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보존

[시대의 흐름에 서서]시장경제와 인간가치 (경향, 4/13)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23:15
조회
674
**[시대의 흐름에 서서]시장경제와 인간가치 (경향, 4/13)


프랑스에서는 지난 1월 중순 도미니크 드 빌팽 총리의 ‘첫 취업 계약 (CPE)’ 법안의 발표가 있은 후 온나라가 시위와 소요에 휩싸였다. 이것을 반대하는 대학생과 고등학생, 노조 그리고 일반 시민의 집회와 시위는 지난 2월부터 되풀이되다가 4월4일에는 노동조합 측 계산으로는, 참가자가 규모가 3백만명이 넘었다. 이 글을 초하고 있는 중에 전해온 뉴스로는 이 사태는 정부가 법안 철회를 선언함으로써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프랑스를 넘어서 일반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 경과를 다시 되돌아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지 않나 한다.

보도된 바와 같이, CPE는 26세 미만의 젊은이가 첫 취업을 한 경우 2년 이내에는 해고를 자유롭게 하게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 의도는 고용과 해고를 용이하게 하여 젊은이의 취업 기회를 넓힌다는 것이다. 현재 젊은이들의 실업률은 23%에 이르는데, 빈민지역에서 그것은 50%를 넘어간다. CPE와 같은 법이 필요한 것은 노동자를 보호하는 법적 규제가 많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의 안정성 보장을 목표로 하는 현행의 법들은 피고용자의 해고는 사전예고, 보상금 지급, 해고 사유 제시 등의 의무 이행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CPE는 이것을 느슨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佛 ‘첫 취업계약’ 법 파문 의미-

CPE는 새로 취업하는 젊은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 시장의 성격 전부를 바꾸어 놓는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2004년의 통계이기는 하나, 직장인의 80%는 ‘기한미확정 고용계약 (CDI)’ 법의 보호를 받고 있고 새 법이 이것을 바꾸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CPE 반대 운동에 학생들만이 아니라 노동조합들이 참가한 것은 이번의 법이 전체적으로 직장의 안정성을 약화시킬 새로운 정책 방향을 시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르몽드지의 경제 평론가 에릭 르 부셰의 분석에 의하면, 직업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현행법들은 평생직장을 가지고 있는 기득권자를 보호하면서 실업의 고통을 저학력의 젊은이들에게 떠넘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주기 위해서는 노동법의 개정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오늘날 산업의 중심은 대량 생산 체제로부터 보다 유연하고 경쟁적인 작은 규모의 생산 단위나 서비스업으로 옮겨가고 있다. 매일 3만명이 해고되고 3만명이 새로 채용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노동시장도 전반적으로 이에 따라 보다 유연하게 바뀔 필요가 있다. 새 법의 일부 내용이나 제정의 절차 (가령 대화와 토의가 부족한 상태에서의 졸속 처리)를 비판하면서도 르 부셰는, 이와 같이 CPE의 정당성을 변호했다.

-세계화 경제 ‘노동 유연성’ 흐름-

이러한 변호는 프랑스 국내의 사정에 그 분석을 한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노동 유연성’의 압력은 무엇보다도 세계화된 시장 경제체제에서 온다. 직업 안정성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사회 안정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은 국가 경제의 힘이다. 이 힘은 세계 경제 속에서의 치열한 경쟁을 통하여서만 확보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의 하나가 노동시장의 유연화이다. 이러한 역설적 입론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될 수는 있다. 데모에 참가한 한 학생의 말. “작년도 프랑스계 다국적 기업의 수익이 8백40억유로인데,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적 술수에 불과하다”-이 말은 노동 유연성을 넘어가는 더 넓은 테두리의 문제를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을 단도직입으로 지적한 말이다.

그러나 일단은 세계 시장에의 적음은 주어진 현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테두리 안에서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유럽연합(EU)은 민주주의와 함께 사회적 연대의 존중을 그 정체성의 한 특징으로 받아들인다. 2000년 3월 리스본 수뇌회담에서, 확인한 것도 경제, 사회, 환경의 균형 발전의 목표였다. 특히 사회적 목표는 주요한 확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여러 목표 달성에 토대가 되는 것이 경제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 결과, 경제 성장을 위하여 다른 목표들의 희생이나 보류가 일어날 수 있다. 프랑스의 어떤 사회학자들은 이번 사태에서 보수주의 또는 신자유주의가 진보주의적 수사를 도용한다고 비꼬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실 세계에서 사회 목표의 추구가 우회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의 현실에서 정책과 전략의 문제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리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복잡한 사정 속에서 핵심적인 것은 인간적 가치의 목표를 잊지 않는 일이다. 사회학자 다니엘르 랭아르 교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실린 CPE에 대한 비판적인 논평에서 오늘의 직업 시장에서의 인간성의 왜곡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의 생각으로는 CPE에 관계없이 직업의 유연성은 진행되고 있고, 그것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온전한 인간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 없게 한다. 오늘날 직장인은 모든 것을 능률과 업적의 관점에서 추구할 것을 요구받고 그 관점에서 감시받고 평가된다. 상거래에서의 거짓말, 사생활 침범, 역정보 제공 같은 것은 사업의 관례이다. 고객은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조종의 대상일 뿐이다. 기업의 물질적 힘이나 이데올로기로 부터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직장인에게 인간관계의 기초로서의 타인에 대한 존중, 연대성이나 상부상조의 가치 등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 (우리의 경우 인간성 저질화의 다른 한 양상은 이해관계에 기초한 패거리의 등장이다.) 이러한 직장의 행동체제는 시민 사회의 성격도 변화시킨다.

미국의 한 소설가는 직장인에게 요구되는 인간성의 소멸을 더 단적으로 말하여, “참으로 유연한 회사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표현한 바 있다. 회사가 원하는 것은 고용인이 하나도 없이 움직이는 회사이다. 이런 회사에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신의나 우정이나 신뢰는 끼어들 여유가 없다. 이러한 인간성 소멸은 실직에 이르지 아니하는, 잦은 직장 이동의 경우에도 일어난다. 3만 명이 해고되고 3만 명이 채용된다는 것은 완전한 실업보다는 구조조정으로 직장 이동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뿌리 내린 고장에서 인간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의미있는 일에 종사할 때에 행복하다. 정든 고장, 정든 사람, 정든 직장이 필요한 것이다. 신의, 우정, 신뢰는 정든 환경에 정주하는 데에 따르는 부수적 효과라고 할 수 있다.

-‘인간적 가치지향’ 최우선 돼야-

노동 유연성의 불가피함을 인정한다하더라도, 그것이 반드시 비인간적인 형태의 것이어야 하는 것일까? 프랑스의 경제사회연구소의 플로랑스 르프레느 연구원은 노동 유연성을 피고용자의 삶의 변화에 연결 시켜-가령, 직장이동, 교육, 직업 전환, 안식년 등에 연결시켜 이루어지게 하는 법을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말을 하고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직업을 옮기는 것을 보람있는 삶의 추구와 일치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을 제도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적 가치를 새롭게 확인하고 그것을 최대로 참고하면서 현실적 조정을 시도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인도 출신의 캘리포니아 대학의 프라나브 바드한 교수는 세계화가 빈부 문제의 해결에 어떤 효과를 갖느냐하는 것을 논한 최근의 한 논문에서 그것은 대처하는 정부에 따라서 도움이 되기도 하고 해가 되기도 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은 일이 있다. 세계화의 궁극적인 의미를 지금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외부로부터 오는 많은 문제들은, 국가적 대책에 의하여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노동 유연성에 앞서는 것은 인간 가치의 끊임없는 재확인과 현실 적응능력의 유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