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전 생사 갈림길에서 암환자 위한 삶 다짐했죠” (한겨레, 4/12)
■ 병과친구하기■
벽혈병 극복한 최종섭씨
“백혈병에서 살아나면 혈액암 환자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부인과 아이들한테는 소홀할 수 밖에 없어 미안하지만 내가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자고 했죠.”
최종섭(53) 만성골수성백혈병환우회 회장은 요즈음 경기 북부에 있는 가톨릭대 의정부 성모병원에서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2001년 7월27일 갑자기 쓰러져 하루 종일 핏덩어리를 토해내는 등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다.
처음 봉사활동은 서울 여의도성모병원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주치의인 김동욱 혈액종양내과 교수가 지난해 7월 의정부성모병원으로 자리를 옮기자 자신도 짐을 챙겼다. 병원 바로 옆 아파트를 전세 내 병원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에 닷새는 봉사활동을 해야 하는데, 인천 집에서 의정부까지 2시간40분에서 3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오가기는 힘들었어요.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김 교수님이 의정부로 간지 보름만에 전셋집을 구했지요.”
그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지만 낮이나 밤이나 외로울 틈이 없다고 한다. 낮에는 병원에서 마련해준 백혈병환자 진료대기실에서 환자 상담 등의 봉사활동을 한다. 밤에도 그의 봉사는 이어진다.그가 사는 아파트는 지방에서 올라온 백혈병 환자들과 가족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쉼터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혈병 환자만을 위한 30석 규모의 진료대기실은 김 교수의 외래환자 진료실과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데, 그 안에는 병원 직원도 아닌 그에게 제공된 사무용 책상이 비치되어 있다.
그는 “특정 질병의 환자를 위해 별도의 진료대기실을 마련해준 사례는 아마도 의정부성모병원이 전국에서 처음일 것”이라며 “다른 병원들도 같은 병을 앓는 환자들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격려를 나눌 수 있도록 진료대기실을 만들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쓰러지기 전까지 약이라고는 소화제 한알 먹지 않았고, 주위 사람 누구도 질병이 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을 정도로 건강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죽을 병’으로만 알고 있었던 백혈병으로 쓰러졌을 때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부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절망을 딛고 일어서 봉사자로서의 새 삶에 도전했다.
갑작스런 발병 2년간 투병 병원옆 이사 봉사활동 헌신
국내 첫 암환자 산악회 만들어 히말아야 등정 감동 전파
“백혈병 병동에서 입원치료를 받을 때 동료 환자들이 경제적으로는 물론 사회적, 가정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하는 사람도 봤습니다. 건강을 회복할 수만 있다면 혈액암 환자를 위한 자원봉사자로서 제2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그런 다짐은 그에게 강성 시민운동가, 환자 선동가와 같은 이미지를 안겨주기도 했다. 지난 2003년초 19박20일 동안의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실 점거농성은 그가 주도한 환자 권익신장 투쟁의 하나로 만성골수성백혈병 치료제로 기적의 항암제로 불리는 글리벡의 약값 인하와 건강보험 적용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2001년말부터 글리벡을 복용하고 있는 그는 “2003년 7월께 암유전자가 완전히 없어졌다.”면서 “이른바 ‘글리벡 투쟁’을 통해 백혈병 환자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도 없고, 그저 돈 많이 없애고 빚더미 속에서 숨질 뿐이라는 사회적 통념을 바꾸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충북 괴산 조룡산에서 130여명의 백혈병환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국내 최초로 암환자 회원으로만 구성된 등산 모임인 ‘루산악회’ 창립 등반대회를 연 것도 백혈병 환자에 대한 사회의 그릇된 인식을 바꿔 보려는 노력에서 비롯됐다.
루산악회는 창립 첫 해에 일반인들도 엄두를 내기 힘든 히말라야 등정에 도전했다. 그를 포함해 백혈병 환자 7명은 지난해 12월 일주일간 쉬지 않고 오른 끝에 해발 4300m에 위치한 히말라야 안나푸르봉 베이스캠프까지 등정하는데 성공했다. 탤런트 최진실씨 등이 동참하고 등산용품업체인 에델바이스 등이 후원한 이 휴먼드라마는 공중파를 타고 전국에 방송되어 국민의 가슴을 파고든 바 있다.
“안나푸르나봉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 저절로 눈물이 나왔어요. 대자연 앞에 선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저 겸손하게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귀국한 뒤 글리벡 투쟁을 비롯해 봉사활동을 적어 놓은 노트를 모두 불태웠다. 언젠가 책으로 펴내려고 했던 자신의 삶의 기록들을 태우며 그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