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세계화가 빈곤·폭력·실업 부른다” (한겨레,5/26)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14 21:19
조회
1466
*“세계화가 빈곤·폭력·실업 부른다” (한겨레,5/26)

1975년 처음 히말라야에 위치한 ‘작은 티베트’ 라다크에 도착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한 젊은이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집을 보여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여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18년 뒤 그는 같은 젊은이가 어느 관광객에게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너무 가난합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사이 라다크는 ‘개발’됐다.
사람들이 무역 위해 생산하도록 강요받아
‘성장 신화’ 깨고 자연·공동체로 돌아가야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이 주최한 ‘지식기반사회와 불교생태학’ 국제학술대회의 연사로 방한한 노르베리―호지는 26일 강연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들면서 세계적 빈곤을 창조하고 있는 세계화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었다. 빈곤과 폭력, 실업 그리고 건강한 삶을 파괴하는 세계화 대신 그는 생태적,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는 지역화를 역설했다. 28일에는 문화세상 이프토피아가 주최하는 ‘생태 문화 프로젝트’에서 ‘여성이 만드는 생태적 삶과 문화’ 강연도 한다. 25일 동국대에서 그를 만나 그의 생각을 자세히 들어봤다.

―요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세계화의 물결이 한국에도 거세다. 세계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세계화의 구체적 모습은 국제적인 무역과 금융의 규제를 없애는 것이다. 그 영향은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모든 경제활동의 규모를 점점 더 키우고 세계시장을 상대하도록 이끈다. 그 결과 미국에서조차 소규모 농업이나 식당은 물론 국내기업의 생존이 위협받는다. 세계화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지만 상당수 정치 지도자들은 세계화가 초래할 결과도 모른 채 발을 들여놓았다.

―세계화로 인해 더 좋은 제품을 더 싸게 살 수 있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 않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미국이든 스웨덴이든 식품, 집값, 의료비, 교육비 등 기본적인 생계비가 올라가고 있다. 물론 수입된 가전제품 등 일부 가격이 떨어지는 것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오른다. 절대다수 사람들이 살아가기가 더 힘들어진다는 얘기다.

―왜 그런가?

=세계화는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수출을 위해 생산하도록 강요한다. 먼 곳에 있는 큰 기업으로부터 상품을 사야 하는 것이다. 식품이 단적인 예다. 점점 더 먼 곳에서 난 식품을 사게 된다. 그 결과 우리는 거대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비효율적인 시스템에 의존하게 된다.

―예를 들어 대규모 농업이 전통농업보다 생산성 면에선 더 효율적이 아닌가?

=그것은 신화일 뿐이다. 혼자 트랙터를 몰고 방대한 들판에서 농사짓지만 거기에는 정부가 보조한 물, 화학비료와 농약, 그리고 연료가 들어간다. 그런 요인을 고려한다면 산업형 농업은 효율이 형편없이 낮을 뿐더러 실업을 양산한다. 토지를 가장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은 자연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농업이다. 어떤 전통적 농업체계도 단일 작물을 재배하는 법이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의 홍성 등에서 하는 오리농법을 봐라. 이런 집약농업은 단작농업보다 단위 경지당 생산성이 월등히 높다.

―세계화는 사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나?

=세계화는 점증하는 폭력의 근본 원인이다. 세계화는 극소수의 첨단산업 일자리를 위해 수많은 일자리를 없앤다. 언론은 젊은이들에게 도시의 고급직장을 모델로 제시하고 선망하게 만든다. 공동체에서 뿌리뽑힌 다양한 인종과 종교의 젊은이들이 도시에서 만나 직장과 생계를 위한 가차없는 경쟁에 휘말린다. 이들이 겪는 엄청난 심리적 스트레스와 좌절감, 무력감이 갈등과 폭력의 원인이다. 히말라야에 있는 라다크에는 불교도가 대다수이고 무슬림은 소수이지만 600년 동안 아무런 집단갈등이 없이 살아왔다. 부탄에는 불교도와 이들보다 약간 많은 힌두교도들이 비슷한 기간 평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불과 최근 15년 동안 세계화 영향으로 이곳에선 많은 사람이 죽는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일자리를 둘러싸고 자기 집단 안에서, 그리고 이주민과 갈등을 빚는 것이다.

―세계화는 기업에만 효율적이라고 주장했다. 왜 그런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세계화의 중요한 측면은 점점 많은 나라들이 단지 거래를 위해 똑같은 상품을 한편에선 수입하고 다른 한편에선 수출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해마다 약 90만t의 소고기와 맥주를 수출하는데 비슷한 양을 또 수입한다. 영국은 약 10만ℓ의 우유를 수출하고 또 그만큼 수입한다. 10여년 전 세계의 버터 유통을 연구한 적이 있다. 몽골에는 2500만마리의 가축이 있지만 울란바토르의 버터는 모두 독일제였다. 영국에서는 뉴질랜드산 버터가 인근 농장에서 생산된 버터보다 3분의 1 값에 팔리더라. 동일상품의 교역은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이다. 이것은 무역을 늘리려는 눈먼 근본주의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기업들이 단지 값싼 제품을 선택한 결과인가?

=단지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무역을 부추기는 구조가 문제다. 만일 저마다 자기 나라 버터와 감자를 소비한다면 다국적기업은 돈을 벌겠는가. 지구 대다수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하고 생태적으로 건전한 경제를 지역화하는 것이다. 인류는 전통적으로 자기 지역에서 난 산물로 의식주를 해결해 왔다. 커피나 목화, 차 등 단작농업이 시작된 것은 노예제의 유산이다. 세계경제의 시작은 노예제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자급자족이 가장 중요한 전략이란 뜻인가?

=완벽한 자급자족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더 큰 집단과 협력하고 교역을 했다. 세계화냐 아니면 라다크로 돌아가냐 식의 이분법은 위험하다. 내가 <오래된 미래>에서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자연과 공동체에 기반을 둔 사회에는 우리가 몰랐던 삶의 풍요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이용처럼 더 지혜롭게 대처한다면 우리에겐 길이 있다. 내가 전하고 싶은 시급한 메시지는 성장에 관한 수많은 헛된 신화를 맹목적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더없이 싸구려가 될 것이란 점이다. 우리의 생존은 정말로 위협받을 것이다. 한 예로 선진국에서조차 폭력이 증가하고 있고 우울증은 하도 크게 늘어나 언론에서 ‘전염병’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국도 그렇지 않나. 사람들이 점점 더 불행해지고, 성형수술, 약물중독이 일반화되고 있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 성범죄와 가족을 죽이는 끔찍한 범죄가 잇따른다. 이런 사회붕괴 현상은 전통 사회에서 결코 없었던 일이다.

―세계화가 이뤄지는 양상은 어떤가?

=세계화는 저 혼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여러 형태의 보조금을 통해 세계화를 지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종류의 교육을 시키는지, 어떤 종류의 에너지와 기술에 정부가 지원을 하는지가 모두 세계화와 관련돼 있다. 정부가 무역을 위한 하부구조에 막대한 투자를 한 덕분에 영국의 슈퍼마켓들이 사과의 세척과 왁스칠을 위해 항공기로 임금이 싼 남아프리카로 실어갔다가 되가져오는 ‘미친 짓’이 버젓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 구조를 어떻게 바꿀 수 있나?

=세계화를 위해 쓰는 돈의 일부라도 지역화를 위해, 소비자와 생산자의 거리를 좁히는 일을 위해 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직거래로 이득을 본다. 소비자가 슈퍼마켓에서 과일을 살 때 그 돈의 5%만이 생산자에게 간다. 나머지 포장, 운반, 색깔 내기, 냉장, 광고 비용까지 모두 소비자가 부담한다. 직거래가 싼 이유다.

―세계화의 흐름은 거침없고 개개인은 이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무엇이 필요한가?

=가장 시급한 것은 사람들의 세계화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다행히 새로운 깨달음이나 이해가 확산되는 속도가 전에 없이 빠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세계화가 효율적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고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정부의 세계화를 위한 보조금 제도를 바꾸고 지역화를 가로막는 규제를 없애는 일에 관심을 모아야 한다.

―2003년에 이어 한국을 두번째 방문했다. 어떤 인상을 받았나?

=급속한 산업화로부터의 압박이 너무 큰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자연과 공동체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나 유럽보다 희망적이다. 분산형 재생에너지, 지역경제 활성화. 도시와 농촌의 더 나은 균형, 농민 존중 등에서 이 지역이 앞서 나가길 기대한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누구?
언어·환경운동가에서 세계화 반대 전도사로

1946년 스웨덴 태생의 언어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인도의 라다크에서 16년 동안 살면서 느낀 공동체와 개발문제를 다룬 책 〈오래된 미래〉(녹색평론사, 1994)는 전세계 50여개 언어로 번역됐다. 라다크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1980년 ‘라다크 프로젝트’란 국제조직을 만들었고, 그 공로로 1986년 대안 노벨상으로 불리는 ‘바른 생활상’을 받았다. 1991년 국제생태문화협회(ISEC)를 만들어 대표를 맡고 있으며, 국제 세계화 포럼을 통해 세계화의 문제점을 알리는 전도사 구실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