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야!한국사회] 기러기아빠 현상의 또다른 원인 / 이영미 (한겨레,5/29)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14 23:38
조회
631
**[야!한국사회] 기러기아빠 현상의 또다른 원인 / 이영미 (한겨레,5/29)

북적거리는 가정의 달 5월을 보내며 기러기아빠들은 남달리 우울했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 살 때에는 번거롭게만 여겼던 어린이날이나 어버이날도 막상 소외되고 나니 괴로운 날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몇십년 전만 해도 어버이날에 선생님 훈시에는, 꽃 달아 드릴 부모가 없는 고아들에 대해 생각하자는 내용이 늘 포함되었는데, 이제는 위로받아야 할 사람이 더 늘어난 셈이다. 사실 기러기아빠 현상은 단순히 교육문제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물론 교육문제가 주된 원인이기는 하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일까?
나는 기러기아빠 현상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의 중년 여성들이 지니고 있는 가족관계로부터의 도피 욕구도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이 한국 땅에서 결혼과 동시에 아내이며 며느리이며 동서, 형수, 올케이며, 게다가 시집간 딸로서 해야 할 노릇까지 감당했던 여자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그때부터 이 의무에서 홀가분하게 해방되는 것이다. 특히 남편의 해외 근무를 따라 3, 4년 외국에서 산 여자들이 남편의 귀국 시점에서 아이의 교육을 위해 남겠다고 고집하며 달랑 남편만 귀국시켜 기러기아빠를 만드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정작 명분으로 내세운 교육문제보다는 다시 그 복잡한 가족의 의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끔찍해서가 아닐까.

광복 뒤 60년 동안 우리나라의 여성 교육 수준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고, 그에 따라 여성들의 자아실현 욕구 역시 증대되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여건은 이를 제대로 해결하기 힘들게 되어 있다. 아이 있는 기혼여성의 취업은 여전히 힘들고, 육아와 노인 봉양 등은 가족 안에서 해결해야 하며, 싫든 좋든 주부가 그것을 떠안고 있다. 가족관계는 여전히 복잡하고 끈끈하며, 이 관계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 역시 오로지 주부의 몫이 되어 있다. 양가 어른께 안부전화 하는 일부터, 온갖 집안 대소사를 챙기는 일까지, 이 모두는 ‘화목한 가정’을 위해 주부에게 짐 지워진 의무이다. 이것을 다 해내면서, 세계 최고의 속도로 달려가는 한국 사회의 직업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이것 하자고 대학 다녔나?’ 하고 한탄하던 여자들은 삶에 자신감이 생긴 40대에 이르러 모든 가족관계로부터의 도피를 결심한다. 그러나 오로지 아이만을 데리고. 이 대목이야말로 아이러니하다. 이 여자들은 자신에게 부과된 가족의 굴레를 벗어던지면서, 자신은 자아실현의 대리물로 자식을 선택함으로써 또다른 가족의 굴레를 생산한다. 직업인으로서의 자아실현은 아이를 낳으면서 이미 물건너갔고, 이제는 남편마저 버리고 떠나온 마당에, 이들은 오로지 자식의 성공(이들이 원하는 성공이 무엇인지, 과연 그것이 진정한 성공인지는 차치하기로 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된다. 그런데 엄마의 이런 집착이 아이에게는 또 끔찍한 굴레다. 이렇게 피해와 고통은 재생산된다.

내가 아는 한 가족의 예다. 시부모를 모시고 살던 40대 후반의 주부가 중학생 아들과 함께 외국유학을 떠났다. 이 주부는 외국에서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8년이 넘도록 귀국하지 않는다. 이미 정년퇴직을 한 기러기아빠 남편은 홀로된 고령의 시아버지와 둘이 산다. 그런데 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들이 대학도 엄마도 내팽개치고 자신만 귀국해 버렸다. 아마 이 아이는 엄마가 만든 굴레로부터 도망친 것이리라. 사회적 노동에서 여성을 소외시키는 후진적인 상황의 부작용은 의외로 크고 넓으며, 그 대가는 기러기아빠들의 외로움만큼 혹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