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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어린이들이 자신의 종교대로 기도할 수 있다”( 다겐하르트)

작성자
기사연
작성일
2006-05-26 01:40
조회
1439
“학교에서 어린이들이 자신의 종교대로 기도할 수 있다”(2005년 6월 22일, 다겐하르트)

전 세계에 교회와 종교공동체가 한 문제에 대해 점점 고민하고 있다. 그 것은 종교가 복합되어 있는 사회에서 종교교육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이번 글은 인도 출신의 여성 그리스도교 교육가와의 대담이다. 여기에서 아시아의 복합되어 있는 종교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학교에서 어린이들이 자신의 종교대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샤 예수다산(Usha Jesudasan)은 주장한다. 그녀는 인도에서 기자와 저술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녀가 사는 인도에는 그리스도교인, 힌두교인, 무슬림 그리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이 오래 전부터 지역의 협력공동체에서 함께 살고 있다. 우샤 예수다산은 통전적인 종교-상호 간에 종교와 가치를 알기 위한 수업을 기획하고 있다. 이로써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 평화와 조화를 촉진하려고 한다.

>어린이들에게 학교에서 종교-상호를 위한 종교교육과 가치부여의 교육이 필요한 가?

양쪽 모두 필요하다. 먼저 가치부여의 교육이 필요하다. 전 세계에서 그리고 인도에서도 이제 가족과 가정은 더 이상 가치를 매개하는 ‘유일한 장소’(DER ORT)가 아니다. 그 밖에도 우리는 가족에게 유효한 가치를 감싸고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매개되는 가치는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가족구성원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오늘날 가족은 부모로만 나누어져 있거나 또는 한 아이와 같이 사는 부모로 구성되어있다. 가족 분배의 가치를 생각해 보자. 독 자녀로 어떻게 서로 나누는 삶을 가르칠 수 있을까? 매우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질문하자면. 독 자녀에게 어떻게 타자를 위한 동정심을 유발시킬 수 있을까?

과거에 형제들이 3명에서 4명은 되었다. 그들은 서로 색연필을 나누어 쓰거나 쵸코렛을 쪼개어 먹었다. 오늘날 어린이를 위한 당과류를 산다면, 가족의 모든 어린이가 각각의 몫을 받는다. “서로 나누어 먹어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학교에서 몇 몇의 가치를 배워야 한다.

종교-상호 교육은 두 번째로 중요한 질문이다. 어린이는 그 무엇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떤 선입견도 갖지 않는다. 그렇기에 옳은 것에 그리고 선한 것을 이들에게 지시해 주고 알려 주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믿을만한 그리스도교 전망에서 나오는 종교교육이 힘이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교 신자 어머니로서 나는 나의 아이들을 이렇게 훈육한다. 우리 식대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동시에 상대방의 방식대로 기도하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당신의 방식으로 기도할 수 없다. 당신도 우리의 방식대로 기도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 모두는 기도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나의 교리서와 경전이 있다. 당신에게 당신의 교리서와 경전이 있다. 나는 나의 경전을 손에 들고서 경의를 표한다. 그 경전이 나에게 중요하기에. 당신은 당신의 경전을 손에 들고서 경의를 표한다. 따라서 나는 당신의 경전에 대해 나쁜 감정이 없다. 이러한 존경은 어린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야 한다.

내가 확실히 입증한 것이 있다. 이런 방식의 종교-상호 교육이 학교에서 필요하다는 것이다. 20년 전만해도 우리 모두는 상이한 공동체 안에서 살았다. 우리가 오늘날 가지고 있는 친근성은 당시에는 없었다. 오늘날 우리의 자녀들은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과 결혼한다. 이것은 우리가 배우고 올바르게 행해야 할 사실이다.

나의 아들의 여자친구는 힌두교 교인이다. 나는 그녀와 그녀의 신앙을 우리 가족 안에 승낙하기 위한 배치를 해야 한다. 우리는 같은 식탁에 앉아서 함께 식사한다. 하지만 우리는 식사 전에 식사기도를 한다. 그녀는 자신의 종교에 따라 기도를 드린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중요하다. 나는 이것을 배워야 한다.

>다른 종교인들과 같이 기도하는 것이 어떠한가?

우리는 종교적으로 차이나는 방식대로 서로 같이 기도할 수 있다. 당신은 당신의 말로 기도한다. 나는 이것을 존중한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말로 기도하고 당신에게 청한다. 나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을 달라고. 이것이 행동을 위한 가능성 제시이다.

두 번째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공동으로 일치점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전통에 따라서 당신의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당신은 당신의 전통에 따라서 나의 필요한 것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나는 다음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나는 고통당한다는 것.나는 손상된 인류의 일부라는 것. 그렇기에 나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간구한다는 것.

어린이들은 자신의 친구들과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같이 부담 없이 기도한다. 그들은 우리 어른들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더 좋은 출발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어른처럼 옛 것에 얽매여 있지 않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학교에서 재차로 체험한다. 한 아이가 병든 어머니를 모실 때 또는 그의 어머니가 죽음에 임박할 때, 한 아이가 다리가 부러지거나 사고로 눈이 멀게 되었을 때. 이럴 때면 어린이들은 기도하기 때문이다. 선생들이 단체를 이끌 때 이러한 계기들이 작동한다.

교사들은 말할 것이다. 이 어린이의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세요. 또는 이 어린이는 학교에서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우리 같이 기도합시다. 그렇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이것이다. 사람들이 장미 색깔의 촛불을 들고 기도하거나 무릎을 꿇거나 손을 펼치거나 하는 행위는 어린이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어린이들에게 이러한 감정을 연대의식 속에서 전달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라는 흔적을 갖는 것입니다.