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에 서서] 정치와 일상적 삶 (경향, 6/7)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이번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참패는 지방선거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참여정부에 대한 국민의 전반적인 비판과 거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 국민적 심판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앞으로의 정치 기획을 수립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실증적 조사와 분석 없이 그것을 가려내는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을 포함하여, 추측과 가설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도 보다 정확한 진단으로 나아가는 데에 전혀 무의미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5·31 지방선거가 주는 한 교훈-
많은 유권자들이 정부에 부표를 던진 것을 정책이나 정책 수행의 방법에 대한 합리적 분석의 결과라기보다는 보다 막연하고 일시적인 감정적 반응으로 간주하는 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감정적 반응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그러한 느낌도 어떤 때 많은 요인들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한 하나의 총체적인 평가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이 중요해진 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이다. 유권자들의 부표는 정부의 정책이 이것으로부터 크게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대체적으로 말하여, 정부의 정책과 삶의 느낌의 사이에--특히 그 정책이 과감한 미래 지향적인 것일 때에--완전한 일치가 있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의 삶은 대체로 현재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일단 흔들어 놓는 것처럼 보이기 쉬운 것이 미래 지향의 정책이다. 비참한 극한적 상황이 아니라면, 지금 오늘의 삶의 현실을 흔들어 놓는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반가운 일이 아니다. 노동계급의 혁명 참여를 호소하면서, 마르크스가 부르짖은 유명한 말에는 “기성체제의 전복으로 노동계급이 잃을 것이라고는 그들을 얽매는 쇠사슬밖에 없다”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단순화된 수사적 표현이 그러하기 쉽듯이, 이 말이 놓치고 있는 것은 쇠사슬이 곧 밥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근대적 발전은 이 쇠사슬을 점점 느슨한 것이 되게 했다. 마르크스의 기대와는 달리 사회주의 혁명이 산업화에 앞섰던 서구가 아니라 러시아와 같은 비교적 낙후된 사회에서 일어난 이유도 이러한 데에 있다.
서구 근대성의 성립 과정을 설명하면서,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는 그 하나의 계기로 “일상적인 삶의 긍정”을 말한 바 있다. 이것은 사람의 삶에서, 말하자면, 영웅적 또는 초세간적인 정신적 차원의 가치와 행동이 아니라 장사하고, 일하고, 결혼하고, 자식 기르고, 소설 읽고 작은 느낌에 반응하고 하는--일상적인 일들이 중요해진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일상의 삶의 여러 활동을 뒷받침하는 것이 경제이다.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일상적인 삶이 중요해지면서 위에서 말한 바 쇠사슬 또는 밥줄도 느슨한 것이 된 것이다. 그간의 경제 성장과 민주적 정서의 확대는 우리에게도 상당 정도로 일상적 삶의 긍정을 가져오고 그것을 정치 이슈들에 대한 판단의 중요한 준거가 되게 했다. 물론 이 일상적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그리고 계층마다 다르다. 이미 이루어진 일상적 삶에서 그대로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잃을 것이라고는 억압의 쇠사슬밖에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어 간다는 느낌이 생기고 있는 것이 이 시점의 사정이 아닌가 한다. 단순히 삶에 대한 불만이라는 면에서 말한다면, 불만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불만은 다분히 일상적 삶이 확장되어가는 속도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억울한 느낌을 갖는 데에서 오는 것이지, 반드시 마르크스가 즐겨 쓰는 ‘비참’이라는 말로 형용해야 할 극한적인 상황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할 것이다.
-미래지향 정책과 현실의 괴리-
많은 사람들에게 보존할 만한 일상생활이 있고 그것의 확장을 향한 욕구가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현실에 비추어 그간의 많은 정부정책들은 대체로 사람들의 일상적 삶의 신장(伸張)에 관계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데올로기적이고 추상적인 발상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내용에서 그렇고 접근의 방법이나 홍보의 수사에서 그러했다. 정부가 그 정책적 방향의 핵심에 놓고자 했던 각종 과거사 사업과 같은 것은, 일상성에서 동떨어진 이데올로기적 기획의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이데올로기적이고 추상적이라는 인상을 준 것은 정책의 성격 자체가 그렇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국자들의 말의 스타일만으로도 국가와 삶의 과제들은 그 심각성을 잃고 화풀이를 위한 언어의 놀이로 전락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사실에 근거했으면서도 그것을 전체적 일관성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 그것도 현실이탈을 가져온다. 이번 선거에서 여당에 크게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이 부동산 정책과 그에 관계된 세금이라는 해석들이 있다. 지난번 칼럼에서도 논한 바와 같이, 부동산은 국민의 삶의 현실과 가장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문제이다. 이 문제가 유권자들의 마음에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은 맞는 것일 것이다. 부동산 가격을 억제하는 것은 경제적 관점에서 또 사람의 삶의 근본을 생각하는 관점에서나 충분히 정당성을 가진 정책목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목표나 의도에 관계없이, 현정부 아래에서 부동산 가격은 터무니없는 상승을 계속했고 이 현상은 한정된 지역을 벗어나 전국화했다. 여기에 대한 원인의 상당부분이 수도 이전 계획을 비롯한 정부의 개발주의 정책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주거와 국토의 부동산화는 사회 불안의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값이 상승하는 경우에도 자신의 주거지와 토지가 고가의 부동산이 되는 것은 환영받을 일인 것 같으면서도 삶의 근본을 시장의 거센 폭풍에 노출시키는 것인 까닭에 무의식 속에 불안을 쌓이게 한다. 부동산가의 억제를 위한 세금은 정당한 정책의 수단일 수도 있다고 하겠으나, 그것이 “세금폭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극단적인 것이 될 때, 그것은 정책의 의도를 넘어 사회 안정을 해칠 수밖에 없다.
-현재위치 기반 더 나은곳으로-
정치의 어려움은 의도에 관계없이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데 있다. 정치란 다수 국민의 삶의 운명을 거는 일이다. 그러니만큼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은 정책의 의도보다도 오히려 결과이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정책의 일관성, 정책의 의미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 또는 정책의 현실적 조정-이러한 점에서, 정부가 행동하는 방식은 전혀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삶의 현실과는 관계가 없는 그들만의 추상적 이념으로-또 삶의 전체를 거머쥔 비전이 아니라 지나간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어설픈 단편들로 갈팡질팡 움직여간다는 느낌을 준 것에 틀림없다.
혁명적 변화는 사람들에게 영웅적 행위 속으로 개인의 삶을 투척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영웅이 아닌 보통 사람의 경우 일상적 삶에서 잃어버릴 것이 없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발전 단계에 두드러진 것은 일상적 삶의 성장이다. 그것을 넘어, 해야 할 많은 일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얻은 것에 기초하면서 그것을 넘어가는 것이라야 한다. 마르크스적 혁명 이상에 공감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성쇠를 지켜보면서 사회 혁명의 바른 방법은 마치 시인이 사실을 비유적으로 변화시켜 원래의 의미를 확대하듯이 사회가 드러내주는 사실 자체의 성격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 우리의 과제는 현실의 핵심적인 사실에 충실하면서-이 현실이 사람의 삶의 기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그것을 보다 온전한 것으로 바꾸어 가고, 그것을 보다 나은 다음 단계로 유도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선거의 한 교훈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