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화해

독일의 “동방정책”과 한국 통일: 유사점과 차이점 및 교훈*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1-05-31 22:13
조회
1380
독일의 “동방정책”과 한국 통일: 유사점과 차이점 및 교훈*





한스 기스만
(함부르그대학교 평화안보연구소 IFSH)




* 이 논문은 2001년 5월 17일 "평화공존을 위한 대북 포용정책의 성과와 전망"이라는 주제로
인하대학교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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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전후 독일과 한국 간에는 일견 상당한 유사점들이 있다. 두 경우 모두 완고한 정치 체제와 이념이 다른 두 국가로의 분단이 야기되었으며 서로 다른 경제 체제방식을 도입하였다. 동독(독일 민주공화국, GDR)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북한(조선 민주 인민공화국, DPRK) 은 민주주의의 결여, 사상 주입 강요, 군사력에의 의존성 및 통제 경제 체제에 입각해 왔다. 동독과 북한 모두 사회주의 블록의 동맹국이었고 , 무대로 하는 지역은 달랐지만 소련의 위대한 세계적 전략(the Soviet Grand Global Strategy)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서독과 남한이라는 “자본주의 상대국”의 존재로 인해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두 나라 모두 정치적으로 중요성을 가지며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고유한 우월성(endemic superiority)”을 지님을 입증하는 방편이 되었다. 다른 소련 동맹국들과 비교해 볼 때, 동독과 북한은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와 민족 배경으로 인해 군사적, 경제적 직접 지원을 훨씬 더 많이 누렸다. 그렇기 때문에 소련 제국이 무너지고 체제의 안정을 가능케 한 외적 지원이 고갈되자 이 두 나라의 경제 및 사회 체제가 와해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독이 개별 국가로의 존재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현재의 북한은 건재하고 있다. 물론 독일을 방문한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1990년 이래 많은 남과 북의 대표단 들이 독일을 시찰하며 `독일의 경험'을 배우고자 했다 .

여러 가지 유사점들에도 불구하고, 통독이 한국에 있어서도 통일 모델이라고 하는 주장은 사실상 환상(“myth”)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의 경험으로부터 유용한 교훈을 끌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통독 전 기간과, 60년대 말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와 발터 쉴(Walter Scheel) 의 사회-자유 연합 하에서 추진된 소위 “동방정책(Ostpolitik)” 은 도움이 되는 교훈이 될 것이다.

1.독일의 신 “동방정책”(New “Ostpolitik”)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고 쿠바 미사일 위기가 정점에 이른 바로 직후에 , 당시 베를린 시장이던 빌리 브란트의 최측근이던 에곤 바르(Egon Bahr)는 1963 년 바바리아의 투찡(Tutzing) 시에서 한 연설을 통해, `국가(독일) 문제(national question)'에 대한 전후 서방의 정책을 심도 있게 변화시킬 것과 동구 국가들과의 협력을 촉구하였다. 1949년 이후 아데나워 수상과 집권 기독민주당의 정책은 주로 다음의 세가지 주요 목표를 특징으로 하였는데, 대서양(미-유럽간) 안보, (서)유럽 통합, (독일) 통일이 그것이었다. 아데나워는 단지 강경한 전략적 결단과 경제적 우위를 보여주게 되면 조만간 소련은 부실한 정치,사회,경제 체제로 되어있는 `골칫덩이' 동독을 떨쳐버리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 같은 희망은 1953년 6월 동독에서 발생한 노동자 봉기 이후 더욱 힘을 얻었다. 아데나워에게 있어 이 기간 중 가능성 있는 유일한 통일 방안은 합병이었다. 이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같은 기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베를린의 울브리히트(Ulbricht) 정권에도 일부 기인한다는 점이다. 동독의 울브리히트 정권은 적어도 1959년까지 물론 `독일의 사회주의화'라는 전제 하에 평화 통일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일 가능성에 대한 울브리히트의 긍정적인 발언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었을 것이고, 도리어 동독 내 여론을 달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50년대 말에는 상황이 다소 달라졌다.

소련은 서독의 군비강화를 피하기 위한 협상 수단으로 몇 차례 동독을 이용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하고 나서, 독일의 중립화에 입각한 통일 논의나 과도 단계로서의 연방(confederation)에 대한 일절의 논의를 일축하였다. 그 대신, 소련은 동독을 독일에 위치한 `사회주의적 군사 요새'라고 간주하기 시작하였다. 직접적으로 장벽을 세우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지만, 소련이 동독에 `좀 더 효과적인' 국경체제를 구축할 것을 촉구했으며, 독일인들이 서독으로 탈출하는 것을 막고, 동독 내 소련 기지 방첩을 위해, 그리고 주권 국가이나 소련에 의존하는 동독으로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제 소련과 동독 당국 모두 `평화 공존' 이념에 입각한 `2국가 이론'을 주창하게 되었다. 더욱이, 미·소간 관계 악화 후 독일과 특히 베를린은 소련의 유럽 교두보가 되었다. 서독이 동독을 `존재하지 않는' 국가, 정통성 없는 체제로 규정하는 방식을 계속하자, 소련은 더욱 비타협적이 되었다. 서독 정부는 그와 같은 자신의 입장을 우방들이 지지할 것으로 가정했으나 이는 착각이었고, 베를린 위기 동안 분명해진 사실은 서독의 동맹국들은 독일 통일을 위해 자국(미,영,불) 군인을 희생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다. 도리어 미국과 소련은 쿠바 위기 및 베를린 사태 동안 나타난 대립의 상호 파멸 잠재력을 인정하자, 핵심적인 상호 이해 영역을 규정하고 서로 더 긴밀히 협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독의 통일 주장은 소수 독일인들에게 외에는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베를린 주민 (에곤 바르)이 서독의 수많은 정치인들 보다 먼저 더 정확하게 소련이 동독을 자신의 대 서방 군사 경계선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이해했다는 것은 아마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이리하여 독일의 재통일은 더 이상 단순히 독일인들의 `국가 위업'이 아니라 전반적인 유럽의 안보문제가 된 것이었다. 소련의 지원이 없으면 통일은 단지 소망에 그칠 뿐임을 바르는 확실히 이해했으며, 동독을 소련의 마수에서 건져 내려는 일체의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있었다. 더욱이, 그러한 시도는 소련이 가혹한 대응을 취함으로써 동독의 고립을 더욱 심화시킬 수 도 있으니 동서독 양국 국민 간의 틈이 더욱 벌어질 수가 있었다. 또한, 대립 정책은 동독인들의 사회경제적 생활 환경과 인도적 차원의 환경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예측되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도 통일 가능성이 더 높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바르는 정치, 사회, 경제 원조를 향한 광범위한 협력 패턴을 도입하는 것이 소련과 동독이 서방세계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경향을 완화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바르의 유명한 “화해를 통한 변화(Change through Rapprochement)”는 간단하나 정곡을 찌른 사고에 기초한 것으로, 기존 상황을 인정하는 것은 협력의 건전한 기반을 조성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이 상황이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물론 1969년 브란트가 집권하게 되자, 이 개념을 이행하는 것은 줄타기를 하는 것과 다름없는 모험임이 판명되었다. 브란트 수상의 “新 동방정책”은 서독의 보수 여론으로부터 강력한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란트나 바르, 신 동방정책의 지지자들은 통일이란 궁극적인 목표를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목표에는 기본적인 차이가 없었고, 다만 달성 방법과 시간범위 상의 차이가 있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핵심 업적은, 한 전문가가 지적했듯이, “불가피한 것의 인정(acceptance of the inevitable)”에 있다. 그에 따르면, 서독은 “동독 인정을 묵인하였으며, 그 대가로 서 베를린의 서독과의 유대에 대한 계약상의 보장을 받았고 동서독간 통신과 여행의 제한된 기회를 얻어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서독이 국제적으로 새로운 재량권을 확보한 것이다. 즉, 소련과의 갈등이나 제 3국들에 의한 협박가능성을 피할 수 있었고, 심지어 통일 지지를 받기 위해 계속해서 서방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도 피할 수 있었다..”

한편, 대부분의 동독 지도자들은 `관계 정상화'로 자신들의 정권을 국제적으로 인정 받을 수 있기를 바랬다. 결국 제 2의 독일 국가라는 존재의 정당성을 제공한 것은 본질적으로 그 체제가 사회주의라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역시 많은 공산당 관리들은 동독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상에 물들기 시작하지 않을까 우려하였다. 즉, 사회주의 체제의 탈 정통성화(de-legitimization)가 서서히 진행되는 것을 걱정한 것이다.

그러나 동서독은 1960년대 말 정치 변화를 겪게 되었고 이는 양자 관계에 새로운 접근을 야기하였다. 서독의 사민당(SPD)이 집권하게 된 때는 동독의 울브리히트 당 서기의 사회주의로의 독일 통일이라는 비젼이 심각한 경제난으로 무너지기 시작할 때였다. 그의 후임 호네커는 독일 통일에 대한 생각을 버림으로써 소련 당국에서 환영받았다. 베를린 사태 이후 독일통일 논의는 소련에게 있어 상당한 의혹의 대상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한편 호네커는 국제 및 국내 문제에서 재량권을 확대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고 이 같은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좀 더 독립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새로운 당 지도부는 국민들에게 좀 더 많은 사회적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주의 체제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것에 특히 신경을 썼다. 하지만 처음부터 분명했던 것은 70년대에 시작된 수많은 `사회적 프로그램'에 자금을 공급하는 것은 동독 경제의 능력에 지나친 무리였다. 이 같은 문제에 직면하자 호네커는 1석2조를 해 낼 수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서독의 도움을 받아 경제 체제를 강화시키고, 이로써 정권의 정통성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동서독 양 정부에 의한 양국의 공식 상호 인정은 국제 관계에서 양 측에게 좀 더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독일이 유럽 안보를 해치는 “돌발행위(sonderweg)”를 모색하지 않을 것임을 동서방 동맹들에게 분명하게 알림으로써, 동서독 관계 개선을 통해 서구 통합과정과 소비에트 블록 내에서 양국 역할의 신뢰성에 대해 우려가 야기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기존의 현상유지를 공식 인정한 것이 동서독이 각각의 제도적 기구들 안에서 영향력을 강화시켰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독의 경우는 더욱더 외국의 경제 및 재정 지원에 의존적이 되었다.

2.“新 동방정책”이 끼친 영향과 결과는 무엇이었나?

우선 단기적으로,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간 관계 `정상화'는 유럽 내 안정된 협력의 틀이 발전하는데 기여하였으며, 이는 1975년 CSCE 설립과 MBFR, 나중에는 CFE등 일련의 다자간 협상 회의를 통해 공고히 되었다. 사실상, CSCE 설립과정을 가능케 한 것은 신 동방정책이었다. 더욱이, 독일을 둘러싼 긴장 완화는 미소 관계가 좀더 건설적으로 된 데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 미·소는 1972년 최초로 전략적 무기 수를 제한하는 협정과 ABM 협약을 체결하였다. 또 중요한 것으로는, 1970년 소련과 서독 간의 기본 조약은 쌍무관계 뿐만 아니라 -1971년 베를린 협정과 관련하여- 동서독 간 및 독일 내부 관계를 더욱 긴밀하게 하는데 상호 허용 가능한 틀을 제공하였다.

둘째로, 동서독 기본 조약(German-German Basic Treaty, 1972)은 국내 또는 국외로부터 오는 일체의 분열 책동들로부터 양자간 체제(framework)를 법적으로 보호하였다. 결론적으로, 긍적적인 국제 환경과 동서독 모두에서 있었던 국내 정치 변화가 우연히 겹침으로써 관계 정상화가 가능했으며, 이는 두 독일 간의 데땅뜨에 기반을 제공했다.

셋째로, 외부로부터의 불신을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게 되자 독일 내 관계는 급속도로 개선될 수 있었다. 이는 상호 이해관계를 증진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동독에게는 협력에 구조적으로 의존하도록 하여서, 점차 고유의 정치적 역동성을 이루었다. 더욱이, 일상적인 협력을 통해 비공식 채널이 발달하게 되었고 이는 동서간 이해 및 분쟁 조정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단기적 및 장기적으로 보아 중요한 것은, 신 동방정책이 여러 인도적 문제들 (예를 들면 비자 관련 규정이나 통과 규정 완화)의 해결을 용이케 했다는 것이다. 언론과 TV의 활동 여건도 개선되었다. 이것은 양측 국민들을 더 가깝게 하는데 기여하였고, 적어도 국경 저편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동독인들에게 특히 중요했는데,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실제 경험과 일상적인 정치적 선동을 대조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은, 에곤 바르가 한 화해에 대한 예측은 참으로 실현되었다. 다만 그 자신이 1963년이나 1969년에는 거의 꿈꾸지 못할 실제적 방식과 시간 반경에서 이루어졌다. 우선 “동방정책' - 그리고 특히 그것의 경제적 영향과 정치적 틀 - 은 점차적으로 “적”에 대한 인식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회주의 사회”들의 반 자본주의 선전의 정당성 뿐만 아니라 공산 통치 그 자체의 정당성을 손상시켰다. 1970년대말 강화된 동독의 “국가 지위”는 호네커 정권이 국제 문제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주었지만 , 한편으론 동독이 증가하는 국내에서의 비판에 더 취약하게 만들었고, 나중에 가서 이 같은 국내의 비판적 여론은 CSCE 원칙에 기반을 둔 것이자 지지를 받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동독 지도부가 국제 문제에서 활발하게 될수록, 동독 정권의 정통성은 국내 경제 위기 심화의 영향과 다른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에서 시작된 정치 개혁의 영향으로 인해 점점 손상되었던 것이다. 솔리다르노즈(Solidarnosz) 운동이 공산 정권에 대항하는 비정부 세력의 핵심을 제공한 폴란드와는 대조적으로, 동독 권력 와해가 초기에는 당 지도부 파벌의 인텔리 및 문화 엘리트들의 소외로부터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서방에 대한 개방으로 실제로 가장 많이 혜택을 본 이들의 소외는 후에 더 가속화 되었고, 그 이유는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동독 국민들이 지지하는 반면, 호네커 정권은 소련과 노골적인 결별정책(소련 잡지의 금지, 개혁에 대한 비판 등)을 추진한 데서 온 모순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985년 고르바쵸프 취임 직후 동독의 경제 위기가 급속도로 정치적 위기화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동독 사회의 변화 측면에서 본다면 “화해를 통한 변화”라는 바르의 개념은 진정 잘 들어맞은 셈이다.

둘째로, “불가피한 것의 인정”은 결코 양측이 상대방의 정치 체제의 정통성을 인정함을 의미하지 않았지만, 일시적 타협(modus vivendi)을 하여 양측이 사회적 이슈 등과 같은 다른 문제 해결에 착수하게 해 주었다. 서독의 경제, 재정적 지원이 , 만일 없었더라면 불가능 했을 동독 정권의 장기 생존을 가능케 했던 것인지의 여부는 물론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그것은 오해를 낳는 질문이다.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소위 시나트라 독트린(Sinatra-Doctrine)이 없었더라면 통일의 마지막 단계가 가능치 않았거나, 적어도 1989년처럼 빨리 이루어질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도 똑같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은 그 이전에 CSCE 프로세스가 강화되지 않았더라면 구소련내에서 거의 성공 가능성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앞서서 지적한 대로, `동방정책'은 이 프로세스에 대한 결정적인 필요조건 이었다. 마지막으로 기민당의 헬무트 콜 수상이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속하고 강화하였던 덕택으로 협력 관계의 패턴이 동독의 계속적인 구조적 의존도와 합해져 동독인들, 특히 젊은 세대들 사이에 서독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덜하게 만들었다. (대부분 젊은) 동독인들이 1989년 봄 여름에 서독으로 대거 탈출한 것도 독일 국내외로 서독 정책에 대해 압도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셋째로, 바르가 예측했듯이 `동방정책'은 동독 정권의 점차적인 변화에 기여하였다. 동독은 1989년 이른 가을 엄한 이미지를 보였지만, 실제로는 조금만 들어가 보면 정치 경제적으로 얼마나 취약한지를 알 수 있었다. 당, 국가 관료, 군, 경찰, 심지어는 비밀경찰(스타지)의 일부 세력은 더 이상 분명히 당 지도부 방침과 일치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 지도부 내에서도 국내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을 논하는 맥락에서 내분의 조짐을 보였다. 결국, 당 호위대는 라이프찌히와 베를린 가두 시위대에게 사살 명령을 내릴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그 같은 명령을 따를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해를 거듭하면서, 독재 정치의 정당성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정치권력의 변화는 국가 문제 해결 모색의 가능성을 다시 열어 주었으며, 그것의 선결 요건은 평화적 정권 이양을 가능케 한 순조로운 국제 환경 내에서의 체제 변화였다.

3. 선택 가능한 남북 통일 방식

독일의 경우에서처럼, 남북분단도 주로 “국가 이슈(national issue)”로서만 특징지어질 수 없다. 중심적인 특징에는 군사적 대치, 상이한 정치 및 사회 경제적 시스템, 그리고 상반되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분명 진정한 통일체는 적어도 동종의 정치 사회 경제 체제가 필요하며 양측에 공통적으로 공유되는 가치를 요구할 것이다. 만일 통일 목표가 원칙적으로 공유된다면, 그 다음 문제는 통일 달성을 위한 순서가 될 것이다. “동방정책”의 경우,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분명했다: “국가적 문제”는 오직 더 광범위한 유럽 차원에서만 해결될 수 있었고, 유럽의 변화가 먼저 일어난 후 뒤이은 결과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 독일 통일은 궁극적으로 유럽 통합보다 훨씬 더 급속히 일어났다. 하지만 그 이전에 모스크바, 폴란드, 헝가리에서 변화가 없었더라면 독일 통일은 가능치 않았을 것이다. 단지 5년 먼저 독일인들의 통일 요구를 감행했었더라도 실패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더욱이, 통일 요구는 동독에서 먼저 시작된 거지 서독에서가 아니었다. 결국 “동방정책”으로 펼쳐진 기회를 활용하는 것은 동독 국민들에게 달려있었다.

두 번째 문제는 북한의 주체사상에 입각한 사회주의 체제와 정치적으로 다원적인 시장 경제 체제가 결합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또는 한 체제는 그저 사라져야만 할 것 일지의 여부이다. 동독에서 개혁 성향 정당들은 소위 “제3의 길(third way)”을 고안했다. 그러나 다원적 민주주의를 “사회주의적” 사회 경제 체제와 결합한다는 생각은 구조적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인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40년 간의 통치 후 국민들은 최대한 빨리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를 제거하고 싶어했다. “동방정책”은 결코 한 체제를 다른 것으로 맞바꾸려 하지 않았고, 단지 동독의 “폐쇄적 시스템”을 점차 개방하고 변화시키면 (유럽 차원의 환경이 유리함을 전제로 하여) 궁극적으로 동독 사회가 체제 변형을 준비하고 독일의 미래를 자유로이 결정할 기회를 준비하게 할 것이라는 가정 하에 출발하였다.

“동방정책”과 비교하면 1972년 시작된 한국의 새로운 `북방정책'은 다른 시각에서 출발하였다. “동방정책”이 의도적으로 독일의 미래 지위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제로 남겨놓고 “국가 문제” 해결을 미룬 데 반해, 한국의 북방 정책은 처음부터 통일이란 목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적 문제'는 처음부터 여러 다른 이슈들과 구분할 수 없이 연결 지어져 버렸던 것이다. 또는 다르게 표현하면, 모든 다른 이슈들이 그때 이래 규정된 통일 목표에 맞추어 측정되어져 왔다. 그 후1992년과 2000년에 (세부 내용은 다르나) 남북한 간 이해증진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원칙을 따랐다. 그리하여 남한의 북방 정책과 독일의 `동방정책'간 중요한 차이는 장기간 동안, 협력의 전제로서 두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통일, 협력, 통합은 모두 한 바구니에 담겨져 왔고 유사한(parallel) 일이라고 인식된다.

남한의 북방정책과 “동방정책” 간의 구조적인 차이는 이념적 대립 뿐 아니라 정치 및 경제-사회적 체제간의 차이를 남한의 통일 정책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론적으로 통일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남한의 “사회주의화”, 북한의 “자본주의화”, 또는 현재 남북한에 존재하는 것과 다른 일종의 혼합 체제(hybrid system)가 그것이다. 처음 두 방식은, 통일 맥락에서 논의 되면 분명 남북한 중 적어도 한 쪽이 거부할 것이고, 세 번째 방안은 양측 모두에게 개연성 없이 들릴 것이다. 세 가지 방안 중 어느 것도 단기에 협상, 합의가 될 가능성은 없으며 절대 불가능 할 수도 있다. 처음 두 방안은 아마도 한 측이 상대방에게 무력으로 강요해야 할 것이다. 셋째 방안은 북한 사회-경제 체제가 “경착륙(hard landing)” 을 하고 난 뒤 변환기 이후 때가 되어서야 진정한 선택방안이 될 것이다. 반면, 그 같은 체제의 붕괴로 인한 불안이 야기된다고 하면 급속한 통일의 전망을 꼭 강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결론 지을 수 있는 것은, 현재의 현상 유지가 “국가적 문제” 해결의 시발점으로 인식되고, 양측 모두 적대적인 합병을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단지 “국가적 긴밀함(national coherence)”에 입각한 화해는 매우 비현실적이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선언문은 두 체제와 두 정부에 기초한 “느슨한 연방”을 통한 남북 통일을 언급함으로써, 다소 불가능한 일을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구조 분석적 입장에서 보면, 그 같은 방안은 대답보다는 질문을 더 만들어 낸다. “느슨한” 연방이라는 것이 연방(federation)과 연합(confederation) 사이에 있는 그 무엇을 나타낸다고 추측할 것이다. 두 체제와 두 정부를 유지함은 단순히 북한통치의 “내적 매커니즘”을 유지함을 의미하며, 이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 요소와 기저 이데올로기가 모두 긴밀히 상호 연관이 있으며 상호 의존한다. 이러한 메커니즘들은 남한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 요소들이 다른 것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고 변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답이 나올 수 없다.

“느슨한 연방”이라는 용어는 짧은 기간 동안 남한의 국민들이 통일의 비젼을 살아있게 해줄 수 있고 또한 북한인들에게도 일말의 희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정치적 포부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운영 차원에서는 다소 허술하다(loose cannon). 연방이건 연합이건, 현재 계속되는 체제 대항 위에서는 안정된 기반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기본적인 논리는 꽤나 간단히 수립할 수 있다. 즉, 두 개별 체제 구상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두 개의 개별 국가 고수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지만, 통일을 원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생존하는 체제로 합의를 보아야 할 것이다.

세 가지의 대안적인 정치적 옵션들이 훨씬 더 개연성을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 방안들은 남북 통일이 조만간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첫째, 남북한 간 “공존”이라는 의미로 남북관계의 “정상화”; 둘째, 북한에서 “위로부터의” 변혁에 기초한 일반적인 “연방”으로의 움직임; 셋째, 북한의 정치 및 사회-경제 체제가 “아래로부터” 변화하여 궁극적으로 평화 권력 이전으로 이어 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세가지 옵션들이다.

a) 공존

전 지역을 가로지르는 군사적 안정의 측면에서, 그리고 북한에서 아직까지 기능하는 권력 메커니즘을 놓고 볼 때, 통일 과정을 향한 개연성 높은 접근법은 남북한 간 공존의 강화이다. 일견해서는, 그것이 분단된 민족의 정당성을 증가하는 것처럼 보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더 심도 깊은 분석을 해보면 그렇지 않다. 남북한 정상은 작년 최초의 정상회담 중 분명히 통일의 목표가 포기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현재의 현상상태와 무관하게 통일의 목표를 다짐하였다. 통시에 분명한 것은, 만일 남한이 법적 現狀의 변화를 요구한다면 아마도 북한 정권은 즉각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남한이 당분간은 법적 現狀態를 불가피한 것으로 명백히 인정한다면, 50년 간 분단의 왜곡된 산물들로 정의될 수 있을 현상태의 다른 요소들(군사 대치, 적대적 상호 비방, 경제 협력의 결여, 인도적 차원 문제 등)이 다뤄질 수 있을 것이다.

언뜻 보면, “공존” 개념은 평탄한 통일 과정의 반대자들을 지지하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양측이 실제로 구체적인 통일 계획에 합의 된다면 그럴 것이나, 지금까지는 해내지 못한 일이다. 더욱이 이제 작년 정상 회담 후의 기대를 고조시키던 외교의 흥분이 가라앉고 나니, 통일이 단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이 분명해졌다. 좀 더 이성적인 통일 논의를 하는 것이 더욱 실질적인 고려사항을 포괄하는 방향이 될 것이다. “공존” 이라는 개념은 북한 정권이 “경착륙”도 “연착륙”도 하지 않을 전망이라는 가정과, 비록 북한의 심각한 경제 및 사회적 위기상황에도 불구하고 북한 정권의 정치 및 군사력의 존속은 아직까지 심각히 의문시 된 바가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공존” 개념은 더 나아가 알 수 없지만 얼마 동안은 한반도에 두 국가(two states)가 하나의 민족(nation)을 이루면서 존재할 것임을 가정하면서. 통일 과정의 구체적인 단계와 일정, 그리고 한국 국가의 미래 모습에 대해서는 미지로 남겨두게 된다.

북한 국가를 사실상(de facto) 인정한다고 해서 평양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을 공식 인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 국제법 원리에 따르는 상호 행동을 규제할 수 있는 안정되고 신뢰적인 틀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반어적이나, 북한이 남한에 의해 적법 국가(legitimate state)로 인정 받을수록, 북한 정권은 내정에 있어 국제적 규칙에 따라야 한다는 압력 하에 놓이게 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정통성이 “위협적인(적국)” 남한에 대한 것으로 규정되는 한, 북한 정권은 자국의 국내 통치를 자신의 존립을 노리는 외부의 위협에 대항한 방어 수단인 것으로 합리화 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 기존의 외부적 위협에 대한 선전을 믿을 근거가 없어지면, 북한의 국내 정통성은 기본적으로 남한과 비교되어 정권이 이룬 성과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공존”이란 개념은 상이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분명하고, 북한 정권이 사용할 때는 여기서 논의한 것과는 다소 다를 것이다. 러시아의 공산당 지도자 레닌은 공산주의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인 우월성을 입증하게 된다는 일시적인 체제간 대결이라는 전세계적으로 혁명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김일성은 1993년 더욱 수세적으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통일(unity)은 공존,공영, 공통 이해관심사를 주창하고 모든 것을 민족 통일의 대의에 종속시키는 원리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 김일성이 가장 원했던 것이 통일을 향한 길로써 공존을 진지하게 논의하고자 하기 보다는, 자신의 기울어져가는 정권을 보호하는 것이었는지의 여부는 논란 가능할 것이다. 신 지도부는 매우 심각한 사회-경제적 압력 하에서도 “공존”의 개념을 사용해 왔지만, 더 나아가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노력 역시 늦추지 않았으며 “하나의 통일된 국가 내 상이한 체제들의 공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미 논한 대로, 하나의 통합된 국가 내에 두개의 구조적으로 상이한 정치, 사회-경제 체제가 있는 것은 진지한 선택 방안으로 생각 될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상 회담 후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 공존”이라는 말을 취해 쓰면서 통일 실현 까지는 약 30년 정도의 긴 기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암시했다. 하지만 김 대통령은 민족 통일을 체제적인 대결 관계와 결합하는 구조적인 모순을 다루지 않았다.

사실, 공존이 통일을 위한 시행도구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도화된 대화, 합의, 협약을 통해 일체의 쌍무적인 분쟁이나 이해관계를 다루는 기반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이상도 이하도 이루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은 공존 기준들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하지만 단순히 공존을 주창하는 것 만으로는 양 체제간 깊은 구조적 차이를 해소하지 못한 채인 한 통일의 가능성을 증가시키리란 법은 없다. 선전과 대결을 중단하는 약속이나 합의는 문서 상으로는 보기 좋고 양자 관계를 개선 시킬 수는 있을지 모르나,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존은 -만일 북측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단지 국가 대 국가 차원의 갈등을 완화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고 ,양 측이 발전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 안정된 조건들을 제공할 수는 있을 것이다. 국가 대 국가 차원의 화해는 대립하는 정치 및 사회-경제 체제의 화해를 가져오지 않는다. 하지만 평화적인 경쟁의 바람직한 기반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승리는 두 나라 중 한 쪽 국민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평화적 대결이라는 상황 하에서 열등한 체제는 “위에서부터” 변화하거나 아래서부터 변화할 것이라는 기대에 기초한다.

b) “위로부터의” 변화

김정일이 신중하게 북한을 개방하여 대화와 협력을 하기로 결정한 배후 이유들은 자세히 논의 되어 왔다. 일부 분석가들이 김정일을 진정한 개혁자로 인식하는데 반해, 다른 이들은 그를 배신자로 비난한다. 분명히 김정일은 다른 대안의 여지가 없다. 심각한 사회 및 경제난에 봉착해 있고, 공식적인 공급과 지원 채널은 고갈되었다. 과거 동맹국들도 사라졌다. 북한은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어 왔다. 기식(parasitic)적인 통치 구조와 비효율적인 통제 경제를 유지하는 것은 엄청난 자원이 들어가고 있다. 무기와 군사 기술 수출을 통해 경제를 부양하던 전통적 방식은 국제 사회로부터 강력한 정치적 및 도덕적 압력을 받게 되었다. 북한은 인도적 구호 및 경제 원조의 계속적인 흐름에 크게 의존해 왔다. 분명히 이러한 상황 하에서 , 북한 정권은 수중에 쓸 수 있는 카드가 얼마 없다. 가장 유망한 것이 남한과의 관계이다. 하지만 남에서 북으로 자원이 아무리 이전되어도 무너지는 사회-경제적 체제를 구하기에는 불충분할 것이다. 김정일이 단기간 사이 두 차례의 중국 방문을 한 것은 등소평 식의 “사회주의적 시장 경제”를 북한을 위한 매력적인 모델로 생각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즉, 중국식 모델은 기득권 층에 의한 관료적 통치와 점차적인 경제의 민영화와 대규모 외국인 투자를 결합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성공했다고 해서 북한의 경우에도 똑같이 효과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은 중국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훨씬 덜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다. 또한 평양의 통치 상층부가 중국 지도부 만큼 융통성 있고 실용적인가의 여부도 의문시 될 수 있다. 정치적 분열의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김정일의 균형자적 역할은 중-동부 유럽의 다른 구 공산 지도자들의 경우 보다 훨씬 더 어렵다. 체제를 유지하는 것은 국내외 적으로 체제 개방의 폭을 제한 할 것이다. 경제 체제의 자유화는 구조적인 조세 개혁을 필요로 하고 현재의 지출 수준의 세제 기반을 위협할 것이며, 이는 관료층과 군부 등 기득권 세력 일부의 불만을 가중시킬 수도 있다. 강경파에 대처하기 위해 김정일은 점차 권력을 당 관료 정통파들로부터 이전함으로써 경제 자유화를 정치적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점진적인 정치적 개혁과 자유화 없이는 경제체제의 자립도를 높이는 것과 정치 개혁 과정의 신뢰도를 높이려는 데 대한 모든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 것이다 . 한편, 외국 투자자들에게 경제 체제를 개방하는 것 역시 정치적 모험을 야기할 것이다. 특히 김정일은 점차로 강력한 남한 경제가 허약한 북한 경제를 흡수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 같다. 어느 쪽 전망도 딱히 안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김정일은 아마도 두 가지 사이에서 절충안을 모색해서 헤쳐나가 보려는 시도를 할 것이며, 이 방향을 선택한 것이 당연한 것 같다. 개방에 대한 화려한 말을 해왔지만 신년사에서는 다시금 “혁명 시대의 필요에 부합”해야 하는 군부의 군사력을 칭송하였다. 이 같은 이중적 접근법은 공존 상황 하에서는 얼마 정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국내외적으로 불만을 야기할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남한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냉전 동안 서유럽에서 있었던 두 가지 사조가 한국에서도 발견된다. 첫째 부류는 “채찍과 당근”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체제의 변화에 영향을 주려고 했다. 상대가 여러 가지 내용에서 양보하는 것이 `당근'을 얻는 선결조건 이었다. 다른 쪽 사조는, “공존공영(live and let live)” 정책을 선호하면서, 국민들의 선택 자유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두 정책 모두 지지와 반대 세력이 있었으며, 한국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 일 것이다. “위로부터의” 개혁 과정의 초기 단계에서는 지도자(들)의 행동 준비 상태가 지나치게 강조되어서는 안된다. 일단 한편으로는, 적당한 억제를 행사하고 기존의 움직임과 차후 계획을 너무 요구함 없이 장려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야만 이 개혁 프로세스가 외국으로부터 정권을 붕괴시키려는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서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화 및 자유화의 지지가 다른 대안 방도가 없는 정권을 강화시켜주는 대가로 교환되어서는 안 된다. “동방정책”으로부터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상기한 두 가지 정책 조종은 동시에 적용될 때 가장 좋다는 것이다. 대립정책도 유화정책도 개혁 프로세스를 지도하는 데는 좋은 수단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양쪽 모두 정권으로 하여금 다시 재생할 수 있는 출구를 열어 두기 때문이다.

앞서 논의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추진했던 세력이 그 개혁을 끝까지 해내게 될 사람들인지는 미지수로 남아있다. 러시아와 중-동부 유럽에서는 그렇지 않았고, 중국에서도 신 지도부 세대가 등소평이 20년전 구상했던 것 이상을 해 냈다. 상이한 목표를 가진 다음 단계들을 함축하는 정치적 변화의 점진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양자를 혼합하는 것은 시기 상조일 것이다.

c) “아래로부터의” 변화

현재로서는 “아래로부터의” 변화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념 주입, 정치적 압박과 통제, 극도의 사회-경제난에다가 자유 언론을 국민들에게 차단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표현하거나 조직적인 저항을 하는 것을 막았을 뿐 아니라 다른 선택 대안의 존재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축소시켜왔다. 이러한 상황이 향후 수 개월 간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북한의 “연착륙”을 가정한다면, 많은 것이 “위로부터의” 변화 속도에 달릴 것이다. 하지만 남한과 국제사회는 북한 주민들에게 기본적인 생활 여건을 향상시킴으로써 필요한 변화작업을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직접 북한 주민들에게 제공되는 원조와 지원은 무엇보다도 희망을 소생시키는데 기여할 것이고, 또한 수 십 년간 그들이 들어왔던 것처럼 남한이 침략 야욕을 가지지 않음을 더욱 인식하게 될 것이다.

다른 변화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첫 발자국을 내딛으면 계속해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일단 초기의 자유를 누리게 되면 사람들은 더 요구하게 될 것이다. 상부의 압력과 통제 없이 조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그것을 잡으려 할 것이다. 시간은 길게 걸릴지 모르지만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다. 유럽에서 CSCE 원칙들이 시행된 것은 유럽 사회들 내부에서 자신감이 성장하는데 크게 기여했지만, 폴란드와 헝가리를 제회하고는 동독을 포함한 다른 사회들에서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십 년 이상 걸렸다. 북한의 특수 상황을 고려컨대, 더 긴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경제 자유화가 반드시 정치적 변화 과정을 가속화 시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공공 지출의 여유가 적어지면서 그로 인해 적어도 일부 계층 주민들에게는 국가가 여전히 보장해주는 생활 수준에 압박이 가해진다면 더욱 더 많은 빈민들이 인민주의적 명분(populist cause)을 지지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당분간은, 해외로부터의 구호 지원의 차단 또는 장애가 혹시라도 발생하면 이는 자유화와 민주화 모두의 전망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도 있다. 동시에 경제 지원과 정치적 대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주민 직접 원조와 국가간 정치적 대화는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 이런 접근 방식은 최대한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요구한다. 직접 원조와 관련해서는 부패한 현지인들에 의한 자원 누출을 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자원을 전달하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투명한 통제 체계가 권장되는 것이다.

독일의 경우에서처럼, 남북한 쌍무 관계를 “당사자 화(Koreanization)”하는 것은 세가지 이유에서 유용할 수 있다. 우선, 남북 관계의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외부 개입이라고 인식될 수 있는 것들을 다루는데 자신감을 가져올 수 있다. 공통의 근원, 문화적 정체성, 같은 언어와 지리적 인접성은 실제로 중요하고 즉각적인 경제적 지원을 용이하게 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둘째, 제 3국가들과의 관계는 덜 중요할 수도 있고, 그것을 이용하여 불화를 일으켜 자신이 득을 보려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 측 국민들이 조국 통일에 대한 현대적인 비전을 개발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4. 국제 환경

앞서 언급했듯이, 동서독 관계를 둘러싼 긍정적인 환경은 “동방정책”의 성공과 그 후 독일 통일에 많이 기여했다. 불행히도 한반도 상황은 꽤 다른 것 같다. 1970년대 유럽의 데땅뜨 기간과 같은 것이 동북아시아에는 없었고, 유럽과 대조적으로 전략적 편가르기가 양극체계가 아니라 더 복잡한 전략적 4강 구도를 하고 있다. 지역강국들 간 공공연한 영토 분쟁이 미해결로 남아있고, 중국과 미국간 관계도 불안하며,적어도 중국 정부는 미국에 대해 “한국 카드”를 쓰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 OSCE 의 비동맹 국가들과 중립국들처럼 중재국 역할을 하는 나라도 없다. 중,소,미,일의 사회적 배경에는 깊은 문화적 차이가 특징적이다. 군축의 패턴이 존재 하지 않으며, 지역 안보 협력의 틀도 없다. 지역 안보 체계를 세우려는 기회는 결코 좋았던 것이 없으며, 아마 오랫동안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의 화해 프로세스는 궁극적으로 주변의 유리한 환경이 선결 조건일 것이나 그것에 의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남북한 관계는 어려운 시기에도 점진적인 화해 무드(rapprochement)를 보존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독일의 경우 1980년대 초 SS-20 미사일 위기 동안의 동서독 관계의 경우와 같다. 물론 그 당시 “동방정책”은 벌써 10년이 넘은 정책이었다.

5. 예비적 결론

한국인들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통일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동방정책”은 본떠야 할 모델도 아니지만,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하면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불가피한 것을 인정하고 개선을 향한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것 간의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일 것이다. “최종 해결책”을 기다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각 진전은 탄탄한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고 이는 점증하는 단계들을 요구한다.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그러한 단계였다. 다음 단계들은 더 진전 되어야 할 것이다. 공존, “위로부터의 ” 변화, “아래로부터의” 변화, 유리한 국제 환경 조성 등 각 단계는 더 나은 것을 위한 변화를 약속하는 것이며, 하나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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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Hans J. Giessmann의 논문 `독일 통일 모델을 `복제'하려는 환상과 한국' 참조, Korea and World Affairs, vol. 23 no. 2, 1999, pp. 225 - 240.
2. Egon Bahr, Sicherheit f?r und vor Deutschland, Munich: Carl Hanser, 1991, pp. 11-17을 참조
3. Peter Bender, Neue Ostpolitik. Vom Mauerbau bis zum Berliner Vertrag, Muenchen: DTV, 1986을 참조
4. Wilhelm Bleek, 냉전에서부터 동방정책까지: 단독적 아이덴티티를 찾는 두 독일: World Politics, vol. 19, no. 1, 1976. pp. 114-129, 여기서는: p. 119/120.
5. Ibid.
6. Roger Morgan, in: Roger Tilford, ed., 독일의 동방정책과 정치적 변화. Westmead, Farnborough: Saxon House, 1975, pp. 95-108 을 참조
7. Hans Maretzki, 남북한 간 정상화와 데땅뜨라는 미제, Pugwash Workshop, Seoul, Korea, 2-6 April 2001, mimeo을 참조
8. Ibid.
9. KCNA, 7 April 1993을 보라.
10. http://www.Korea-np.cojp/pk.에서 인용
11. Hans J. Giessmann, 세계적 시각으로 본 유럽 안보와 국방 아이덴티티 문제: KNDU Review, vol. 5, no. 2., December 2000, pp. 3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