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

21세기 한국 교회의 예배 갱신 과제(박근원 교수)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0-11-30 00:48
조회
4362
21세기 한국 교회의 예배 갱신 과제




박근원 교수

Ph.D. 아퀴나스 신학대학원
現 한신대학교 교수
한국목회학박사원 위원장




I. 들어가는 말


II. 그리스도교 예배의 새로운 환경
1. 지구촌화
2. 에큐메니칼 지평
3. 시대 사조

III. 세계 교회 예배의 수용
1. 예배의 축제화
2. 성만찬 예식의 강조
3. 전통 예배 유산의 활용

IV. 한국 교회 예배의 상황적 표현 1. 주일 예배의 차별화
2. 신앙집회의 역동성
3. 교회 예식·가정 예식의 재정립

V. 나오는 말







I. 들어가는 말


바야흐로 21세기가 눈 앞에 와 있습니다. 이천 년대는 이제 역사의 박물관 속으로 물러나고, 언덕 너머 희망에 찬 삼천 년대가 이 땅 위에 곧 도래할 것입니다. 여기서 한 세기를 마감하고 또 한 세기를 맞이하는 인간의 심정은 회한보다는 설렘에 압도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 설렘을 달래기 위하여, 미래학자들은 낙관론을 펴기도 하고, 문명 충돌론 같은 비관론을 내보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가 맞이할 새로운 21세기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특히 21세기 우리 한국 교회의 예배는 어떤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야 할까요?

오늘 21세기 한국 교회 예배 신학과 실천의 새로운 위상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계 교회 역사의 한 세기 정도는 개괄해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배 내용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를 살펴보면, 매우 흥미 있는 사실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곧 동방 교회는 서서 드리는 성만찬 중심의 찬양 예배가 전형을 이루었고, 서방 교회는 무릎을 꿇고 드리는 미사 중심의 성례전적 예배가 전형을 이루었으며, 이에 반하여 개혁 교회는 앉아서 드리는 설교 중심의 듣는 예배가 전형을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저마다의 이러한 전통적 흐름이 오늘에는 어떻게 합류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는 것은 더더욱 흥미 있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 예배 연구나 세계 교회의 일치 운동을 통해서 예배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이해나 교회 이해, 복음 이해나 종말론 이해에서, 현대 예배 신학의 위상 전환을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 예배 자체가 개개 예배 전통을 재조명하고, 세계 교회 예배의 유산을 적극 수용하며, 현대 상황 문화를 창조적으로 표현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특히 성만찬 예식의 의미와 빈도를 강조하는 것이나, 철저한 준비를 통한 전체 회중의 참여를 요구하는 것이나, 예배의 축제성 회복을 통한 좀더 역동적인 예배를 주창하는 것 등이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배가 진정 교회 공동체의 생명력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예배에서 '구원의 축제'라는 예배의 역동적 성격이 늘 살아 숨쉴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21세기 예배론의 관건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좀더 자세히 밝히겠지만, 우리의 그리스도교 예배에 이러한 역동적 성격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은 지난 4반세기 이후의 현상입니다. 초대 교회 예배의 본질이 학문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오직 그것만이 아닌 복합된 역사적 요인이 작용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 이후 약 5세기 동안에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역동적 성격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약 천여 년 동안은 '미사'라는 틀의 고정된 로마 가톨릭 예배가 별다른 변화 없이 지속되었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정체적이고 고정화된 예배를 개혁하려 했으나, 그 후 5세기의 개혁 교회 예배도 다시금 정체적 성격으로 고정되고 말았습니다. 설교만을 중시한 고정된 예배의 표현으로 획일화된 것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시작된 세계 교회 일치 운동 과정에서도 그 정체성은 극복되지 못했습니다. 신 구교가 저마다 예배 전통을 고집해 왔을 뿐만 아니라, 개혁 교회들 사이에서도 고정된 교파적 예배의 성격을 유지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60년대를 전환점으로 예배 표현에 새로운 장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교회 전통을 초월한 초대 교회의 예배에 관한 연구 업적이 그 지반에 깔려 있기는 해도, 예배 표현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그 밖의 교회사적인 사건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동방 정교회가 에큐메니칼 운동에 합류하게 된 것이 대표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가려져서 역사적 그늘에 놓여 있던 세계 교회의 다른 한 주류가 이 운동에 합류함으로써, 초대교회 예배의 역동성을 새롭게 인식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동방교회의 예배에 원초적인 그리스도교 예배의 한 모습이 보존되어 왔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동방 교회의 예배와 만남으로써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예배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사고가 움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그리스도교 예배 유산의 공통 분모를 확인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가톨릭 교회에서는 1960년대 중반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쳐 본격적인 예배 개혁의 기치를 든 바 있고, 또 본격적인 예배 표현의 개혁을 주도해 오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런 획일적인 개혁 운동으로까지는 전개되지 못했지만, 에큐메니칼 운동의 과정을 통한 개신 교회와 동방 교회의 만남에서 참신한 예배 갱신 운동의 물결이 일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예배 갱신 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위에서 말한 동시대적인 교회사적 사건들의 교차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세계 교회가 예배의 원초적인 모습을 되찾아 그것을 보전해 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배 운동의 성격을 여러 가지 시각에서 검토할 수도 있겠으나, 쉽게 표현해서 이는 예배의 '역동성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가장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도 진행 중이고 적어도 이번 세기 말에는 그 표현의 윤곽들이 정립될 조짐을 보이는 그리스도교 예배 표현의 새로운 경향성은 바로 이 본연의 '역동성 회복'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세계 교회 예배 표현의 새로운 경향은 그 역동성 회복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입체적인 현상을 평면적으로 설명하기란 무척 어렵지만, 그것을 집약한다는 의미에서 말하자면 이런 내용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세계 교회 예배의 역동성은 '축제화', '상황화', '세계화'라는 차원에서 새롭게 표현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예배 갱신 운동의 실천적 삼각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그 세 토막의 새로운 예배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Ⅱ. 그리스도교 예배의 새로운 환경


1. 지구촌화


우리는 지금 세계화·지구촌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교 예배가 어떤 닫혀진 교회 공동체의 축제로만 진행될 수는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현대 예배에서 그리스도교 예배 본연의 역동적 성격이 드러나는 다른 한 국면은 세계 교회의 예배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지구촌의 현실은 어느 한쪽 구석을 드러내지 못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지구촌의 개방과 더불어 이번 세기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오늘의 예배 표현에 새로운 역동성을 진작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그리스도교 예배의 '세계화' 현상이 저마다 다른 나라와 교회의 예배에 새로운 활력소를 제공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최근까지의 세계 교회 일치 운동이 그리스도교 예배의 이해와 연구에 기여해 온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배의 뿌리는 같으나 교회 전통에 따라 다르게 발전되어 온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차이를 바로 이해하고 공감대를 확대해 가려는 연구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BEM 문서의 등장이 그 구체적인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뿌리에 대한 연구에서, 그 종말론적인 신학적 공감대를 확인하였습니다. 꼭 배타적인 것만은 아닌 예배 전통들도 확인하였습니다. 아울러 오늘의 예배 현장인 세계 곧 지구촌에서 공동 과제의 발견에 함께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들은 매우 희망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에큐메니칼 지평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에큐메니칼 유산을 발견하게 된 것이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본디 하나의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확장과 발전 과정에서 제각기 지역적 문화의 요소가 가미도 되고 시대적인 분위기들도 가미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리화되면서 어떤 일정한 유형으로 고착되어 버렸습니다. 예배의 고정화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긴 역사적 과정에서 이해하자면, 예배 본연의 역동성을 상실해 온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늘도 세계 교회의 일치 운동에 가시가 되고 있는 것은 이렇게 각 교회 전통마다에 고착된 예배 의식입니다. 20세기에 와서 서로 다른 교회 전통들이 만나 당면 과제를 논의하는 과정에, 저마다 다른 예배의 다양성을 인식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서로 공감대가 있음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에 관한 이 공감대가 상이점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예배에서는 온 세계의 기쁨과 아픔에 동참하는 예배로의 개혁이 요청됩니다. 창조 세계의 탄식을 외면하는 하나님 찬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세계 교회들의 예배 요소들도 우리의 예배 요소로 수렴되어, 우리의 노래와 탄식으로 표현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예배의 세계화는 거꾸로 예배의 상황화를 요구합니다. 이미 많은 세계 교회의 경우가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고 있지만, 우리의 교회도 우리 한국 문화적인 표현으로 다듬어져야 할 것입니다. 상황적-문화적 동질성 속에서, 지구촌 인류의 동질성 구현이 가능한 시대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세계적이면서도 철저하게 한국적인 예배의 창출이 한국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미래의 과제라고 확신합니다. 수직적으로는 전통을, 수평적으로는 세계를 품는 21세기 한국 교회의 예배 갱신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할 것입니다.


3. 시대 사조


현대 사회는 탈근대화라는 시대 사조에 따라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서 엄청난 회오리바람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예배에서도 그 전통적 유산이 해체되고 창조적으로 재구성되는 진통을 앓고 있습니다. 영상 매체의 발달도 눈부실 정도입니다. 정보화 시대라는 구호 아래, 첨단 미디어들의 등장이 눈만 뜨고나면 새롭게 발전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 장치에서도 컴퓨터를 이용한 화상 교육이나 설교를 보조하는 놀라운 장치들이 속속 그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최첨단 극장식 교회나 온갖 미디어들로 가득 찬 미디어 만능주의 교회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사용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되면서, 인터넷 예배까지 생기는 현실이고 보면, 이러한 첨단 시대의 물결을 하루하루 헤쳐 나가기가 21세기에는 더욱더 어려워질 전망입니다. 첨단 정보나 미디어들이 회중들의 의사 소통과 설교를 위하여 제한적으로 선용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의도적인 방향으로 계산된 조작을 함으로써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회중이 온몸으로 참여하는 예배가 아니라, 예배 구경꾼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예배는 잘못입니다. 하나님과의 접촉을 개인화 시켜 버리는 그 모든 행위도 위험합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경배와 찬양이나 CCM 같은 새로운 시도들에서도, 그 순기능과 역기능을 잘 살필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합니다. 공부방이나 노래방에서, 휘황찬란한 거리나 교회에서, 젊은이들을 무분별한 팝송 중독증으로부터 구출해 내어, 종교적인 감격과 체험을 맘껏 발산할 수 있게 한 데는 참으로 바람직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천편일률적이고 따분한 설교 중심의 예배 틀을 과감히 깨고, 성령의 임재 가운데 온 교회 회중의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참여를 가져온 것은 획기적이라 할 만합니다. 하지만 발라드 풍이나 록 뮤직 풍의 남의 나라 리듬을 앞다투어 소개하는 데 혈안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식의 되풀이가 우리 민족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긴 안목으로 예배 리듬의 신명성을 포촉하고, 21세기 미래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물꼬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유행의 범주를 뛰어넘어, 외국의 신명성과 우리 민족의 신명성이 뿌리에서부터 접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국 복음송의 가사나 율동마저 마구잡이 식으로 베껴 쓰는 데는 위험 요소가 많습니다. 어색한 외국 정서에 함몰되어, 우리 민족의 독특한 신앙적 표현이 사라진다면, 이것 또한 잠깐 동안의 유행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몇몇 리더 중심의 찬양단 공연으로 끝나 버리거나, 개인적 은혜 체험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듯한 계산된 몸짓, 음향 효과나 집단 심리 기제를 이용하여 악용할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시대 사조를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무작정 이 시대 조류에 편승하여 좇아 갈 것이냐, 아니면 이 시대 사조의 망망대해에 희망의 돛을 달고 의연히 믿음의 항해를 해 나갈 것이냐 입니다. 21세기 새로운 시대 조류를 헤쳐 가야 할 우리 모두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예배 원론의 정석을 지켜 가려는 피나는 노력일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예배와 각가지 신앙 집회에서 무엇보다도 축제적이고 역동적인 모습을 되살려 가야 할 것입니다. 회중이 여흥을 즐기는 구경꾼이나 관객으로 남지 않도록, 프로그램이나 참여자의 다양화를 꾀하여야 할 것입니다. 연극이나 춤, 각종 미디어도 선용할 수 있고, 여성이나 청년 등 교회 내 소외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과 참여로 신앙 집회 자체가 축제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회중의 삶과 연결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 개인적·공동체적 역할을 분명히 깨닫고 결단함으로써,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신앙 순례를 계속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런 시간들이 심층적인 집단 치유의 기회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고 함께 치유를 경험하는 치유 공동체의 역할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신앙의 동맥에 뿌리가 닿아 수혈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Ⅲ. 세계 교회 예배의 수용


1. 예배의 축제화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예배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신앙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주일의 예배도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축제를 반복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네 폭 병풍과도 같은 예배 행위의 가닥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예배의 참 뜻을 발견할 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듯 예배는 본디 '부활의 축제'였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시작된 것이 오늘의 예배입니다. 부활 사건 자체도 역동적 사건이었거니와, 그것을 축하하는 예배 자체도 역동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 축제적인 예배의 성격이 오랜 역사를 통해서 '의식'이 되고 '예전'이 되면서, 원래의 역동적인 성격이 희석되거나 퇴색된 셈입니다. 초대교회 예배에 관한 최근 연구를 통하여 예배의 축제적이고 역동적인 성격을 새롭게 깨달은 것입니다. 오늘 세계 교회의 신학적 강조점도 예배에 대한 이런 이해를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른바 종말론적인 예배 이해입니다. 예배가 '메시아적인 잔치'라는 이해입니다. "그것은 모인 공동체의 잔치인데, 이 공동체는 복음을 선포하고 경험된 해방에 응답하고 그 나라의 표징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식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친교를 성취합니다"(Moltmann). "예배는 구원 역사의 축제이며, 그것이 마지막 때에 확인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또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역사의 축제입니다"(von Allmen). 오늘의 예배는 그런 축제적인 성격을 재현해서 그 역동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 자체가 축제를 위한 장막으로 이해되고, 거기에 장식된 예술적인 표현들도 악과 죽음과의 갈등 속에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축하하는 표현 양식을 갖춰 가고 있습니다. 예배의 내용이 기쁨과 희망의 잔치가 되어 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축제적인 예배란 드라마틱한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의 내용이 무용과 연극으로 표현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말보다 행동이 주종을 이루는 예배가 됩니다. 이런 예배에는 움직임과 리듬이 따른다. 십자가와 깃발을 앞세운 예배 행렬로써 예배가 시작됩니다. 성서 봉독도 그저 성서를 펴서 읽는 정체적인 것이 아니라, 가시적인 '말씀의 입장' 의식을 통해 성서를 받아 펴서 봉독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예배는 사제나 예배 인도자의 독주가 아니고, 온 회중의 참여 형태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런 축제적인 예배는 인간의 육감 전체를 위한 것이야 합니다. 지루하게 말로써 이어지는 설교를 듣는다거나 미사를 드리는 행위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말도 하고 냄새도 맡고 만져도 볼 수 있는 총체적인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예배에서는 구경꾼(onlooker)과 연주자(performer)가 구분될 수 없습니다. 예배 순서지에 활자화된 것을 함께 읽는 정도의 참여로써는 역동적인 예배의 성격을 다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축제적인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예배 순서를 판에 박은 '주보'의 문자로부터 자유로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좀더 즉흥적인 응답이 요청됩니다. 축제적인 예배에는 같은 것의 반복만이 아닌, 새로운 창조적 표현이 요청됩니다.

그리스도교 예배를 축제화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극동 아시아의 나라들(한국-일본-중국)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예배와 민속 축제가 성속(聖俗)의 이질적인 것으로 구분되어, 상호 교호작용이 용납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지역 특유의 문화적 유산이기도 하고, 여기에 전달된 그리스도교 형태의 탓이기도 합니다. 축제는 좀 상스런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고, 점잖은 사람들은 그저 구경이나 해야 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교 예배와 민속 축제와의 만남이 불가능하므로 예배의 역동성을 회복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축제적 예배의 결여가 오늘 한국 교회 예배에 변태적인 풍습의 도입을 진작시키는 풍토를 자아내고 있음을 흔히 목격하게 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축제적인 예배의 시도는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예배를 축제화하기가 어렵다 해도, 한 해에 몇 차례만이라도 축제화해 가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절기로는 부활절과 성탄절, 민속 절기로는 중추절과 8 15 해방절로부터 축제적인 표현이 시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곁들여서 지교회의 창립 기념 주일 또는 어느 지역 공동체의 경사를 겸한 예배일 경우에 축제적인 예배가 가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배의 축제성 회복과 관련하여, 예배 틀의 전체적인 재검토도 시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의 축제적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예배 환경과 축제적인 장식과 예배 내용에 관해서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전통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예배당 구조에서 축제적 분위기 조성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제대가 있는 강단의 고정화입니다. 현대 신학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교 예배의 제단은 성만찬 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정된 제단을 헐 수도 있고, 다른 모습으로 위치를 변경시킬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배의 축제적 분위기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 세계 교회 예배 갱신론자들의 한결같은 지론입니다. 제단 주변의 상징물도 필요에 따라서 자리바꿈을 하거나 달리 장식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축제 계절에 맞는 빛깔 변화도 필수적입니다. '교회기(旗)'나 '국기'의 배열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간 시설의 재배치 곧 강단, 상징물, 의자를 포함한 전체 예배 공간의 재배열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합니다. 전통적인 상징을 포함한 예배 공간의 축제적 분위기 조성이 오늘의 예배에서 아주 결정적인 요소임이 틀림없습니다.

축제적인 예배 장식의 다양성을 위해서는 우리 민속 문화의 여러 상징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표현해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만장이나 궤를 축제적으로 받아들인 현수막에 대해서도 바른 이해가 필요하고, 성령의 임재를 뜻하는 불의 장식으로서 등잔의 활용도 생각해봄직합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의 깃발(banner)을 긍정적으로 살려 쓰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생명'을 상징하는 생화(生花)나 효과적인 기계 장치에 대해서도 올바르고 치밀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축제적 예배의 예전적 동작도 중요한 부분입니다. 사실 축제적인 예배란 몸과 손발의 움직임을 전제로 한 예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자에서 앉았다 섰다 하는 정도에서 벗어나, 입장·퇴장 행렬이나 성서의 입장이나 성만찬 참여 등에서 적극적이고 횡적인 움직임이 요구됩니다. 몸 전체로 찬양을 드리는 '예전춤', 그리고 몸 전체로 메시지를 전하는 '예전극' 같은 드라마 예배에 대해서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모름지기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인간의 집단 무의식 속에 깃들이어 있는 예배의 축제적 리듬이 살아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노력들이 가시화될 때, 전체 회중이 참여하는 축제적 예배 분위기 조성이 결코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 성만찬 예식의 강조


그리스도교 예배를 축제화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요?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방법은 교회 전통의 성만찬 예식을 회복해 가는 것이 아닐까요? 설교 중심의 획일적인 예배를 벗어나 좀더 역동적인 축제를 베풀기 위해서는, 성만찬 예식의 의미와 빈도를 강조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만찬 예식의 실천적인 회복이 우리의 시급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성만찬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하면 '희망의 축제'가 됩니다. 오늘의 세계 교회는 적어도 이런 성격의 성만찬 예식으로 비중을 바꿔 가야 합니다. 희망의 축제란 오고 있는 메시아 왕국을 향하여 순례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도상 잔치입니다. 이런 성만찬 예식에서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회상하면서, 그분의 구원과 해방이 성취되고, 바로 이런 희망을 드러내는 축제로서 선포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성만찬 예식을 이렇게 희망의 축제로 비중을 바꿔 갈 때, 지금까지의 성만찬 이해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미래지향적인 희망의 축제로서, 성만찬 예식은 '개방적인 초대'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만찬 예식에서 '주님의 초대'의 기선성입니다. 그분의 초청이 희망의 축제에서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만찬의 개방성은 바로 주님의 초청으로 운명 지워진 것입니다. 교파나 교리나 교역 직분의 폐쇄성을 문제 삼는 신학적 표현입니다. 희망의 축제는 열려진 축제로서, 이 예식의 율법성을 깨고 복음적인 것으로 비중을 바꿔 가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성만찬은 십자가 위에 펼쳐진 예수 그리스도의 팔처럼, 개방적인 초대의 근거 위에서 베풀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계의 화해를 위하여 죽었듯이, 성만찬에서 세계는 화해 가운데로 초대되는 것입니다. 교파의 한계를 초월해야 하는 것은 물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한계마저도 초월할 수 있는, 세계를 향한 개방된 예식으로 이해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희망의 축제로서, 성만찬은 그 기원을 예수의 메시아적인 역사 곧 제자들과 나눈 그분의 메시아적인 잔치들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 사건을 회상하는 예식 속에 담긴 희망의 표징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한 식탁에 모여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 그분의 말씀과 함께, 서로에게 빵을 떼어 주고 포도주 잔을 제공합니다. 이런 행동을 통해서 교회 공동체는 메시아적인 수난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선포하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하여 영광 가운데 오실 그분의 오심에 대한 교회 공동체의 희망을 선언하게 됩니다. 긴 성만찬 기도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갈구하는 기원 속에서는, 이 세계의 구체적인 아픔과 연대하는 사명도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회상이 세상의 고난과 승리의 희망을 회상하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만찬은 희망을 회상하는 종말론적인 식사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수난 능력과 그분의 죽음을 통한 죄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희망의 축제는 이런 세계의 아픔과 연대하는 친교를 창조합니다. 적어도 오늘의 성만찬이 이런 의미의 것으로까지 바뀌어 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희망의 축제로서, 성만찬은 교회의 사건만일 수는 없습니다. 동방 교회의 예전에서 강조되어 온 '우주적 의미'가 보완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만찬의 그리스도론적인 토대만으로서는 뭔가 미흡한 느낌이 듭니다. 그 종말론적인 이해는 삼위일체론적인 맥락 안에서 확대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만찬에서 친교는 해방과 화해의 근거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회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회상은 감사한 일일 수 있습니다. 동방 교회의 성만찬 이름이 지니고 있는 이 '감사'(Eucharist)는 그리스도의 해방과 화해가 미치는 영역만큼이나 폭이 넓고 포괄적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리적인 감사 행위 안에서 또 중보의 기도 안에서 전체 피조물을 포함하고 온 우주의 다가오는 해방과 구속을 기다립니다. 이 성만찬을 매개하는 그리스도의 친교를 통하여, 하나님은 감사와 찬양 즐거움과 기쁨 속에서 찬미됩니다.

희망의 축제인 성만찬은 '애찬'(agape meal)의 의미를 어떤 형태로든 포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 때는 애찬이 성만찬 예식에 뒤따라 수행되곤 하였습니다. 성만찬의 교리화 과정에서 애찬이 이것과 분리되거나 아주 상실되어 버린 것은 불행한 발전이라고 봅니다. 성만찬을 종말론적으로 이해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이 아가페적인 성만찬의 의미가 회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빈곤과 억압의 세계 안에서 성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 모든 이의 고통이나 희망과 완전한 연대를 이루면서 성만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메시아가 모든 사람들을 자기 식탁에 초청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고, 또 모든 사람들이 메시아와 함께 그분의 식탁에 앉게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교회의 성만찬은 참가자들을 세상의 나머지 사람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을 했지만, 성만찬을 진정 메시아적인 축제로 이해한다면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를 지닌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식사는 참가자들을 세상 안에서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난한 모든 사람들과 연대를 하게 만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적인 성만찬은 '선교적인 사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성만찬을 그리스도 역사의 통일된 종말론적 관점으로부터 생각했고, 이 세상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렇게 이해된 성만찬 예식의 비중이 예배 현장에서 적극 반영되어야 할 것입니다. 희망의 축제로서 성만찬이 예배의 선포 안에 통합되어야 합니다. 더 이상 예배의 부록으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예배를 축제화하는 데 성만찬의 새로운 역할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3. 전통 예배 유산의 활용


오늘의 세계 교회는 자기네 전통에 대한 고집보다는 이미 발굴된 예배의 공동 유산을 수용해 가는 데 노력을 기울여 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면, 설교 전통과 성만찬 전통의 전향적인 만남일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배타적 입장을 뛰어넘어, 그리스도교의 온전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 과감히 서로의 선 자리를 이해하고 수용하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 곳곳에서 그 모습이 너무도 역력합니다. 설교를 가벼이 보아 온 예배 전통에서는 그 설교의 비중을 높여 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성만찬을 소홀히 해 온 교회 전통에서는 그 복원을 시도하고 있음도 눈에 띕니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유산은 누군가가 독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전적인 전통과 비예전적인 전통이 저마다 흘러내려 오고 있지만, 그 뿌리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서로가 만나게 되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공동 유산의 상속자임을 재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공동 유산을 서로 보완하려는 움직임이 거센 물결처럼 몰려 있음을 느낍니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자면, 대표자 한 사람의 긴 독백 기도보다는 사제와 회중이 함께 드리는 '연도'(litanic prayer)나 '중보의 기도'가 폭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서구 교회의 삼성창(sanctus)이나 자비송(kyrie)이 제3세계의 교회에서도 불려지는가 하면, 반대로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 교회의 찬송이나 기도문이 제1세계의 교회들에서도 애용되고 있습니다. 동방 교회 전통의 '침묵'이 오늘의 세계 교회 예배에 긍정적으로 반영되고 있고, 예배의 마무리를 세계를 향한 '파견'으로 이해한 '보냄의 말씀' 같은 것도 보편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일의 예배에서는 이러한 방향의 예배 갱신 작업이 더욱 거세져서 거의 완성된 모습에 가까워지리라고 기대해 봅니다.

한국의 개신교 전통에서도 '예배력'을 좀더 긍정적으로 살려 써야 합니다. 흔히 교회력이라고 불리어지는 이 예배를 위한 달력은 '축제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세계 교회의 공동 예배 유산으로서 예배의 축제화에 필요불가결한 자원입니다. 스위스 종교 개혁자들이 자신들의 개혁 의지와 관련하여 지나치게 가지를 잘라 버렸기 때문에, 특히 장로교의 전통에서 별로 중요하게 평가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세기 예배의 전통에 관한 연구에서 그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기에 이르렀고, 오늘 대부분의 세계 교회가 축제적인 예배의 자원으로 다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리듬이 필요하고 교회의 연중 예배에도 숨결이 있어야 하는데, 이 예배력이야말로 예배를 통한 신앙 영성의 형성에 바람직한 도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배력에도 다양성은 있습니다. 에큐메니칼 예배력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하더라도, 그 완성은 저마다 교회 전통과 그 교회마다의 문화적 상황의 빛 속에서 다시 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존의 교회력을 보강하는 차원에서, 삼위일체력에 따라 창조절의 의미를 새롭게 부각시키는 것은 우리의 상황에 매우 적합한 시도가 될 것입니다.

이 예배력에 따른 주일 예배의 설교 본문으로 제정된 '성서 일과'는 21세기 세계 교회 강단 설교의 흐름을 주름잡아 갈 것이라고 판단됩니다. 이 '성서 일과'는 해마다 각 주일이 지니는 절기의 의미에 따라 3년을 한 주기로 적절한 성경 구절을 배열해 놓은 것입니다.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신구약 성서 내용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읽고 듣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 세 본문은 구약과 사도 서신(요한 계시록 포함), 그리고 복음서로부터의 성서 본문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선포되고 시작된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복음서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완전히 성취되었고, 그것이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서 인류의 모든 세대에 전파됨을 이해하도록 고려한 것입니다. 교회력이나 성서 일과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 개신 교회의 설교자들에게는, 예전적·교육적·에큐메니칼적인 면에서, 3중의 이득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세계 교회 예배 갱신 운동에서 또하나 두드러진 경향은 예배와 예식에서의 '시편'에 대한 재평가입니다. 한국의 개신교에서도 이를 중요한 미래 과제로 수용해 가야 할 것입니다. 초대 교회 이후 2천년의 예배 역사에서 시편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재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특히 16세기 제네바의 개혁자 요한 칼빈이 예배에서 시편 노래를 부활시켰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개혁자들의 시편 노래와 교독, 교송에 대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 교회에서 그 활용이 퇴색되어 가고 있음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저마다 다른 문화권에서 자신들의 정서에 맞는 감동적인 시편의 예전적인 번역이 어려운 과제이기는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도 새로운 예배 자원으로서 시편 노래의 개발과 활용이 시급합니다.


Ⅳ. 한국 교회 예배의 상황적 표현


1. 주일 예배의 차별화


우리 교회에는 예배의 횟수가 너무 많은데, 문제는 그 예배마다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부흥 집회의 물결 속에서 모든 집회가 예배로 불리어지는 바람에, 그 예배마다의 특성과 강조점이 희석되어 버린 것입니다. 모든 집회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해 온 점에서는 그 나름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으나, 예배다운 예배를 드려 가는 데는 의식의 문제가 뒤따릅니다. 지금쯤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예배 전승에 따라, 그 예배에 차등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가장 중요한 예배는 부활절 축제의 반복으로 주일에 드리는 대예배입니다. 이 예배는 다른 예배와 구분해서 가능한 한 축제화하고, 동시에 성만찬을 포함한 예배로 바꿔 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경우, 이미 말씀드렸듯이, 주일예배의 선포적인 설교는 반드시 예배력에 준한 성서 일과의 세 본문(구약성서, 서신서, 복음서)에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또한 주일 예배의 진정한 차별화는 상황화를 통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동북아 문화권에서, 예배(禮拜)란 예법(禮法)을 갖추어 하나님을 경배(敬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영광의 요소가 깃들이어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알고 있듯이, 예배는 영원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피조물의 응답입니다. 그 피조물 그 인간들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 사는 사람이냐에 따라서, 하나님 이해도 다르고 응답하는 방식도 다릅니다. 구체적인 삶을 배제한 예배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 예배가 진정한 그리스도교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장소나 시대에 따라서 그 문화적 표현이 가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예배는 저마다 지역 교회 공동체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서 예배 표현의 역동성을 회복해 가고 있습니다. 예배의 문화적 창출(inculturation)이 날이 갈수록 돋보이고 있습니다. 예배의 '상황화'를 통한 그 역동적 성격의 재현이 시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예배 역사는 '제의'(cult)와 '문화'(culture) 사이의 교류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참다운 역동성도 이 두 함수 관계에서 회복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배에 관한 역사적인 연구에서는 문화적 적응 과정(aggiornamento)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변함없는 것과 변함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변함없는 것은 예배의 기본 유형이고, 늘 변하는 것은 축제의 양식과 그 예배를 구체화하는 삶의 요소들입니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역동성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에게나 그 문화와의 토착적이고 창조적인 만남을 통해서만 유지되어 왔습니다. 이 사실을 좀더 고전적인 사례를 들어서 설명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예배의 기본 틀은 회당 예배, 식사 의식, 개종 세례, 연례적인 축제, 매주의 안식일 모임, 공동 기도를 위한 매일 집회 등을 포함한 유대교 예배 형태로부터 발전한 것입니다. 여기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말씀의 예전, 성만찬 예식, 세례 예식, 부활절과 오순절 축제, 주일마다 갖는 전체 공동체의 집회, 일정한 시간에 찬양과 기도를 위해 모이는 매일 기도회 등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예배의 기본 유형이 사도행전에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사귀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행전 2:42).

예배의 문화적인 적응의 역사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됩니다. 오늘까지도 교회 예배에 아람어나 히브리어 표현이 남아 있음은 물론, 헬라어가 많은 예배 표현으로서 잔존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후 로마에 정착한 그리스도교는 그 땅의 이교 문화에서 교회의 결혼 예식과 장례 예식을 채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온 생애를 연중 축제의 절기로 만든 것도 로마에서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확장됨에 따라 그 예배는 새로운 형태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토착적인 언어들로 복음의 전달이 어려웠을 때 라틴어가 예전 언어로 고정은 되었지만, 그 예배가 좀더 시각적이고 연극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도 모두 그 당시의 문화적 적응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동방 교회 예배에서 '성상'(icon)의 등장은 그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그것은 예배 공동체에 그리스도와 그 성도들의 임재를 시각적으로 선포하는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서방 교회 예전에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인간됨을 강조한 나머지, 성상 예배를 '미사'라는 드라마 형태로 발전시키게 된 것입니다. 예배의 상징이 다른 형태로 바뀌어진 셈입니다.

그리스도교 예배가 문화와의 만남에서 그 역동성을 유지해 온 역사는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언제나 역동성이 상실되고 굳어져 갈 때에는 새로운 탈바꿈이 시도되곤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오늘의 예배 갱신 운동도 오늘의 문화적인 다양성과 역동성 속에서 새로운 활력을 찾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현대 문화에 관한 논평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활자 문화·라디오·흑백 텔레비전 시대를 뒤로하고 컬러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그들에게 글로 읽는 예배, 말만 듣는 예배란 끝없는 갈증과 공허를 안겨 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무언가 새로운 예배 언어가 개발되어 가야 합니다. 예배의 매체(media)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가 그 특정 시대, 그 특정 장소에 있는 예배 공동체의 삶의 표현 속에서 본연의 역동성을 유지해 온 것이 사실이고, 오늘도 그런 역학이 예배 갱신 운동의 차원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남쪽에 위치한 떼제 공동체나 라틴 아메리카 기초 공동체 같은 것을 대표적인 사례로 연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한국 교회의 예배에도 아직 초보적인 단계이긴 하지만, 이런 역동적인 예배의 발상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국악을 동반한 예배가 시도되고 있습니다. 밥상 공동체의 현장감 있는 성만찬 예식도 실험 단계이기는 하지만 꾸준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예배를 한국 민속과 문화의 '마당' 개념으로 정리해 보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사려져 가는 우리 민속 문화의 당굿을 복원하여 거기에 그리스도교적인 의미 부여를 시도해봄직합니다. 당굿 같은 우리 민속 축제 속에 깃들이어 있는 춤과 가락과 율동을, 그리스도교의 예전춤이나 찬양이나 비나리나 독경 등으로 승화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국 문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예복이나 축제복 또는 한복의 활용, 우리 문화의 얼이 담긴 성만찬 집기나 상징물의 개발도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교가 우리 민족의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마을 축제를 수용한 창조적인 예배도 가능할 것입니다. 지역 단위로 큰 규모의 도당굿 같은 민속 예배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아직은 모든 것이 불투명하지만, 이런저런 시도에 불이 붙으면 21세기 한국 교회의 예배 갱신 운동에도 새로운 전기가 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명의 틈을 볼 수 있는 비전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2. 신앙 집회의 역동성


주일 낮예배 이외의 기존 예배들은 '신앙 집회'의 성격으로 유지해 가야 합니다. 신앙을 함양하기 위한 성서 연구나 성서 강해, 또는 갖가지 신앙 강좌가 바람직합니다. 이런 집회에서도 계속 설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경우, 그것들은 강해설교의 성격으로 주일 낮예배의 선포적 설교와 구분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바꿔 말해서, 주일 낮예배의 설교까지 강해설교를 한다는 것은 예배의 차별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 밖의 갖가지 기도회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립이 요청됩니다. 새벽 기도회, 금요 기도회, 구역 기도회 등은 '기도 모임'으로 정착해 가고 있고 또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서는 이런 것들을 교회당 중심으로 '예배' 자를 붙여 계속하고 있으나, 그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의 이런 기도 모임들이 '미니' 부흥회 같은 성격을 지녀 왔으나, 사실 그 때 그 순간뿐이었습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앞으로는 교회의 '매일 기도회'(Daily Office) 전통과 접맥시켜 갔으면 합니다. 이런 신앙의 울 안에서, 유대교로부터 시작된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성 생활과 우리 종교 문화와의 만남이 가능합니다. 이런 기도 모임에서는 앞에 말한 시편 노래나 시편 교송이 잘 어울릴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교회의 다른 신앙 집회들은 설령 부흥 집회의 숨결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경우라도, 아침·점심·저녁으로 하루 세 번 또는 그 이상 정규적으로 드리는 이 '매일 기도회'는 교회 전통에 면면이 이어져 온 다른 한 가닥의 신앙 영성과 접맥시켜 갔으면 합니다. 교회마다, 가정마다 활용할 수 있는 기도회 자료에 대한 안내가 앞서야 하겠지만, 묵상 기도, 시편 노래, 성서 명상이 주류를 이룬 새로운 가닥의 신앙 훈련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으면 합니다. 하루에 세 번씩, 짤막한 기도회를 계속함으로써, 영성 생활과 훈련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 공동체가 함께 모여 드리는 새벽 기도회, 직장이나 가정에서 끼리끼리 모여 드리는 한낮 기도회,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아 드리는 저녁 기도회 들은 새로운 의미에서 한국적 매일 기도회의 실현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3. 교회 예식·가정 예식의 재정립


본디 동서방 교회의 전통에서는 온갖 가정 예식도 교회 예식으로 수용하여 발전시켜 왔습니다. 신앙적인 의미 부여와 그 예식들의 장엄함과 축제성을 위해서는 좋은 전통으로 이어져 온 셈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없거나 그런 예식을 주재할 성직자가 없는 이교 문화권에서는 그런 전통의 계승이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 민속의 제의적인 요소들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토대로 알맞게 해석하여, 21세기 한국 교회의 교회 예식·가정 예식으로 고쳐 쓰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 예식은 교회와 교역자를 중심으로 꾸려 가고, 가정 예식은 가정과 만인 사제직을 중심으로 꾸려 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주변의 크고 작은 목회적 상황에 따른 모임까지도 예배라는 상투적인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경우는 예배라기보다는 '예식'으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 예배, 장례 예배가 아니라, 결혼 예식, 장례 예식으로 불리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예배와 예식을 구분하되, 모든 예식을 'OO식'으로 격하해 온 이웃나라의 풍습을 지양해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찬식', '세례식', '결혼식', '장례식'으로 부르지 말고, 반드시 '예식'으로 격상해서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성찬식'이 아니고, '성만찬' 또는 '성만찬 예식'으로 부르는 것이 신학적으로 정당한 표현입니다.

우리 문화의 관혼상제나 가정의례를 그리스도교 신학의 핵심에 따라, 믿음 예식, 사랑 예식, 희망 예식 들로 얼마든지 재해석하고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 겨레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예식들, 곧 '고사례'(告祀禮)라고 통칭해도 좋을 일련의 민간 예식들을, 그리스도교 예식의 신앙적인 차원에서 '축복 예식'으로 적극적으로 승화시켜 가야 합니다. 좀더 세부적으로 보면, 믿음 예식에는 세례와 견신례, 교역자와 공동체와 평신도의 부름, 그리고 건축 및 봉헌 따위의 그리스도교 믿음 행위와 관련된 예식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사랑 예식에서는 약혼과 결혼, 결혼 인정과 기념에 관련된 갖가지 예식이 가능합니다. 희망 예식에는 죽음과 추모에 관한 예식이 다양하게 깃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 예식에서는 그 밖에 한 인간의 생애 주기나, 가정과 지역사회와 관련된 온갖 예식을 한 데 다듬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미 밝혔듯이, 초대 교회 때부터 이런 예식들은 그리스도교 예식으로 얼마든지 있어 왔음을 문헌 연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어디까지가 문화이고 어디까지가 신앙인지를 비판적인 검토를 통하여, 이런 민간 예식의 그리스도교적인 예식화를 위해 과감하게 물꼬를 열어 가야 할 것입니다. 물꼬는 이미 열려 있다고 생각하는데, 중요한 것은 한국의 교회로서도 주체적으로 그런 것을 신학화하고 신앙화하는 작업을 해 가는 일입니다.


Ⅴ. 나오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21세기 한국 교회 예배 갱신의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해 보았습니다. 오늘의 예배는 그 표현 자체가 무척이나 생동감 있고 역동적인 것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히 오늘 세계 교회는 예배 표현의 르네상스를 맞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미흡한 예배 풍토를 갱신해 갈 수 있는 기회를 맞은 셈입니다. 이 기회를 어떻게 선용할 수 있을까요? 온 세계 교회가 변화를 겪고 있고, 이미 한국 교회들도 그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정체되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세계 교회의 신학적 흐름과 새로운 예배 표현들에 대해서도 민감한 대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예배 표현에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적극적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예배의 새로운 흐름들 가운데 꼭 유의해야 할 점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의 예배 표현이라고 해서 꼭 복잡화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성'을 고수해야 하는 개혁 교회 예배의 원리 같은 것을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창조적인 표현'입니다. 예배 전통과 오늘의 상황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창조적 시도가 가능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예배 표현에서 그 항구성과 잠정성 사이의 긴장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이런 긴장 속에서 역시 창조적 표현의 가능성은 주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의지에 따라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21세기 한국 교회 예배를 갱신해 가야 할 것입니다. 현대 예배의 신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예배의 창조적인 모델을 개발해 가는 데 온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21세기, 세계적으로는 첨단 과학기술 속에서 실질적인 지구촌 시대가 될 것입니다. 민족적으로는 현실적인 통일의 시대가 도래할 것입니다. 종교적으로는 제3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명나는 21세기 공동체가 힘차게 날갯짓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우리 문화를 꽃피우는 신명나는 21세기 예배 갱신의 비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전통의 우리 것을 발굴하고 수용하는 일과, 세계화에 기여하는 일이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세계 교회 예배 유산의 보편성과 한국 풍토에 맞는 상황 예배의 창조성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발전시켜 감으로써, 신명나는 예배의 축제적 본질을 회복하고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21세기 한국 교회의 예배 갱신을 위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우리의 미래 과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