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빵’만큼 ‘장미’가 필요한 노숙인 (한겨레, 3/10)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주 먼 옛날, 빈곤과 나태와 불구를 자부심과 긍지로 채웠던 시절이 있었다. 시래기가 올라앉은 밥상, 할 일 없는 게으름, 버짐 가득한 얼굴, 종기 난 팔뚝, 절름발이의 지팡이, (…) 가난과 질병과 죽음이 밥상머리의 국그릇처럼 익숙하던 때였다. 전쟁이 끝난 뒤 죽음과 불구는 고통과 슬픔일지언정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거적때기를 둘러친 천막집은 불편함과 남루함이었을 뿐 열등감은 아니었다. (…) 궁핍으로부터의 해방은 요원했으나 어쩔 수 없는 궁핍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가치였다. 그런 때가 있었다.’ (김진송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 중에서)
한국에서 ‘도시 빈민’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였다. 강(江)의 주변이나 산비탈에 형성된 판자촌, 꼬방동네, 달동네에서의 생활은 농촌에 비해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언젠가 ‘해 뜰 날이 있겠지’라는 희망으로 억척스럽게 하루하루를 기워갔다. 특히 교육열이 대단해서 자식을 위해 부모들은 어떤 고생이든 감내했다. 바로 그 점에서 다른 나라들의 ‘슬럼가’에서 관찰되는 ‘가난의 문화’가 한국에서는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동네는 농촌 공동체의 정서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돈독한 이웃관계로 결핍을 서로 메워주었다. 궁핍한 가운데서도 최소한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생명력을 스스로 충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그러한 기백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는 사회 구조와 함께 거주의 양식도 중요하게 연루된다. 그동안 도시에서 달동네는 꾸준히 사라지고 그 대신 임대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그 결과 물리적인 생활 조건은 개선되었지만 사회적 관계를 잃었다. 급할 때 아이를 맡아주고 질병 등의 어려움을 겪을 때 서로 돌보아주던 상호 부조의 완충지대가 이제는 없다. 그나마 임대아파트는 나은 편이다. 고립과 단절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곳은 지하 단칸방이다. 겉보기에는 빈민가가 아닌데 집에 막상 들어가 보면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갈 뿐 아니라, 가족관계도 파괴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 더욱 참담한 거주지는 쪽방이다. 거기에는 가족을 잃고 지극히 불안정한 일거리로 연명하는 이들이 기거한다. 그러다가 사정이 나빠지면 바로 노숙인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노숙인은 우선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발생하지만, 사회심리적인 요인이 가중되면서 장기화되고 고착된다. 즉 직장을 잃거나 빚에 몰려 집을 떠난 이들이 사회적 관계는 물론 가족과의 유대마저 끊기면서 완전히 노숙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알콜 중독이나 정신 질환까지 겹치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경제가 회복되어도 홈리스들이 줄어들지 않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노숙인 가운데 고아 출신이나 어릴 때 가정이 해체된 이들도 대단히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돌아갈 가정이나 마을이 아예 없을 뿐 아니라 주민등록상에도 누락되어 있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많다. 국가의 빈약한 복지 시스템을 가족주의로 겨우 메워온 한국에서 피붙이의 보호막이 없는 사람들의 운명은 가혹하다.
도시의 불청객으로 기피의 대상이 되는 노숙인들, 가난의 설움과 고통을 가득 안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인생의 전환점은 소실점처럼 아득해 보인다. 다행히 정부와 사회단체에서 노숙인들의 재활과 자활을 돕는 시설과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노숙인들이 굳건하게 자립할 수 있기 위해서는 외적인 생활조건을 개선하고 일자리를 구해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들이 상실한 것은 경제력이나 가족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존감이다. 한 인간으로서 의연하게 실존을 지탱할 수 있는 내면의 부피다. 그리고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는 믿음이다. 그것은 배움과 깨달음을 통해 회복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생각에서 세워진 학교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을 표방하면서 노숙인들에게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는 성프란시스 대학이 그것이다.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가 미국의 클레멘트 코스의 사례를 참고로 만든 배움터다.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이러한 시도는 매우 생소하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가 절박한데 한가하게 인문학이라니? 그것은 생존의 문제에서 자유롭고 일정한 지적 능력을 갖춘 사람들에게나 적합한 것이 아닌가? 노숙인들에게는 직업훈련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러나 지난 해 가을 20명의 입학생으로 예술사와 글쓰기, 철학을 한 학기 운영해본 결과, 그런 고정관념은 무너졌다. 관련 전문가나 교수들이 12주 동안 진행한 강좌를 통해 노숙인들은 자아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수강생은 한 학기를 마치며 다음과 같이 소감을 정리했다.
“거리에서 찌든 생활을 청산하기란 제일로 어려운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망가져서 제대로 생각하고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것이 거리 생활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처지로 다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의 생각과 마음 상태를 정비하는 기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문학과정이 바로 이런 정비의 기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과정을 마쳤다는 것으로 난 이 세상과 가까이 갈 수 있고, 갈 수 있는 희망을 찾았다고 생각됩니다.”
이 강좌에 참여한 어느 철학 교수는 자신이 오히려 노숙인들에게서 엄청난 것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처절한 경험을 토대로 우려내는 생각과 언어는 어설픈 관념의 조합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온갖 굴욕스러운 한계상황에서 자기를 비하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던 이들이 다시금 삶을 긍정하며 일어설 때, 그 기운은 우리의 남루한 의지를 육중하게 감싼다.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인생을 풍부하게 상상할 수 있는 힘이 거기에 있다. 그들이 빚어내는 의미의 연금술에서 세상은 원대하게 조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