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아프리카 비망록 / 박용현 (한겨레, 5/16)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21:17
조회
1352
**{아침햇발] 아프리카 비망록 / 박용현 (한겨레, 5/16)

4월28일: 아프리카 취재여행 사흘째. 첫 방문국인 가나에서 눈에 들어오는 건 아이들뿐이다. 첫날 보았던, 단돈 10달러에 팔려가 볼타 호수에서 노예처럼 물일을 하다 구출된 아이들의 잔상 탓일까. 거리에는 조잡한 물건을 팔러 자동차로 달려드는 아이들 천지다. 이렇게 물건팔이로, 카카오 농장으로, 다이아몬드 광산으로 끌려가는 아이들의 규모조차 알 수 없단다. 가난 탓이라고 한다. 가난은 누구 탓인가. 국제기구에서 어린이 구출 사업을 하고 있는 에릭은 식탁의 콜라 잔을 집으며 말했다. “오랜 식민지 시대를 거친 아프리카 사람들은 누군가 와서 뭘 해주기를 바라는 습성이 생겼죠. 그러나 콜라 한 잔을 주면 결국엔 다섯 잔을 빼앗아가는 게 외부인들이지요.” 식민과 독재의 잔해 속에서 동포의 고통에 아파하는 한 아프리카인과 마주앉은 저녁, 가슴이 막혀온 건 열대야 탓인가.
4월29일: 노예 무역의 본거지였던 케이프 코스트를 둘러보고 수도 아크라로 달리는 차에서 어둠을 맞았다. 지평선 위로 초승달이 낮게 떴다. 아프리카의 달빛은 어찌 이리 교교한지.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선 야자수는 그제 난민캠프에서 본 레게풍 머리의 아프리카 여성을 닮았다. 이웃나라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을 휩쓴 내전은 수백만명을 삶의 터전에서 내쫓아 나라 안팎으로 유랑하게 했다. 이제 국제사회의 화두는 이들 난민의 귀환을 돕는 일이다. 바야흐로 평화는 왔다지만,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을 새로 일궈야 할 일손이 없고, 일손이 있다 한들 그들에겐 맨손뿐이니 ….

5월2일: 시에라리온에서 이튿날. 수도 프리타운의 푹푹 찌는 사무실에서 만난 젊은 변호사 멜런은 내전 때 외국으로 피신했다가 귀환했다. 미국과 유럽의 유수한 대학 로스쿨에서 공부를 했다니, 많은 난민들이 원하듯 잘사는 나라에 눌러앉을 법도 하건만, 외국에서 기금을 모아 고국 땅에 ‘공익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동포들을 돕고 싶어 왔다”는 그의 미소는 유달리 하?R다.

5월3일: 내전의 잔혹성을 증언하는 ‘팔다리 잘린 사람들의 마을’을 방문한 아침, 현기증과 메스꺼움이 기습을 했다. 사흘째 이곳 사람들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바라보느라 마음이 지쳐갈 즈음, 몸에도 일사병이 찾아든 것이다. 우리 일행을 안내하던 에디와 카트린은 급히 그늘을 찾아 쉬게 하고, 의료진에 연락하고, 유엔 차량을 찾았다. 응급차는 길이 막히자 비좁은 빈민가 골목을 내달렸는데,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고 물건을 나르는 맨발의 아이들이 차에 치일 듯 위태위태해 현기증이 더했다. 저녁에 호텔로 찾아온 에디는 “하루종일 네 걱정만 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내 머리를 짚어보던 그들의 검은 손에서 기분 좋은 체온이 느껴졌다.

후기: 달은 천 개의 강에 비친다더니, 서울의 아파트촌에도 달빛이 교교하다. 어느덧 한껏 부푼 저 달은, 팔려간 아이들이 그물을 걷는 볼타 호수에도, 가나의 카카오 농장에도,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 광산에도, 프리타운의 악취나는 빈민가에도, 라이베리아 난민들의 캠프에도 비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가나산 초콜릿을 먹고 있고, 누군가가 손에 낀 시에라리온산 다이아몬드는 아프리카 아이의 눈물처럼 달빛에 반짝 빛날 것이다.

달이 비추는 어느 곳엔들 모순이 없으랴. 이 땅에서도 대추리 노인들은 평생 일군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고 어린이날을 맞은 결식아동들은 여전히 쓸쓸한 것을. 모순에 고통받고 그에 맞서 싸움으로써, 우리는 연대해야 할 이웃인 것을. 아프리카도 우리가 연대의 손길을 내밀기에 결코 먼 땅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