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화해

[DMZ 포럼]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접근법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02-28 22:08
조회
1576
기조강연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접근법


김상근 목사(NCC 통일위원장)


이제 우리는 20세기를 보내고 새로운 세기,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20세기는 우리 민족에게 많은 시련을 안겨준 세기였습니다. 20세기의 벽두에 반외세 반봉건의 민족사적인 과제를 우리의 힘으로 달성하지 못함으로써 민족사는 일제 식민지 지배로 굴절되었습니다. 이후 동족상잔의 한국전쟁과 분단, 독재로 이어졌습니다.
세계사적으로도 20세기는 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은 세기였습니다. 1914년 발칸에서 시작한 1차 세계대전이 20세기가 전쟁의 세기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면, 20세기의 막바지에 발칸에서 일어난 코소보 사태는 20세기가 전쟁의 세기였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20세기는 전쟁에서 시작해서 전쟁으로 얼룩진 세기였던 것입니다. 20세기는 1,2 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중동전쟁, 걸프전쟁 등 크고 작은 전쟁을 거치면서 가장 많은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이룩한 세기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20세기의 경험은 21세기를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21세기에 인류가 추구해야할 보편적인 가치가 '평화'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분단을 겪은 우리 민족에게도 평화적인 통일은 21세기에 우리 민족이 가야할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21세기를 앞둔 우리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의 21세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21세기를 전쟁이 없는 최초의 세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으로 얼룩진 20세기를 보내고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세계사적인 소명입니다.
한반도는 20세기 전쟁의 세계질서에 철저하게 편입되어서 민족의 운명이 강대국에 의해서 결정되어졌습니다. 2차대전의 결과 분단과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사의 비극을 겪게되었습니다. 아직도 냉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계적인 분쟁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얼마전의 서해교전은 한국전쟁의 법적, 제도적, 정치적, 군사적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보이지 않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우리 현실의 한 단면입니다.
이제 우리는 평화를 준비해야 합니다. 평화를 원하면 평화를 준비해야 합니다. 평화를 원한다면서 무력만 확충하면 평화가 아닌 전쟁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현실은 '대결과 협력'이라는 남북관계의 이중성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에 대한 준비를 통해서 '화해와 공영'이라는 새로운 질서로 창조적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지난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를 채택하면서 통일시대로의 진입이 예고되었습니다. 그러나 남북관계는 북한의 핵개발 의혹과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계속된 북한의 경제적 위기로 화해와 공영의 새 질서를 만들지 못하고 냉전의 굴레 속에 갇혀 있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북미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고, 금강산 관광 등 남북 교류협력도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남북관계를 전환시킬 수 있는 국면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국면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통일이 아니라 '역사발전과정으로서의 통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통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는 생각으로 통일과정을 차분히 준비하는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이 필요합니다. 아울러 21세기 세계평화는 분단과 냉전의 현장인 한반도에서 시작한다는 원대한 청사진도 필요합니다. 비무장지대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민간차원에서 접근할 때도 통일을 준비한다는 시각과 세계평화의 밑그림을 그린다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은 남북의 긴장완화라는 정치적 의미 이외에도 경제적 문화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일대에 평화적 차원에서 청정산업공단, 생태계 보전지역지정, 민족 생태공원, 물자교류센터, 세계평화를 위한 상징적 건물을 신축하자는 의견과 함께 야외음악 공연장 등을 조성하자는 여론과 제안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비무장지대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수난 속의 축복'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비무장지대가 민족 분단이라는 수난의 산물이지만, 비무장지대를 전화위복으로 삼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지혜에 의해서 비무장지대는 민족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비무장지대(DMZ; De-militarized Zone)란 '군병력과 시설을 유지하지 아니할 의무를 지니는 지역'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남북 사이에는 정전협정에 따라서 동서로 약 250km의 군사분계선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이 군사분계선에서 남과 북으로 각 2km 떨어진 선이 비무장지대의 남방한계선이며 북방한계선입니다.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에 있는 지역이 바로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입니다. 이 비무장지대는 한반도 전체의 약 0.5%에 해당합니다. 실제로는 남방한계선은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북방한계선은 남쪽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비무장지대의 폭은 4km가 되지 못하고 면적도 더 줄었습니다. 비무장지대의 전 지역에서 남북의 직선거리 4km가 유지되는 곳은 거의 없고 가장 가까운 곳은 700-800m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비무장지대는 남북 사이의 군사적 대치의 현주소이고 남북이 최신예무기를 동원하고 있습니다.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중무장지대(Heavily Militarized Zone)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또한 백만개가 넘는 대인지뢰가 매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여름에 홍수가 나면 대인지뢰가 떠내려와서 민간인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경우를 해마다 보아왔습니다. 비무장지대의 대인지뢰는 비무장지대가 결코 평화지대가 아님을 알려주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동엽 시인은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 밤은'이라는 시에서 "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 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 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 남쪽권력도 아니 미친다는/ 평화로운 논밭"이라고 비무장지대를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비무장지대는 이미 '평화로운 논밭'이 아닙니다. 기관총, 박격포, 대인지뢰 등으로 중무장한 지역이 되어 버린 지 오래입니다. "대포가 쌓이면 터진다"는 서양속담과 같이 완충지역에서조차 중무장한 채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면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무장지대는 '전쟁을 중단하기 위한 존재'이면서도 '전쟁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지역'입니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에서는 비무장지대에서 군사역량을 철거할 것을 규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폭발물, 지뢰 등도 제거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정전협정을 체결할 때에는 비무장지대의 실질적인 비무장화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새겨볼 것이 있습니다. 정전협정에서는 비무장지대의 실질적 비무장화를 위해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는데,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세계적인 중무장지대로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97년에 대인지뢰금지운동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국제대인지뢰 운동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한반도 비무장지대의 대인지뢰입니다. 클린턴 행정부는,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에서는 대인지뢰가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타와 조약으로 불리는 대인지뢰조약에 서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 상원에서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 비준을 거부하였을 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CTBT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임기 중에 한반도 비무장지대 때문에 대인지뢰금지조약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쉬운 일이라고 심경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전협정만 잘 지켰으면 한반도 비무장지대의 대인지뢰가 국제인도주의 운동의 승리라고 평가받는 대인지뢰금지조약의 걸림돌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또 미국이 참가하지 못해서 가슴아프다고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토로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정전협정을 잘 지키지 못해서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비무장지대가 국제적인 논란이 되는데도 정전협정을 잘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우리의 반성이 부족한 현실입니다. 이는 남과 북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남과 북이 그 동안 정전협정 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자괴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에 대해서 말의 성찬으로 그치지 않고 실질적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한 민족적인 사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전협정을 지키지 못하고도 이에 대한 반성조차 부족한 우리의 현실을 보다 냉철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비무장지대를 평화적으로 이용할 것에 대해서는 남측이 보다 적극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북측 역시 비무장지대에서 모든 군사인원과 장비를 철수하고 군사시설물을 해체해서 민간인들에게 개방할 것을 주장해왔습니다. 사실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은 남과 북의 공동 관심사입니다. 이 일을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은 사실 북한에게는 매력적인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경제위기가 체제위기로 연결되는 것을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한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비무장지대를 통한 남북 교류와 협력의 증대보다는 비무장지대라는 긴장지역의 존재가 위기관리에는 보다 효율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북기본합의서 제 12조에서는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문제를 협의 추진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북한도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언제까지 외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위해서는 남북의 정치 군사적인 환경이 중요합니다. 비무장지대는 적대 쌍방간에 우발적 혹은 의도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군사적 충돌을 막고 긴장을 완화하기 위하여 설치된 완충지대입니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말하기에 앞서서 비무장지대를 설치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전히 남북사이의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가 필요하다면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가 평화적 이용보다 앞서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당시보다도 오히려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병력과 무기가 크게 증대하여 한반도의 비무장지대가 세계적인 군사력 밀집지역이 되어버린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비무장지대라는 강력한 무력대치로 정치 군사적인 격리기능, 완충기능을 담당해 오고 있는 것을 접촉과 교류의 기능으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그만큼 남북관계의 변화가 동반되어야 가능할 것이라는 현실적인 인식을 놓쳐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무장 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검토하면서 앞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의 대북한 경제제재 완화 조치 발표 이후 남북관계가 변화할 것이라는 현실인식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한편 시각을 달리해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은 군사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보다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군사적 대결이라는 현실 상황논리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군사적 대결과 불신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민간차원에서는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활용이라는 접근법이 군사대결을 완화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이 현실을 타개하는 적극적인 접근법이 될 수 있습니다.
비무장지대를 평화적으로 개발해서 국제적인 평화지대가 된다면 그 자체로서 매우 훌륭한 완충지대가 되는 것입니다. 비무장지대가 국제적인 평화지대가 된다면 남측으로서는 북한의 기습공격의 가능성을 막게 될 것입니다. 북측으로서도 남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을 덜게 됩니다. 즉 평화적 이용은 비무장지대의 설치 목적인 완충지대로서의 역할을 매우 효과적으로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비무장지대의 설치 목적도 달성하고 또 평화적으로 이용하는데서 오는 여러 가지 기대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므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의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미 75년에 미국의 부르킹스 연구소는 비무장지대를 국제적 감시 하에 두게 될 경우 북한의 기습적인 공격의 가능성을 폐쇄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남북의 정부 당국도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이 지니는 군사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전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무장지대를 평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고 군축을 실현하기 위한 조치를 추진해야 합니다. 비무장지대에는 이미 남북한이 철책선을 전진 설치하고 중화기를 배치하여 원형이 깨어져버렸습니다. 남북한이 현재의 정전체제를 유지하고 평화를 관리하기 위해서도 최소한의 완충지대가 필요하므로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 군사적이 환경을 조성해야하는 것입니다. 특히 대인지뢰와 같이 앞으로도 오랜 세월동안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장치를 제거하기 위한 남북 공동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은 냉전체제를 청산하고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튼튼한 기초가 될 것입니다.
둘째, 비무장지대에서 남북의 군사적 대치가 첨예하게 될수록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여야 합니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이 남북 사이의 군사적 신뢰구축과 분쟁예방을 위한 훌륭한 조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째, 비무장지대를 공동개발할 경우 경제적으로 남북에게 이득을 가져다주고 또 평화분위기 조성에도 도움을 주므로 '민족공동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비무장지대에 접근해야 합니다. 북한이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에 소극적이기 때문에 북한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이 북한에게도 경제적, 군사적으로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해나가야 합니다.
넷째, 대결이 가장 첨예한 비무장지대를 생태공원, 평화공원으로 조성하여 비무장지대에서 만들어진 평화의 기운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대시켜야 합니다. 나아가 한반도의 비무장지대를 21세기 세계평화의 상징 지역으로 만들어서, 21세기의 벽두에 냉전의 작은 섬인 한반도의 비무장지대에서 세계인과 함께 평화를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의 의미 있는 출발이 한반도 통일과 세계 평화를 향한 장대한 결과를 낳게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99년 10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