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화해

북한 핵문제의 본질과 동북아 정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2-11-12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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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문제의 본질과 동북아 정세


강정구 (동국대 교수)


I. 북한 ‘핵무기개발 의혹’과 한반도 전쟁위기

탈냉전과 평화의 시대라고 하는 90년대 이후 한반도에는 8번의 전쟁위기를 겪었다. 그 가운데 미국이 주도한 전쟁위기는 무려 여섯 번이었고, 북한 핵무기 개발의혹을 제기함으로써 발생한 전쟁위기는 최근까지 네 번에 이른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핵무기의혹 제기는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인 전쟁위기와 직결되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같이 이번 핵의혹사건 역시 전쟁위기로 치달을 수 있는 극도의 위험한 현상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1. 91년 ‘제2의 한국전쟁위기’와 핵안정협정 가입

북한은 1985년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했다. 이는 소련으로부터 원자력발전소의 기술공급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180일간의 교섭을 거쳐 18개월 안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안정협정을 체결해야 하는 의무조항을 이행하지 않았고, 1차 연장기간이 끝나는 1989년 6월 이후에도 핵안전협정을 체결하지 않았다. 이렇게 NPT에 가입하고 핵안전협정 체결을 미룬 나라는 북한 뿐 아니라 프랑스, 중국 등 수많은 나라들이 해당되었다.

북한은 미국이 핵무기로 북한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선언과 핵안전협정 체결 후 북한에 대한 핵위협이 있을 경우 협정의 효력을 유보할 권리를 보장하는 선행조건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이 하나의 선례가 된다는 핑계 하에 거절해 왔다.

1차 연장기간 만료인 1989년 6월부터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무기 개발의혹을 제기하고 국제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 프랑스 등도 안정협정을 미루었고, 이스라엘, 남아공 등은 핵무기를 보유 한데도 전혀 국제적 압력이 없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미국의 북한에 대한 압력은 부당하고 불공정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스라엘이나 남아공은 미국의 핵무기개발 지원을 공공연히 받았고, 또 제3세계인 파키스탄이나 인도 등은 이미 핵무기 보유의 수준으로 핵무기 개발이 진척되었는데도 북한과 같은 압력을 미국으로부터 당하지 않았다.

1991년 3월 페르샤만전쟁이후 미국은 북한과 김일성주석을 ‘제2의 이라크’와 ‘제2의 후세인’으로 낙인찍으면서 ‘120일 전투시나리오’, ‘제2의 한국전쟁’, ‘세계7대분쟁예상지역’ 선정 등으로 노골적인 전쟁위협을 가해 왔다. 당시 이종구국방장관이 영변을 기습폭격하는 엔테베작전을 언급한 것은 이러한 미국의 대북공세와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미국의 막무가내 식 논리에 덩달아 춤추는 발상이었다(강정구, 1991). 이 전쟁위기는 탈냉전시기에 도래한 반반도 전쟁위기의 첫 번째로서 그 발단은 북한 핵무기 개발의혹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 전쟁위기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구체적으로 포착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개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국이 벌린 전쟁위협이다.

미국의 대북한 압살정책이 서서히 강화되고, 소련의 개혁정책과 몰락이 진행됨에 따라 북한은 기존의 대유엔정책인 ‘하나의 조선’인 단일국가로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한다는 기존정책을 바꾸어 1991년 유엔에 분리가입 하는 등 유연한 자세로 자기의 생존권 확보를 꾀했다. 곧, 유엔의 틀 안에 들어감으로써 남한은 중국·소련과 수교, 북한은 미국 및 일본과의 수교라는 교차승인 구도로 나아가 북한이 생존권을 확보 받으려는 정책선회를 시도했다. 또한 1991년 9월 부시미대통령의 전술핵무기 폐기 선언과 12월 18일 노태우대통령의 핵부재 선언을 계기로 1992년 1월 31일 IAEA와 핵안전협정을 체결하고 1993년 2월까지 6차례의 사찰을 받았다. 아울러 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 12월 31일 남북비핵화공동선언, 92년도 팀스피리트훈련 중지발표 등이 이루어져 남북관계는 상당히 개선되었다. 물론 북한은 핵사찰을 통하여 미국?일본 등과 관계개선을 추진하고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체제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생존전략의 하나였고 탈냉전의 첫 번째 전쟁위기는 북한의 핵안정협정 가입으로 해소되었다.

2. 93-94년 영변핵위기와 10.21북미제네바합의

북한은 1992년 2월부터 6차례의 핵사찰을 받았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생존권 확보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기보다 1993년 팀스피리트 훈련을 남한과 함께 재개해 북한을 대상으로 핵전쟁연습을 감행했다. 결국 영변핵위기도 미국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함으로써 발생한 미국의 북한위협에서 비롯되었다.

더 나아가 IAEA는 북한에게 미신고한 영변의 2개 기지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했다. 미신고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은 사상 유례가 없는 것으로 북한은 이 시설이 군사기지이기 때문에 이러한 요구는 북한주권 침해행위라면서 반발했다.

IAEA가 1993년 2월 9일 “핵 폐기물 저장소로 추정되는 영변 핵단지내 2개의 미신고 시설에 대한 특별사찰 수락”을 북한에 요구하면서 핵무기 개발 의혹의 근거를 첫째 ‘2개의 원칙적 불일치’, 둘째, 2개의 미신고 영변 시설에 대한 사찰 미이행으로 들었다.

첫째 ‘2개의 원칙적 불일치’가운데 하나는 플르트늄 양의 불일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북한은 손상된 1-2개의 연료봉을 교체하기 위하여 영변의 5메가원자로의 가동을 1989년 약 100일간 중단하였고, 1990년 이 1-2개의 연료봉으로부터 방사화학실험실(다음부터 방사실)에서 90gr의 플르트늄을 추출하였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IAEA가 임시사찰에서 채취한 표본들을 분석한 결과 89, 90, 91년 세 차례에 걸쳐 플르트늄을 추출했다고 주장하고 또 추출량도 북한이 신고한 양보다 많다고 보았다. 이 불일치를 규명하기 위하여, 곧 10-12kg의 플르트늄을 숨겨 놓았을 것이라는 의혹이 짙은 영변의 미신고시설 2곳을 특별사찰을 북한에 요구했다. 또 다른 하나의 불일치는 방사실험실에서 추출한 플르트늄 조성비(동위원소의 구성비)가 폐수에서의 조성비와 불일치하다는 것으로 이 때문에 신고되지 않은 재처리시설이나 핵폐기물이 어딘가 더 있다고 의심하였다. 이 숨겨진 곳이 바로 영변 미신고 시설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영변의 미신고 시설의 사찰 거부에 관해서 IAEA는 이 두개의 시설이 위의 불일치와 관련이 있고, 플르트늄을 보관하거나 은닉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은 위의 불일치는 원자로가 실험실이고, 북한 자체 기술로 개발되었으므로 계산방법이나 기구의 착오 때문에 생긴 것이며, 영변시설은 군사시설이고 1992년 3차 사찰 때 이미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유엔가입, 남북관계개선, 핵사찰 등을 통해 북미관계정상화를 이루어 자신의 생존권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1년 동안 여섯 차례의 사찰을 받았지만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추진하기보다는 중단하였던 팀훈련을 재개해 북한을 핵공격 전쟁연습으로 위협하고, 핵문제 해결 후 곧이어 미사일, 인권, 화학무기, 생물학무기, 테러 문제 등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려는 저의를 보였다. 이 경우 북한의 대응이 마땅하지 않으므로 NPT 탈퇴를 선언하여 핵카드를 통해 미국과 관계개선을 이루어 생존권을 확보하려는 고단위 처방으로 나왔다. 곧, 1995년 3월 15일로 NPT조약이 만료됨에 따라 기존조약의 존속에 미국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이미 덫에 걸린 미국에게 최대한 양보를 얻고자 한 것이었다.

북한의 입장으로서는 IAEA가 북한에 요구한 특별사찰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불공정한 행위였다. 더구나 핵무기 보유국가인 미국이 비핵무기 보유국인 북한을 겨냥해 스텔스폭격기 등을 동원해 핵전쟁연습을 강행하면서 북한을 위협하는 것은 분명히 핵무기 보유국가가 非보유국가에 대해 핵위협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NPT조약을 위배한 행위이다. 그러나 IAEA는 미국의 위배행위를 응징하기보다는 오히려 북한에 특별사찰을 강요하는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이중잣대 행위를 자행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상승작용해 북한은 1993년 3월 12일 NPT를 탈퇴하였다. 북한의 탈퇴선언은 1995년 3월 15일로 만료되는 NPT체제를 지속시켜 미국의 핵 기득권을 유지하여 세계적인 군사적 헤게모니를 계속 장악하려는 미국의 장기적인 세계전략에 엄청난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현존 NPT는 핵무기보유국가들에게는 핵무기 생산, 개발, 실험, 증산 등에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비핵무기보유국에게는 일체의 핵무기 생산, 실험, 개발, 비축도 허용하지 않는다. 곧, 핵강국의 기득권을 철저히 보장하는 전형적인 불평등·불공정 조약이다.(주1) 미국은 바로 이 조약을 영속시켜 그들의 핵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군사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장기적인 세계 지배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미국의 패권주의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NPT를 북한이 탈퇴함으로써 미국의 장기적 세계전략에 차질을 빚을 소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미국의 사활적 이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생존전략으로서 핵카드와 미국의 장기적 세계패권전략구도의 일환으로서 NPT조약의 연장기도가 충돌하여 한반도는 1년 수개월동안 무려 5번이나 되는 군사적 긴장을 치렀다. 이들 가운데 지난 6월전쟁위기는 최악의 것으로 카터의 적극적인 중재가 없었더라면 민족공멸로 이어질 수 있는 극한적 상황이었다.

이미 미국은 6월 2일부터 매시간 단위로 한반도상황을 점검하는 비상체제를 갖추고 인디펜던스 항공모함을 환태평양군사훈련에 참가시켰으며, 미 상원은 이미 퇴역한 고속정찰기 SR71을 복귀시켜 북한상공을 정기정찰하기 위해 1억 달러의 예산지출을 승인하고 예방폭격을 배제하지 않고 있음을 재확인하였으며 미군 1개사단 증파를 협의하는 등 군사적 대결상태를 준비해 나갔다. 또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은 “북한이 계속 버틸 경우에 대비해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계획을 지금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언론이나 여론조사 등도 대화보다는 대결을 촉구하고 군사력 사용이라는 초강경 대결을 역설하였다({한겨레신문} 1994. 6. 7).

최종의 순간은 94년 6월 16일이었다. 한국에서는 럭 주한미사령관과 레이니 대사가 미대사관저에서 몰래 만나서, 비상체제를 가동, 소개작전을 추진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레이니는 공식명령도 기다리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 와 있던 딸과 세 손자?손녀에게 사흘 뒤인 일요일까지 한국을 떠나라고 말한 것이다. 워싱턴시각으로 16일 아침 10시경 백악관에서는 대통령, 부통령, 국무?국방 장관, 합참의장, CIA국장, 유엔대사, 안보보좌관 등 최고위 당국자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열었다.

회의 서두에 클린턴은 유엔안보리의 대북한 제재 추진을 최종 승인했다. 클린턴의 최종승인이 떨어지자 [합참의장은] 한반도 주변지역의 미군증강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에게 추가병력을 제대로 배치하려면 한시적이나마 예비군을 소집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미 국민이 사태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점진적 증강 안이 담긴 제1안에 대해 설명한 뒤 전투기와 또 다른 항모전단 그리고 1만 명을 웃도는 추가병력 배치에 관한 제2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Oberdorfer 1998, pp. 300~303)

이미 북한은 미군의 추가배치가 있을 경우 이를 군사적 공격으로 간주하고 선제공격을 할 것을 밝힌 상황이었다. 바로 이때, 이 긴박한 순간에 백악관은 평양을 방문중인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으며, 이로써 민족파멸을 초래할 전쟁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게 되었다. 실로 모골이 송연한 순간이었다. 물론 미국은 5월 18일 국방장관, 합참의장, 주한미군사령관 게리 럭, 현역 4성장군과 제독, 세계 전역에 파견된 장성 등을 대거 소집하여 특별군사회의를 거쳐 도상훈련이 아니라 ‘실전회의’를 통하여 만반의 준비를 거친 상태였다(같은 책, p. 291). 이 때 제3안은 전면전, 곧 5027에 의한 북한섬멸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최소한 40만 명 이상의 미군파병을 전제로 예비군 소집을 계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같은 책, p. 299). 전쟁경보국가정보 담당관 찰스 앨런은 미군의 무력증강은 북한의 전시 동원령을 유발시킴으로써 선제공격의 위험성이 고조되고 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는데, 대통령에 대한 전쟁경보보고는 전쟁개시가 임박했을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이다(Sigal 1998, p. 208).

그러나 2001년 6월 제주도평화포럼에서 페리(Perry)가 밝힌 것처럼 “클린턴 대통령이 전쟁개시를 승인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김주석과 카터의 합의를 받아들여 파국을 모면하게 되었다.

남한정부 또한 전군의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대통령은 “24시간 감시체제를 통해 한?미 양국은 북한의 움직임을 100% 장악하고 있다. …한?미 양국은 만일의 사태에도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무력을 갖추고 있다”({한겨레신문} 1994. 6. 4)면서 ‘여유’의 수준을 넘어서 ‘전쟁승리’를 자신하는 모습까지 보였다({중앙일보} 1994. 6. 4). 6월 8일 김영삼정권은 출범 이후 첫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예비군 동원태세, 국지전 대비태세, 심지어 전면전까지 상정하였다.(주2)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이병태는 통일전쟁 운운까지 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제재는 곧 전쟁이며 전쟁에서는 자비가 없다. …동족에 대한 제재 판을 벌여놓고도 자기만은 무사하리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고 대응하는({중앙일보} 1994. 6. 6) 한편, 군 참모총장 최광을 중국에 급파하여 ‘혈맹관계’를 과시하고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 탈퇴불사를 선언하였다.

전쟁상황이 이렇게 화급했는데도 대부분의 남한사람은 자기의 죽고 사는 문제가 경각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마음 편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의 결정권이 거의 미국에 달려 있고, 이에 관한 정보가 우리에게는 철두철미하게 차단되어 실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99년 5월 24일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겨레신문}과의 대담에서 94년 6월 중순의 전쟁 직전상황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미국은 동해에 항공모함의 비행기를 몇 분 안에 북한에 갈 수 있는 거리에 배치했고, 함포사격 하려고 준비했다. 하루는 보고를 받으니 내일 레이니 대사가 기자회견을 한다고 하는데 대사관 직원가족들의 철수를 발표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전쟁 직전에 취하는 조처다. …남북에서 얼마나 죽을지 모른다. 천만 명에서 2천만 명이 죽을 것이다. …그날 저녁 클린턴하고 32분 동안 통화했는데 대판 싸웠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에는 남북전쟁은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진술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과연 전쟁을 방지하는 데 얼마나 역할을 했는지에 관해서는 의문이다. 당시의 위기상황을 다룬 여러 저서나 증언에서, 우리의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의 반대 때문에 전쟁파국을 막을 수 있었다는 분석은 아직 없다. 당시 미국의 핵전담 대사였던 갈루치도 KBS와의 인터뷰에서 몇십 분만 늦었더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야기했으며, 국방장관이었던 페리도 전쟁 초읽기를 시인했다. 그리고 전문가 대부분은 카터의 중재 덕분에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절박하고 심각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 직전까지 치닫는 상황에서 우리의 대통령은 도대체 무엇을 하였으며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대통령으로서 엄청난 직무유기, 아니 죄악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남한의 대통령이 반대를 해도 전쟁은 미국의 각본에 따라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 32분 동안 클린턴과 싸웠는데도 그 결과 전쟁을 막을 수 없었다는 기막힌 사실은 미국이 주도하는 한반도 내의 전쟁에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도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이러고도 우리가 주권국가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한데도 우리의 주류정치인무리들과 주류 언론 및 학문계는 50년 동안 우려먹은 한미공조 운운하면서 미국만을 짝사랑해야 한다고 되풀이하고 있는가?

2001년 6월 제주도평화포럼에 참석한 페리(Perry)의 “한국 어디로 가는가”라는 제목의 특별연설이 이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북한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나는 전쟁비상계획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이틀 동안 군지휘자들을 만나 전쟁계획의 모든 세부상황을 검토했다. 파견할 육군?공군 부대를 결정했고 이동방법, 도착시간 등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한편 기습공격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고려했다. 검토결과 전쟁이 발발하면 승리하겠지만 한국군?미군?한국국민의 피해가 엄청날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 나와 군지휘관들은 주한미군을 강화하면 피해를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주한미군을 수만 명 증원하는 계획을 입안했고, 주한 미대사관에 민간인 철수계획을 준비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이 전쟁개시를 승인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우리는 ‘영변의 핵활동을 중지하고 의미 있는 협상을 할 준비가 됐다’는 김일성의 전언을 받아 협상에 나선 것이다. ({중앙일보} 2001. 6. 17)

또 이 당시 미국의 국방성에 잠시 아르바이트를 한 한국계 미국인 대학원생의 증언에 의하면 영변 핵위기에 대처하는 국방부 관리들은 북한에 2천만 이상의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폭격을 하고 전쟁이 나면 그 많은 사람이 죽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우려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이 미국인들에게는 오로지 퍼싱미사일의 위력이나 첨단무기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북한을 파괴할 수 있는가 하는 기술공학적 측면만이 관심사였지 우리들 수백만 아니 수천만이 죽는다는 사실은 전혀 관심 밖이었다.

1년 8개월 동안 긴박한 공방과 다섯 차례의 군사적 긴장을 겪은 끝에 6월위기를 고비로 미국과 북한 사이는 마침내, ‘합의문 발표 후 1개월 이내 북학 핵활동 동결’ ‘핵동결 뒤 연락사무소 연내 설치’ ‘연간 중유 50만 톤까지의 대체에너지를 북한에 공급’ ‘2천MW 경수로 제공에 대해 6개월 재 계약 및 2003년 완공’ ‘북한의 NPT잔류와 국제원자력기구 임시?일반 핵사찰 수용’ ‘대북 핵 불사용에 대한 미국무부 보장’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10?21조미합의가 타결되었다. 이로써 북미관계는 적대적 관계에서 새로운 외교관계 수립의 단계로 전환하고 휴전협정 또한 평화협정으로 대체되어 북한의 생존권은 확보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북미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으로 곧 붕괴될 것으로 예견하였기 때문에 미국이 제네바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고 또 새로운 작전계획 5027-98로 북한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미국의 속내야 어찌 되었든 그 동안 북한은 10?21 합의가 규정한 핵연료봉을 97%까지 봉인하고 핵발전소를 중단하여 협정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러나 미국은 합의사항인 대북 경제제재의 해제를 거의 이행하지 않았고, 북한에 핵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정부의 공식적인 보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2003년까지 완료하게 되어 있는 2천MW의 경수로도 적기에 공급할 수 없게 되었으며 2008~9년까지 재대로 이행될지도 의문이다. 북한과의 관계개선도 전혀 진전시키지 않았다. 또 중유 50만 톤을 적기에 제대로 공급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견해는, 99년 3월 11일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의 “대북 경제지원, 관계개선, 북한의 안전보장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북?미간 제네바합의를 지키는 대국의 아량을 보여야 한다. 북한이 먼저 이것을 해야 저것을 주겠다는 식으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발언이나, 그 동안 우리 정부관계자들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제네바협정을 지키지 않은 책임이 “엄밀히 따지면 미국 쪽이 더 크다”고 말하곤 했으면서도 외교적 파장을 우려해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한겨레신문}(1999. 3. 11)의 분석과 일치한다.

당연히 북한은 미국의 이 같은 고의적인 불이행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했고 협정이행을 촉구하는 한편 경고도 했다. 그러나 부시미국은 적반하장 격으로 대응하면서 한반도 전쟁위기를 고조시켜 왔다.

3. 1998년 금창리핵위기와 북?미 베를린합의

금창리 핵위기에서 비롯된 또 다른 한반도 전쟁위기는 해리슨이나 퀴노네스가 밝힌 것처럼 의회의 강경파, 국방부와 CIA의 매파 등이 미 국방정보국(DIA) 패트릭 휴즈 국장(현역중장)이 유출한 정보를 토대로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위반했다고 주장한 데서 발단되었다({중앙일보} 1998. 11. 24). 페리 북한정책조정관의 전략안 시안에서는 한반도를 전쟁상황으로 몰아넣는 3단계 안을 예고했으며, 미 합참 간부회의에서 존 틸러리 주한미사령관은 “올 봄 한국에서 일종의 ‘긴급상황’이 예상된다”고 밝혔고, 99년 2월 2일 조지 테닛 CIA국장은 상원 군사위에서 “북한이 절박한 경제상황으로 ‘미국과 위험한 극한정책’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경고했다({한겨레신문} 1999. 2. 4).

98년 10월 9일 주한미군 작전부참모장인 레이먼드 아이어스 소장은 북한이 공격을 준비중임을 보여주는 모호하지 않은 조짐들이 나타날 경우 선제공격한다는 작계 5027-98을 발표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모두 죽여 군대라고 할 수 있는 걸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없애버릴 것”이라고 전쟁위기를 확산시켰다. 또 군산복합체의 이익과 밀착한 공화당의원들은 북한에 제공해야 할 98년도 분 중유 50만 톤의 예산을 승인하지 않으면서 합의이행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98년 8월부터 본격화된 금창리 핵위기는 8월 말 북한의 인공위성 발사로 더욱 증폭되어 99년 ‘한반도 봄 위기설’로 발화되면서 지난 1993~94년의 위기를 재현하는 듯했다. 2002년 9월 미국의 노틸러스 연구소가 정보자유법(Freedom of Information Act)에 의해 밝힌 엄청난 사실은 1998년 6월 10일 김대중대통령과 클린턴과의 정상회담 직전에 미국은 대북 핵선제공격 실전연습을 비밀리에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스 캐롤리나 주둔 세이머 존슨 미 공군기지 제4전투비행단 소속 F-15E 전폭기가 핵폭탄의 일종인 BDU-38을 탑재해 플로리다의 폭격장에 투하하는 모의 훈련 반복 실시한 것이 확인되었다.

정욱식이 노틸러스 연구소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미국 대통령이 대북한 핵무기 사용을 승인하면, 제4 전투비행단은 괌 등 한반도 인근 지역에 배치되게 된다. 또한 핵폭탄을 탑재한 F-15E 전폭기와 함께 E-3A 조기경보통제기(AWACS), KC-135 공중급유기, 전투비행단을 보호하기 위한 F-15 전투기 등이 동원된다. 또 “미국 본토로부터 전폭기를 출격시켜 북한에 핵공격을 하는데 10시간 정도 소요되고, 트라이던트 잠수함 발사 핵미사일의 경우에는 버튼을 누르면 30분만에 한반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주3) 이는 분명히 핵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약속한 94년의 북미제네바합의 위배이다.

그러나 94년 전쟁위기 때 전쟁을 부추겨 민족안보를 저버린 반민족적인 김영삼정부의 행위와 달리 김대중정권은 포용정책의 테두리 속으로 금창리 핵위기를 끌어들여 위기를 잠재워 민족안보를 지키는 전향적 정책을 취함으로써 중대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금창리 핵위기에 대한 3?16북미베를린합의는 △금창리 지하시설 의혹해소를 위해 현장조사단(30명) 방문과 추가 복수방문 허용 △정치?경제 관계 개선을 위한 조처로 60만t 식량지원 및 감자증산의 농업지원, 4월 29일 평양에서 4차 미사일회담 재개, 북한자산 동결 해제 등 부분적 경제제재 완화를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금창리 지역을 사찰했으나 핵무기개발 의혹은 사실무근으로 판명 났다. 그러나 미국은 이에 대해 사과표명조차 하지 않았다.

북한이 이 합의로써 얻은 것은 식량지원 60만 톤과 약간의 농업지원밖에 없으며, 그 밖의 부분은 미국이 응당 10?21협정에 의해 이행했어야 할 사항이다. 그것도 경제제재의 부분적 완화에 그쳤다. 미국은 식량지원에 드는 약간의 비용만으로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개발과 발사유예를 2003년까지 받았다. 또한 ‘북한 적 만들기’를 시도했던 군산복합체 및 이들과 야합한 강경세력의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셈이었다. 일본에 ‘전역미사일방어체제’(TMD)를 강요하고 자신은 ‘전국미사일방위’(NMD) 개발을 확정 시켰다. 물론 이들은 한반도의 전쟁위협을 볼모로 자신들의 추악한 잇속을 차린 것이다.

필자는 이미 영변 핵위기 당시 미국의 행위유형을 다음 몇 가지로 특징화한 적이 있다(강정구 1994b). 첫째, 미국은 이중삼중 잣대로 영변 핵위기를 조성하여 불공정 게임을 일삼았다. 이스라엘, 남아공, 일본 등의 핵은 문제삼지 않으면서 유독 북한에게만 온갖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둘째, 강?온 양동작전으로 북한에 양보를 강요하고 의회 등을 핑계로 기존 합의를 파기하면서 무력제재 수순을 밟는 유형을 보였다. 셋째, 국무부는 일괄타결 등으로 유화책을, 국방부?CIA?군산복합체 등은 무력제재 불사의 강경책을 일삼았다. 넷째, 핵위기의 주기적 악순환을 이용하여 한미연례안보회의 등에서 의도적으로 위험을 고조시켜 한국에 무기구매를 유도 및 강요하였다. 다섯째, 궁극적으로 북한의 핵카드를 완전 소진시킨 상태에서 다음에는 미사일문제, 화학 및 생물학 무기, 테러문제, 인권문제 등으로 북한을 순차적으로 옥죄려는 경향을 띠었다. 여섯째, 국제원자력기구를 ‘긁어 부스럼 만드는 훼방꾼’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마치 미국의 행위가 객관적이고 정당한 것처럼 위장하는 행위를 일삼았다.

이를 보건대 3?16북미베를린합의로 한(조선)반도가 미국의 볼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부시정권이 들어서자, 클린턴정권 말기 조명록 북한차수가 방미하여 관계개선과 평화보장체제를 합의한 ‘10?12북미공동성명’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친 데서도 이는 확인된다. 미국은 대북한 경제제재의 해제와 단계적 관계정상화를 지속적인 카드로 악용하면서, 미사일?생화학무기 문제 등을 순차적으로 제기하는 ‘양파껍질 벗기기’ 식으로 북한의 방어선을 하나씩 무너뜨리려 할 것이고, 이때마다 또다시 한반도에는 위기가 재연될 것으로 필자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미국의 연이은 미사일문제 제기에 대해 북한 외무성대변인은 “미국이 방대한 핵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로 우리를 항시적으로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우리 자체의 노력으로 미사일을 개발?시험?생산하는 것은 우리의 자주권에 속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미국이 아무리 우리의 미사일 위협을 떠들어대도 자신들의 군비증강책동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문제의 핵심을 부각시켰다({동아일보} 1999. 3. 31). 이제 미국은 대북한 위협의 메뉴를 금창리 핵위기에서 미사일문제로 바꾼 것이다. 이로써 또다시 미사일 위기라는 수없이 많은 “가지를 한반도라는 나무에 쳐놓아” 전쟁위험의 바람이 잘 날이 없게 되었다. 왜 우리 민족은 미국의 이 같은 전쟁놀음에 계속 놀아나는 꼴을 당해야만 하는가?

금창리 전쟁위기는 미국 국무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방성의 DIA가 북한 금창리지역의 인공위성 사진에서 ‘이상한 징후’가 나타난 것을 언론에 흘려(최원기 1998) 사건을 부풀린 대표적인 경우이다. 인공위성 사진에 나타난 뭔가 이상한 점에 대해서 제대로 된 검증절차도 밟지 않고, ‘북한은 으레 그럴 테니까’라는 근거 없는 낙인론에 매몰되어 바로 북한의 핵무기개발로 무조건 단정지으면서 한반도 전쟁위기를 재연시킨 사건이다. 1년 반 이상의 협상과 진통 끝에 베를린합의에 이르러 미국은 북한에 60만 톤의 식량지원을 하고 금창리를 ‘사찰’했으나 결과는 아무런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렇듯 금창리 핵위기 사건은 실재하지도 않는 북한 핵무기개발에 대한 의혹을 일으킴으로써 긴장을 고조시키고 전쟁도 불사한다는 미국 의원들이나 지식인의 냉전낙인론, 일방주의, 람보주의, 우월주의가 결합한 결과이다. 그러고도 이에 대한 사과나 유감의 표명도 없는 뻔뻔스런 모습을 보이는 미국이야말로 오늘날 지구촌의 가장 큰 불량국가 또는 황야의 무법자임을 누구도(최소한의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부정 못할 것이다.

금창리 전쟁위기에서 확인된 가장 큰 문제점은 미국이라는 외세가 인공위성 사진 등에서 기후조건이나 다른 밝혀지지 않은 요인에 의해 이상징후만 나타나면 그것을 곧 바로 핵개발로 단정지어 한반도에 전쟁위기를 몰고 오는 데 있다. 이는 미국이 무언가 의심을 하기만 하면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가 바로 경각에 달린다는 기막힌 현실을 말한다. 최근 금강산댐 안정성 문제제기도 다분히 미국의 음모적인 인공위성 사진 유출에 의한 것이다(주4). 왜 이러한 미국의 놀음에 우리의 죽고 사는 문제가 농락 당해야 하며 남북관계가 조금이라도 개선될 기미만 보이면 미국의 인공위성 사진 유출과 같은 딴지걸이에 의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하는가?

II. 2003년 한반도전쟁위기설과 임박한 전쟁징후

1. 2003년 한반도전쟁위기설

2001년 3월 부시대통령과 가진 첫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은 김대중대통령의 임기 중 최대목표인 한반도평화선언을 일고의 여지없이 허물어뜨리더니 2002년을 전쟁의 해로 선포하여 전쟁의 먹구름을 한반도에 몰고 오는 듯했다. 임동원 특보는 2002년 3월 19일 "1년 이내에 상당한 수준의 북미관계 진전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1994년 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싼 위기 때와 같이 한반도에 안보위기가 올 수 있다"라고 ‘2003년 한반도정쟁위기설’을 우려했다. 또 김대중대통령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의 정체, 불안정해진 한반도 정세를 언급한 사석에서 “평화를 확고히 구축하지 못하고 임기 말을 맞는 게 천추의 한”이라고 전쟁위기를 암시했다. 94년 영변핵위기 당시 미국 측 협상대표였던 갈루치 조지타운대 국제대학원장은 4월 10일 미 군축협회 주최로 열린 기자회견에서 “현재의 상황은 내가 협상을 벌였던 1993년과 94년을 생각나게 한다”고 말해 ‘2003년 한반도전쟁위기’를 확인했다(<경향신문>, “북핵 위기론 재 부상 실체 없는 수수께끼”, 2002.4.29).
이에 임동원 특사는 평양을 급히 방문했고 이후 4월 20일 미래전략연구원 창립 1주년 포럼에서 전쟁위기 사태의 심각성을 토로했다.

1994년 상황에 대해 미국 사람들은 '전쟁 직전 기적이 일어났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태가 다시 와야 되겠습니까? 작년 가을부터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을 들어봤을 것입니다. 이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미국, 일본과의 정상회담도 있었고, 저 역시 한반도 평화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 평양을 다녀왔습니다.

이러한 2003년 전쟁위기는 다섯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첫째, 경수로발전소 공기지연에 따른 보상문제이다. 94년 영변핵무기 개발의혹에 즈음해 발생한 전쟁위기를 북한과 미국은 10?21북미제네바협정으로 극복했다. 이 협정은 미국은 북한에 경수로 원자력발전소 2기를 2003년까지 공급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경수로공사 지연으로 인해 공급이 2008년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북한은 전력수급에 차질을 빚어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될 것이고 응당 이에 대한 배상을 미국에 청구할 것이다. 부시미국은 이를 이미 거절하고 있어 2003년에 보상문제가 매듭지어지지 않으면 북한은 핵동결 조치를 해제하여 다시 중수로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할 것이고 이 경우 전쟁을 통해서라도 대량살상무기를 反확산시키겠다는 미국의 전쟁주의와 마찰이 생겨 한반도 전쟁위기는 고조될 것으로 보인다.

둘째, 북한 과거핵에 대한 특별사찰을 2003년 이전에 받을 것을 미국이 느닷없이 쟁점화하고 있다. 제네바협정은 특별사찰 시점을 “경수로 핵심부품을 인도하기 전”과 함께, 경수로 사업의 상당 부분이 완료될 때”로(When a significant portion of the LWR project is completed, but before delivery of key nuclear components) 규약하고 있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는 내부적으로 2005년 5~6월을 핵심부품 인도시기로 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갈루치는 “핵심부품에는 비핵관련 부문과 핵관련 부문이 있다”면서 “비핵관련 부문을 먼저 인도하고 핵관련 부품을 나중에 인도하면” 특별사찰을 2003년에 실시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또 사찰기간도 IAEA는 3-4년을 잡고 있지만 갈루치는 핵사찰 기술이 발전한 만큼 몇 개월이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부시행정부의 의도적인 위기조성에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경향신문>, “북핵 위기론 재 부상 실체 없는 수수께끼”, 2002.4.29).

94년 영변핵위기 당시 미국과 IAEA는 기술적인 필요성을 근거로 북한에 대해 온갖 ‘긁어 부스럼 만들기’를 일으켜 전쟁위협을 획책했고 이 때 IAEA는 완전히 미국의 꼭두각시였다. 지금도 KEDO나 IAEA는 미국 장단에 맞춰 춤추면서 한반도전쟁위기를 조장하는 광대역할을 할 것으로 우려된다.

그러나 핵파동을 계기로 북한이 비공개 양해각서를 공개함으로써 미국의 핵사찰 조기 주장은 터무니없는 사기극임이 드러났다. 기본합의문 제4조와 비공개 양해각서 제7항은 `경수로사업의 상당 부분`을 ‘터빈과 발전기를 포함한 제1호 원자로용 비핵 주요부품의 인도’ ‘제1호 원자로용 터빈 수용 건물 및 부속 건물의 완공’ ‘제1호 원자로의 원자로용 건물과 그 부속건물의 완공’으로 규정하고 있다.

셋째, 북한이 10?12북미공동성명 당시 미사일 개발 및 발사를 2003년까지 유예했고 이전에 미사일협상을 매듭지을 것을 요구하고 있는 점이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암묵적으로 합의한 10 억불상당의 보상이 북미미사일 협상에서 2003년까지 타결되지 않을 경우 북한은 미사일 개발과 발사에 대한 유보를 해제할 것이다. 이 경우 전쟁을 통해서라도 대량살상무기를 反확산시킨다는 부시의 전쟁 의존적 군사정책이 곧바로 북한에 적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북한의 미사일개발은 북한주권의 문제이며 외화벌이의 수단이다. 개발과 수출을 중단할 것을 미국이 요구한다면 북한이 이로 인해 입게 되는 손실을 보상하는 것은 미국의 당연한 의무이다. 미국이 보상을 해 줄 의사가 없다면 북한의 주권행위인 미사일 개발에 간섭하지 말아야 할 문제이다.

넷째, 미국의 이지스함 북한해안 배치계획이다. 영국의 디펜스 위클리 보도에 의하면, 동해에 SM-2 블록4 요격미사일 30기를 장착한 이지스함 두 척을 2003년까지 북한에서 20~50km 떨어진 해상에 배치를 구상하고 있다한다. 또 4~5년 안에 50기의 SM-3 블록1 요격미사일을 장착한 이지스급 순양함 두 척을 북한에서 150~550km 떨어진 해상 배치해서 대기권에서 북한미사일에 대한 요격을 가능하게 한다고 한다. 이러한 군사적 조치는 북한에 대한 전쟁준비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2002년 6월 14일 월포위츠 미국방부 부장관이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ABM협정을 넘어서'라는 글에서 '해상발사 요격미사일 배치를 2004~5년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한겨레신문} 2002.6.15). 이를 미루어보아 2004-5년에 북한 해안 가에 배치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미국이 전쟁을 쉽게 벌리는 조건을 만들게 된다.

다섯째, 남한 정권교체로 부시-이회창 연대가 형성되어 과거 레이건-나카소네-전두환 연대구도를 재연할 가능성이 높다. 이 새로운 연대는 동북아협력체의 추진과 한반도 전쟁예방 역량을 후퇴시키고 오히려 전쟁 부추기기를 자행할 것으로 예견되어 전쟁 촉발 가능성을 한층 높여줄 것으로 우려된다.

이들 요인에 의한 2003년 전쟁위기의 심각성을 공동 인식한 남과 북은 임특사와의 공동보도문에서 “쌍방은 최근 조성된 한반도정세와 민족 앞에 닥쳐온 엄중한 사태, 그리고 남북관계에서 제기되는 제반문제들에 대하여 폭넓게 협의하고” 전쟁예방을 위해 서로 6.15선언정신으로 남북관계를 복원시킬 것을 합의했다. 또한 5대 과제―경의선 연결, 금강산 육로관광, 개성공단 건설, 군사적 신뢰 구축, 이산가족상봉 정례화―를 진척시켜 한반도 안보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적극적인 전쟁방지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는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축소하겠다는 정책이다.

2. 임박한 전쟁징후

미국은 올해 1월부터 느닷없이 ‘악의 축’을 꺼내면서 이라크와 북한 및 이란을 살생부에 공개적으로 올려 놓았다. 이에 이곳 남녘 땅 민중, 시민, 사회 단체들 700여 개가 모처럼 한 목소리로 전쟁반대, 미국반대를 외치면서 성남공항으로, 그림자 시위로 도라산까지 쫓아다니며 악귀를 쫓아내는 굿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미국은 한 발자국 물러섰지만 여전히 전쟁의 불씨를 지피고 있었다.

전쟁의 불씨가 전쟁국면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부랴부랴 임동원 특사가 북한을 방문해 남북은 6.15공동선언을 복원시켜 남북공조로 이에 대비한다는 합의에 이르렀다. 이로써 94년 6월 전쟁을 마치 부추기는 듯하다가 마지막 전쟁이 임박해서야 비로소 공포에 싸여 클린턴에게 전화를 걸어 32분 동안 싸우면서 전쟁은 안 된다고 고함만 질러댄 김영삼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당연하고 현명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이것도 잠시, 금강산댐(북측은 임남댐)의 인공위성 사진이 미국에서 흘러나오면서 금강산댐 안정성 문제가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갑자기 옛날 전두환의 금강산 댐 수공위협이라는 사기극이 재연되었다. 덧붙여 최성홍 이라는 철부지 외교장관이 북한은 장대로 쥐어박아야 무언가 정신을 차린다는 식의 친미예속사대주의 발언을 함으로써 남북공조의 복원은 다시 암초에 걸려 버렸다.

여기에다 핵태세보고서라는 비밀보고서가 나와 미국의 한반도 전쟁위협이 뻥치는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핵 공격대상 가상 7개국의 명단에 북한이 들어 있고, 선제 핵공격 최우선 목표 5개국에 북한을 넣으면서 "즉각적이고 잠재적이며, 예기치 못한 돌발 상태가 가능한 나라"로 지목했고, 핵 선제 공격 구체적 사례로 첫 번째 들먹인 것이 '북한의 남한 공격' 이었다. 이렇듯 한반도는 미국의 선제핵공격의 0순위에 올라 와 있었다.

어디 이 뿐인가? 3월 말에 발표된 ‘미 의회 한반도 보고서’는 미국이 햇볕정책을 지지하지 않고, 북한을 테러국 명단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한국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4자회담에 의한 평화협정에 회의적이고, 북한의 재래식 무기의 감축과 휴전선 부근의 군사력철수를 요구하고, 2003년 이전에 북한의 과거핵사찰을 요구하고 아니면 경수로 중단을 해야하고, 미사일협상에서 보상문제를 부정적으로 보고, 재래식무기에 대해 남북협상에 의한 해결방안에 반대하는 등 6.15공동선언 죽이기 원칙을 열거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입에서는 “평화를 확고히 구축하지 못하고 임기 말을 맞는 게 천추의 한”이라는 자조적인 한탄이 터져 나왔다.

바로 이 시점에서 서해에는 99년 6월의 1차교전에 이어 6월 29일 2차서해교전이 발발했다. '전쟁 한번 해요. 한번만 똑바로 하면 안 들어온다'(한나라당 강창성의원) 식의 전쟁광적인 막말이 난무했다. 이에 남한 군부는 기존의 전쟁억제 지향의 5단계 교전수칙을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3단계로 단순화하여 선제공격 지향적인 작전지침을 하달했다. 더 나아가 이상희 합참 작전본부장은 “앞으로는 북 함정의 NLL 침범징후만 포착돼도 해군 뿐 아니라, 공군전력, 백령도 연평도에 위치한 지상군 전력이 합동으로 대응하”며?공군전투기의 초계비행 범위도 NLL 부근 쪽으로 확대된다"고 밝혔다.

이로써 우발적이고 사소한 충돌이라 할지라도 육해공 합동작전이라는 전면전을 상정한 대응을 취하게 되어 한반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고 가게 된다. 또한 막가파 부시미국이 2003-4년 전개할 것으로 보이는 한반도전쟁획책에 이러한 우발적 충돌이 전쟁 빌미를 노리고 있는 미국에게 낚시 밥을 제공해 주는 꼴이 될 것이다. 한반도에 전쟁의 먹구름은 더욱 더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또 앞에서 밝혔지만 2002년 9월에 미국이 금창리핵위기 당시 북미제네바합의를 위배하고는 여전히 비밀 대북 핵전쟁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에다 9월 20일 발표된 부시 독트린이라는 미국의 신국가안보전략은 선제공격, 미국단독행동, 대량살상무기 반확산을 위해 선제공격, 북한 제2의 이라크화, 미국의 압도적 군사우위 유지, 미국군사력 도전의 씨앗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영속적인 무소불위 패권주의 등을 선언해 세계를 경악케 했다. 특히 북한을 이라크 다음으로 불량국가로 규정하여 제2의 이라크 가능성을 더 한층 높였다. "북한은 지난 10년 동안 세계의 주요탄도미사일 조달처였"어며 "북한은 (판매용의) 점점 더 성능 좋은 미사일을 시험해오면서 자신들의 대량파괴무기도 개발했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번 여름 한국이 월드컵으로 ‘붉은 악마’의 망령에 취해 신들린 세상을 구가하는 동안 미국은 대북한 비밀계획인 대북한군사시설 공격을 검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0월 17일자 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대량살상무기를 목표물로 상정하고, 남한정부에게는 비밀로 한 체 기습공격을 하는 방안이 미 국방부에서 검토되었다. 이에 파월국무장관과 파고태평양함대사령관 등이 대북한 기습공격 계획을 서둘러 덮었다고 한다.

역사적인 북일정상회담이 열리는 시점에 맞추어 체니부통령은 북한 핵무기 보유설을 기정사실화 했다. 국내 반민족적인 주류언론은 사기극인 줄 뻔히 알면서 북한 핵보유를 기정사실화 했다.

이렇게 올해 들어서도 미국의 전적인 주도에 의해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고조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대북한 전쟁위협은 부시미국의 기본적인 한반도정책의 결과물일 수밖에 없었다.

부시의 한반도정책의 골간은 ‘일방적 양보불가론’, ‘엄격한 상호주의론’, 과거핵에 대한 철저한 검증론과 2003년 사찰론, 한반도평화선언 불가론, 북한먼저 재래식 무기 감축론, 북한 빌미 MD론, 대량살상무기 반 확산의 첫 표적론, 북한병력 후방배치론, 대북한 핵선제공격론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주5) 이들 세부정책은 그야말로 황야의 무법자식으로 국제정치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국제주의를 배제한 완벽한 일방주의와 지배적패권주의(domination-oriented hegemony)의 발로이다.

III. 북한의 변화와 동북아협력체 및 한반도시대의 서막

위기는 기회를 몰고 온다는 이야기처럼 7월이 접어들면서 한반도 전쟁위기에 대한 돌파구가 북한 쪽에서 나타나면서 동북아 전역으로 확대되어 새로운 기대와 전망이 솟아오르는 듯 했다. 이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합주곡 형태의 동북아지각변동이라 일컬을 만큼 질적인 변화를 잉태하고 있다. 이들 지각변동을 북한, 남북한, 동북아, 아셈 수준에서 살펴보고 이에 대한 평가를 내려보겠다.

첫째, 북한의 개혁개방이다. 지난 7월 북한이 임금인상, 배급제의 제한적 철폐, 환율인상, 물가인상 등 경제 현실화 조치를 취했다. 이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개혁인 시장경제 형태를 접목시키는 본격적인 신호로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곧바로 자본주의의 도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경제 형태가 국가사회주의와 결합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시장경제는 비공식 수준이지만 이미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고난의 행군‘기간 극심한 식량난으로 인해 북한에는 무려 350여개의 시장이 상존하고 있었고, 북한 주민의 90% 이상이 이 시장경제를 경험했으며, 총생산액의 약 25%를 차지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 조치로 이제까지 시민사회의 변화에 소극적으로 적응하는 ’수동적인 적응정책‘에 머물던 북한이 이제 정부가 앞서서 적극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능동적 개혁정책‘으로 전환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본격적인 시장경제의 활성화가 북한 내부에서 이루어질 전망이다.

이어서 신의주 특구가 발표되면서 사회주의 북한 속에 자본주의인 신의주라는 두 개의 경제체제를 결합시킨 파격적인 변화를 내외에 보여 주었다. 이는 북한변화의 정도가 그들의 공식적인 표현인 개선 정도가 아니라 급진적 개혁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갑자기 급조되었거나 일시적인 현상이 결코 아니다. 북한의 장기적 생존권 확보차원에서 철저히 계획되고 준비된 변화이다. 북한은 미국이나 일본의 천민자본주의가 아니라 사민주의인 스웨덴 등 유럽자본주의를 오랜 동안 연구해 왔고, 2000년 11월에는 핵심 일꾼 400여명이 유럽, 호주, 중국 등에서 시장경제를 학습시켰다. 신의주 특구 역시 이미 주민이동, 도시계획 등 오랫동안의 준비를 그친 예정된 행보였다.(주6)

둘째, 남북관계 또한 6.15국면으로 복원되었다. 서해교전에 대한 북한의 유례 없는 유감표명과 함께 진척된 경의선 및 동해선 착공, 휴전선 철조망 제거, 아시안게임에 650여명의 북한 선수와 응원단 참가, 남북 직통전화 개설, 8.15민족공동행사, 통일축구, 이산가족 상봉, 병력 50만 감축설 등으로 6.29서해교전에서 오는 전쟁위협의 우려가 가시면서 6.15국면이 다시 가동되었다. 이제 남한은 북한의 급진적인 개혁과 개방을 맞아 이제까지 공언하고 약속한 대로 이를 전적으로 지원하고 남북공조를 강화해야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

셋째, 충격적인 북?일 정상회담에 이어 북?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청사진이 짜여졌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셈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남북대화, 일북대화와 함께 미북대화를 병행, 추진해 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미북대화가 조속히 재개되기를 기대한다"고 미국을 한 목소리로 압박했다. 또 일본수상은 단독 기자회견에서 북미대화를 촉구했다. 북?일간의 비밀회담을 일년 간 끌어오면서도 미국에 통보하지 않는 일본의 행보와 한일공조로 미국에 대한 압박을 전개한 것은 남한과 일본의 현대 외교역사에 전례 없는 대미 자주적인 외교 행보이다. 미국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일본이나 남한의 외교가 독자적인 위상을 찾고 이 과정에서 북한과 러시아와 공조를 취한 것은 동북아 협력구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기에 충분하다.

넷째, 북?러 간에 한해에 두 번의 정상회담이 열리고, ‘철의 실크로드’가 합의되고, 북일 정상회담에 대한 러시아의 막후 지원이 이루어졌다. 경의선과 동해선으로 남북종단철로가 열리고 이것이 시베리아횡단철로로 연결되면 부산에서 파리 및 스칸디나비아까지 이어지는 철의 실크로드가 뚫리게 된다. 이는 한반도가 물류기지로서의 새로운 위상을 갖게 되며 동북아를 서로 꿰어 동북아경제협력체를 일구는 토대가 될 것이다. 이는 1984년 남북 경제회담에서 북녘 대표가 처음으로 제안했던 것이고. 김일성 주석이 1994년 6월 말 벨기에 노동당 대표에게 밝혔던 구상이다.

다섯째, 26개국 정상이 참여한 아셈회의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와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화답한 아셈회의는 햇볕정책 지지와 평화적 조미관계를 권유하는 `한반도 평화선언'을 발표하게 이르렀다. 이제 세계적 수준에서 한반도와 동북아문제에 대한 이해와 공조를 확보한 셈이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의 중국 상하이 방문과 신사고 선언 등이 이들 큰 물결과 결합되어 있다.

이들 남북한과 동북아 및 아셈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큰 변혁의 흐름은 남북한 개별적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 러시아, 중국 등과 합주곡을 울린 결과이고, 동북아라는 큰 지각의 총체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으며, 앞으로 미국의 일방주의가 지배하는 동북아에서 벗어나 탈미의 동아시아공조체제의 서막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총체적 구도 속에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올바른 위상을 가지고 그 진전이 기대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지각변동은 한반도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해 준다. 경의선과 동해선의 복원이 시작되어 냉전의 철벽인 뚫리기 시작했고, 남북종단 철로가 개통되고, 더 나아가 시베리아와 중국의 동북3성이 한반도와 유기적으로 결합될 전망이다. 이들 여러 움직임은 남북한 개별적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일본, 러시아, 중국 등과 합주곡을 울린 결과이고, 앞으로 지속적인 동아시아공조체제의 서막일 수 있다.

이렇게 남북공조와 동아시아 공조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전쟁광이 득실거리는 공화당 지배의 미국과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본과 남한 내 친미예속사대주의들의 책동에 대비해 우리의 민족생명권을 확보할 수 있는 첩경임을 직시해야 한다. 동시에 이 과정에서 우리 남과 북은 민족공동체로 또 동아시아는 유럽연합과 같은 동아시아협력체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반도, 동아시아 및 세계의 평화는 물론이거니와 북한, 시베리아, 중국동북3성의 경제개발로 남한, 일본, 러시아, 중국 등에 수 십년 간의 경제활성화를 가져오면서 경제공동체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동시에 세계경제에도 활력을 불러 올 것이다.

이러한 탈미(脫米) 동아시아협력체의 길에 남과 북은 공조와 자주로 조정자와 균형자로서 그 직분을 정립함으로써 21세기 동아시아와 함께 하는 한반도시대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맡은 바 역사적 직분을 다할 때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지 그냥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 직분은 바로 미국의 제국주의세력,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본과 남한 내 친미예속사대주의들의 반역사적인 책동을 극복하는 실천이다.

IV. 북핵위기의 가려진 진실과 그 본질

9월말이 되면서 동북아협력체의 서막으로 한반도 전쟁위기에 대한 다소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게 되는 가 했더니 곧바로 북한 핵무기개발의혹이 불거지면서 또 다시 한반도 긴장이 높아지고 2003년 한반도전쟁위기설이 조기에 가시화되지 않을까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탈미 동북아협력체의 출발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서장에 반역사적인 책동이 시작된 것이 바로 켈리특사의 방북을 계기로 형성된 북핵위기이다. 94년이나 98년의 핵위기와 마찬가지로 이 번에도 본질적으로는 과거와 비슷한 유형이 나타난다.

첫째, 미국의 일방주의적 대북한 생명권 침해기도에 의해 핵위기가 초래되었다. 91년의 핵위기는 미국이 중국이나 프랑스 등 핵안정협정을 체결하지 않는 여타 나라들은 문제삼지 않으면서 북한에게만 이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면서 전쟁위기가 초래되어 북한의 생명권이 위협받았다. 94년 역시 미국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지하기로 했으나 93년에 이를 재개해 북한 생존권을 일방적으로 위협함으로써 전쟁위기가 발생했다. 99년 금창리핵위기의 경우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단지 인공위성 사진으로 북한의 제네바합의 위배로 단정짓고 전쟁위협까지 벌렸다.

이번의 경우도 미국이 북한을 2002년 연초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태세보고서나 부시독트린에서 핵 선제공격을 노골화함으로써 북미제네바합의를 위배한 채 북한 생명권을 위협했기 때문에 북한이 핵카드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위기가 초래되었다. `조미관계 선린우호관계 이후 우려사항 저절로 해소`라는 10월11일자 조선중앙통신 논평에서 북한은 “우리에 대한 <악의 축>교리를 들고 우리를 핵선제공격 대상으로 선정한 미국의 적대시정책이야말로 조선반도의 군사정세를 긴장시킬 수 있는 기본우려사항이며 조미관계개선을 방해하는 첫째가는 장애물이다"라고 미국의 생명권 위협을 지적했다.

멕시코 한미외무장관 회담이후 미국관리가 밝힌 바에 의하면 “북한 관리들이 미국인들에게 부시 대통령이 연초 북한을 `악의 축` 가운데 하나로 지목한 뒤에 위협감을 느껴 핵무기 개발 계획에 착수한 것으로 밝혔다”고 전한 것도 이번 핵위기 역시 이러한 미국의 북한 생명권 위협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해준다.

둘째, 미국의 핵위기 조성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가능성에 대한 위기 조성이지 구체적인 핵무기개발 계획이나 진행과 같은 행위에 대한 위기 조성은 아니다. 일종의 국가보안법과 같이 행위보다는 사상을 벌하는 것과 맥을 같이하는 위기조성이다. 91년은 북한이 핵안정 협정에 가입하지 않으면 핵무기 개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핵위기를 조성했고, 94년의 경우 흑연감속제 완자로는 핵무기 원료인 플라토늄 239를 생산해 핵무기로 사용될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곧, 북한이 구체적인 핵무기개발을 하고 있었거나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번의 경우도 농축우라늄 보유는 발전소용이나 핵무기용으로 쓸 수 있지만 핵무기용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미국은 핵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셋째, 냉전낙인론 때문에 핵무기 개발에 대한 섣부른 단정론이 등장하여 사실확인이나 검증 없이 북한 핵무기개발 의혹은 곧 기정사실화 되었다. 정욱식의 주장처럼 지역이나 규모 및 개발과정 등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 확인이 없었고 ‘고농축우라늄 보유 시인’에 대해서도 확인이 되지 않은 상황이며 단지 추론 수준에 불과하다. 북한에 대한 의혹만 제기되면 쉽게 ‘북한은 으레 그래’면서 단정론으로 치닫는 것은 이 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여기에는 북한측의 확인도 부인도 않는 모호한 생존전략이 단정론을 부추기는 데 기여했다.

북한은 10월 25일 외무성 대변인의 발표를 통해 “미국 특사는 아무런 근거자료도 없이 우리가 핵무기 제조를 목적으로 농축 우라늄계획을 추진하여 조-미 기본합의문을 위반하고 있다고 걸고들면서 그것을 중지하지 않으면 조-미대화도 없고 특히 조-일관계나 북남관계도 파국상태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였다”고 반박했다.

넷째, 제네바합의 위배 책임을 북한에 일방적으로 전가하고 있다. 금창리핵위기 당시 확인도 되지 않는 인공위성 사진만을 근거로(추후에 사실무근으로 판명되었지만) 북한이 제네바합의를 위배했다고 전쟁위협까지 불사했듯이 이 번에도 농축우라늄 보유설만으로 합의 위배와 그 책임을 북한에 일방적으로 덮어씌우고 있다. 북한은 제네바합의에 관한 한 앞의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의 지적처럼 우라늄농축설이 제기되기 이전까지는 합의사항을 충실히 이행했고 아래의 10월 25일자 북한 외무성 담화처럼 위배를 주도한 것은 미국이다.

1994년 10월 조미기본합의문이 채택되었으나 미국은 그 이행문제에 대해 이미 말할 자격을 상실한지 오래다...결국 기본합의문의 4개 조항중에 미국이 준수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우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선제 공격 대상에 포함시킨 것은 명백히 우리에 대한 선전포고로써 조-미공동성명과 조-미기본합의문을 완전히 무효화시킨 것이다. 부시행정부는 우리에게 한 핵선제 공격을 정책화함으로써 핵무기 전파방지조약의 기본정신을 완전히 유린했으며 북남 비핵화공동선언을 백지화해버렸다. 부시행정부의 무모한 정치 경제 군사적 압력책동으로하여 우리의 생존권은 사상 최악의 위협을 당하고 있으며 조선반도에는 엄중한 사태가 조성되게 되었다.

다섯째, 반면 미국이 북한에 관한 한 북미합의나 국제협약 등을 위배한 경우는 쟁점화가 되거나 핵위기가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 임동원수석도 지적했지만 94년의 북미제네바합의를 미국은 제대로 지키지 않고 지연이나 부분적 이행에 그쳤다. 여기에다 핵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소극적 안전보장을 위배하고서 미국은 악의 축, 핵태세보고서, 부시독트린, 98년 BDU-38의 모의 핵전쟁연습 감행, 2002년 여름 비밀 대북한 공격계획 등으로 북한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그런데도 미국의 이러한 위배는 국제사회의 쟁점이 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에 면죄부를 안겨 주면서도 확인되지 않는 북한의 핵무기개발시인에 즈음해서는 세계가 야단법석인 것은 분명히 불공정행위이고 ‘힘이 법이다’라는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여섯째, 미국이 북한에게 2003년 과거 핵 사찰을 강요한 것은 제네바합의에 의해 정당하다는 것은 허구임이 드러났다. 미국은 금창리핵위기 당시도 국무성과 백악관 등에서는 의아심을 가진 그래서 확인되지 않는 인공위성 사진을 근거로 핵무기개발을 단정하고 전쟁위협을 벌려 결과적으로 사기극을 벌렸다. 부시 정권 등장이후 지속적으로 추구한 ‘과거 핵에 대한 철저한 검증론과 2003년 사찰론’은 제네바 기본합의문 비공개 양해각서가 공개됨으로써 허구임이 드러났다. 기본합의문 제4조와 합의문에 따르는 비공개 양해록 제7항은 `경수로사업의 상당 부분`을 ‘터빈과 발전기를 포함한 제1호 원자로용 비핵 주요부품의 인도’ ‘제1호 원자로용 터빈 수용 건물 및 부속 건물의 완공’ ‘제1호 원자로의 원자로용 건물과 그 부속건물의 완공’으로 규정하고 있어 2003년에 과거 핵사찰을 받아야 한다는 미국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날조임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일곱째, 미국은 10월 17일 북한 핵무기개발 ‘시인설’이 언론에 공개되자 바로 이튿날 제네바합의 파기설을 확산시켜 핵파장을 일파만파로 확대시키고 그 책임을 전적으로 북한에 귀착시키려 시도했다. 본래 한미일간에 아펙정상회담에서 논의하기로 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언론에 노출시켜 파장을 확대시켜 동북아의 일본이나 한국 등이 동북아협력체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에 강력한 제동을 거는 효과를 거두려한 것으로 추론된다.

미국은 멕시코 한미외무장관 회담이후 미국관리는 “북한 관리들이 미국인들에게 부시 대통령이 연초 북한을 `악의 축` 가운데 하나로 지목한 뒤에 위협감을 느껴 핵무기 개발 계획에 착수한 것으로 밝혔다”고 전했다. 북한관리가 핵카드를 이용하기 위해 아주 모호하게 핵개발의혹을 흘렸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북한의 생존전력의 하나인 NCND 설을 미국은 구미에 맞게 확대해석 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북한은 외교부 대변인 성명에서 “우리는 미국 대통령 특사에게 미국의 가중되는 핵압살 위협에 대처하여 우리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주었다”고 밝힌 것처럼 실제 농축우라늄을 실험실 수준에서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고 이를 은근히 미국에 암시함으로써 핵카드로 미국을 협상으로 유인하는 전략을 꾀했을 가능성이 높다.

동북아협력체의 출발로 장기적 생존권 구도를 출범시킨 북한이 내적인 개혁개방과 신의주 특구의 성공을 위해서도 동북아협력체의 골간인 북일수교나 배상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기에 핵카드의 활용은 바람직한 생존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오히려 역이용하여 북한악마만들기에 몰두해 파기설을 일부러 흘리면서 사건 확대를 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종합해 볼 때 이 번의 핵위기는 아래의 본질적 속성을 가진다고 보여진다.

첫째, 일부에서 말하듯이 켈리특사의 무례함에 우발적으로 대응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시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핵카드를 사용하기 위해 북한이 의도적으로 시인도 부인도 아닌 아주 모호하지만 시인 쪽으로 무게를 실리게 하는 방식으로 미국이 핵무기개발 의혹을 가져 협상에 임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둘째, 핵카드는 핵문제의 개별적 사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전쟁위협, 북한의 개혁개방, 동북아협력체의 서막과 총체적으로 관련된 결과물로 제기되었다. 미국의 전쟁위협에 직면해서 단기적 생명권을 확보하고 동시에 신의주 특구나 경제개혁 및 북일수교 및 배상금에 의한 경제력 신장 등을 통한 장기적 생존권을 확보해야하는 북한으로서는 동북아협력체의 출범과 북미관계개선이 필수조건이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라면 북한에 유리한 시기를 잡아 활로를 모색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고 이번의 시기 선정은 적절한 선택이라고 보여진다.

셋째, 북한은 서해교전에 대한 유감표명, 일본인 납치에 대한 인정, 홍콩 식의 자본주의적 신의주특구 설정 등 혁명적 변화를 보임으로써 미국이 북한의 ‘모호한 방식의 시인’을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로 인정하여 선의로 받아주기를 바랐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지만 미국이 대량살상무기에 대해 외교적 노력으로 비확산(non-proliferation)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무력을 통한 반확산(counter-proliferation)을 꾀한다는 군사패권주의를 노골화하고 있는 점을 북한은 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악의 축, 부시독트린, 핵태세보고서 등에서 계속해서 선제핵공격 0순위에 올려놓고 제2의이라크화를 시도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북한악마만들기로 대응할 것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넷째, 비록 미국의 북한악마만들기와 전쟁위협을 강화한다 하드라도 북한은 이미 남북관계의 급속한 진전, 일본과의 정상회담과 수교협상에 대한 합의, 러시아 및 중국과의 철의 실크로드 등으로 동북아협력체의 서막을 열었고, 또 아셈에서 한반도평화선언 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라크와는 달리 미국의 전쟁위협이나 북한 악마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간파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더구나 이라크와의 전선을 확정시키고 있는 시점을 고려한다면 지금이 미국의 행위에 제약을 가할 수 있는 최적의 시기라고 보아야 한다. 미국의 전쟁제일주의에 대한 지구촌의 반전여론과 반미주의가 성장하고 있는 점도 북한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다섯째, 앞의 2003년 한반도전쟁위기설과 임박한 전쟁위협을 보아 2003년으로 북미관계개선을 넘기게 되면 미국이 보다 제약을 덜 받게 되어 북한주도의 게임이 아니라 미국주도의 게임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아 북한의 협상력이 저하되는 것을 고려해 보다 조기에 핵카드를 던진 것이라 보여진다. 경수로 공급기일, 미사일 유예기간의 마지막 해, 남한정권 교체, 과거 핵사찰 기일 등이 2003년에 한꺼번에 문제화되면 복합상승작용을 해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을 우려했다고 볼 수 있다. 사태가 임박하기 이전에 협상으로 해결을 시도해야만 미국의 침략이라는 파국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섯째, 북한이 핵무기개발에 대한 시인 아닌 시인은 나름대로의 정당성이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곧, 부시의 ‘악의 축’ 위협이후 대비를 했다는 것을 미국관리에게 흘렸고, 외교부 대변인의 성명은 아래와 같이 정당화했다.

부시행정부의 무모한 정치 경제 군사적 압력책동으로하여 우리의 생존권은 사상 최악의 위협을 당하고 있으며 조선반도에는 엄중한 사태가 조성되게 되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우리가 팔짱끼고 가만히 앉아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보다 더 단순한 사고는 없을 것이다...미국의 가중되는 핵압살 위협에 대처하여 우리가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명백히 말해주었다.

이러한 북한의 핵무기개발의도에 대한 정당화 주장은 대북선제공격론을 노골화하는 부시정책에 비춰 설득력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럼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핵질서 파괴자로 북한이 낙인찍히는 것이나 미국의 일방적 제네바합의 파괴자로 모는 것에 대한 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일곱째, 비록 미국이 ‘평화적 무장해제’라는 수사어를 쓰면서 지금은 평화에 무게를 싣고 있지만 지배적 패권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부시의 속셈은 무장해제에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국제적 상황이 유리할 때는 언제라도 전쟁에 의존할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러므로 현정부와 차기정부 및 민중시민사회는 전쟁이라는 파국을 만드는 데 전력을 투구해야 하고 이를 수행할 역량이 있는 정권을 창출해야 한다.

여덟째, 미국은 이번 핵위기를 빌미로 막 태동하려는 동북아협력체의 형성을 분쇄하기 위해 진력을 다할 것이다. 이에 대한 차기정부의 장기적 안목과 대비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및 21세기 한반도시대를 위해서도 동북아협력체의 형성은 필수적이다.

V. 94년 핵위기와 비교

이번 핵위기의 발단은 94년 제네바북미합의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고 동시에 전쟁위기로 점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94년의 핵위기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전쟁발발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 자리매김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비교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94년에 비해 이번 핵위기에 대한 전쟁통제력이 국내외적으로 높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내의 전쟁통제력은 한시적인 것임에 심각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2003년 2월에 등장할 차기정권이 대북 적대 및 강경 정권으로 귀착될 경우 국내 전쟁통제력은 행사되지 못하고 오히려 94년의 김영삼정권 식의 전쟁부추기와 같이 전쟁위기로 몰아갈 가능성이 훨씬 높다. 그러므로 다가오는 대선에서 전쟁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권을 창출시키는 것이 전쟁위협을 해소하기 위한 관건 가운데 하나이다.

1. 유사점

1) 핵위기로 인해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는 극도의 위험상황.
94년에는 1시간만 늦었더라도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2) 미국언론과 한국언론의 냉전낙인론
: 사실확인이나 검증도 없이 무조건 북한은 으레 저래라는 식의 냉전 낙인론 난무

3) 친미예속사대주의자인 국내주류의 부화뇌동하는 작태
: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다운 사이비 한국인

4) 서울불바다 언급을 과잉 왜곡해 전쟁준비를 서둘게 한 것처럼
무례한 미국특사의 언사에 대한 강석주 답을 곧 바로 핵무기개발 시인으로 확대 해석하여 기정사실화 함

2. 다른 점1--미국 및 세계정세

1) 패권주의 성격
94년: 클린턴정부의 지도적 패권주의(leadership oriented hegemony) 요소와 국제주의
02년: 부시정부의 막가파식의 지배적 패권주의(domination oriented hegemony), 전쟁위협론, 일방주의

2)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정책기조
94년: 클린턴정부--외교적으로 비확산시키는 정책
02년: 부시정부--전쟁을 통해서라도 반확산시킨다는 정책

3) 미국의 지하시설 파괴무기 수준
94년: 제대로 개발되지 못해 전쟁 발발시 서울의 막대한 피해 예상
02년: 높은 수준의 무기 개발로 서울 피해 수준이 94년보다 낮을 것으로 예측
: 04년 북한해안 이지스함 배치로 TMD 미국의 전쟁부담 경감예상

4) 제2전선 유무
94년: 제2전선 없었음
02년: 대 이라크 전쟁 현안과 남한의 정권교체로 전쟁위기 국면 조성이 의도적으로 늦춰질 가능성.

5) 국제적 전쟁 견제력
94년: 견제력 행사되지 못함
02년: 아셈의 한반도평화선언, 한일정상회담에서 미국에 북한과 대화 촉구
: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국제적 저항 고조
: 세계적인 반전운동 고조

3. 다른 점 2--한국의 대응

1) 정권의 전쟁예방 역량
94년: 전쟁부추기기 정책 일관.
: 마지막 순간 전쟁불가론 피력했지만 미국은 미동도 하지 않고 계획대로 전쟁진행.
02년: 금창리핵위기나 ‘악의 축’전쟁위기에서 임특사 방북과 같이 전쟁예방정책과 역량발휘

2) 대북정책 기조
94년: 북한붕괴촉진정책과 흡수통일정책
02년: 햇볕정책과 흡수통일배제 정책

3) 한반도 주변정세
94년: 중국이외에는 북한에 대한 이해와 지원을 하는 국가가 없었음
02년: 동북아 4개국이 북한의 입장을 이해하고 동조하는 상황

4) 정권교체
94년: 정권교체 없었음
02년: 차기정권이 대북 적대 및 강경정권 등장 경우 94년의 전쟁부추기기 정책 재판 가능성 높음
: 이라크전쟁 때문에 차기정권이 들어선 이후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위를 조성할 가능성 높음

5) 국내의 사회단체들의 전쟁통제력
94년: 통일운동 진영의 성명서와 긴급토론회 수준의 문제제기로 전쟁통제력 전무
02년: ‘악의 축‘전쟁위기 당시의 반전운동과 반미운동 고조로 전쟁에 대한 민중통제력이 향상

6) 남북공조
94년: 적대관계가 고조된 상태
02년: 최고조로 고조된 상태

VI. 해결방안

앞에서 우리는 이번 핵위기의 출발은 미국의 대북한 핵선제공격에 의한 북한죽이기 전쟁위협과 이에 대응한 북한의 생존전략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 북한의 생명권 보장은 남북한과 미국 3자간의 평화협정체결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이는 주한미군의 철군이나 군축 등 복잡하고 장기간이 요구되는 사항이다. 때문에 북한외교부는 단기적 해결방안으로 불가침협정을 요구했다. 동시에 경제발전에 장애가 되는 테러국 지정이나 경제봉쇄의 해제를 요구하고 자주권을 요구함으로써 장기적 생존권 보장을 요구했다.

사실 이러한 북한 생명권 보장은 북미제네바합의에서 미국이 합의한 것으로 미국이 일방적으로 위배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공정하고 바람직하며 정의로운 해결은 미국이 북미제네바합의와 2000년의 10.12공동성명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막가파 부시 미국에게 이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역시 골간은 북미기본합의의 기본 틀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동시에 보다 확실한 보증이 담보되는 형태로 해결이 되어 미국이 또 다시 이를 위배함으로써 핵위기가 반복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남한은 핵심당사자로서 문제해결의 주도자로서 위상을 확고히 가져야 한다. 94년 식으로 전쟁국면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해 민족생명권을 방기하는 일은 결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남과 북이 주인이면 주인답게 주도적으로 풀어 나가야 한다. 우리 모두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도 말이다.

첫째, 농축우라늄문제는 미국이 제네바합의의 소극적안보보장(NSA) 합의를 위배하고 북한죽이기 정책을 펼친 데 대한 북한의 생존권적 대응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미국이 북한에 불가침선언을 제공하고, 대신 북한은 농축우라늄 시설의 가동을 중단한다. 북한은 이 중단을 보증하기 위해 IAEA의 감시체제를 받아들인다. 이후 불가침협정이 체결되면 농축우라늄시설에 대한 사찰을 받고, 경수로가 완료되는 시점에서 이를 폐기한다. 아니면 정욱식의 제안처럼 미국이 먼저 북한에 대한 소극적 안보보장 선언을 하고, 주변 강대국의 소극적 안전보장을 ‘교차’ 보장하여 보증을 강구하는 방안이다. 즉, 미국은 북한에게 소극적 안전보장을 하고 중국과 러시아는 남한에게 소극적 안전보장을 명문화하는 방안이다. 이 경우도 역시 첫 단계에서는 IAEA감시체제를 받아들이고 다음에는 사찰을 받고 마지막 단계에는 폐기한다. 두 가지 방안가운데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을 함께 참여시켜 미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하는 터전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둘째, 미국이 2003년과 2004년까지 경수로를 공급하지 못해 북한이 막대한 전력손실을 입었으므로 응당 이에 대한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 보상은 한국이 경수로 공사의 70%이상을 부담했으므로 같은 비율로 전력을 북한에 제공하고 일본은 나머지 부분을, 또 미국은 중유 50만 톤을 중단 없이 제공한다. 이 전력보상은 경수로가 완료되는 시점까지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셋째, 전력지원에 대한 대가로 북한은 과거 핵 가운데 미신고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이나 5메가와트 원자로 중 하나에 대해 사찰을 받는다.

넷째, 경제제재와 테러국 지정을 해제하면 북한은 미신고시설 가운데 나머지 부분에 대한 사찰을 받는다.

다섯째, 남북 간의 핵과 경제협력의 연계론을 막고 핵과 경제협력을 분리해서 남북 간의 경제협력과 교류 등을 지속 및 강화시켜야 한다. 특히 경의선 및 동해선과 같이 철의 실크로드와 동북아협력체의 관건이 되는 협력은 차질 없이 진행시켜 동북아관련국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핵위기에 공동대응의 구도를 구축해야 한다. 동시에 신의주특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여 남북공조를 튼튼히 함으로써 미국이 끼어들 틈새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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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다.
* 이 글은, 필자가 11월 1일 평화운동단체들이 주최한 토론회 「북 핵문제의 본질과 올바른 접근방안」에서 발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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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1) 실제 조약 6조는 “각 체약국은 핵군비경쟁의 조속한 중지 및 핵군비감축에 관한 효과적 조치를 취하고, 엄중하고도 효과적인 국제관리하에서의 전면적이고도 완전한 핵군축을 실현할 조약체결을 위해서 성실한 교섭을 이행할 것을 약속한다”라고 약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실제로 사문화된 셈이다.

(주2) 두번째 국가안전보장회의는 김일성 주석 서거가 알려진 직후인 7월 9일에 열렸는데, 이는 “‘김일성 사망―북한체제 붕괴―김정일 무력도발’이라는 시나리오에 기초한 정부의 비상계획에 따른 조치였다.” 비상계획은 군사?안보 측면의 충무계획과 통일에 대비한 충무계획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러한 시나리오와 비상계획에 따라 대통령은 전군 특별경계령, 공무원 비상대기령, 외교대책반 가동 등의 조치를 취했다(?빗나간 시나리오, 맥빠진 ‘비상계획’?, {시사저널} 150호, 1994. 8. 11).

(주3) 정욱식, “한반도 핵전쟁 위협의 당사자는 누구인가?- 지속되는 한반도의 핵위기 - ” 2002년 9월

(주4) 최근 북한의 임남댐(남한에서는 금강산댐으로 부름)의 안정성 문제가 제기되어 임동원 특사가 긴급 방북하였고, 한반도 2003년 안보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6?15국면으로 복원시켰던 남북관계가 다시 경색되고 이산가족 상봉의 성과물을 축소시켜, ‘악의 축’ 전쟁위기 이후 간신히 조성됐던 한반도 화해분위기가 다시 암초에 걸리고 말았다. 이 댐에 대해 전두환 군부정권은 ‘수공위협설’을 조작하여 군부정권 연장을 시도했고 대북 적개심을 고양시켰다. 86년 10월 29일 이규효 건설부장관은 “북한이 서울을 삽시간에 쓸어버릴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금강산 댐’을 건설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면서, 길이 1100m, 높이 200m, 최대 저수능력 200억t의 초대형인 이 댐을 북한이 파괴할 경우 서울을 비롯한 남한 중부지역 일대가 물바다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고는 대응 댐인 ‘평화의 댐’ 건설을 발표하면서 국민을 선동하여 코흘리개 유치원생부터 칠십 노인까지 앞다퉈 성금을 내게 한 결과 773억 원의 성금까지 모았던 대국민 사기극이었고 대북한 ‘냉전악마 만들기’였다.
실제 2000년 10월에 완공된 북한의 임남댐은 높이 121.5m, 최대 저수량 26억t, 연간 평균저수량 약 18억t으로 29억t의 소양강댐보다 규모가 작다. 이에 대한 안정성 의혹의 제기는 최근 미국 아이코너스 위성사진에 세 곳이 함몰된 것처럼 보이는 위성사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2002년 5월 8일 ‘물 심포지엄’에서 충남대 토목공학과 임희대 교수는 “금강산댐에 대한 위성사진을 판독한 결과 댐이 함몰되거나 누수된 흔적이 없고… 댐에 누수가 발생했다는 주장은 암반의 색깔을 잘못 판독한 것이며, 만약 누수가 발생했다면 벌써 예측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남한언론과 일각에서 제기하는 댐붕괴위협설에 의문을 제기했다(?한겨레신문? 2002. 5. 8). 이러한데도 한국언론의 냉전낙인론에 의해 일반국민들 사이에서 댐 안정성 위험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었고 그들의 무의식세계에는 또다시 대북 적개심과 북한위협론이 축적되고 증폭되어 버렸다.

(주5) 참조: 강정구, “미국의 신패권주의와 한반도 평화?통일” 강정구, {민족의 생명권과 통일}(당대, 2002).

(주6) 북한은 경제개선조치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어떻게 명명하든지 간에 이는 분명히 질적인 변화인 개혁으로 보아야 한다. 중앙계획체제의 근간을 유지한 채 시장기제의 접목을 꾀하는 것은 질적인 정책전환을 의미한다. 실천적으로도 개혁으로 개념 규정하는 것은 남한의 햇볕정책이 추구하는 북한에 대한 개혁개방 유도정책의 결실을 의미하는 것이고, 북한불변론에 대한 반증이고, 대북적대세력인 미국 등에 대한 북한변화를 기정사실화 하는 데도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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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평화만들기에 기재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