가 보고하듯이, 신파본에서는 ‘출애굽 주제’를 안식일의 근본 취지로 내세우지만, 출애굽기의 십계명에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가 안식일의 근본 취지로 인용된다. 그러므로 출20장의 십계명 본문의 저작 시기는 창세기 1장의 저작시기 보다 더 빠를 수 없다. 출20장의 본문은 신파본 십계명을 개정하여 작성한 토라의 최종저자인 P의 솜씨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신파본은 신명기의 십계명인 신5:6~21의 본문 그대로라고 나는 추정한다.

<본문명상>
1절 끝에 스투마(?)가 붙어 있으므로 1절이 하나의 항목이 된다. 7절과 17절 끝에 파투카(?)가 있다. 파투카의 구분법에 따르면 십계명은 1~7절까지가 전반부가 되고 8~17절까지가 후반부가 된다. 전반부는 하나님에 관한 명령이고 후반부는 사람에 관한 명령이다. 스투마에 따라 구분해 보면 전반부는 [1절, 말씀하시는 야훼] + [2~6절, 출애굽 야훼/ 다른 신들 금지/ 페셀금지] + [7절, 이름도용금지]의 세 가지 금령으로 구분된다. 8절 이후에 제시된 금령은 모두 일곱 가지로서 전후반부를 합치면 모두 열 가지 계명이 된다. 이것은 마소라 학파의 전승에 따른 십계명 구분법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마소라학파는 1절(壹), 2~6절(貳), 7절(參), 8~11절(四), 12절(伍), 13절(六), 14절(七), 15절(八), 16절(仇), 17절(拾)로 십계명을 구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절을 별도의 계명으로 간주하는 것이 옳다. 유대인 크리스챤들이 번역한 JPS는 13~16절을 합하여 하나의 절로 뭉뚱그렸다.

제1계명(1절)은 두 가지 동사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다바르’ 동사이고 또 하나는 ‘아마르’ 동사이다. 다바르 동사는 동종명사 ‘하드바림’을 받는다. ‘이 모든 말씀들(하드바림)을 명하여(다바르) 가라사대(아마르)’라고 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동사로써 제일계명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시되 말씀으로 다스리시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신 셈이다. 이것은 천지를 창조하시되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고백하는 창세기 1장의 창조신학과 같은 맥락에 있다. 세상의 왕들은 무력과 폭력으로 나라를 통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칼이나 창이 아닌 말씀으로 다스리신다. 무릇 당신의 백성은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당신의 통치에 응답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대강령이다.

제2계명(2~6절)은 야훼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밝히면서 백성이 그 하나님의 성격에 맞추어 행동해야 할 으뜸가는 원칙을 천명한다. 우선 야훼는 구원(해방)의 하나님이시다(2절). 미츠라임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노예노동에 시달리던 히브리인들을 그 고통의 현장에서 탈출시키신 하나님이 곧 야훼시다. 하나님께서는 미츠라임 땅을 가리켜서 ‘노예들의 집’이라고 표현하신다. 그 노예들의 집에서 ‘너’, 곧 ‘이스라엘’을 탈출시키셨다. ‘이스라엘’은 미츠라임에서 ‘히브리인’이었다. 미츠라임 제국의 신민들은 히브리인을 불가촉천민으로 멸시하였다(창43:32).
고대근동의 모든 제국은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노예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한 지배이데올로기를 떠받쳐준 것이 제국의 종교였다. 이집트 제국은 태양신 종교를 지배종교로 신봉하였고 신바빌로니아는 ‘마르둑’ 또는 ‘신’을 최고신으로 섬겼다. 페르시아는 ‘아후라마쯔다’를, 헬라제국들은 ‘주피터’를, 로마제국은 ‘제우스’를 각각 최고신으로 내세웠다. 이 모든 신들은 신들 중의 신들로서 영웅숭배 사상을 정당화하며 소수 엘리트의 독점 권력을 합리화하고 전쟁과 인간차별을 인간사의 본질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야훼께서는 그러한 제국체제를 정당화하는 불의를 히브리인의 탈출사역을 통해서 타파하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체의 ‘다른 신들’을 부정할 것을 요청하신다(3절). 여기서 말하는 ‘다른 신들’이란 무엇을 가리키는가? 성서시대의 ‘다른 신들’은 어떤 행태를 보이는가? 야훼 이외의 다른 신들은 제국의 신들이다. 몰렉과 같은 소국의 신들일지라도 만신전(萬神殿, pantheon)에 속하여 제국의 최고신에게 부속되어 있는 한 그것들은 ‘다른 신들’의 범주에 든다. 제국의 지배이데올로기에 봉사하고 있는 만신전의 신학체계에 속한 일체의 모든 신들이 ‘다른 신들’의 범주에 속하며 그들은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야훼는 만신전의 범주를 벗어나 오롯이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어떠한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다. 인간이 창출한 어떠한 이데올로기에도 봉사하지 않으신다. 야훼 하나님은 만민의 하나님이시며(창12:3)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다 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이집트의 신도 아니며 바빌로니아의 신도 될 수 없다. 독일인의 하나님도 될 수 없고 프랑스인의 하나님도 아니며 영국인의 하나님도 될 수 없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피조물에게 종속되지 않으시며 만민을 골고루 사랑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야훼를 어떤 피조물의 형상에 비겨서 신상으로 제작해서는 안 된다(4절). 특히 ‘페셀’을 만드는 행위를 엄금한다. 페셀은 나무나 돌을 새겨서 만든 조형물을 가리킨다. ‘만들지 말라’란 금령은 산림채벌이나 채석장에 투여되는 노예노동을 금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노예제 사회에서 왕들은 신전이나 신상을 제작하기 위해서 저마다 채석장이나 벌목장을 확보하고 석공이나 목공을 부역에 동원하여 일을 시켰다. 그러므로 신상뿐만 아니라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 투여되는 일체의 노예노동도 야훼 하나님은 금지하신 것이다. 십계명 자체가 제국주의 체제 아래에서 고난당하는 사람의 추체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대강령이다. ‘페셀’과 ‘신상’ 금령을 형이상학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인간의 경험과 무관한 종교적 사상으로 한정해서는 곤란하다.
‘페셀’과 ‘터무나’(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들에게 절하는 행위는 금한다(5절). 여기에 동사 ‘아바드’가 사용되었는데 이 동사는 노예노동의 행위를 가리킨다. ‘섬기다’, ‘예배하다’라고 번역되기도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거짓된 신들에게 노예가 되어 그들을 위해서 일하지 말라고 금하고 있다(‘로 아브뎀’). 그 이유는 야훼께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엘칸나’)으로서 야훼를 미워하는 자의 경우에 아비의 허물을 자여손 삼사 대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따지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반드시 벌을 주시기 때문에 저 우상들에게 절을 하거나 그것들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야훼 하나님은 계명을 지키는 경우에 그 사람에게 천대에 이르기까지 ‘변치 않는 사랑’(ㄱ헤세드)를 행하시는 분이시다(6절).
이 축복과 벌을 규정하는 5~6절에 대해서 질문이 생긴다. 만약 한 사람이 자기 세대 동안 범죄하지 않고 계명을 잘 지켰다면 그는 자손 천대까지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세대에 가서 범죄하면 그 후손은 삼사 대까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경우 천대까지의 축복은 무효가 될 것이다. 축복을 천대까지 견지하려면 한 세대도 죄를 짓지 말아야한다. 하지만 과연 자기 세대에 죄짓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하물며 두 세대에 걸쳐서 계명을 범하지 않고 온전하게 준수하는 가문이 누가 있겠는가? 선을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시14:3의 말씀을 인용하여 바울은 롬3:20에서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탄식했다. 시편이나 로마서가 옳다면, 즉 바울이 표명한 것처럼, 인간에게 계명을 지킬 능력이 워낙 없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무슨 이유로 내려 주셨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 성실하게 답하여야 한다. 우선 히브리어 본문을 다시 꼼꼼하게 뜯어보자. 5절 안에 종속절인 ‘키’절이 있다. 이 속에서 ‘파카드’(찾다, 따지다, 주목하다) 동사와 ‘사나’(미워하다) 동사가 나온다. ‘아버지들’(아보트)와 ‘아들들’(바님)은 복수형으로 쓰였다. ‘아버지들의 허물’은 아들들 삼사 대에 이르도록 하나님께서 따지신다. 이 때 ‘허물/죄’는 ‘아본’이란 히브리어 단어로 표현되어 있다.
이 허물의 내용은 문장 끝에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 대해서’라고 규정되어 있다. 즉 ‘아버지들이 나를 싫어하여 등을 돌린 허물’을 가리킨다. 즉 야훼를 믿지 않고 등을 돌려서 다른 신을 섬기는 배교행위를 문제 삼고 있다고 하겠다. 야훼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사례는 포로기에 비일비재하게 발생하였다. 예루살렘과 솔로몬성전을 파괴하고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은 야훼 하나님이 마르둑 신에게 정복당했음을 크게 선전하였다. 수많은 야훼신앙인들은 마르둑을 신앙하는 쪽으로 뒤돌아섰다. 그러나 야훼 하나님을 참으로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은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선포하신 사실을 기억해 내고 말씀을 새롭게 기록하고 포로민들에게 금권을 휘두르는 제국의 신들에게 굴하지 말고 신앙을 지킬 것을 가르쳤다. 5절이 말하는 ‘죄를 따진다’는 구절은 이처럼 배교하는 자들을 향한 것이다.
그러나 6절에는 이와 상반된 축복의 말씀이 선포된다. 여기에는 ‘아사’(행하다)와 ‘아하브’(사랑하다) 동사와 ‘샤마르’(순종하다) 동사가 쓰였다. 하나님께서는 ‘변치 않는 사랑을 행하신다’(아사 헤세드). 이 때 동사 ‘아사’는 4절의 ‘아사’ 동사와 중복된다. ‘페셀’을 ‘만들지 말라’(‘아사’의 부정형)고 명하신 야훼께서는 ‘변치 않는 사랑’을 ‘만드시는’(‘아사’의 긍정형) 하나님이시다. 6절은 4절을 의식한 대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헤세드’로 표현된 이 사랑은 백성과 맺으신 계약에 충실하여(에메트, 출34:6) 일절 변개함이 없이 백성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 ‘아하브’(사랑하다)라는 동사로써 바로 앞 문절에 나오는 동사 ‘사나’(미워하다)에 대한 대조법이 보인다. 야훼를 미워하는 사람과 야훼를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대조법이다. 야훼를 사랑하는 사람은 야훼의 명령들(‘미츠와’의 복수형)을 잘 듣고 순종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대조법이 발견된다. ‘삼사 대’의 짧은 기간과 ‘천 대’라는 긴 기간의 대조법이다. 하나님의 징벌은 잠간이고 그의 사랑은 영원하다는 수사법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원죄로 인해서 율법을 지킬 능력이 인간에게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이 십계명을 읽으면 논리에 모순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한 세대도 죄를 짓지 않는 세대는 없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기회는 영영 오지 않는다는 논리는 본문이 뜻하는 바가 아니다. 2~6절의 제이계명은 이 같은 대조법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배교하지 말고 야훼에 대한 믿음을 지키자고 권면하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 대조법을 통해서 토라의 저자는 십계명의 이후로 선포될 모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잘 지킬 것을 독자들에게 권면한다. 이 권면귀는 곧 시내단화 전체의 법문을 아우르는 대강령의 역할을 맡고 있다. 이 강령을 철저하게 실천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원칙을 가르쳤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설교의 소위 ‘팔복’은 시나이산의 십계명을 해석한 문단이다.

산상설교의 ‘복되다’ 문단을 ‘팔복’이라고 칭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마5:2의 ‘레곤’(가라사대, le,gwn)는 히브리어의 ‘레모르’(가라사대, ????)에 해당하는 어귀이기 때문에 마치 출20:1의 ‘가라사대’ 절을 하나의 항목으로 꼽았듯이 마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을 하나의 항목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카리오이’(복되다)로 시작하는 11~12절도 포함시켜야 한다. 11~12절은 산상의 ‘복문’을 닫는 마지막 열 번째 항목이 된다. 그렇게 계산하면 다음과 같이 도합 열 가지 문항이 나온다.

산상설교 십복(十福) 십계명
[壹. 마5:1~2(말씀하시는 예수님)] // [壹. 출20:1(말씀하시는 하나님)]
[貳. 3절(성령 안에서 가난한 자의 복)] // [貳. 출20:2~6(출애굽의 유일신 야훼, 신상금지)]
[參. 4절(애통하는 자의 복)] // [參. 출20:7(야훼의 이름 도용금지)]
[四. 5절(낮은 자의 복)] // [四. 출20:8~11(안식일 준수)]
[伍. 6절(정의를 찾는 자의 복)] // [伍. 출20:12(부모공경)]
[六. 7절(불쌍히 여기는 자의 복)] // [六. 출20:13(살인금지)]
[七. 8절(마음이 깨끗한 자의 복)] // [七. 출20:14(간음금지)]
[八. 9절(평화지킴이의 복)] // [八. 출20:15(도둑질금지)]
[仇. 10절(정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의 복)] // [仇. 출20:16(위증금지)]
[拾. 11~12절(예수님을 위해 박해받는 제자들의 복)] // [拾. 출20:17(이웃집에 대한 탐심금지)

위의 비교표는 마태저자가 산상의 ‘십복’을 작문할 때 시나이산의 ‘십계명’에 견주어 만들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일 먼저 말씀의 신학이 표명되고 이어서 하나님 야훼에 대해 명심해야 할 사항이 십계명에 둘째로 나오는데 이것은 마태복음서에서는 ‘성령’이 두 번째 ‘복문항’에 나오는 것과 상응한다. 누가복음서와는 달리 마태저자는 예수께서 성령 안에서 가난해져 있는 사람들을 지시하신다고 보았다. 가난한 자들은 ‘성령으로 인해서’(tw/| pneu,mati) 가난해졌고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복되다는 것이다.
‘토 프뉴마티’란 그리스어 어귀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서양어 역본들에서는 ‘프뉴마’를 이구동성으로 ‘spirit'로 번역했다(라틴, ‘spiritu’; KJV/RSV, 'in spirit'; 루터, ‘geistlich [arm sind]’; 다비, ‘en esprit’). 그러나 그리스어 ‘프뉴마’는 히브리어로 ‘루악흐’임을 명심해야 한다. 불가타성서는 히브리어 루악흐를 대체로 spiritus로 번역했기에 신약성서에서도 그렇게 번역했다. 그러나 ‘루악흐’는 ‘spirit'와는 다른 뜻을 함의한다. ’루악흐‘는 물질을 포함하여 우주에 가득 차 있어 우주를 움직여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 힘, 에너지를 뜻한다. ’루악흐로 인해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복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은 뜻을 전해 준다. ‘마음이 가난하다’란 번역어는 매우 정신화된 해석이다. ‘마음’이란 단어는 8절에 ‘카르디아’(th/| kardi,a|)라는 다른 단어로 표기되어 있다. 우리말 성서는 대체로 ‘심령/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이것을 ‘루악흐’에 잇대어 ‘하나님의 뜻대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이해하면 더 분명해진다.

‘토 프뉴마티’(하나님의 뜻대로)라고 또렷하게 언급한 점은 십계명의 제이계명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노예들을 해방시키신 야훼께서는 유일하신 분이며 일체의 노예노동도 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십계명의 논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가난하게 사는 자에게 적용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제3계명(7절)을 올바로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히브리어 명사 ‘샤붸’란 단어는 ‘공허함/헛됨’을 가리킨다. 그래서 ‘라샤붸’(????)란 어귀를 ‘망령되이’라고 번역한 개역의 번역은 딱 맞는 번역어라고 보기 어렵다(칠역, evpi. matai,w|; 라역, in vanum; KJV/NKJV/RSV, in vain; NRSV, make wrongful use of [the name]; 개개역, ‘망령되게’; 표역/공역, ‘함부로’). 이 어귀는 지금까지 논해온 대로 1~6절의 논지에 비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우리말 사전에 ‘망령(妄靈)되다’란 단어는 ‘늙거나 정신이 흐려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나 있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공역과 표준역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라고 번역한 듯하다. 이것은 칠십인역 ‘에피 마타이오’의 번역과 비슷하다.
그러나 NRSV의 영역 ‘[You shall not] make wrongful use of [the name of the Lord your God]'은 주목할 만하다.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지 말라는 뜻이다. 성서의 다른 곳에서 사용된 용례를 살펴보면, 명사 ‘샤붸’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헛된 우상들에 관련되어 있다(시24:4; 26:4; 31:6[힙7]; 시119:37; 사1:13; 렘18:15; 욥31:5). 이 단어는 물질이나 도덕에 있어서 실재하지 않으며 무가치하고 현실이 아닌 어떤 것을 가리킨다. 신중하지 않게 함부로 야훼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금지하는 잘못된 습관을 금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부러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하여 남을 해치고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악행을 금지한다는 뜻도 들어 있다.
이 지점에서 다시 제국의 왕들이 신의 이름을 이용하여 국가통합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했던 고대의 관례들을 상기해 보자. 고대제국들에서 마르둑이나 아후라마쯔다의 신명들을 악용하여 왕권을 정당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왕들은 신들의 이름을 빌어서 전쟁과 영우숭배와 노예체제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통치수단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야훼의 이름을 이용하려는 어떠한 통치자도 이스라엘에 용납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때 제삼계명인 7절의 ‘라샤붸’는 정확하고도 올바르게 해석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 이름이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악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계명을 현대의 상황에 비추어 해석해 보자. 현대에 ‘페셀’은 무엇인가? 누가 이 사회의 약자를 희생으로 하여 거대한 물질문명의 최고봉에 온갖 혜택을 누리고 사는가? 이 지배자들이 내세운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그 이념은 어떠한 피조물의 형상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그들은 자신의 이기심을 어떠한 보편화된 가치로 포장하고 있으며 어떤 명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각 분야에서 이러한 정당화된 명분들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하는 과정에서 십계명 제3계명이 현대에 주는 교훈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야훼의 이름을 대는 행위를 가리켜 ‘헛맹세를 한다’고 한다. 법정에서 위증하는 경우와 같이 남을 해쳐서 자신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야훼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정치에 있어서는, 어떤 통치자가 어떤 신의 이름을 대면서 그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자신의 권좌 아래 복속시키려고 종교나 이념을 빙자하여 지배이데올로기를 창출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오늘 날 초국가 기업이 기업의 이념으로 인류복지나 사회복지나 애국심을 내세운다면 그것은 헛된 이데올로기이다. 정의로운 기업은 생산과정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창조질서를 보존하면서 생산하는 기업이다. 시장의 확보를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저지르고 감행하는 초국적 기업의 행태는 분명 제삼계명을 어기는 짓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유주의경제체제는 성서에 반하는 체제로 판정된다.

제4계명(8~11절)은 안식일법이다. 이 계명은 장황한 제이계명과 마찬가지로 꽤나 길게 진술된다. 9~10절은 순수한 계명인데 이것을 ‘거룩’의 신학을 강조하는 8절과 11절이 앞뒤에서 감싸고 있다.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고 이레째 되는 날에는 어린이와 노예와 가축과 이주노동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쉬어야 한다. 초점은 휴식에 맞추어 있다. 이것이 샤바트, 곧 안식일이다. 자손대대로 이 날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예노동을 기초로 체제를 유지하던 고대노예제 사회에 있어서 안식일은 억압당하는 모든 노예노동자들에게 해방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안식일이 되면 하나님의 백성은 창조주 하나님의 하신 일을 기억하고 다른 날들과는 완전히 구별하여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다른 민족들과 차이가 나는 ‘거룩’의 의미이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사회에서 안식일의 취지는 변질되었다. 안식일이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삶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스모네왕가의 통치를 거쳐 유대사회는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유대사회에는 토지를 잃고 유랑하는 무리들이 많았고 이들은 일용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안식일에 쉬어야 한다면 하루 벌어 겨우 먹고 사는 민중들에게 안식일은 휴식이 아니라 오히려 수입이 끊어져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날이 되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껍데기만 남은 바리새파 주도의 안식일 체제를 타파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심으로써 십계명의 참뜻을 되살리셨다. 초기교회는 바리새교의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 대신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일요일을 주일로 지켰다. 많은 노예들이 새벽 미명에 지하 예배실 카타콤에 모여 성만찬을 나누고 말씀을 듣고 함께 기도한 후에 황급히 귀가하여 주인의 집을 위해 노동에 종사한 정황을 상상해 보라. 초기교회의 성도들이 안식일 율법을 지키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안식일의 정신을 주일성수에서 되살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일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주일’ 곧 ‘주의 날’은 심판의 날이요 하나님나라가 전취되는 날이요 성취된 종말로 인해서 온 만물이 온전하게 안식을 누리며 평화를 회복하는 날이다. ‘주일’의 소중한 뜻을 망각해 버리고 주일에 유흥을 일삼거나 주일에 시험을 치루거나 주일에 전쟁을 도모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

제5계명(12절)은 사람이 지켜야 할 법도들에 대해서 명령하기 시작한다. 그 으뜸가는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공경하다’에 사용된 히브리어 단어는 ‘카베드’ 동사이다. 이 동사는 본디 ‘무겁다’란 뜻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홀대하지 말고 귀중하게 여기라는 뜻이다.
부모공경의 계명은 십계명 전반부에 나온 야훼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계명과 상응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부모 공경은 하나님 공경과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엘리의 가정과 사무엘의 가정, 특히 다윗의 왕가를 볼 때, 이 계명은 여지없이 무시되었다. 홉니와 비느하스, 사무엘의 아들들, 압살롬의 반역, 등 성서에 부모를 거역한 사례는 부지기수로 나온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한 사례와 맞먹는다.
부모를 공경한 사람은 복을 받는다. ‘야훼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땅에서 오래토록 살 것이다.’ 반대로 부모를 거역하고 홀대하게 되면 ‘그 땅’에서 쉬이 쫓겨날 것이다. 워낙이 이스라엘이 왕가에서부터 부모를 죽이려고 하는 흉악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쫓겨난 것은 사필귀정이다. 이것은 디아스포라 포로민 공동체의 상황에 잘 맞는다. 그러므로 이제 새롭게 주시는 낯선 땅에서 오래토록 살 수 있으려면 자녀 대대로 효도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효도를 하지 않는 자녀는 곧 망하고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코르반’이라고 하고 부모에게 바칠 것을 가로채는 불효자들을 꾸짖었다(막7:9~13). 서양의 자본주의 문명은 우리나라의 효도하는 미풍양속에 악영향을 끼쳤다. 물론 유교에 입각한 종래의 가부장 중심의 가족체제가 옳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 때는 며느리, 등 여성들이 억압을 당했던 폐해가 있었다. 현대의 한국에 대가족체제가 무너지고 핵가족체제가 주종을 이루면서 효도라는 덕목은 매우 시대에 뒤진 것으로 간주된다. 대가족체제는 농경사회에서 효율이 높다. 그러나 임노동으로 생활하는 자본제 사회에서는 대가족이 자본가에서 부담이 된다. 많은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높은 임금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가 중심의 사회에서는 소가족 제도로 바뀌어야 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근자에 들어서 부모를 모신다는 개념은 낡은 개념이 되고 말았다.
서양에는 부모들이 늙으면 양로원으로 들어간다. 자녀들은 따로 사는 것이 상례이다. 늙으신 부모님들이 양로원에서 쓸쓸이 노년을 보내다가 타계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도 서양문물에 깊숙이 젖어 있다. 게다가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면서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해방된 며느리는 시부모를 모시는 일을 기피한다. 물론 생활환경 자체가 아파트 문화로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어쩔 수 없다. 좀 부유한 부모는 자녀와 가까운 곳에 아파트를 얻어 자주 왕래하면서 사는데 이러한 환경을 최상의 경우로 친다.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십계명은 농경사회에서 주어진 법이다. 극도로 개별화된 핵가족제도는 고대에 없었다. 변화된 상황에서 부모공경의 효도를 실천하는 방법을 나름대로 연구하여 실천하는 수밖에 없다. 우선 개인의 차원에서 자녀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또 사회제도의 차원에서 노인문제를 해결하고 노인들을 공경하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해 나가는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특히 가난한 가정에서 노인들을 잘 모실 수 있도록 교회가 앞장서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국인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쫓겨나지 않고 오래토록 번영을 누릴 수 있다.

제6계명(13절)은 살인금지법이다. 여기에 동사 ‘라착흐’(살해하다)가 쓰였는데 이 동사는 십계명에 맨 처음 나온 뒤로 다른 구절들에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성서 전체 에 38회, 토라에만 27회 사용되었다. 십계명 출20:13에 처음 언급된 이후 민35장의 도피성 규정에 무려 19회나 집중 언급된다. 신명기에는 도합 7회 언급된다(신4:42[2x]; 5:17; 19:3, 4, 6; 22:26). 신4장과 19장에 나오는 언급은 민35장과 같이 도피성으로 도망하는 살인자의 경우를 묘사한다. 신22:26의 경우에만 살인의 고의성이 있는 행동을 가리킨다. 이 동사는 고의로 저지른 살인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대부분 부지불식간에 살인하게 된 과실치사의 경우를 표현한다(TWOT). 과실치사를 가리키는 경우는 여호수아서 20~21장에도 8차례 언급된다. 사사기 이후 전체 히브리어 성서에서 13회 더 나온다. 칠십인역 성서에서 간음금지조항이 이곳에 나오고 이어서 도둑질금지조항이 14절에, 살인금지조항은 15절에 나온다(ouv foneu,seij). 그리스어는 ‘포뉴오’ 동사로 번역했다.
‘라착흐’ 동사 말고도 ‘살해하다’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하라그’이다. ‘하라그’는 히브리어 성서에서 ‘라착흐’ 보다 더 널리 사용되어 토라에서만 해도 도합 42회 언급된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였다(창4:8, 하라그). 라멕도 살인하였다(창4:23, 25, ‘하라그’). 특별히 사사기의 전쟁 상황에서 ‘하라그’가 많이 언급된다. ‘라착흐’와 ‘하라그’ 사이에 어떠한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 듯 보이지 않는다. 다만 ‘라착흐’ 동사는 도피성 규정에 전문용어로 쓰인다는 점이 특이하다. 따라서 그 어감의 강도에 있어서 ‘라착흐’는 ‘하라그’ 보다 더 부드러운 느낌을 풍기고 있어서 과실치사의 경우에 많이 쓰인다.
십계명에 일반화된 동사 ‘하라그’를 쓰지 않고 굳이 ‘라착흐’를 사용했다는 데 토라 저자의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내 생각에 ‘라착흐’는 야훼를 섬기는 백성 공동체 내의 생활을 규정하는 단어라고 본다. 공동체 내에서 고의로 형제를 죽이는(하라그) 일이 발생할 리가 없다. 다만 실수로 죽게 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런 과실치사의 사건조차도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는 것처럼 들린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욕을 하거나 살의만 품어도 그것은 이미 계명을 어긴 것이라고 가르쳤다. 율법의 참뜻을 해설해 주신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 행동만 따질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구는 율법을 수행하는 자의 온 존재를 요구한다. 마음속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에 숨 가쁜 상태가 아니라면 그 사람은 이미 살인죄를 저지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예수님의 제자에게 있어서 율법의 문자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형제에게 미운 말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몰라도 모든 사람이 형제에게 한 번 이상은 욕설을 퍼붓거나 미운 맘을 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율법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죄인이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라면 자기 눈에서 티끌을 보고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눈으로 십계명을 보았을 때 공동체 안에 형제를 미워하는 일은 커녕 형제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는 상태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힌다. 살인금령은 디아스포라 포로민 공동체의 법으로 지극한 형제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제7계명(14절)은 ‘간음하지 말라’이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는 ‘나아프’이다. 이 동사도 ‘라착흐’와 마찬가지로 십계명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여 나중에 성결법에 언급되고(레20:10[4x]) 다시 신명기 5장의 십계명에 나온다. 토라에서는 도합 여섯 차례 언급될 뿐이다. 히브리어 성서 전체에서 25회 사용된다. 예레미야서에 8회, 호세아서에 다섯 차례 집중 언급되는 특징을 보인다. 흔히 배교행위나 우상숭배를 가리켜서 사용되는 동사 ‘짜나’는 매춘행위를 하거나 창녀와 동침하는 짓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와는 달리 ‘나아프’는 호세아를 버리고 정부와 달아난 여인 고멜과 같은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도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서 지켜야할 법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짜나’ 동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칠십인역에서는 이것을 ouv moiceu,seij(우 모이큐세이스)라고 번역했다. 기본형은 ‘모이큐오’이다(LXX 13절). 이 그리스어 동사는 오직 토라에서만 히브리어 ‘나아프’의 일관된 번역어로 쓰이나 예레미야서와 같은 곳에서는 ‘모이카오마이’와 ‘포르네이아’라는 번역어를 번갈아 쓴다(예. 렘3:8~9). ‘포르네오’는 대개 히브리어 ‘짜나’의 번역어로 쓰인다.
예수님께서 이 계명을 가장 올바르게 이해하셨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음욕을 품다’의 그리스어 원어는 ‘에피투메오’이다. 이것은 ‘짜나’나 ‘포르네이아’와는 다른 뜻으로 탐욕이나 욕망과 연관된 동사이다. 이 때 ‘여자’는 ‘귀나이카’인데 이 명사는 마5:31의 ‘귀나이카’와 동일하다. 한글역본에서는 마5:28에서 ‘여자’로 번역하고 마5:31에서는 ‘아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잘못이다. 나는 이 두 곳 모두 ‘아내’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본다. 즉 남의 아내를 보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탐을 내는 자는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간음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런 자는 눈이나 손이라도 잘라내 버려야 마땅하다고 예수께서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남자가 여자를 보고 성욕을 느끼는 피조물의 속성을 정죄한 것이 아니다. 공동체 성원의 유부녀를 탐내어 가로채기 위해서 불륜의 성행위를 갖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 여성은 그 공동체에서 매장되고 남편에게 쫓겨나게 된다. 공동체가 깨어지게 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남의 아내를 탐하는 짓은 이웃의 가장 소중한 재산을 강탈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하나님나라의 공동체에서 쫓겨난 사람은 필경 지옥에 떨어지고 만다.

제8계명(15절)은 ‘훔치지 말라’이다. 여기에 쓰인 동사는 ‘가나브’인데 이것은 십계명에 처음 나오는 동사가 아니다. 창세기에서 이미 여러 번 쓰였다. 히브리어 성서 창세기에 ‘가나브’ 동사는 도합 12회 언급되었는데 칠십인역에는 7회로 조정되었다. 특히 창31장에서 마소라본은 ‘가나브’ 동사를 8회, 칠십인역은 ‘클렢토’를 3회만 사용한다.
칠십인역 성서에서 ouv kle,yeij라고 번역되어 있다(LXX 14절). ‘클렢토’란 단어는 창세기에서 야곱이 라반의 양들 가운데 아롱진 무늬 있는 것으로 자신의 양을 번식시켰을 때 라반에게 훔친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장면에서 사용된다(창30:33). 그런데 라헬은 아비 라반의 드라빔을 훔쳤다(에클렢센, 창31:30, 32). 요셉은 어떤 도둑이 히브리인들의 땅에서 자기를 납치하였다고 말할 때 이 ‘클렢토’란 단어를 쓴다. 십계명의 도둑질은 납치, 유괴에 의한 인신매매 행위도 의미한다. 요셉의 형들이 은잔을 훔친 것으로 혐의를 받았을 때도 이 단어로 번역되었다(창44:5, 8).
산상설교에서 예수께서는 이 계명을 언급하지 않으셨다. 다만 ‘속옷을 가지려고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마5:40)고 명하심으로서 ‘도둑질’의 수준은 아예 문제도 삼지 않으셨다. ‘네게 꾸려고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42)는 계명을 실천하는 자야말로 참으로 도둑질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 주변에 가난하여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 줄 알면서 호의호식하는 그 사람이 바로 도둑이 된다. 그러므로 물건을 훔쳤다고 해서 도둑놈이라 정죄하지만 그 도둑놈이 훔칠만한 물건을 가진 부자들이 가난한 자를 모른 척하고 살고 있다면 그들도 도둑놈이 된다. 예수님께서 이 계명을 철저하게 해석하심으로써 율법의 핵심이 사랑에 있음을 가르치셨다. 십계명을 조직의 강령으로 삼은 하나님백성의 공동체는 형제의 물건을 탐내어 도둑질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윤리를 더욱 철저하게 적용하고 있다.

제9계명(16절)은 위증금지령이다. 마소라본은 ‘아나’동사(????, 대답하다)에 목적어 ‘에드 샤케르’(?? ???, 거짓증언)를 결합시켜서 법정에서 위증하는 상황을 명백하게 표현한다. 칠십인역은 ou yeudomarturhsei" kata tou plhsion sou marturian yeudh라고 번역하여 ‘프슈도’(거짓)란 요소를 문장의 앞과 뒤에 두 번 넣어 줌으로써 재귀형 문장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법정의 위증 금지를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위증의 상황은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을 때 전개된다. 왕후 이세벨이 장로들과 음모를 꾸며 비류 두 사람으로 하여금 나봇에 대하여 위증하게 만들었다(왕상21:13).
예수께서는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금하셨다. 다만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해야 한다. 이웃을 음해할 목적으로 위증하는 것도 금하셨지만, 박해받을 때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위증하는 일도 만류했다. 예수를 믿다가 법정에 끌려갔을 때 변명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예수를 증언하고 박해를 받는 것이 좋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모독하였다고 위증자들이 나서서 고발하였다. 빌라도가 법정에서 심문할 때 그는 예수에게 ‘네가 유다인의 왕이냐?’라고 묻자 su. le,geij(수 레게이스)라고 답변하셨다(마27:11; 막15:2; 눅23:3). 이것을 우리말 공관서 번역에는 ‘그렇다’라고 번역했다. 직역하면 ‘네가 말한다’이다. 요한복음서에는 su. le,geij o[ti basileu,j eivmi(너는 내가 왕이라고 말하고 있다)라고 명사절을 넣어서 더욱 상세하게 답변하신다(요18:37). 예수를 치는 불리한 증언이 많음에도 이에 대해 일언반구도 대꾸하지 않는 예수님을 보고 빌라도는 이상하게 여겼다고 한다(마27:13~14).
한 국가의 체제 문제를 놓고 위증하는 일은 역사에서 비일비재하였다. 어떤 집단의 이익에 걸린 문제가 제기될 경우에는 법정에서 위증하는 일은 필요악처럼 따라다닌다. 예수님을 제거해야 하는 필요성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와 헤롯과 빌라도로 구성된 국가체제를 둘러싼 커다란 정치운동에서 생겨난 것이다. 평소에 서로 갈등하던 지배자들이 담합하여 예수님을 처형했다. 로마제국이라는 체제 자체를 문제시하였기 때문에, 반제국운동을 통해 독립된 국가를 재건하려는 민족운동의 허위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전 우주의 규모에서 영원 전부터 영원 이후까지 펼쳐지고 있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한 개인 예수란 인물은 처형당하였다.
민중(오클로스)은 또 다른 지도자 대제사장의 종용을 받아 재판에 나서 예수에 대해서 위증하였다(눅22:4). 무리는 예수 대신 바라바를 석방시켜 달라고 요구했다(막15:8~15). 민중이 재판에 등장하여 예수를 죽이는 데 공헌했다는 사실은 민중이 정치에 참여할 때 저지를 수 있는 오류의 가능성을 지적한다. 대중의 집단의식이 민중을 오류로 몰아가곤 한다. 예컨대 북한에서 행해진 인민재판이란 사법제도는 있어서는 안 되는 제도이다. 집단기억이나 집단의식으로 한 개인을 심판하는 일은 ‘거짓증언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위반하는 짓이다.

제10계명(17절)은 이웃의 가속과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금령이다. 칠십인역에는 마소라본과 순서가 뒤바뀌어 나온다. 두 본문을 차이점들을 짚어 보자. 마소라본에는 ‘이웃의 집’에 별도로 동사가 붙어 하나의 완벽한 문장을 구성하고 있다. 이어서 동일한 동사에 ‘아내, 남종, 여종, 소, 나귀, 재산’의 순서로 품목이 언급된다. 모두 일곱 가지 항목이다. 여기서 ‘집’은 권속이나 같이 모두를 포괄하는 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웃의 집, 곧 거기에 속한 사람이나 가축이나 물건 일체를 탐내지 말라는 뜻이다.
칠십인역은 좀 다르다. ‘이웃의 아내’가 맨 먼저 언급된다. 그 다음에 ‘집’이 언급되고 이어서 그 집에 속하는 항목들이 나열된다. 그 번역 본문은 아래와 같다.

ouvk evpiqumh,seij th.n gunai/ka tou/ plhsi,on sou (A. 아내)
ouvk evpiqumh,seij th.n oivki,an tou/ plhsi,on sou (// B. 집)
ou;te to.n avgro.n auvtou/ (i. 밭)
ou;te to.n pai/da auvtou/ (ii. 남종)
ou;te th.n paidi,skhn auvtou/ (iii. 여종)
ou;te tou/ boo.j auvtou/ (iv. 소)
ou;te tou/ u`pozugi,ou auvtou/ (v. 멍에 매인 가축)
ou;te panto.j kth,nouj auvtou/ (vi. 탈 짐승들)
ou;te o[sa tw/| plhsi,on sou, evstin (vii. 모든 재산)

위의 첫 두 줄에서 ‘아내’와 ‘집’은 평행법을 이룬다. ‘아내’ 즉 ‘집’이란 어법이다. 아내를 무척 강조하는 문장이다. 그 다음에 ‘집’에 속한 항목은 모두 ‘우테ou;te’라는 부정어로 나열되는데 ‘밭’, ‘남종’, ‘여종’, ‘소’, ‘멍에 매인 가축’, ‘말 따위의 탈 짐승들’, 그리고 ‘기타 재산’의 순서로 모두 일곱 가지 항목이 기명되어 있다. 마소라본과는 달리 칠역에서는 ‘집’이 ‘아내’와 동격이며 ‘집’은 전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특히 아내를 으뜸가는 재산으로 간주하여 맨 앞에 기명하고 있다.
마소라본의 ‘탐내다’란 동사 ‘???(ㄱ하마드)’는 칠십인역에서 ‘에피투메오evpiqumh,seij’란 동사로 번역되었다. 간음금령인 제7계명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마태복음 5:28의 ‘에피투메오’란 동사와 직결된다. 마소라본의 동사 ‘하마드’는 창2:9; 3:6에 쓰여 선악과를 따먹으려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다. 먹고 싶은 욕망이 솟아 오른 것이다. 사람은 땅을 탐낸다(출34:24). 아합이 나봇을 죽게 한 것도 포도원을 정원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온 땅은 하나님의 것이다(출19:5). 제10계명은 탐심 자체를 문제시한다.
도둑질이나 납치나 유괴나 거짓증언이나 간음하는 모든 악행은 남의 것을 탐내는 탐심에서 비롯된다. 이 탐심에서 이웃집에 있는 것을 빼앗고 싶은 악한 마음과 악행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전쟁의 원인이기도 하다. 하나님나라를 일구어 가야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는 모름지기 탐심 자체를 경계하고 아예 마음에서 탐심의 싹을 아예 잘라버려야 한다. 이런 존재 상태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으려는 무소유의 수행은 좋은 방법이다. 더 나아가 탁발행각에 나서는 것도 또한 수행의 방편이 된다. 아내와 자식이 모두 깡통을 차고 길거리에 나가 앉는 것도 온 가족이 수행하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불가능한 것 같지만 아내와 자식들의 동의를 얻어 시행해 볼 만하다.
이렇게 볼 때 제10계명은 지금까지 제시된 공동체의 윤리인 부모공경, 살인금지, 간음금지, 도둑질금지, 위증금지를 모두 포괄하여 총정리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인다. 여기에 예수님의 산상설교(마태5~7장)에 제시된 계명에 대한 해설(미드라쉬)에 비추어 십계명을 읽는다면 그 뜻이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