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특파원리포트] 일, 초등1년 성폭행피살 재판에 떠들썩 (한겨레, 7/6)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7-12 21:39
조회
1361
**[특파원리포트] 일, 초등1년 성폭행피살 재판에 떠들썩 (한겨레, 7/6)

지난 4일 일본 히로시마 지법에선 하굣길 초등학교 1학년 여학생에게 성적 폭행을 가한 뒤 살해한 페루인에 대한 선고 공판이 있었다. 사형이 구형된 호세 마누엘 톨레스 야기(34) 피고에겐 무기형이 선고됐다.
피해 어린이 아이리(7)의 부모가 간절히 바란 극형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딸의 영정을 무릎에 얹어놓은 채 마음을 졸이며 판결을 기다렸던 아버지 기노시타 겐이치(39)는 영정을 향해 “아이리, 미안해. 패했어”라며 나즈막히 속삭였다. 그는 영정이 피고를 마주하는 것조차 악몽이라며 영정을 손수건으로 덮고 있었다.

그렇지만 피해자가 1명인 살인사건에선 몸값을 노린 계획적 유괴살인 외에는 사형이 선고되지 않는다는 일본 법원의 오랜 관례에 비춰, 최고형이 내려진 셈이다. 재판부는 특히 “가석방은 신중할 것을 희망한다”는 전례가 드문 주문을 달았다. 사실상 종신형이란 의미다. 중형 선고의 배경에는 최근 어린이 대상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피고는 체포 당시부터 “악마에 이끌린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해왔다. 변호인도 피고가 심신허약으로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라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별로 참작되지는 않았다. 간신히 사형은 면한 피고는 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스페인어로 “신께 감사드립니다” “여자 애를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라는 말을 몇차례 외쳤다.

특히 이번 재판은 피해 어린이 부모의 이례적 행동 때문에 일본 사회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들은 선고를 열흘 가량 앞둔 지난달 말 일본 언론에 사건을 적극적으로 보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게이치는 “(피해자는) 히로시마의 초등 1년생 여자 아이가 아니라 세계에서 하나 뿐인 아이리다. 실명을 분명하게 사용하고, 성적 피해의 실태를 가능한 범위에서 상세하게 보도해달라”고 당부했다. 해맑게 웃으며 두 손으로 ‘V’자를 그리고 있는 아이리의 사진도 언론사에 제공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어린이의 부모로서는 극히 드문 일이다. 어린이 성범죄의 경우, 언론은 피해자와 가족의 사생활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본명을 밝히지 않고 범행이나 피해의 상세한 내용을 보도하지는 않는 게 원칙이다. 신문들은 실명보도를 하면서도 가족의 요청에 따른 것임을 거듭 밝혔다.

신문과 방송에서 아이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범행 실태가 언급되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가슴에 되풀이해 못을 박는 행위라는 것을 게이치 부부도 잘 안다. 하지만 어린이 성폭력이 얼마나 잔인무도한 범죄인지를 사회에 제대로 알리고 재발을 막는 데 모든 것을 걸겠다고 이들은 결심했다.

게이치는 아내(35)의 꿈 속에 아이리가 나타나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어요. 도와줘요”라고 말한 게 결심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성폭력 피해 어린이를 돕는 게 어떤 것일까를 곰곰히 생각했다. 결론은 당시 7살인 딸이 받았을 충격, 살해당한 구체적 과정, 성적 폭행의 진실을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피해자들이 쉬쉬 하고 숨기는 바람에 같은 범죄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게이치는 “언론이 배려 차원에서 절제해 보도한 것을 알고 있다”며 “그러나 그러면 사람들이 왜 검찰이 극형까지 구형해야 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어린이 성추행 정도로 가볍게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지난해 11월. 통학로길에 인접한 아파트에 살던 범인은 하굣길의 아이리를 자신의 방으로 유인했다. 아이리의 하반신을 문지르며 자위행위를 했다. 아이의 하반신에는 범인의 손가락으로 인한 상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욕구를 해소한 범인은 아이리를 목졸라 죽인 뒤 종이박스에 넣어 근처 공터에 내다버렸다.

사건 발생 7개월이 지났지만, 부모들은 아직도 날마다 집안 불단에 모셔놓은 아이리의 영정에 인사를 건네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어머니는 아이리를 대신할 인형을 만들어 늘 품고 잔다고 한다.

“소리를 내면 죽인다는 위협에 애가 얼마나 무서움 속에서 폭행을 참고 견뎠을까. 폭행이 끝나면 그래도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았다. 여자로선 목숨을 뺏기는 것이나 다름없는 성적 폭행을 당한 뒤 살해됐다. 아이리는 두번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사랑하는 어린 딸을 비참하게 잃은 뒤 어린이 성폭력과의 투쟁에 나선 피해 가족의 절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