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구

도시와 농촌 사이에 난 오솔길을 따라 하나님의 산을 오르자 (이영재 연구실장)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7-06-28 23:24
조회
2436
도농공동체.hwp

도시와 농촌 사이에 난 오솔길을 따라 하나님의 산을 오르자
- 자연목회를 위한 신학의 가능성 -

이영재 목사(본원 연구실장)

들어가는 말
신자유주의 세계 경제체제가 온 지구를 휩쓸고 있다. 국가 단위로 움직이던 자본이 이제는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서 자유롭게 운동하고 있다. 시장의 자유를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신봉하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시장에서 벌어지는 악한 일들을 방지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낳는 폐혜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안체제를 마련하기에 급급하다.
장윤재 교수는 세계 규모의 시장운동에 대항하는 길은 지역 규모의 시장을 활성화하는 길 뿐이라고 분석하였다. 지역 시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도시의 사람들이 농촌으로 귀농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본다. 사람들은 돈이 있는 곳으로 쏠리고 돈은 도시에 몰리기 때문에 많은 수효의 사람들이 농촌으로 귀농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돈과 무관하게 살면서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종교인들만이 오롯이 농촌에서 자연을 지켜내면서 살아 갈 수 있다고 그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로써 그는 기독교의 사회운동을 위한 미래의 정책으로서 귀농운동을 제일감으로 꼽고 있다고 평가된다.

1. 농촌생활 이야기
며칠 전에 전라도 장성에 사시는 남상도 목사를 방문했다. 그곳 농촌교회에서 25년 동안 시무하시면서 한마음공동체를 짓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교회를 중심으로 유기농 농사를 지어 ‘한마음’이란 상표로 광주시민들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대기업농들이 광주시내의 시장을 넘보았지만 한마음공동체가 지역아파트 단지의 길목을 지키는 전술로 대기업의 공세를 방어하였다고 하였다. 작업장과 출하장에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작업하고 있는 모습에서 한국 농촌교회의 희망찬 미래를 내다 볼 수 있었다.
그는 새벽 다섯 시에 기침한다. 고전음악을 들으면서 한 시간 동안 아침명상과 아침운동을 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한다. 이 운동을 빼먹은 날은 하루의 노동이 힘겹게 느껴지지만, 아침 명상과 운동으로 시작한 날은 꽤 힘겨운 작업도 거뜬히 해낸다고 했다.
그는 요즈음 폐교된 시골 초등학교를 인수하여 그곳에 황토집 군락을 짓고 황토집 짓는 기술을 배우려는 학생들과 더불어 생활한다. 최근에 WCC는 신자유주의 세계경제 질서에 대항할 그리스도교의 대안의 한 사례로서 한마음공동체에 주목하였다. 오는 5월말 경에 이곳에서 전 세계에서 신앙의 동지들이 모여 신자유주의 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기고 기도하기로 했다고 한다.
처음에 그는 공동생산을 통해서 마을주민들의 경제적 자립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그 전망은 밝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남목사님은 농촌경제운동에서 농촌문화운동으로 운동의 방향을 선회하였다. 도시민의 귀농은 농촌에 문화가 없기 때문에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가장 중요한 문화는 의식주의 문화이다. 농촌의 밥상은 도시의 밥상에 비견할 바 없이 신선하다. 그러나 주거환경이 도시에 비해서 열악하다. 도시의 아파트가 주지 못하는 농촌만의 쾌적한 느낌을 주는 건강한 집을 짓기로 했다. 그래서 온돌을 놓은 황토집을 짓기 시작했다. 온돌황토집 짓기를 여러 해 거듭하는 동안 남목사님은 이제 황토집 짓기에 고수가 되었다. 건강에 좋은 황토집에 살게 되면 귀농자들이 다시 도시로 되돌아가는 일은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도시의 열악한 주거문화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여태권 목사님은 전주시 인근에 위치한 율곡이란 마을의 교회에서 30년 가까이 시무하신 분이다. 그는 얼마 전 기사연에서 주최한 포럼에 강사로 나와 이렇게 말머리를 엮어냈다. 그는 ‘지역에서 쓴 감투가 많아서 외부로 잘 못 나옵니다.’ 한 교회에서 오래 목회하는 여목사님을 보고 마을사람들은 ‘우리 목사님은 어디 다른 교회에 못 강께 그냥 눌러 있는가 보다’라고들 수군거렸다고 했다. 지금은 마을아이들이 ‘우리 목사님은 이웃집 아저씨 같다. 할아버지 같다’고 깔깔거린단다.
그는 ‘기독교 공동체? 우리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라면서 율곡마을 공동체에 대해서 말문을 열었다. ‘일하는 사람, 연구하는 사람은 살아남는다. 혼자는 하지 말라. WTO 때도 버텼고 FTA에도 버틸 것이다. 대결하려면 마을이 똘똘 뭉쳐야 한다. 살기 위해서는 끝없이 뭉쳐야한다’는 신념을 강조했다. ‘어떻게 하면 농촌을 떠나지 않고 농촌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 풀, 나무, 흙과 같은 생명을 모르고서 무슨 학문이 필요할까? 도시는 정신의 황폐구역이다. 반대로 농민에게는 돈이 없고 궁핍하니까 생명을 보지 못한다. 도시에는 생명이 없고 농촌에는 돈이 없다. 그러니까 도농은 격리되어서는 살 수 없다. 도농이 하나의 단위로 엮이어야 서로 살 수 있다’고 하면서 도시와 농촌의 상생론을 내놓았다.
농민의 자녀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신단다. ‘대기업의 머슴놈이 되느니 시골에서 사장하자’라고. 그는 ‘이렇게 가르치면 순진한 촌놈들이라 청년들이 도시로 안 빠져 나간다’고 대견해 했다. 그래서 율곡마을에는 젊은이들도 꽤 있다고 했다.
최성현이란 분도 있다. 그는 박달재 ‘바보 이반 농장’에 살고 있다. 지난 해 8월에 ‘산에서 살다’라는 아주 예쁜 책에 산속 생활을 담아 세상에 내놓았다. 20년 전 처음에 그는 한원익 선생님이란 분과 함께 박달재에서 공동으로 자연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는 한선생님에게서 여러 가지 자연생활에 필요한 영성을 배웠다.
한선생님이란 분은 지금 전남 승주 문유산 자락에서 자연생활을 하고 계시는 분이다. 자연이 숨을 쉬는 봄이 오면 그는 맨발로 농사를 짓는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맨 몸으로 흙을 일구면서 살아간다. 전기도 쓰지 않고 전화도 없다. 물론 TV도 없다. 비료도 쓰지 않고 자연농법으로 먹을 만큼만 농사를 짓는다. 그는 이현주목사님을 존경한다고 했다. 언젠가 그는 서울로 불초 소생을 찾아와 자신이 직접 참나무를 구워서 만든 숯가루 한 봉지를 주고 가신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이빨을 치료하러 치과병원을 들렀다가 귀가하는 중이었다. 한선생님은 거실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치과에 다녀왔다고 하자 그는 혀를 끌끌 찼다.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가 이빨하나 홀로 치료하지 못하고 치과신세를 지다니 하면서 나를 비롯한 도시의 목회자들이 무능한 것을 질책하였다. 예수님이라면 치통쯤은 금방 고쳐주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서 하루에 여러 차례 잇몸을 문질러주는 생활습관을 익혔다. 그 후로 유학생활을 하는 중에도 치통이 올 때마다 병원을 찾지 않고 손가락 하나로 치료하곤 했다. 어쩌다 치통이 찾아올라치면 잇몸을 수백차례 문질러서 피를 터뜨렸다. 치통은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다.
이들 말고도 농촌에서 자연생활을 하며 지내는 지인들이 많이 있다. 이들에게서 공통된 점은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주류의 물질문명세계를 벗어나 자연과 합일되는 기쁨을 누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삼라만상을 지어내시고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을 일상에서 만나고 대화하는 높은 경지를 보여 준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자연생활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상을 농촌목회자가 누릴 수 있다면 농촌목회의 현장이 바로 수행의 터전이 될 것이다.

2. 성경이야기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일관되게 도시생활을 경계하고 자연생활을 권장하고 있다. 도시생활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늘 경계한다. 아브람이 이집트 수도로 들어갔을 때 아내를 파라오에게 빼앗겼다. 아브람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생존전략을 구사했다는 대목은 제국의 도성에서 권력자가 어여쁜 아내를 빼앗고 그 남편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음을 암시한다(창12:13). 도시는 폭력의 진원지이다. 비록 파라오의 후궁으로 들어가 파라오의 수청을 드는 수모를 겪긴 했지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길에 힘입어 사래는 애굽의 수도를 탈출하는 일에 성공하였다. 사래는 별이 총총한 밤에 이슬을 담뿍 머금은 목초지를 떠돌면서 남편 아브라함과 더불어 일생을 함께 하였다. 그녀는 막벨라 동굴에 안장되기까지 시골생활을 영유하면서 도시로부터 오는 도전들을 잘 감당한 여성이었다.
애굽에서 얻은 재산 때문에 아브람의 일꾼들과 롯의 일꾼들 사이에 다툼이 잦았다. 아브람과 롯은 헤어져야 햇다. 아브람은 시골을 택하였지만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아브람은 들판에서 살았다. 천사들이 소돔과 고모라 도성을 심판하려고 갔을 때 롯은 도시의 성문 앞에 앉아 있었다. 성문 앞은 통상 재판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아마도 도시는 폭력에 넘치고 있었고 롯은 폭력에 당한 피해를 고소하였다가 패소를 당했을지도 모른다(창19:1). 방종한 욕망과 나그네에게 폭행을 일삼는 불의한 도시 소돔은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고 말았다. 성경의 이야기는 도시문명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위험한 문명임을 경고한다.
롯의 아내는 소돔성에 미련을 두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으로 변하고 말았다(창19:26). 도시의 문명은 편리함을 제공해 준다. 밀집한 곳에서 이웃들과 즐기는 향락도 발달해 있다. 또 물산도 풍부하게 거래되어 시장이 크고 여러 가지 즐거운 물건들이 즐비하다. 롯의 아내는 그러한 도시 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듯하다. 시골목회자가 농촌을 평생 지키기에는 많은 장애가 있다. 가장 큰 장애는 사모님을 시골에서 행복하게 해 드리기가 무척이나 힘들다는 점이다. 더구나 커가는 아이들의 교육이 가장 큰 난제다. 만약 사모님께서 도시출신의 여성이라면 시골에 정주하는 과제는 더욱 힘겨워진다. 시골목회자는 아내와 함께 따스한 봄볕 아래서 애기 속살 같은 눈을 틔우는 새싹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아내를 그렇게 안내하려면 아내를 위한 사랑의 정열에 활활 불타고 있어야 한다. 아내에게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아내가 시골생활에 재미를 낼 수 있다(창26:8).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를 통과해야 했다. 그곳은 전갈과 불뱀이 우글거리는 물도 없는 사막이었다. 이곳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훈련을 받았다. 훈련받은 광야의 백성은 길을 가로막는 도성의 왕들을 차례차례 무찔렀으며 여호수아의 지도로 약속의 땅에 살던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위시한 가나안 성읍의 왕들을 모두 무찔렀다(민20~24장; 수6~12장). 하나님께서 교만한 도시의 권세자들을 내치시는 장면이다.

3. 산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
1970~80년 서울의 삭막한 생활에서 최성현씨는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을 늘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는 정신문화원에서 연구하다가 후쿠오카 마사노부의 자연농법에 접하고 야마오 센세이의 삶에서 배웠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그는 1988년에 박달재로 이사하였다. 산 입구에 ‘바보 이반 농장’이란 작은 문패를 걸고 산에서 자연생활을 시작하였다. 자기가 먹을 만큼만 생산할 농토를 마련하였다. 하루의 반은 농사를 짓고 나머지 반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면서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산에서 살고 있다.
최근에 ‘산에서 살다’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농촌목회자에게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다. 나날이 핍절해 가는 농촌의 현실에서 목회에 힘쓰는 우리의 농촌목회자들이 신학할 길을 보여준다. 마을에서 생산공동체를 일구어 경제투쟁에 힘써 성공한 농민목회자들이 있다. 경제자립에 성공했다하더라도 목회자는 마을 사람들의 욕심과 싸워야 한다. 돈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는 한 다툼은 끊임없다.
마을 공동체의 경제공동체를 이끌어 내지 못한 농촌목회자들이 대다수다. 이들은 앞날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짓눌려 실의에 빠져 있다. 내가 사랑하는 선배 목사님 한 분은 노인 교인들만 20~30명이 채 안되는 시골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그는 사례비 월 30만원과 교단에서 지급하는 얼마간의 생활보조금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실정은 비단 그 선배뿐만 아니라 한국의 방방골골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농촌교회의 목회자들이 겪고 있는 뼈아픈 실정이다. 이런 실정에서 ‘산에서 살다’란 책은 농촌목회자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다.
최성현씨는 벌레와 풀을 벗 삼아 자급할 정도의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고 있다.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는 뽕나무 밭에서 딴 오디로 발효음료를 만들어 시장에 내기도 한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음은 물론, 땅을 갈거나 땅을 벌거숭이로 만드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산에서 살면서 늘 식물과 벌레와 새들 등 여타 생물들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 사전을 놓고 자연공부를 한다(창2:19). 절로 생긴 미나리 밭에 거머리와 미꾸라지와 야생 달팽이와 소금쟁이 등 수많은 수생동물이 산다. 밥상에는 늘 야생초가 푸짐하게 올라온다. 그가 사는 곳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까막딱따구리나 솔부엉이 같은 새들도 산다. 그는 자신이 사는 산골에 다양한 동물과 식물들이 살러 오는 것을 무엇보다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모든 목숨 가진 것의 바탕인 공기와 물과 땅과 숲을 지키기 위한 자신의 고민과 실천, 거기서 얻는 보람과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창1:28). 한 포기 풀을 존경하고 벌레 한 마리에게서도 배우는 삶을 통해 삼라만상이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한 귀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이러한 피조성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고 일관되게 예언의 말씀을 설하고 있다.
최성현은 육체노동을 하는 가운데서 경전을 읽는다. 동양의 경전들을 공부하면서 그는 자연생활을 위한 원동력과 통찰을 얻는다. 그는 자연에게서 삶의 계율을 배우고 경전을 통해서 영원에 잇닿는 계율을 실천한다. 자연이 주는 조촐한 밥상에서 한없이 풍성한 영혼의 결실을 먹는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처럼 그는 하늘에 있는 곳간에 추수한 것들을 들인다(눅10:2; 막6:25~32).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보면서 그곳으로 영혼이 돌아갈 것을 깨닫는다(신34:6; 막16:6). 풍장의 옛 관습을 전해 들으면서 자신의 몸을 땅에 되돌려주는 방법을 연구한다(창2:7).
그는 톨스토이와 최시형의 가르침에 공감한다. 사람이 곧 하나님(한울님)이라는 진리를 산으로 이따금 찾아오는 방문객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체득한다. 그는 현대 문명에 찌든 방문객들을 언제라도 아무 조건 없이 영접한다. 나그네들의 외관을 대하면서 그는 늘 하나님을 만나기를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여러 차례 거듭 실패하는 가운데 오히려 그는 자신의 혜안이 부족함을 탓하고 반성한다(마7:1~5). 그러한 실패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은 보통 사람으로 다가 오신다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확신한다. ‘그런데도 막상 닥치면 겉밖에 안 보인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이 다인 줄 안다. 거기에 사로잡혀 행동한다.’
‘산마을 이웃들’이란 표제의 글에 최성현은 여러 가지 깨달음을 담는다. 기어 다닌다고만 알았던 쌀바구미가 실상은 날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절대로 날지 못하는 척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쌀바구미에게서 지극한 겸허를 본다(민12:3). 쌀바구미를 제거하기 위해 양파를 쌀자루에 넣어 두는 등 별별 수단을 다 강구한다. 그래도 쌀바구미가 사라지지 않자 그는 체념한다. ‘사람도 쌀을 좋아하고, 쌀바구미도 쌀을 좋아한다.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쌀을 나눠 먹으며 같이 살 수밖에 없다. 어깨 위를 기어 다니던 쌀바구미를 조심스럽게 집어 멀리 놓아주고 불을 껐다.’
산을 찾아 온 한 친구에게서 ‘사람이 돌보다 못하다’는 법어를 듣는다. 사람들이 대화하면서 남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 얘기만 늘어놓는 것을 반성한다(막4:9; 사6:9~10). ‘듣는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들을 때 더욱 많은 것을 깨우칠 수 있고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건만 우리는 자꾸 제 말만을 하려고 한다.’ 성서도 듣는 것을 강조한다. ‘들으라, 이스라엘!’이란 신명기의 외침은 이를 단적으로 대변한다(신6:4).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다듬을 것을 성서는 권한다(왕상19:12).
깊은 가을 어느 날 그는 청설모가 밤을 까서 먹으려다가 나무 밑으로 떨어뜨린 밤을 주워 먹는다. 그는 청설모가 밤을 까서 자기에게 던져 주었다고 느낀다. 뿐만 아니라 집 안에 사는 쥐가 농작물을 갉아 먹는 것을 막지 못하고 마침내 쥐와 함께 공생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다. 이와 같이 쌀바구미와 산을 찾는 친구와 청설모와 쥐 등을 삶에서 만나면서 그들을 ‘산마을 이웃들’로 여기어 살갑게 받아들인다.
‘산에서 함께 사는 친구들’이란 장에서 그는 왕소등에에게 물려서 얻은 깨달음을 읊조린다. ‘그쯤하고 그만 해줘. 왕소등에 아줌마!’ 그는 알을 낳을 즈음의 암컷이 피를 빨기 때문에 왕소등에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이다. 피를 흘리면서 그 피를 ‘산에서 바치는 세금’이라고 여긴다(레16:14~15). 밭을 갈다가 노랑턱멧세를 보고 먹이를 얻기 위해 힘겹게 애쓰는 인간의 모습을 한탄하지만 이내 뽕나무에서 한 웅큼 오디를 따 들고 깨닫는다. ‘저 사람이나 이 사람이나,/ 어떤 사람이나, 가슴 안을 보면, / 얼마나 멋지게 빛나고 있나. / 얼마나 멋진 노래를 하고 있나.’ 진박새가 집짓는 행태를 관찰하면서 그 작은 새에게 절을 올린다. 또 어느 날 집 안에 말벌이 집을 지은 것을 발견하고 말벌과 함께 사는 생활을 시작한다. 말벌과 문에서 맞닥들여 이마에 한 방 쏘인다. 그는 비닐로 통로를 만들어 말벌이 집문을 통하지 않고 드나들 수 있도록 통로를 만들어 준다. 그리고 부득이 통로를 만들게 된 점을 변명하여 비닐 한 면에 이런 글을 썼다.
‘말벌님에게. 평화롭게 살기 위한 조치입니다. 같은 문을 쓰다 보니 서로 부딪치는 등 그동안 서로 어려운 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쏘이기도 했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창문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말벌님의 삶을 존경합니다.’
최성현은 톨스토이의 ‘바보이반’을 사랑한다. 그는 ‘바보이반의 나라’라는 표제어로 자신의 수상집의 마지막 장을 장식한다. 어떤 나라를 동경하는 것일까? 이반 나라의 주민은 도깨비와 늘 대결한다. 도깨비는 ‘당신들은 바보다.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걸 당신들은 모른단 말인가?’라고 질문한다. 주민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세금이니 지불이니 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돈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겠어요?’라고 대답한다. 이웃나라 군사들이 쳐들어 와서 집에 불을 지르고 가축을 죽이고 했을 때, 그들은 있는 대로 탈탈 털어 다 내주었고 어느 한 사람 자신을 지키려고 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거 보세요. 당신네 나라에서 살기 어렵거든 모두 여기와 사세요. 그리고 다 내어 드릴테니 제발 사람이든 가축이든 죽이지 마세요.’ 최성현은 ‘나 또한 그 나라의 주민이 되고 싶다’고 중얼거린다. 잠언17:8과 같은 금언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가 될 수 있다.
최성현의 이 모든 자연생활 단상들은 성서의 말씀을 그대로 되뇌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성서가 노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꿈이 최성현의 꿈과 다르지 않다. 성서가 증언하는 야훼 하나님은 최성현이 자연에서 만나는 한울님으로 다가간다. 동학에서 배우고 불경에서 배우고 자연에서 배우면서 최성현은 성서의 삶을 묵묵히 살아간다.

4. 성경을 통해서 보는 자연생활
이러한 상황에서 성서와 더불어 읽을 만한 아름다운 책을 하나 서점에서 찾아냈다. 야마오 센세이가 쓴 ‘어제를 향해 걷다’란 책이다. 이 책을 성서를 명상하는 가운데 함께 읽어 보기로 한다.
야마오 센세이는 얼마 전에 작고하였다. 그는 와세다 대학 철학과를 3학년에 중퇴하고 1960년대 후반부터 ‘부족’이란 이름으로 대안 문화공동체 운동을 시작한 사람이다. 그는 국가라는 통치기구를 벗어난 삶을 모색하였다. 성경에도 왕국에 대한 대안 체제로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역사가 나타나 있다. 이 점에서 야마오는 하나님의 부름에 따라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야마오는 땅에서 태어나고 땅 위에 아무 것도 세우지 않고, 다만 땅과 함께 살고, 땅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노렸다. 오전은 기도와 명상에 집중하고, 오후에는 산책을 하거나 독서를 하면서 그는 일 년간 온 가족을 데리고 인도를 순례하기도 했다. 1975년부터는 도쿄 도심에 3층짜리 건물을 임대하여 1층에는 유기농산물 가게, 2층에는 유기농 식당, 3층에는 책방을 열어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드는 일을 했다. 서른아홉이 되던 1977년에 도쿄를 떠나 ‘야쿠’라는 먼 섬의 한 폐촌으로 들어갔다. 중앙이 아니라 지역에서 세상을 지키려기 위해서 였다. 그곳에서 애니미즘을 바탕으로 한 전통종교의 맥을 이었다. 그는 ‘손수 농사지어 먹는다’, ‘되도록 기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도와 명상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는다’, ‘집중한다’, 등 스스로 세운 삶의 원칙을 지키며 살았다. 2002년에 그는 야쿠섬에서 죽었다.
그는 자신의 생활을 ‘자연생활’이라고 정의하였다. 자연생활을 하는 일상에서 그는 하나님을 늘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신에 대한 일상의 체험에서 야마오가 깨달은 세계관은 ‘본래 고향’이라는 깨달음이다. ‘본래 고향’이란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사는 세상이다. 예수님께서 설파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내용을 보는 듯하다. 농촌목회자가 풀과 나무와 벌레와 새의 이름을 배우면서 작은 공동체를 말씀으로 인도한다면 그것이 곧 ‘자연목회’라고 할 것이다.
강과 산과 들과 바다, 그 안에 사는 모든 생명과 물체에서 그는 신을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신학에 관한 논쟁에 빠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모세의 모습이 떠오른다(출33:7-11). 목회자에게 농촌의 자연에서 하나님을 늘 만나고 체험하는 삶이 이어진다면 아무리 어려운 경제생활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야마오의 체험을 기독인들은 일종의 정령숭배나 우상숭배라고 비난할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시며 삼위일체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연현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짓은 잘못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신관은 콘스탄틴 기독교 이후 서구에서 이루어진 신학의 결과물이다. 성서 자신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신(루악흐)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ㅎ). 이 말씀에서 ‘루악흐’는 우주에 편만한 ‘기’를 가리킨다. 우리말 성경에서 ‘루악흐’와 그에 해당하는 ‘프뉴마’를 ‘영/성령’이라고 번역했다. 최근에 민영진 박사는 ‘영/성령’이란 번역어가 일본성경의 영향을 받은 번역이라고 지적하였다. 우리말에는 ‘기’라는 개념이 ‘루악흐/프뉴마’에 더 가깝다. 태초에 하나님의 ‘기’가 있어 삼라만상에 깃든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니 말씀의 ‘기’가 작동하여 세계를 존재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 속에는 하나님의 ‘기’가 운행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기’를 땅에 바람으로 불게 하시니 물이 줄어들었다(창8:1). 애굽에서 야훼께서 일으키신 열 가지 재앙도 기의 역사이다. 주께서 동편에서 ‘기’를 일으키시니 메뚜기 재앙이 일어났다(출10:13, 19). 홍해바다를 가르신 것도 야훼의 힘찬 ‘기’였다(출14:21; 15:8).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기’를 채워주신다(출28:3; 31:3; 35:21, 31). 모쉐에게 주신 것도 이 ‘기’이며 칠십인 장로에게 분여해 주신 것도 이 ‘기’다(민11:17, 25, 26, 29). 하나님에게서 ‘기’가 나와 운행하니 바다 쪽에서 메추라기떼가 날아와 이스라엘 진영 사방에 두 규빗이나 쌓였다(민11:31). 코라의 반역 사건에서 모쉐와 아하론이 백성을 위해 중재기도를 할 때 ‘모든 육에게 기를 주시는 하나님 엘이시여!’라고 기도했다(민16:22). 하나님께서 모쉐에게 명하여 여호수아에게 지도력을 위임할 때도 동일한 신명을 불러 기도했다(민27:16). 이 때 여호수아 안에는 하나님의 ‘기’가 충만하였다(민27:18). 발람이 보니 이스라엘의 진영에 야훼의 ‘기’가 충만하였다(민24:2). 이 하나님의 ‘기/루악흐’는 천지에 가득하며 온 땅은 주의 것이다(출19:5). ‘기’는 하나님의 주권을 수행하는 힘 또는 에너지이다.
야마오는 자연의 구석구석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기’를 몸으로 감지하며 기도와 예배를 그치지 않았다. 만물에 깃든 정령들의 화답을 받으며 즐거운 생활을 하였다. 7000년이나 묵은 오랜 ‘삼나무’를 때때로 찾아가서 그 앞에서 제례를 올리곤 했다. 이러한 예배 행위 속에 야쿠섬의 전통이 보존되고 자연을 파괴하는 일체의 문명과 종교가 극복되었다. 그의 염원에 정령들이 응답을 한다. 이것을 성경이 금하는 우상숭배라고 비난할 수 없다. 성서가 금하는 우상은 본디 가나안 도시(국가)의 문화와 종교의 상징물이다. 제국의 정복과 경쟁과 영웅숭배를 금지하는 반제가 곧 우상금지령의 본뜻이다. 가톨릭교회가 조상제례를 문화로 간주하고 허용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형식에 논점을 두지 않고 효도라는 정신에 본질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개신교도 우상숭배금지의 사상을 성경의 본뜻에 따라 재해석해야 할 즈음에 이르렀다. 서구의 문화와 신학 속에 갇혀 있던 성경을 우리의 눈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 이제 자연에서 생활하는 목회자들이 저마다 자기 땅에서 자기 눈으로 성경을 자유롭게 읽고 해석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제국의 이데올로기는 강자를 흠숭하고 영웅에게 상을 베푼다. 영웅은 마땅히 관직을 받고 남을 통치하며 고대광실에서 산다. 그러나 야마오의 마음은 그 반대의 길로 향한다. ‘생명을 아는 자는 모두 약자이다’라거나 ‘작은 집이 좋다’라는 식으로 깨우침을 고백한다(신8:12). 생명을 아는 약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한다. 여기에는 누가 높으냐는 의식이 전혀 없고 지극히 낮음의 길만이 추구된다(민12:3). 이 약자가 강자에 대항해서 싸우는 길은 오직 야훼의 권능에 의지하는 길뿐이다. 이것이 성서의 거룩한 전쟁 사상이며 임마누엘 신앙이다. 세상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늘 승리한다.
그래서 농촌교회를 지키는 목사님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말씀을 통해서 자연을 만나고 자연을 통해서 말씀을 체득하는 수행이다. 자연목회를 하는 가운데 체득한 깨달음으로 우리의 신학을 세워나가는 일은 미래의 세계를 위해서 너무나 절실하다. 농촌에 있는 설교자들이여! 생명이 고갈되어 가는 도시의 목회자 동지들에게 신선한 생명을 퍼담아 선물해 줄 수 있는 농촌교회의 자연목회자들로 성장해 나가자.
우리나라에는 방방곡곡에 교회가 예쁘게 서있다. 아무리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도 시골마다 조그만 교회들이 동네와 어울려 서있다. 도시들에도 교회들이 빼곡하니 들어서 있다. 밤에 높은 데서 서울을 보면 빨간 십자가들이 야경을 장식한다. 우리나라가 도시 중심으로 발전하다보니 시골에 살던 사람들이 대부분 도시로 이주하였다. 그 바람에 농촌교회들에 성도들이 급격히 줄었다.
농촌교회에 시무하는 목사님들도 덩달아 힘겨워졌다. 심지어 문을 닫는 시골교회도 생긴다. 농촌교회 목사님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고 도시에 비해서 박탈감이 크다. 사모님들도 문화와 교육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시골목회에서 소외감에 시달린다. 도시교회들이 시골교회를 지원한다 하여도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온전한 대책은 못된다.

5. 스코트 니어링과 피에르 라비의 조화로운 삶
스코트 니어링은 경제학자로서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도시를 벗어나 버몬트의 시골로 이주하였다. 한 퇴락한 농가를 매입하여 아내 헤렌과 함께 평생 자연생활을 누렸다. 스무 해 동안의 자연생활을 그는 열 가지로 간추려 정리하였다.
1. 황무지를 개간해서 기름진 밭으로 가꾸어 채소, 과일, 꽃을 생산하였다.
2.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퇴비로만 농사하였다.
3. 의식주를 손수 해결하여 노동시장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미국 경제의 불황에서 자유롭게 살았다.
4. 작은 사업을 시작하여 임금이 나올 만큼 제법 훌륭하게 꾸렸다.
5. 병원을 찾는 일은 전혀 없었다.
6. 도시의 복잡한 삶 대신에 매우 단순한 삶의 양식에 자리 잡았다.
7. 노동기간을 6개월로 줄이고 나머지 6개월은 연구, 여행, 글쓰기, 대화, 가르치기, 등으로 소일하였다
8. 언제나 문을 열어 두어 방문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스코트 부부는 ‘돈을 벌거나’ ‘부자가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일체 버렸다. 반대로 자연과 일치하는 삶을 추구하면서 참된 자유를 발견하고 넉넉한 삶을 향유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도시중심으로 돌아가는 제국주의 시장 논리에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마침내 그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프랑스에서 사는 피에르 라비도 도시생활을 버리고 시골의 삶을 택하여 한뙈기 밭을 일구며 우주와 생명의 리듬에 따라 살았다. 그는 풍요에서 가난을 선택하였다. 죽은 땅을 되살리고 소박한 삶을 살면서 물질주의에 따라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현대의 도시문명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역설한다. ‘인간은 자유와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고요와 침묵을 음미하면, 원하는 대로 살 권리가 있다. 또한 지도자들의 크고 작은 횡포에 저항하고, 자연과 계절과 조화를 이루며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가 바라는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그것들 중 대부분은 힘들게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다. 그 힘든 노력은 몇 년간 계속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우리를 힘의 한계까지 데리고 간다. ... 도시를 떠난 그는 생산 제일주의의 강박 관념에 등을 돌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농촌에서 그 강박 관념을 다시 보게 되었다. 농부로서 그는 대지를 황폐하게 만들고 인류에 피해를 입히는 생산 제일주의의 논리에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 대지, 물, 식물, 동물 같은 지속적이며 재생할 수 있는 자원의 자율적인 운영 원칙으로써 ‘생명 농업’에 의지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아메리카의 여러 원주민들이 가르쳐 준 것처럼 대기자 우리와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의식적이고 영적인 혁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자연을 산업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땅을 섬기는 농부의 자리로 인식하였다. 환경을 파괴하는 물질주의 산업문명에 대항하여 그는 2001년에 녹색당의 대표로 대통령에 출마하여 환경 캠페인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6. 자연목회에서 말씀 깨우치기
성경에서는 ‘광야의 길’을 백성이 거쳐야할 성화의 과정으로 제시한다.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에게 오랜 세월의 광야유랑기가 주어진다. ‘슈르광야’(출15:22), ‘신광야’(출16:1), ‘르피딤광야’(출17:1; 19:2), ‘시내광야’(출19:1), ‘파란광야’(민10:12; 12:16), ‘친광야’(민20:1)를 거쳐서 마침내 모압평원(민22:1, 아르봇 모압)에 이른다. 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생명공동체로 부름을 받고 거룩한 백성으로 성장해 나가도록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음식이 없을 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고 물이 없을 때 바위에서 생수가 터졌다. 아말렉 같은 강자의 탄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치기도 했다. 하나님의 얼굴을 친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신5:4). 편협한 인종주의와 편협한 민족주의를 벗어날 식견을 광야에서 배양할 수 있었다(출18:1-12; 민12:1-16). 야마오처럼 자기의 땅에서 자기의 땀으로 농사한 것을 자기 밥상에 올리는 자연생활이 광야에서 이어졌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목회자의 일상이 깨달음 속에서 이어진다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 더욱 피폐해질 농촌에 신바람이 일 것이다.
자연의 삶에는 반드시 수많은 장애와 시험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시험은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가장 먼저 온다. 아내가 그러한 광야의 생활에 적응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야마오의 경우는 유별나다. 그의 아내는 죽기까지 한 번도 외딴 섬에서 사는 일에 실망을 표한 적이 없었다. 저녁 식사 후에 야마오는 늘 부인과 화로 사이에 두고 정담을 나누곤 했다. 그녀가 죽었을 때 야마오는 거의 중심의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무너지는 자신을 부여안았다. 야마오의 아내는 그처럼 야마오의 자연생활을 지탱해주는 정신적 지주였다. 그러한 아내의 시신을 화장하여 야마오는 그녀의 뼈를 먹어 아내와 하나가 되려고 했다. 부부묘를 만들어 아내를 안장한 다음 야마오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보았다.
농촌에서 목회자가 자연생활을 지향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가운데 아내와의 합일하는 체험을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농촌목회를 지원하는 젊은 목회자가 있다면 그는 자연생활을 알고 함께 할 수 있는 여자랑 결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농촌목회를 지원하는 젊은 여성목회자가 있다면 그 또한 마찬가지로 자연생활을 알고 있는 남성과 결혼해야 자연목회가 가능할 것이다. 이 점은 자연목회를 먼저 시작한 선배들이 자상하게 미리 일러 주면 좋을 것이다.
농촌목회자에게 가장 걸리는 문제는 자녀교육의 문제이다. 야마오는 자녀들을 야쿠섬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도록 지도하였다. 청소년 시절에 자연이 무엇인지를 체득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식들의 삶’에 대해서 철저히 생각하고 이런 결정을 내리면서 ‘시골 아이로 자라 가는 자식을 보는 기쁨’을 느낀다. 나중에 섬을 떠나 살다가 잠시 돌아온 ‘아들과 함께 한 밤낚시’에서 가족의 진정한 미래를 연다. 현대의 교육은 국가를 위한 엘리트 양성에 그 목적을 둔다. 그 국가란 괴물이 핵무기를 짓고 전쟁을 준비하며 경쟁을 위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다. 도시문명을 일구어 그 속에서 자연을 망가뜨리는 작은 괴물들을 배양하고 있다. 엘리트를 양성하여 각종 첨단 산업의 전위로 고용하고 각종 고시로 공무원을 등용하며 국민들로 하여금 돈을 버는 일에만 열중하도록 몰아가고 있다. 생명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러한 현대의 국가교육체제와 결별을 선언할 수밖에 없게 된다. 시골에서 자녀들이 부모와 자연생활을 나누면서 함께 기도하면서 함께 성서를 읽고 한 교회를 섬기면서, 그리고 지역의 자연공동체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지역공동체에서 스스로를 위한 학교를 만드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디아스포라 공동체들이 저마다 토라학교를 열고 어린 자녀들을 스스로 가르쳤던 역사를 생각해 보자.
야마오는 자연생활을 통해 공동체의 두레생활로 나아간다. 그는 야쿠섬의 주민들 뿐 아니라 인근에 있는 오끼나와와 같은 섬들의 주민들과 교분을 나눈다. 집을 지을 때 ‘함께 짓는 집’에서 두레의 기쁨을 증언한다. 명절 때 민속놀이 ‘줄다리기’에서 깊은 영성을 자각한다. 이런저런 전통들을 이어가면서 지역을 지키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에 전념을 다하였다.
야마오의 광야생활에는 현대의 진보사관을 물리치는 남다른 생명사관이 있었다. 그는 시간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어제를 향해 걷다’란 표제에서 인류가 오히려 원시의 시대로 되돌아가기를 제창한다. ‘진화하지 않아도 좋다’라거나 ‘미국을 쫓지 말라’는 표제의 글들을 통해서 소위 진보 내지는 진화라는 일체의 사유체계를 부정하였다. 모든 인간중심의 편리함을 거부하고 자연중심의 불편함을 기꺼이 선택하는 담백한 정신의 통찰을 실천한다.
창세기 1장의 외침, ‘생육하고 번성하라’란 축문은 이러한 자연을 잘 다스리는 자연생활의 인간들에게 선포된 복이다. ‘정복하라’(카바쉬). 시원의 땅에는 그 땅을 갈(또는 섬길, ‘아바드’) 사람이 없었기에 황폐하였다(창2:5). 하나님께서 황폐함을 극복하시려고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으로 하여금 그것을 경작하고(또는 섬기고, ‘아바드’) 지키게 하셨다(창2:15).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은 아담과 이브는 에덴에서 추방당한다. 땅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된다.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겨우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창3:17). 가인은 이 저주받은 땅을 섬기는(‘아바드’) 농사꾼이 되었다(창4:2, ‘농사하는 사람’). 선악을 알게 된 시원의 인간 가인은 자신의 곡식제물이 열납되지 않자 그것을 자기에게 나쁜 일인 줄 여겨서 화를 내고 동생 아벨을 죽인다. 문 앞에 엎드린 죄를 다스리지 못하여 살인죄를 저지른다(창4:7).
살인죄는 선악을 판별하는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은 죽음의 운명을 감당해야 했다. 하나님은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창2:9)로 가는 길을 차단하였다. 두 그룹과 화염검으로 그 길을 지키게 한 것이다(창3:24). 이 저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풀린다. 하나님은 회막 한 가운데에 있는 법궤의 뚜껑위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작정하신다(출25:22). 법궤 안에는 말씀을 새긴 돌판이 있고 법궤의 뚜껑 위에는 두 그룹들이 있다. 말씀을 지키는 그룹들은 하나님의 현존으로 들어오는 인간에게 영생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준다. 말씀이 곧 참 생명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 곧 법궤의 뚜껑이시다(롬3:25, ‘휠라스테리오’ = ‘카포렛’). 그러므로 시원에서 저주받은 땅은 말씀을 중심으로 사는 공동체에서 에덴으로 회복되며 그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요1:1).
죄악이 넘치는 시대의 영웅들은 하나님을 적대하였다(창6:1-3). 하나님을 적대한 인간은 모두 진멸되었다(창6-9장). 하나님이 멀리 있는 줄 알고 하늘로만 치달리던 바벨의 문명은 무너졌다(창11장). 도시문명에서 폭행을 일삼던 소돔과 고모라와 스보임과 아드마의 무리들은 유황불에 타 죽고 말았다(창19장). 광야를 지나가는 이스라엘을 가로막던 열왕들, 곧 파라오와 아말렉왕과 아랏왕과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과 모압왕 발락은 모두 진멸당하였다(출7~15장; 민20~24장; 수1~12장). 생명운동을 가로막는 세력들은 이처럼 망하고 생명운동으로 나아가는 형제들은 생육하고 번성한다.
야마오는 자연 속에서 열린 생각으로 성서를 읽는다. ‘이끼와 성서’란 표제의 글을 쓰면서 그는 시42편의 아름다운 가락을 따라서 읊조린다. 우리의 농촌목회자들에게 먹을거리가 부족하다. 자연에서 먹을거리를 얻는 지혜를 찾아내고 자연의 생명에서 성서의 말씀을 찾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멸망으로 치닫는 현대 문명의 대안이다.
농촌이나 산으로 들어가 자연 속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살고 있는 동무들이 주변에 꽤나 있다. 이들에게서 자연목회를 위한 신학의 가능성이 보인다. 남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모든 왜곡된 제국의 사고체계를 교회로부터 몰아내기 위한 최전선에 농촌의 자연목회자가 서 있다. 한국교회에서 자연의 생명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부문이 있다면 그것은 농촌현장이다. 그런 면에서 농촌목회자들은 경제투쟁이나 정치투쟁으로 나서지 말았으면 좋겠다. 모든 정치투쟁은 국가권력의 획득을 전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치투쟁으로 국가권력을 손에 넣는다하더라도 제국문명의 대안을 일구어낼 수 없다. 오직 믿음으로써만 희망을 가꿀 수 있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 한국은 국민국가의 성립기를 맞아 바람직한 미래의 사회를 모색하고 있다. 온 국민이 참여하는 정부의 형태는 과거에 왕이 휘두르던 국가권력을 이제는 국민이란 이름으로 나누어 가진 형태이다. 하지만 권력을 나누어 가진 국민이 타락하면 우상숭배의 나라를 세워가려고 안달할 것이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과 같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 사회를 위한 대안으로서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도시를 탈출하는 사람들과 농촌의 궁핍을 일탈하는 사람들이 만나 이루는 말씀의 공동체이다.

나가는 말
서구교회가 국가의 권력을 늘 동반하였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자. 성경의 교회는 국가주의를 넘어서고 편협한 민족주의도 넘어서고 어떠한 이권관계의 소용돌이에서도 벗어나는 말씀의 공동체이다. 자연에서 약동하는 하나님의 ‘루악흐/기/성령’을 받는 것이 교회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을 벗삼아 자연을 섬기면서(‘아바드’) 살아가는 생명지킴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목회자를 지도자로 세우는 교회는 예수의 제자 동아리들이 이룬 공동체이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미래가 있다.
우리나라가 발전하여 이제는 세계열국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좋은 점도 있지만 신자유주의의 세계경제 체제를 주동해야 하는 불편함도 따른다. 이러한 물질운동으로부터 교회의 선교는 자유롭지 못하다. 부유함과 가난함의 양극화 속에서 교회도 양극화되고 있다. 잘사는 목사 모둠과 가난한 목사 모둠이 갈라지고 있다. 대형교회와 소형교회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도시교회와 시골교회가 대비된다.
남상도 목사와 여태권 목사와 최성현씨와 임원식씨와 야마오씨와 스코트 니어링와 피에르 라비는 ‘자기만의 길’을 발견하고 ‘아직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그 길에 길동무들이 있었고 그 길에 아무도 모르는 내밀한 기쁨이 있었다. 그들에게 소유의 강박관념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최성현과 임원식과 야마오와는 달리 여태권과 남상도에게는 마을 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남다른 고충이 따른다. 마을 공동체 성원 전체를 소유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은 어마어마한 고투를 요구하고 있다. 이 과제는 시장의 논리를 극복하는 과제와 마찬가지로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 난관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도농공동체의 첫 단추는 꿰어지지 않는다.
도농공동체를 준비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도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도 무관심할 수 없다. 도시의 문제들을 넘어서 목회하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도 이리저리 세심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근자에 나온 ‘세이비어교회’의 이야기나 서울 수유리에서 공동체를 일으키고 있는 최철호 목사의 이야기나 서울역 앞에서 참된 공동체를 일구기 위해서 고투하고 있는 조익표 목사의 이야기들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농촌공동체들과의 활발한 관계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도농공동체를 위한 신학사상이 마련되고 미래사회를 위한 청사진이 대충이나마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도서
성경전서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야마오 산세이, 최성현 옮김, 어제를 향해 걷다, 조화로운 삶, 2006.
장 피에르 카르티에, 길잡이 늑대 옮김, 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조화로운 삶, 2006.
최성현,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 도솔, 2003.
최성현, 산에서 살다, 조화로운 삶, 2006.
스코트 니어링, 류시화 옮김, 조화로운 삶, 보리, 2000.
스코트 니어링, 이수영 옮김, 그대로 갈 것인가 되돌아 갈 것인가, 보리, 2004.
스코트 니어링, 김라합 옮김, 희망, 보리, 2005.
존 살트마쉬, 김종락 옮김, 스코트 니어링 평전, 보리, 2004.
안혜령, 농부의 밥상, 소나무, 2007.
브라이언 피어스, 류해욱 옮김, 동행, 생활성서, 2006.
유성준, 세이비어교회, 평단, 2005.
유성준, 세이비어 교회: 실천편, 평단,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