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아침을 열며] 진보의 위기, 그리고 삶 (경향, 7/3)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7-12 21:38
조회
1353
**[아침을 열며] 진보의 위기, 그리고 삶 (경향, 7/3)
〈김봉선 정치부장〉

일전에 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MC의 ‘농(弄)’에 귀가 솔깃했다. 20대 자녀가 취업하면 집안의 경사이고, 30대가 취직하면 국가적 경사란다. 40대가 여전히 직장에 다니면 세계 8대 불가사의이고, 50대에도 직장을 잃지 않으면 21세기형 한강의 기적이라나. 부러 과장한 우스갯소리지만 피폐해진 삶의 애환을 저렇게 전하려는구나 싶었다. 5·31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정권의 실정 ‘탄핵’이라는 평가까지 나온 터라 여운이 남는다.

사실 민심이반은 심각한 지경이다. 부동산이든, 세금이든, 양극화든, 교육이든 정부 목소리가 커질수록 시장과 여론은 반대로 내달린다. 가끔 말은 바른 소리다 싶은 노무현 대통령의 ‘호소’가 국민들의 이목을 끌지 못한 지 오래다. 보수언론들의 비틀기가 도를 넘어섰으나 딱히 그것만은 아니다.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부조화의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처럼 입으론 서민과 개혁을 외치면서도 정작 정책은 ‘우향우’해온 데 따른 신뢰 상실과 고달파진 삶이 요체인 듯하다. 한때의 유행어지만 오죽하면 ‘좌측 깜빡이등을 켜고 우회전한다’는 자조가 여권에서 나왔을까.
진보진영이 덤터기를 쓰고 있다. 그렇다. 각 분야에서 ‘진보의 위기’라는 경고음이 울린다. 이탈한 민심은 상당부분 보수쪽으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지방선거 과정에서 터져나온 공천비리 등 한나라당의 각종 스캔들이 표심에 영향을 못미친 것은 왜일까. 여당과 민주노동당의 ‘동반추락’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마술에 걸린 것 같은’, 난해한 현상은 진보에 대한 등돌림이 비판을 넘어 혐오로 치닫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 신뢰 잃어 심각한 민심이반 -

정권의 국정운영 미숙이 진보세력의 무능으로 겹쳐지는 착시현상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집권층의 모태가 그쪽이고 그들이 내건 기치가 진보·개혁인 탓일 게다. 억울한 일이다. 현정권이 그 축에 든다 해도 실제 집권세력은 그들만의 ‘성’을 쌓았다. 오만한 ‘386’이 성곽 주변에 해자를 쳤고, 진짜 진보는 소외됐다. 주초 단행한다는 개각의 하마평을 보더라도 ‘돌고 도는’ 그들만의 세계는 확연하다.

집권당이라는 열린우리당은 또 어떤가. 진보의 궁극적 지향점인 ‘서민의 정당’의 이미지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민주노동당과 민주당은 물론 한나라당에도 밀린 게 우리당이다. 툭하면 ‘개혁’, ‘실용’ 논란으로 퇴행적 소모전을 벌인다. 개혁이 목표라면 실용은 방법일진대 실용이 ‘우향우’로 변질됐기 때문이다. 철학의 빈곤이다. 이런 꼴의 우리당을 진보로 묶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착시든 공동책임론이든 여권의 무능과 태만, 혼선이 불러온 진보 위기의 실상이다. 진보는 이념이 아니라 삶 자체다. ‘낮은 곳으로’의 외침이기에 패자부활전이 가능한 사회정신을 일컫기도 한다. 반대편에 양극화 같은 시장만능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반작용으로 공고해지는 사회의 보수·수구화엔 더 없는 토양이다. 더 가다가는 시장만능주의의 다른 이름인 신자유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버팀목조차 빠져나갈 상황이다.

우려는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한·미 FTA 협상을 보자. FTA는 ‘무역’ 협정이라기보다 포괄적인 ‘경제통합’ 협정이다.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내걸지만 거대 자본시장인 미국에 맞설 우리의 여력은 왜소하다. 얼마전 론스타가 한국 정부의 과세 부과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FTA 협상을 이용하려 한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바로 FTA 협상이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세계화와 궤를 같이 하는 흔적들이다. ‘외환위기 당시 IMF를 지렛대로 구조조정을 관철했다면 이번에는 FTA를 지렛대로 구조조정하겠다는 발상’이라는 이해영 교수의 지적은 충분히 타당하다.

- 건강한 진보도 지켜야 -

국내 사정도 극악스럽다. 그나마 정권이 ‘1%를 더 내면 10%를 더 돌려준다’는 설득 논리로 지켜내려는 세금정책은 ‘세금폭탄론’의 대반격에 직면하고, 양극화 해소안은 증세·감세 논쟁에 휘말린 채 진척이 없다. ‘정권을 걸고 잡겠다’는 부동산 정책도 보수세력의 총체적 저항을 맞고 있다. ‘보유세 강화, 거래세 완화’ 원칙은 고수한다지만 민심 수습용 재산세 경감은 부동산정책의 기조를 흔들 소지가 없지 않다. 진보의 뒷받침없이는 ‘도로(徒勞)’가 되기 십상인 과제들이다.

다행인지 수구적 보수의 대변신을 꾀한다는 ‘뉴라이트’ 운동이 활발하다. 한나라당이 수권능력을 갖춘 정당으로 환골탈태할 수 있는 힘을 보태주길 기대한다. 그래도 사회 균형추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 진보의 위기는 자못 심각하다. 위기가 거듭남의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까닭이다. ‘건전한 보수’ 못지 않게 ‘건강한 진보’도 사회가 지켜내야 할 소중한 가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