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화해
[DMZ 포럼] 한반도 통일과 DMZ의 평화적 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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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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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2-28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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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통일과 DMZ의 평화적 이용
김귀옥 교수(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사회학 박사)
1. 통일의 길에서 DMZ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
1990년대 들어와 DMZ의 평화적 이용을 놓고 많은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1999년 10월 16일 MBC 9시 뉴스가 자연생태계의 보고로서 DMZ를 보도한 것이나 'DMZ는 살아있다'와 같은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과 같이 그간 방송계는 DMZ의 자연생태계 측면에 주목해 왔다. 또한 국제 환경단체인 'DMZ 포럼'{{) 한반도 DMZ 환경보호를 위해 미국을 주도한 국제 사회가 결성한 단체이다. 이 단체의 자문위원으로는 한반도 남북 문제 전문가인 스칼라피노 캘리포니아주립대 명예교수도 포함되어 있다(『한겨레신문』1999년 3월 22일자).}}은 1999년 3월 20일 학술 세미나를 DMZ를 평화와 생태계 보호를 위해 활용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또한 건설교통부와 국토연구원은 DMZ를 중심으로 한 남북 백두대간의 자연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백두대간 살리기'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각계 의견을 수립하고 있다{{) 『한겨레신문』99. 4. 14일자.}}. 강원도는 양구군 동면에 생태식물원을 만들 계획을 수립해 두고 있다. 김영삼 정권 하에서도 DMZ 보호방안에 대한 나름대로의 계획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김대중 정권 출범 직전, 세계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건 총리, 김진현 서울시립대총장)는 98년 1월 30일 휴전선 인근 접경지역을 유보지역, 보전지역, 준보전지역, 정비지역 등 4개 권역으로 분류해 관리하는 방안을 확정해 정부에 제시했다(『한겨레신문』98. 1. 30일자).}}. 그간 문화계에서는 DMZ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자주 발표되어 왔다. 최근만 보아도 서울시립 무용단의 정기공연인 '하얀강'이나 1998년 8월에 중견 화가들이 기획한 `98분단전'에서는 DMZ를 배경으로 한 분단의 아픔을 주제로 다루었다. 또한 작가 박상연의 소설 『DMZ』 역시 DMZ를 배경으로 반공포로와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루었다.
이상에서 얼핏보아 DMZ를 둘러싼 그간의 논의가 예술의 소재나 배경이 되어 오거나 자연생태계 보호와 평화 정착이라는 차원에서 DMZ를 많이 언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최근 학계나 정치계에서는 한반도 냉전 구조 철폐를 둘러싸고 DMZ 문제에 대한 쟁점이 현안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는 DMZ가 상징하는 냉전 구조를 언급하는 것이지 DMZ 문제 자체를 통일이라는 문제와 연관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자리에서는 DMZ를 통일 과정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특히 정치·군사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사회문화통합의 관점에서 DMZ의 이용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점에 앞서 비정치·군사적인 차원에서 또는 민간인과 관련지어 DMZ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짧게 살펴보겠다.
2. 남북 통일과 교류의 길에서 본 DMZ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북한·중국과 미국에 의해 체결되고 난 후,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북으로 2km씩 떨어져 있고 길이가 249km에 달하는 벨트인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가 설정되었다.
DMZ는 남북 분단과 대치의 장이자 냉전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DMZ를 통해 임수경이 북에서 남으로 왔고 정주영과 그의 소떼가 왕래하였고 간첩 리철진도 왕래하였다.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사건과 통일 방안을 통해 통일 과정에서 DMZ가 어떻게 활용되었으면 좋을까 고민해 보고자 한다.
하나. 남북밀무역과 38선
남북밀무역은 시기적으로 보아 한국전쟁 전에 주로 있었으므로 DMZ와 직접 관련은 없으나 DMZ가 38선의 연장이라면 같은 범주에 넣어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남북밀무역은 1945년 해방되고 분단되던 시기부터 생겼고 1950년 전쟁이 나면서 대략 종료되었다. 밀무역은 당시 '남북밀무역(南北密貿易)' 또는 '38무역', '38밀무역'으로 불렸는데 비공식적인 38선 월경 교역은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을 통하여 미소 양측이 남북의 산업 복구, 교통·통신 조직의 통일, 필수품의 교류 조달 등에 합의함에 따라 가능해졌다(장화수, 1980). '38밀무역'이 사실상 밀무역으로 규정된 것은 미군정이 1946년 12월 15일 남북 물자 교류문제를 다룬 '조선 연안 교역의 감독에 관한 통첩'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동해안의 주문진, 서해안의 용호동, 남해안의 여수의 3개 항구를 남북교역 항구로 지정하고 교역방식도 '해안간 무역(cost-wise trade)'을 택하였다. 따라서 38선 월경 무역은 '밀무역'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북한이 부족한 쌀을 보내달라는 요청은 들어주지 않았지만 민간인들의 필수품 반입은 어느 정도 묵인하였다. 따라서 밀무역이란 밀수와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공식적인 '남북교역'은 미소간의 합의하에 이루어 진 것이었고 '38밀무역'은 1947년 이후 공식 교역이 제한되면서 당국의 묵인 하에 가능할 수 있었던 분단국의 특수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장화수, 1985; 김보영, 1995). 이 밀무역은 그저 남북의 물자만 오가던 것이 아니라, 남북 쌍방 정보의 교환장으로도 활용되어 공식적으로 교역을 담당하는 상인들은 '첩자'나 '이중첩자'로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유영구, 1993). 따라서 38선은 분단의 역사에서도 시장으로서 역할을 했고 사람과 문화가 교류되는 길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둘. 1954년 3월 실향사민 송환 사건{{)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글쓴이의 박사학위논문인 "정착촌 월남인의 생활경험과 정체성-속초 '아바이마을'과 김제 '용지농원'을 중심으로"(서울대 사회학과. 1999; 서울대 출판부 근간)를 참조하시오.}}
분단 50여 년의 역사의 지평에서 아스라이 잊혀진 사건 가운데 하나가 '실향사민 송환사건'이다.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 제3조 59항에 근거했다.
한글 조항 제3조 59항 (a) 본 휴정협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당시에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에 있는 자로서 1950년 6월 24일에 본 휴전협정에 확정된 군사분계선 이북에 거주한 전 민간인에 대하여서는 그들이 귀향하기를 원한다면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은 그들이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며 협조하여야 한다.
본 휴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당시에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의 군사통제지역에 있는 자로서 1950년 6월 24일에 본 정전협정에 확정된 군사분계선 이남에 거주한 전 민간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귀향하기를 원한다면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은 그들이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며 협조한다(정일형 편저, 1961: 266-268)
그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후 본의와는 상관없이 이주된 사람들이 귀향을 희망하면 원거주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정전협정은 그러한 민간 월남·월북인들을 실향사민(失鄕私民, displaced civilians)으로 규정하였다. 이 정전협정에 따라 실향사민을 원고향으로 송환하기 위한 '송환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남한 국회가 실향사민 문제를 둘러싸고 '납북인사'문제를 제기함으로써 1954년 3월 1일 월남인 가운데 37명, 월북 외국인 19명이 DMZ를 거쳐 송환되었을 뿐이다. 만일 이때 남북 정권이 제대로 실향사민을 송환하였더라면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셋. 통일과 화합, 교류의 장으로서의 DMZ
1955년 한 청년이 임진강을 헤엄쳐 월북하였다. 그는 이미 이승만에게 자신의 통일방안을 적은 편지를 보냈고 다음 북한 당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 도강하였다. 그는 바로 김낙중이고 그의 통일방안을 "통일독립청년고려공동체수립안"(김낙중·노중선, 1989; 김낙중·김남기, 1985)이라고 한다. 그의 통일독립청년고려공동체는 남한지역 공동체와 북조선지역 공동체 그리고 고려공동체 직할 운영도시 지역으로 구성되는 연방제로 운영된다. 특히, 남북의 쌍방정부는 비무장지대(DMZ)와 판문점 부근의 1천 평방키로미터의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각각 즉시 통일독립청년고려공동체에 이양하기로 하고 동지역 안에 통일독립청년고려공동체 운영도시를 공동으로 건설한다(김낙중·노중선, 1989: 22).
이는 대단히 이상적이며 비현실적 발상이 아닌가? 특히 1950년대 중반, 이승만의 무력통일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을 당시를 고려하면 그의 평화통일, 연방제식 통일론은 대단히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엘리트 중심적인 발상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청년 김낙중의 이상적인 발상에는 미래를 바라보는 탁견이 엿보인다. 첫째, 그의 평화통일론이 그렇고 둘째, 현존 남북의 정치·경제 체제를 그대로 인정한 채, 새로운 3의 길로의 통일상을 제시한 점이 그렇다. 셋째, 이 글과 관련하여 DMZ의 가치를 충분히 주목한 점은 중요한 통찰이다. 당시 어느 누구도 DMZ의 가치를 주목하지 않던 시기에 그는 DMZ를 새로운 통일 공동체를 만들 터전으로 주목하였다.
3. 한반도 통일과 DMZ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방책
위의 역사적 사건에서 우리가 교훈을 받을 수 있는 DMZ는 통일 과정에서 첫째, 남북이 만남으로써 일어나게 될 직접적 충격을 줄일 수 있는 완충지역으로서 역할 할 수 있다.
DMZ는 강원도 고성, 인제, 양구, 화천, 철원{{) 철원군에는 과거 금화(金化)군이 포함되어 있다.}}과 경기도 파주, 김포, 포천 등 9개 군을 관통하거나 인접해 있다(황광복, 1996; 황광복, 1995). 이 인접 지역에는 산악지대도 있지만 강원도의 철원이나 경기도의 경우에는 평야와 좋은 토지도 있다. 1990년대 민간인통제지역이 일부 풀리면서 토지문서가 암암리에 사적으로 매매되어 왔다{{) 정영화. "비무장지대 개발의 득과 실." 『한겨레신문』97. 5. 12일자.}}. 통일이 되는 길에 풀어야 할 문제가 중첩되어 있는데, DMZ의 토지문제마저 심각해진다면 통일은 분단의 종식, 냉전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판도라의 상자가 될 우려가 적지 않다. 이에 남북 정부는 DMZ 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이 기획될 필요가 있다. 즉 남북 통일이 진행되는 과정이나 통일이 되더라도 일정한 시기까지는 DMZ는 새로운 의미에서 완충지대로 남을 필요도 있을지도 모른다. 즉 분단의 장벽으로서의 DMZ는 철거하되 남북 인적·물적 교류에 대한 일종의 '한계의 문턱'으로 일정한 시기까지 남을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 중국 본토와 홍콩간의 완충지대 설정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DMZ는 통일을 위한 공동체를 만드는 장으로서 역할 할 수 있다. 현재 많은 단체나 정부 당국은 DMZ을 자연생태계 공원으로 지정하는 방향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물론 산악지대에 대해서는 이러한 모색은 필요하다. 그런데 생태계 공원으로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남북 분단이 야기한 문제를 소극적으로 풀려고 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미국이 DMZ를 생태계 공원으로 조성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분단 주체로서 DMZ를 영구화하려는 저의마저 엿보게 된다. 미국은 한반도 분단 문제에 대한 일정한 책임을 지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DMZ는 과거 사람들이 논밭을 경작하며 살았고 짐승들이 오갈 뿐만 아니라 철도가 다니던 길도 있던 다양한 삶의 터전이었다. 분단의 청산은 과거 삶의 공동체를 회복할 필요를 요청한다. 그렇다고 하여 개인의 시장 경쟁의 원리에 맡겨 두었다가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DMZ는 투기의 대상화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남북
정권이나 통일 정권이 사들여 그 장을 완충지대이자, 새로운 사회·문화를 연습하고 남북 문화를 만들 현장으로 조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 즉 김낙중의 발상을 빌어와 DMZ에 남북 사회문화 교류의 장, 통일 학습장, 통일 연수원, 시장 등을 조성하는 것이다. 또한 DMZ에 청소년이나 아동을 위한 캠프장, 주부 문화 교류장, 5일장과 같은 정기장시를 개설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남북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차이를 깨닫고 다양한 공존 방식을 배울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꿈을 실현하는 데에는 정부 당국의 적극적인 통일에의 전망이 필요하다. 동시에 시민사회단체들의 통일과 평화를 한반도에 정착시키기 위한 분명한 대안과 실천이 절실하다.
참고 문헌
김귀옥. 1999. 『월남인의 생활경험과 정체성: 아래로부터의 월남인 연구』. 서울대 출판부.
김낙중·김남기. 1985. 『굽이치는 임진강』. 삼민사.
김낙중·노중선. 1989. 『현단계 제통일방안』. 한백사.
김보영. 1995. "해방 후 남북한교역에 관한 연구-1945년 8월∼49년 4월 기간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유영구. 1994. 『남북을 오간 사람들』. 중앙일보사.
장화수. 1980. 『分斷國の 經濟交流論』. 동경: 천문당.
장화수. 1985. "'38밀무역'시절의 남북 물자교역." 『북한』8월호: 62-8.
정일형 편저. 1961. 『유엔과 한국문제』. 국제연합회한국협회.
황광복. 1995.『DMZ는 국경이 아니다』.
황광복. 1996. "DMZ의 사회학적 접근과 이해." 한림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주최. 『DMZ의 오늘과 내일』.
『한겨레신문』.
김귀옥 교수(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사회학 박사)
1. 통일의 길에서 DMZ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
1990년대 들어와 DMZ의 평화적 이용을 놓고 많은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1999년 10월 16일 MBC 9시 뉴스가 자연생태계의 보고로서 DMZ를 보도한 것이나 'DMZ는 살아있다'와 같은 다큐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과 같이 그간 방송계는 DMZ의 자연생태계 측면에 주목해 왔다. 또한 국제 환경단체인 'DMZ 포럼'{{) 한반도 DMZ 환경보호를 위해 미국을 주도한 국제 사회가 결성한 단체이다. 이 단체의 자문위원으로는 한반도 남북 문제 전문가인 스칼라피노 캘리포니아주립대 명예교수도 포함되어 있다(『한겨레신문』1999년 3월 22일자).}}은 1999년 3월 20일 학술 세미나를 DMZ를 평화와 생태계 보호를 위해 활용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또한 건설교통부와 국토연구원은 DMZ를 중심으로 한 남북 백두대간의 자연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백두대간 살리기'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각계 의견을 수립하고 있다{{) 『한겨레신문』99. 4. 14일자.}}. 강원도는 양구군 동면에 생태식물원을 만들 계획을 수립해 두고 있다. 김영삼 정권 하에서도 DMZ 보호방안에 대한 나름대로의 계획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김대중 정권 출범 직전, 세계화추진위원회(위원장 고건 총리, 김진현 서울시립대총장)는 98년 1월 30일 휴전선 인근 접경지역을 유보지역, 보전지역, 준보전지역, 정비지역 등 4개 권역으로 분류해 관리하는 방안을 확정해 정부에 제시했다(『한겨레신문』98. 1. 30일자).}}. 그간 문화계에서는 DMZ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자주 발표되어 왔다. 최근만 보아도 서울시립 무용단의 정기공연인 '하얀강'이나 1998년 8월에 중견 화가들이 기획한 `98분단전'에서는 DMZ를 배경으로 한 분단의 아픔을 주제로 다루었다. 또한 작가 박상연의 소설 『DMZ』 역시 DMZ를 배경으로 반공포로와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루었다.
이상에서 얼핏보아 DMZ를 둘러싼 그간의 논의가 예술의 소재나 배경이 되어 오거나 자연생태계 보호와 평화 정착이라는 차원에서 DMZ를 많이 언급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최근 학계나 정치계에서는 한반도 냉전 구조 철폐를 둘러싸고 DMZ 문제에 대한 쟁점이 현안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는 DMZ가 상징하는 냉전 구조를 언급하는 것이지 DMZ 문제 자체를 통일이라는 문제와 연관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자리에서는 DMZ를 통일 과정에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특히 정치·군사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사회문화통합의 관점에서 DMZ의 이용을 모색하고자 한다. 이 점에 앞서 비정치·군사적인 차원에서 또는 민간인과 관련지어 DMZ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용되었는가를 짧게 살펴보겠다.
2. 남북 통일과 교류의 길에서 본 DMZ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북한·중국과 미국에 의해 체결되고 난 후,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남북으로 2km씩 떨어져 있고 길이가 249km에 달하는 벨트인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가 설정되었다.
DMZ는 남북 분단과 대치의 장이자 냉전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DMZ를 통해 임수경이 북에서 남으로 왔고 정주영과 그의 소떼가 왕래하였고 간첩 리철진도 왕래하였다. 그간 주목하지 않았던 사건과 통일 방안을 통해 통일 과정에서 DMZ가 어떻게 활용되었으면 좋을까 고민해 보고자 한다.
하나. 남북밀무역과 38선
남북밀무역은 시기적으로 보아 한국전쟁 전에 주로 있었으므로 DMZ와 직접 관련은 없으나 DMZ가 38선의 연장이라면 같은 범주에 넣어 보아도 괜찮을 것 같다.
남북밀무역은 1945년 해방되고 분단되던 시기부터 생겼고 1950년 전쟁이 나면서 대략 종료되었다. 밀무역은 당시 '남북밀무역(南北密貿易)' 또는 '38무역', '38밀무역'으로 불렸는데 비공식적인 38선 월경 교역은 1946년 1월 16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을 통하여 미소 양측이 남북의 산업 복구, 교통·통신 조직의 통일, 필수품의 교류 조달 등에 합의함에 따라 가능해졌다(장화수, 1980). '38밀무역'이 사실상 밀무역으로 규정된 것은 미군정이 1946년 12월 15일 남북 물자 교류문제를 다룬 '조선 연안 교역의 감독에 관한 통첩'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동해안의 주문진, 서해안의 용호동, 남해안의 여수의 3개 항구를 남북교역 항구로 지정하고 교역방식도 '해안간 무역(cost-wise trade)'을 택하였다. 따라서 38선 월경 무역은 '밀무역'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은 북한이 부족한 쌀을 보내달라는 요청은 들어주지 않았지만 민간인들의 필수품 반입은 어느 정도 묵인하였다. 따라서 밀무역이란 밀수와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공식적인 '남북교역'은 미소간의 합의하에 이루어 진 것이었고 '38밀무역'은 1947년 이후 공식 교역이 제한되면서 당국의 묵인 하에 가능할 수 있었던 분단국의 특수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장화수, 1985; 김보영, 1995). 이 밀무역은 그저 남북의 물자만 오가던 것이 아니라, 남북 쌍방 정보의 교환장으로도 활용되어 공식적으로 교역을 담당하는 상인들은 '첩자'나 '이중첩자'로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유영구, 1993). 따라서 38선은 분단의 역사에서도 시장으로서 역할을 했고 사람과 문화가 교류되는 길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둘. 1954년 3월 실향사민 송환 사건{{) 이 문제에 대해서는 글쓴이의 박사학위논문인 "정착촌 월남인의 생활경험과 정체성-속초 '아바이마을'과 김제 '용지농원'을 중심으로"(서울대 사회학과. 1999; 서울대 출판부 근간)를 참조하시오.}}
분단 50여 년의 역사의 지평에서 아스라이 잊혀진 사건 가운데 하나가 '실향사민 송환사건'이다.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 제3조 59항에 근거했다.
한글 조항 제3조 59항 (a) 본 휴정협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당시에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지역에 있는 자로서 1950년 6월 24일에 본 휴전협정에 확정된 군사분계선 이북에 거주한 전 민간인에 대하여서는 그들이 귀향하기를 원한다면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은 그들이 군사분계선 이북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며 협조하여야 한다.
본 휴전협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당시에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의 군사통제지역에 있는 자로서 1950년 6월 24일에 본 정전협정에 확정된 군사분계선 이남에 거주한 전 민간인에 대해서는 그들이 귀향하기를 원한다면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은 그들이 군사분계선 이남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며 협조한다(정일형 편저, 1961: 266-268)
그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후 본의와는 상관없이 이주된 사람들이 귀향을 희망하면 원거주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정전협정은 그러한 민간 월남·월북인들을 실향사민(失鄕私民, displaced civilians)으로 규정하였다. 이 정전협정에 따라 실향사민을 원고향으로 송환하기 위한 '송환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남한 국회가 실향사민 문제를 둘러싸고 '납북인사'문제를 제기함으로써 1954년 3월 1일 월남인 가운데 37명, 월북 외국인 19명이 DMZ를 거쳐 송환되었을 뿐이다. 만일 이때 남북 정권이 제대로 실향사민을 송환하였더라면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셋. 통일과 화합, 교류의 장으로서의 DMZ
1955년 한 청년이 임진강을 헤엄쳐 월북하였다. 그는 이미 이승만에게 자신의 통일방안을 적은 편지를 보냈고 다음 북한 당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 도강하였다. 그는 바로 김낙중이고 그의 통일방안을 "통일독립청년고려공동체수립안"(김낙중·노중선, 1989; 김낙중·김남기, 1985)이라고 한다. 그의 통일독립청년고려공동체는 남한지역 공동체와 북조선지역 공동체 그리고 고려공동체 직할 운영도시 지역으로 구성되는 연방제로 운영된다. 특히, 남북의 쌍방정부는 비무장지대(DMZ)와 판문점 부근의 1천 평방키로미터의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각각 즉시 통일독립청년고려공동체에 이양하기로 하고 동지역 안에 통일독립청년고려공동체 운영도시를 공동으로 건설한다(김낙중·노중선, 1989: 22).
이는 대단히 이상적이며 비현실적 발상이 아닌가? 특히 1950년대 중반, 이승만의 무력통일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을 당시를 고려하면 그의 평화통일, 연방제식 통일론은 대단히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엘리트 중심적인 발상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청년 김낙중의 이상적인 발상에는 미래를 바라보는 탁견이 엿보인다. 첫째, 그의 평화통일론이 그렇고 둘째, 현존 남북의 정치·경제 체제를 그대로 인정한 채, 새로운 3의 길로의 통일상을 제시한 점이 그렇다. 셋째, 이 글과 관련하여 DMZ의 가치를 충분히 주목한 점은 중요한 통찰이다. 당시 어느 누구도 DMZ의 가치를 주목하지 않던 시기에 그는 DMZ를 새로운 통일 공동체를 만들 터전으로 주목하였다.
3. 한반도 통일과 DMZ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방책
위의 역사적 사건에서 우리가 교훈을 받을 수 있는 DMZ는 통일 과정에서 첫째, 남북이 만남으로써 일어나게 될 직접적 충격을 줄일 수 있는 완충지역으로서 역할 할 수 있다.
DMZ는 강원도 고성, 인제, 양구, 화천, 철원{{) 철원군에는 과거 금화(金化)군이 포함되어 있다.}}과 경기도 파주, 김포, 포천 등 9개 군을 관통하거나 인접해 있다(황광복, 1996; 황광복, 1995). 이 인접 지역에는 산악지대도 있지만 강원도의 철원이나 경기도의 경우에는 평야와 좋은 토지도 있다. 1990년대 민간인통제지역이 일부 풀리면서 토지문서가 암암리에 사적으로 매매되어 왔다{{) 정영화. "비무장지대 개발의 득과 실." 『한겨레신문』97. 5. 12일자.}}. 통일이 되는 길에 풀어야 할 문제가 중첩되어 있는데, DMZ의 토지문제마저 심각해진다면 통일은 분단의 종식, 냉전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판도라의 상자가 될 우려가 적지 않다. 이에 남북 정부는 DMZ 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이 기획될 필요가 있다. 즉 남북 통일이 진행되는 과정이나 통일이 되더라도 일정한 시기까지는 DMZ는 새로운 의미에서 완충지대로 남을 필요도 있을지도 모른다. 즉 분단의 장벽으로서의 DMZ는 철거하되 남북 인적·물적 교류에 대한 일종의 '한계의 문턱'으로 일정한 시기까지 남을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 중국 본토와 홍콩간의 완충지대 설정과 마찬가지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DMZ는 통일을 위한 공동체를 만드는 장으로서 역할 할 수 있다. 현재 많은 단체나 정부 당국은 DMZ을 자연생태계 공원으로 지정하는 방향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물론 산악지대에 대해서는 이러한 모색은 필요하다. 그런데 생태계 공원으로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남북 분단이 야기한 문제를 소극적으로 풀려고 하는 인상을 받게 된다{{) 특히 미국이 DMZ를 생태계 공원으로 조성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에 대해서는 분단 주체로서 DMZ를 영구화하려는 저의마저 엿보게 된다. 미국은 한반도 분단 문제에 대한 일정한 책임을 지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DMZ는 과거 사람들이 논밭을 경작하며 살았고 짐승들이 오갈 뿐만 아니라 철도가 다니던 길도 있던 다양한 삶의 터전이었다. 분단의 청산은 과거 삶의 공동체를 회복할 필요를 요청한다. 그렇다고 하여 개인의 시장 경쟁의 원리에 맡겨 두었다가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DMZ는 투기의 대상화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남북
정권이나 통일 정권이 사들여 그 장을 완충지대이자, 새로운 사회·문화를 연습하고 남북 문화를 만들 현장으로 조성해 나갈 필요가 있다. 즉 김낙중의 발상을 빌어와 DMZ에 남북 사회문화 교류의 장, 통일 학습장, 통일 연수원, 시장 등을 조성하는 것이다. 또한 DMZ에 청소년이나 아동을 위한 캠프장, 주부 문화 교류장, 5일장과 같은 정기장시를 개설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남북의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차이를 깨닫고 다양한 공존 방식을 배울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꿈을 실현하는 데에는 정부 당국의 적극적인 통일에의 전망이 필요하다. 동시에 시민사회단체들의 통일과 평화를 한반도에 정착시키기 위한 분명한 대안과 실천이 절실하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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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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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복. 1995.『DMZ는 국경이 아니다』.
황광복. 1996. "DMZ의 사회학적 접근과 이해." 한림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주최. 『DMZ의 오늘과 내일』.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