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세계교회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 논의 시작-안텔리아스협의회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3-12-05 23:05
조회
1576
세계적 차원의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36명의 에큐메니칼 전문가, 신학자, 기구 실무자 등은 지난 11월 17일부터 20일까지 레바논의 안텔리아스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에 관한 협의회’를 열고, 변화된 세상과 에큐메니칼 환경에 부응하는 새로운 에큐메니칼운동의 모양새에 관해 논의했다.
배경
이번 협의회는 그 배경이 상당히 깊다. 외면적으로는 올해 말이면 퇴임하는 콘라드 라이저 WCC 총무가 지난해 중앙위원회에서 그 필요성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라이저 총무 스스로가 WCC 총무로 부임하기 전 독일 보쿰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출간한 책 ‘변화의 기로에 선 에큐메니즘-에큐메니칼운동에 있어서의 패러다임 시프트’(Ecumenism in Transition-Paradigm Shift in Ecumenical Movement)에서 ‘과거의 전리품을 자랑스럽게 되뇌이는 에큐메니즘의 용도폐기’를 주장하면서부터, 사실상 이 문제는 라이저총무의 가장 중요한 이상이자 과제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라이저총무가 이런 주장을 하게 된 데에는 WCC 내부의 조건과 외부적 조건이 동시에 작용했다. 우선 WCC 내부적 조건으로는, 전통적으로 긴장관계에 있던 교회일치운동의 두가지 흐름의 합류 경향을 들 수 있다. 즉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를 중심으로 진행돼 오던 ‘교회일치의 가시적 표상’으로서의 ‘하나의 사도적 신앙’을 추구하는 흐름과, ‘삶과 일’(Life and Work)과 ‘전도와 선교’(Mission and Evangelism)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오던 ‘세상에 대한 공동의 증언과 봉사’라는 두 흐름이, 캔버라 총회 이후 ‘코이노니아로서의 일치’라는 개념을 통해 상당부분 접근하더니,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을 위한 공교회 협의과정(Conciliar Process)을 통해서는 사실상 하나로 합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신앙과 직제가 최근에 진행해 온 ‘교회론과 윤리’에 대한 연구가, ‘교회의 진정하고도 값진 일치는 도덕적인 결단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교회의 도덕적인 실재 속에는 교회의 삶과 행동은 물론, 교회의 고백까지 포함돼 있다’는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코이노니아의 윤리’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즘 속에는 신앙적 차원과 증언 및 봉사의 차원이 합류돼 있음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에큐메니즘은 사실, 에큐메니칼운동이 추구하는 바 ‘교회로 바로 서기’의 문제와 연관돼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라는 거대한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세계화라는 흐름에 저항하기 위한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로 바로 서기’가 에큐메니칼운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는 세계화의 흐름에 대항하는 교회의 진용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새틀짜기’가 필요해진 WCC의 외부적 조건과 연결된다.
WCC는 오래 전부터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에큐메니즘의 원칙을 제시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가시적 일치의 표상으로서의 하나의 사도적 신앙’과 ‘세상을 향한 공동의 증언과 봉사’라는 형태로 구체화 됐고, 이는 기구로서의 WCC가 일관되게 추구해 왔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흐름은, ‘힘의 지배’라는 논리 아래 모든 것이 힘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획일성’을 강요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화에 저항하는 에큐메니칼운동은 획일성이 아닌 새로운 다양성이라는 무기로 재무장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라이저총무는 지난해 WCC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총무보고를 통해, “에큐메니칼운동은 다양성속의 일치와 ‘일치 속의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포용적인 공동체’라는 형태로 구체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동안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운동을 주도해 왔던 WCC의 고민이 생겨난다. WCC가 지난 50여년동안 에큐메니칼운동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주도적인 기구로 존재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WCC에 가입하지 않았음에도 사실상 에큐메니칼 헌신에 참여해 온 가톨릭 교교회 같은 교회도 존재하고 잇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거의 참여하지 않았던 오순절교회나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들 역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들 교회들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이 헌신해 왔던 증언과 봉사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포용적 공동체’를 이야기하면서, 이 교회들을 배제한 채 WCC라는 기구의 ‘에큐메니칼 주도권’을 주장하기는 힘든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에큐메니칼 활동’의 통일성과 효율성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도 새틀짜기를 추구해야 하는 조건이 됐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시민운동이 크게 성장하면서, WCC가 하고 있던 증언과 봉사의 역할을 (기독교와 관련을 맺고 있느냐의 여부와는 관계 없이) NGO 들이 상당부분 수행하고 있고, 이 NGO들은 교회들과 직접 접촉, 재정적인 문제 등을 해결해 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기반으로 생겨난 수많은 ‘에큐메니칼 행동체’(Ecumenical Actor)들이 세계적인 차원과 지역적인 차원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수행해 왔던 증언과 봉사의 역할을 해 내고 있다.
‘하나의 사도적 신앙을 향한 신학적 대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과 직제’를 통한 신학적 대화는 어쩔 수 없이 ‘다자간 대화’의 형태를 지닌다. 하지만 지난 10여년간, 가톨릭-루터교, 성공회-루터교 같은 ‘양자간 대화’가 계속해서 시도됐고, 이를 통해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이같은 양자간 대화에서 이루어진 진전을 W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기구에서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텔리아스의 논의
안텔리아스 협의회 참석자들은 이같은 상황의 변화와 조건들에 대해 동의하면서, ‘교회의 가시적 일치’와 ‘세상을 향한 공동의 증언과 봉사’라는 에큐메니칼운동의 목표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리고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가 필요한 이유가 “교회의 일치와 생명의 온전함과 풍성함에 대한 우리의 증언과 봉사가 보다 효과적인 협력과 보다 큰 통일성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새틀짜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이해들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안텔리아스 협의회를 통해 확인됐다. 참석자들은 이것을 △가톨릭, 오순절, 복음주의 교회들의 참여를 이끌어 냄으로써 현재의 에큐메니칼운동을 확대하는 일 △교회들간의 친교를 깊게 하는 일 △에큐메니칼 활동 내부의 통일성과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현존하는 에큐메니칼 활동체들의 관계를 강화하는 일의 세가지로 정리했다.
안텔리아스 협의회 참석자들은 이 세가지 중 특히 세 번째 이해에 강조점을 두면서, 향후 ‘새틀짜기’에 대한 보다 폭넓은 논의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 논의의 과정은, 유럽보다는 남반구의 시각에 중점을 두고 ‘참여가 폭넓게 보장되는 과정’(broad participatory process)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향후 1년 안에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행동체들이 참여하는 협의회를 개최하고, 여기에 가톨릭 교회들과 오순절, 복음주의권 교회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할 것을 WCC에 제안했다. 그리고 일단 이 협의회가 열리고 난 뒤에는 향후 논의의 과정과 내용을 이 협의회가 스스로 결정하게 할 것 역시 제안했다. 말하자면, 일단 ‘새틀짜기를 위한 논의의 과정’이 형성되고 나면, WCC는 그 주도권을 논의 과정 그 자체로 넘긴다는 것이다.
전망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가 어떤 스케줄에 의해, 그리고 어떤 형태로 진행될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정해진 바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새틀짜기가 이미 중요한 과제로 제시된 이상, 이 흐름을 거스르기는 사실상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WCC라는 기구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오이쿠메네)로 에큐메니칼운동의 실질적인 영역이 확대되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새로운 모양새’를 잡아 나감에 있어서, ‘가시적 일치’와 ‘세상에 대한 증언과 봉사’라는 에큐메니칼 이상을 얼마나 철저하게 구현해 나갈 것인지가 지켜봐야 할 문제로 대두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배경
이번 협의회는 그 배경이 상당히 깊다. 외면적으로는 올해 말이면 퇴임하는 콘라드 라이저 WCC 총무가 지난해 중앙위원회에서 그 필요성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라이저 총무 스스로가 WCC 총무로 부임하기 전 독일 보쿰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출간한 책 ‘변화의 기로에 선 에큐메니즘-에큐메니칼운동에 있어서의 패러다임 시프트’(Ecumenism in Transition-Paradigm Shift in Ecumenical Movement)에서 ‘과거의 전리품을 자랑스럽게 되뇌이는 에큐메니즘의 용도폐기’를 주장하면서부터, 사실상 이 문제는 라이저총무의 가장 중요한 이상이자 과제로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라이저총무가 이런 주장을 하게 된 데에는 WCC 내부의 조건과 외부적 조건이 동시에 작용했다. 우선 WCC 내부적 조건으로는, 전통적으로 긴장관계에 있던 교회일치운동의 두가지 흐름의 합류 경향을 들 수 있다. 즉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를 중심으로 진행돼 오던 ‘교회일치의 가시적 표상’으로서의 ‘하나의 사도적 신앙’을 추구하는 흐름과, ‘삶과 일’(Life and Work)과 ‘전도와 선교’(Mission and Evangelism)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오던 ‘세상에 대한 공동의 증언과 봉사’라는 두 흐름이, 캔버라 총회 이후 ‘코이노니아로서의 일치’라는 개념을 통해 상당부분 접근하더니,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을 위한 공교회 협의과정(Conciliar Process)을 통해서는 사실상 하나로 합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히 신앙과 직제가 최근에 진행해 온 ‘교회론과 윤리’에 대한 연구가, ‘교회의 진정하고도 값진 일치는 도덕적인 결단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교회의 도덕적인 실재 속에는 교회의 삶과 행동은 물론, 교회의 고백까지 포함돼 있다’는 결론에 도달함으로써, ‘코이노니아의 윤리’를 추구하는 에큐메니즘 속에는 신앙적 차원과 증언 및 봉사의 차원이 합류돼 있음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에큐메니즘은 사실, 에큐메니칼운동이 추구하는 바 ‘교회로 바로 서기’의 문제와 연관돼 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세계화라는 거대한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세계화라는 흐름에 저항하기 위한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로 바로 서기’가 에큐메니칼운동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는 세계화의 흐름에 대항하는 교회의 진용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새틀짜기’가 필요해진 WCC의 외부적 조건과 연결된다.
WCC는 오래 전부터 ‘다양성 속의 일치’라는 에큐메니즘의 원칙을 제시해 왔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가시적 일치의 표상으로서의 하나의 사도적 신앙’과 ‘세상을 향한 공동의 증언과 봉사’라는 형태로 구체화 됐고, 이는 기구로서의 WCC가 일관되게 추구해 왔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계화라는 흐름은, ‘힘의 지배’라는 논리 아래 모든 것이 힘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획일성’을 강요하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화에 저항하는 에큐메니칼운동은 획일성이 아닌 새로운 다양성이라는 무기로 재무장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라이저총무는 지난해 WCC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총무보고를 통해, “에큐메니칼운동은 다양성속의 일치와 ‘일치 속의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포용적인 공동체’라는 형태로 구체화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동안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운동을 주도해 왔던 WCC의 고민이 생겨난다. WCC가 지난 50여년동안 에큐메니칼운동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주도적인 기구로 존재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WCC에 가입하지 않았음에도 사실상 에큐메니칼 헌신에 참여해 온 가톨릭 교교회 같은 교회도 존재하고 잇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거의 참여하지 않았던 오순절교회나 복음주의 계열의 교회들 역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들 교회들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동안 에큐메니칼 운동이 헌신해 왔던 증언과 봉사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포용적 공동체’를 이야기하면서, 이 교회들을 배제한 채 WCC라는 기구의 ‘에큐메니칼 주도권’을 주장하기는 힘든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에큐메니칼 활동’의 통일성과 효율성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것도 새틀짜기를 추구해야 하는 조건이 됐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시민운동이 크게 성장하면서, WCC가 하고 있던 증언과 봉사의 역할을 (기독교와 관련을 맺고 있느냐의 여부와는 관계 없이) NGO 들이 상당부분 수행하고 있고, 이 NGO들은 교회들과 직접 접촉, 재정적인 문제 등을 해결해 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회를 기반으로 생겨난 수많은 ‘에큐메니칼 행동체’(Ecumenical Actor)들이 세계적인 차원과 지역적인 차원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이 수행해 왔던 증언과 봉사의 역할을 해 내고 있다.
‘하나의 사도적 신앙을 향한 신학적 대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과 직제’를 통한 신학적 대화는 어쩔 수 없이 ‘다자간 대화’의 형태를 지닌다. 하지만 지난 10여년간, 가톨릭-루터교, 성공회-루터교 같은 ‘양자간 대화’가 계속해서 시도됐고, 이를 통해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이같은 양자간 대화에서 이루어진 진전을 WCC를 중심으로 한 에큐메니칼 기구에서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텔리아스의 논의
안텔리아스 협의회 참석자들은 이같은 상황의 변화와 조건들에 대해 동의하면서, ‘교회의 가시적 일치’와 ‘세상을 향한 공동의 증언과 봉사’라는 에큐메니칼운동의 목표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리고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가 필요한 이유가 “교회의 일치와 생명의 온전함과 풍성함에 대한 우리의 증언과 봉사가 보다 효과적인 협력과 보다 큰 통일성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새틀짜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이해들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안텔리아스 협의회를 통해 확인됐다. 참석자들은 이것을 △가톨릭, 오순절, 복음주의 교회들의 참여를 이끌어 냄으로써 현재의 에큐메니칼운동을 확대하는 일 △교회들간의 친교를 깊게 하는 일 △에큐메니칼 활동 내부의 통일성과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 현존하는 에큐메니칼 활동체들의 관계를 강화하는 일의 세가지로 정리했다.
안텔리아스 협의회 참석자들은 이 세가지 중 특히 세 번째 이해에 강조점을 두면서, 향후 ‘새틀짜기’에 대한 보다 폭넓은 논의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리고 그리고 그 논의의 과정은, 유럽보다는 남반구의 시각에 중점을 두고 ‘참여가 폭넓게 보장되는 과정’(broad participatory process)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참석자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향후 1년 안에 교회들과 에큐메니칼 행동체들이 참여하는 협의회를 개최하고, 여기에 가톨릭 교회들과 오순절, 복음주의권 교회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할 것을 WCC에 제안했다. 그리고 일단 이 협의회가 열리고 난 뒤에는 향후 논의의 과정과 내용을 이 협의회가 스스로 결정하게 할 것 역시 제안했다. 말하자면, 일단 ‘새틀짜기를 위한 논의의 과정’이 형성되고 나면, WCC는 그 주도권을 논의 과정 그 자체로 넘긴다는 것이다.
전망
‘에큐메니칼운동의 새틀짜기’가 어떤 스케줄에 의해, 그리고 어떤 형태로 진행될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정해진 바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새틀짜기가 이미 중요한 과제로 제시된 이상, 이 흐름을 거스르기는 사실상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WCC라는 기구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모든 창조세계(오이쿠메네)로 에큐메니칼운동의 실질적인 영역이 확대되는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새로운 모양새’를 잡아 나감에 있어서, ‘가시적 일치’와 ‘세상에 대한 증언과 봉사’라는 에큐메니칼 이상을 얼마나 철저하게 구현해 나갈 것인지가 지켜봐야 할 문제로 대두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