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사회기부도 여성소외” 발로 뛰는 원로 (한겨레, 4/26)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6-07 21:12
조회
1408
**사회기부도 여성소외” 발로 뛰는 원로 (한겨레, 4/26)



“여성이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여는 변수라고 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빈곤하고, 그런데도 여성에겐 지원을 하려 하지 않아요.”

여성가구주 다섯 가구 가운데 한 가구는 월소득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절대 빈곤 가구다. 미혼 여성 가구주의 빈곤율은 37.4%로 성인 가구주 가운데 가장 높다. 아이엠에프 경제 위기 직후 여성 빈곤은 눈에 도드라졌지만, 사회적 안전망이 없었다. 박영숙 한국여성재단 이사장(74)이 1999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여성기금인 한국여성재단의 문을 열게 된 까닭이다.

박 이사장은 다가올 5월 한국여성재단의 집중모금 캠페인 기간을 앞두고 목표액을 다소 공세적으로 잡았다. 한달간 10억원. 경제적 빈곤, 기회의 빈곤,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성을 도울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다. 이번엔 그가 직접 발품을 팔고 있다. 대기업을 찾아다니며 “기업이 먼저 나서서 여성에게 기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바쁘다. “불성실은 참지 못한다”는 그다.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윤후정 이화학당 이사장, 정광모 한국소비자연맹 회장 등과 함께 여성계의 몇 안 되는 소중한 원로 가운데 한 명이다. “발런티어는 평생 하는 일”이란 생각으로 재단 설립 뒤부터 지금까지 각계 여성인사들과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월급 0.1% 기부 받기, 유산 1% 남기기, 남성 오피니언 리더들과 함께 하는 ‘미래포럼’ 운영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밖에도 일이 많다. 박 이사장은 지난 17일 한명숙 총리의 청문회 때도 현장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그 때 내가 거기 있는 게 의미가 있다면 한다”는 자신의 믿음대로 몸을 움직인 일이다. 웬만한 정치적 사안에 입을 열지 않던 여성 원로들이 이례적으로 여성총리 지명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한 데도 그의 구실이 컸다. 청문회에 대해서는 “정치계 선배로서 상처만 주면서 쓸 만한 사람을 다 잃어버리는 스타일은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지금도 대기업 등 찾아다니며 재원 마련에 비지땀
“가진 것 모두 사회에 남기고 과거청산 매듭짓고 떠나고파”

이처럼 그는 모든 문제에서 여성이 먼저 소통과 화해의 새로운 장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통일 운동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9월 북쪽에서 열린 ‘2005 남북여성통일행사’ 마지막날이었다. 각종 의례와 격식을 둘러싸고 팽팽한 긴장감이 돈 닷새간 일정 속에서 남북 모두 긴장해 얼음장 같던 분위기를 단박에 깨뜨린 이가 바로 그였다.

이사장은 사무국에서 준비해간 의례적인 연설문 대신 직접 손으로 즉석에서 쓴 연설문을 읽어내려갔다. 그가 “대동강에서 자매들과 함께 평화롭게 배를 타며 쌍무지개가 뜨는 것을 보았고, 그 아름다운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자 남북 모두에서 진심 어린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한 30대 여성단체 실무자는 “원로의 힘이 이런 거구나”라고 감탄했다. 그는 그날 ‘남북’ 대신 ‘북남’이라는 말을 썼다. 서로 자신을 앞세우는게 아니라 앞뒤 호칭이라도 뒤바꿔 불러 상호 존중의 기운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 “여성이 먼저 상대를 예우하기 시작하면 남북교류에 새로운 싹이 틀 거니까요. 통념에서 벗어나야 세상이 바뀔 수 있지 않겠어요?”

그는 여성이 힘을 더해 세상을 바꾸려면 여성 자신이 먼저 가부장과 권위의식이 만들어놓은 ‘통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특히 “여성이 당당하게 몫을 찾아야 한다” 며 “기업의 사회환원금 배분위원회에 여성이 절반은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적 소수자의 문제나 빈곤 여성의 문제에 대한 그의 감수성도 젊은 후배들이 따라잡기 힘들 정도다. 20~30대 까마득한 여성계 후배들이 그를 두고 “누구보다 열려있고 진보적인 선배”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문제가 있는 현상에 대한 저항 의식이 있는 것 같다”고 스스로 진단했다.

“젊었을 땐 어떻게 사느냐가 고민 거리더니, 이제는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에 관심이 가네요. 원로들 모임을 만들어 가진 것 모두를 유산으로 주고 가는 운동을 하면서 사회적 과거 청산 문제까지 매듭짓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그는 후배들에게 짐을 덜어줄 고민을 새로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진보와 보수를 넘어선 용서와 화합만이 우리나라가 새롭게 도약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이들은 원로밖에 없다고도 했다. 어려운 숙제에 골몰한 그의 발걸음이 또다시 빨라질 참이다.

박 이사장은 누구?

193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박 이사장은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70년대까지 와이더블유시에이 등 여성단체에서 일했다. 80년대 정계로 진출해서는 평민당 부총재로, 야당의 유일한 여성 의원으로 89년 여성이 친권자의 구실을 할 수 있는 내용을 뼈대로 한 가족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데 막대한 공을 세웠다. 정계에서 은퇴한 뒤엔 한국환경사회정책연구소 소장, 대통령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으며 일찍이 여성·환경 문제에 관심을 뒀다. 덕분에 그는 지금도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뚜벅이’다. 매주 빠짐없이 7시 조찬 모임에 참가하려면 적어도 새벽 5시30분에는 일산 집에서 출발해야 한다.“운전은 배웠지만 자가용을 몰지는 않습니다. 운전 기사가 몰아주는 차를 탈 때도 있었는데, 남 보기엔 좋은 것이었지만 환경운동을 하면서 혼자 차를 타려니 폐를 끼치는 기분이어서 그만두었어요. 걷는 게 건강유지 비법이에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