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세상읽기] ‘생계형 진보’와 ‘생계형 보수’ / 정용욱 (한겨레, 6/11)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28 21:20
조회
1462
**[세상읽기] ‘생계형 진보’와 ‘생계형 보수’ / 정용욱 (한겨레, 6/11)

장기 파업에 따른 계약 종료로 최근 고용자격을 상실한 한국고속철도(KTX) 여승무원 노조가 제4회 박종철 인권상 수상자로 뽑혔다. 박종철인권상위원회는 “케이티엑스 승무원들이 정당한 노조 활동을 벌이다 부당하게 정리해고된 뒤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 점이 박종철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해 수상자로 정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제는 언론의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아직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그들은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노동자의 외주 위탁을 반대하며 100일이 넘게 장기 파업을 벌이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적 문제가 된 지 이미 오래지만 열악해진 노동현실은 점차 많은 이들을 ‘생계형 진보’로 만든다.
역설적이지만 신자유주의적 구조 재편과 자본 공세의 강화는 ‘생계형 보수’도 양산한다. ‘보수’라고 부르는 것이 어폐가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정치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버리는 젊은이가 점차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전 세대와 다른 그들의 감수성과 문화적 취향을 감안해야 하지만 청년실업 문제로 나타나는 경제적 요인도 그들의 탈정치화에 한몫하고 있다. 한편으론 해고되고, 다른 한편으론 인권상 수상자가 되는 이중적 가치관이 병존하는 우리 사회가 제3자의 눈에는 얼마나 황당하고 해괴하게 보일 것인가. 대학이 고시학원,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어느 현상이나 보는 사람을 착잡하게 만든다.

해고됨으로써 인권상을 수상하는 것은 해괴함을 넘어서는 위기의 징후이다. 우선 생계형 진보와 보수가 양산되는 사회, 경제구조가 점차 고착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위기요, 사태가 그 지경에 이르기까지 두 손 놓고 지켜보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무기력증은 더 한층 심각한 위기다. 우리 사회가 하루속히 생계형 진보와 보수의 양산을 막는 사회적 대타협과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지 못하고, 또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복지를 확대하고 강화할 수 없다면 제2, 제3의 케이티엑스 여승무원이 계속 나타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닌가.

지난 60년간 이데올로기를 잣대로 한 진보/보수 구분이 한국 사회를 지배해왔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이념적 기준에 입각한 것인지 모르겠다. 오히려 친미니 반미니, 친북이니 반북이니 하는 구호와 선동, 상대방에 대한 색깔 덧칠하기가 구분의 기준 노릇을 해왔고, 이를 통한 안보 장사가 횡행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회피되거나 왜곡되었다. 정치인들은 입만 열면 민생과 개혁을 외치지만 국회는 민생과 개혁 문제를 처리할 때마다 극한 대립으로 식물국회가 되었고, 그러한 극한 대립은 민생, 개혁 문제와 아무 관련도 없는 좌우 색깔논쟁에서 비롯되기 일쑤였다. 지자체 선거 끝난 게 엊그제인데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차기 대선 표 계산이 분주한 모양이다. 하지만 좌우 색깔논쟁을 넘어서서 생계형 진보와 보수의 양산이 초래하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상 어떤 정치세력도 미래가 없어 보인다.

아침마다 금식하는 재미동포 목사님 한 분을 알고 지낸다. 교우들 십수명과 함께 통일될 때까지 아침 식사를 거르기로 하고 십수년간 그 약속을 지키고 있다. 왜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냐고 묻자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런다는 싱거운 대답만 돌아왔다. 6·15선언 6주년이 코앞이다. 광화문에서 개성공단까지 버스로 두어 시간만에 가는 시대가 되었다. 주변 상황을 돌아볼 때 통일 역시 한반도 주민들의 생활에 밀착한 통일의지가 일차적인 동력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